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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미타파 원문보기 글쓴이: 파란하늘
대부분의 스님들은 나름대로 출가 동기가 있지만, 나는 특별한 출가의 동기를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있다면 전생에나 있었을까? 금생에는 전생의 인연을 따라 자연스럽게 중이 된 것으로 나는 믿고 있습니다.
내 나이 5살 때, 우리 마을로 천수경(千手經)을 외우며 동냥을 하는 스님이 찾아 왔습니다.
"정구업진언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그런데 어린 마음에 그 스님의 천수경 외우는 소리가 어찌나 듣기 좋았던지 하루 종일 뒤를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스님은 나를 기특하게 여겨 엿을 듬뿍 사주었는데, 그 엿을 주머니 여기저기에 넣고 우두둑 씹으면서 죽자고 따라다니며 '원왕생(願往生) 원왕생‥‥‥‥을 외웠습니다.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그날 밤 나는 잠을 자면서도 천수경을 외웠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언제 외웠는지도 모르게 천수경을 다 외웠고, 그 외에도 몇 가지 경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외우고 있었습니다.
국민학교를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누구든지 교단 앞으로 나와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 때 앞으로 나가 춤을 추면서 천수다라니를 외웠습니다.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약‥‥‥‥
내가 춤을 추면서 이상한 말을 하자 선생님은 물론 아이들까지도 배꼽이 떨어져라 웃었고, 그 때 이후 내 별명은 '중'이 되었습니다.
그 후 집안의 친가 ·외가 식구 49명 모두가 차례로 출가하였고, 나도 국민학교를 마친 14살 때 외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통도사에 계시는 고경(古鏡) 스님을 뵙고 출가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출가를 한다는 것은 단순한 인연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정녕 전생의 깊은 인연이 없었다면 나의 출가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의 가족은 친가·외가를 합하여 모두 41명이 승려가 되었습니다. 이 41명의 출가는 석 가모니 부처님과 그 일족의 출가 이후 가장 많은 숫자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41명의 출가는 우연하게 이루어진 것인가? 아닙니다. 나의 외증조할머니인 이평등월(李平等月) 보살의 기도와 입적(入寂), 그리고 방광의 이적(異蹟)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안성이씨(安城李氏) 평등월 보살은 일찍이 우리 나라 제일의 양반으로 치던 광산김씨(光山金氏) 집안으로 시집을 갔습니다. 그여는 남편 김영인(金永仁)의 아낌없는 사랑 속에서 삼 형제를 낳아 기르며, 학식 있는 양반집 안방마님으로 부족함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나이 60이 조금 지났을 때 갑자기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남편이 남의 빚보증을 섰다가 대부분의 재산을 날려 버렸고, 연이어 시름시름 앓던 남편은 끝내 저 세상 사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평등월 보살이 실의에 잠겨 헤어나지 못하고 있자, 이미 장성하여 가정 을 꾸리고 있던 만수(萬洙)·완수(完洙)·은수(恩洙) 세 아들은 머리를 맞대고 상의했습니 다.
"이제 시대는 바뀌었다. 우리가 양반이라고 마냥 이렇게 살 것이 아니다. 노력하며 돈을 벌어야 한다. "
이렇게 결의한 세 아들은 어머니를 찾아갔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조금도 염려 마십시오. 이제부터 저희들이 집 칸을 꾸려 어머니를 편안하 게 모시겠습니다. "
그리고는 남은 재산을 모두 처분하여 목화를 솜으로 만드는 솜틀기계 한 대를 일본에서 구입하였습니다. 기계를 발로 밟으면서 목화를 집어넣으면 껍질은 껍질대로, 씨는 씨대로 나 오고 솜은 잘 타져서 이불짝처럼 빠져 나오는, 당시로서는 최신식 기계였습니다.
이렇게 공주 시내 한복판의 시장에다 솜틀공장을 차린 삼형제는 작업복을 입고 하루 여 덟 시간씩 3교대로 직접 솜틀기계를 돌렸습니다. 기계는 24시간 멈출 때가 없었습니다 공주 사람들은 그 솜틀기계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공주도 이제 개명을 하는구나" 하면서 '공주 개명(公州開明)! 공주개명!'을 외쳤습니다.
마침내 공주 주변에서 생산되는 목화는 모두 이 공장으로 들어왔고, 산더미같이 쌓인 목 화가 솜이 되어 나오는 양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집안에는 돈이 쌓여 갔습니다.
월말이 되면 삼형제는 한 달 번 돈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세 몫이 아니라 네 몫으로 나누었습니다. 남는 한 몫은 누구의 것이겠습니까? 바로 어머니 평등월 보살의 것이었습니 다.
하지만 그 돈을 어머니께 직접 드리지는 않았습니다. 어머니께서 한 달 동안 '삼형제 중 누구 집에 며칠을 계셨느냐'에 따라 그 집에 직접 분배를 하는 것입니다. 가령 큰아들 집에 보름을 계셨으면 반을 큰아들 집에, 막내아들 집에 열흘을 계셨으면 3분의 1을 막내아들 집 에 주었습니다.
이렇게 하니 며느리들은 서로 시어머니를 잘 모시기 위해 갖은 정성을 다 기울였습니다.
집집마다 어머니 방을 따로 마련하여 항상 깨끗하게 꾸며 놓았고, 좋은 옷에 맛있는 음식으 로 최고의 호강을 시켜 드렸습니다. 때때로 절에 가신다고 하면 서로 시주할 돈을 마련해 주는 것은 물론이었습니다.
마침내 이 집안은 공주 제일의 효자 집안으로 소문이 났고, 벌어들인 돈으로는 논 백 마 지기를 다시 사들이기까지 하였습니다. 평등월 보살은 신이 났습니다.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매일매일을 평안함과 기쁨 속에서 지내던 할머니가 막내아들 집에 가 있던 어느 날, 한 비구니 스님이 탁발을 하러 왔습니다. 그 스님을 보자 할머니는 눈앞이 밝아지는 듯 했습니다.
"아! 어쩌면 저렇게도 잘생겼을까? 마치 관세음보살님 같구나."
크게 반한 할머니는 집안에서 가장 큰 바구니에다 쌀을 가득 퍼서 스님의 걸망에 부어 드렸습니다. 그때까지 비구니 스님은 할머니를 조용히 보고만 있다가 불쑥 말을 걸었습니다.
"할머니! 요즘 세상사는 재미가 아주 좋으신가 보지요?"
"아, 좋다마다요. 우리 아들 삼형제가 모두 효자라서 얼마나 잘해 주는지‥‥‥‥ 스님, 제 말 좀 들어 보실래요?"
할머니는 신이 나서 아들 자랑을 시작했고, 며느리 자랑, 손자 자랑까지 일사천리로 늘 어놓았습니다. 마침내 할머니의 자랑은 끝에 이르렀고, 장시간 묵묵히 듣고만 있던 스님은 힘주어 말했습니다.
"할머니, 그렇게 세상일에 애착을 많이 가지면 죽어서 업(業)이 됩니다. "
"업?"
충청도 사람들은 '죽어서 업이 된다'고 하면 구렁이가 된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죽 어서 큰 구렁이가 되어 고방(庫房) 안의 쌀독을 칭칭 감고 있는 업! 할머니는 그 '업'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머리카락이 하늘로 치솟는 것 같았습니다.
"아이구 스님! 어떻게 하면 업이 되지 않겠습니까?"
"벌써 업이 다 되어 가는데 뭐‥‥‥‥ 지금 와서 나에게 물은들 뭐하겠소?"
스님은 바랑을 짊어지고 돌아서서 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포기할 수 없었습니 다. '업만은 면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5리, 10리 길을 쫓아가면서 스님께 사정을 했습니다.
"스님, 제발 하룻밤만 저희 집에 머무르시면서 업을 면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 오. 스님, 제발 저 좀 살려 주십시오."
간청에 못 이겨 다시 집으로 온 스님은 할머니가 이끄는 대로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 나 스님은 윗목에서 벽을 향해 앉아 말 한 마디 없이 밤을 새웠고, 할머니 역시 스님의 등 뒤에 앉아 속으로만 기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발 업이 되지 않는 방법을 일러주십시오. 제발‥‥‥ 마침내 날이 밝아오기 시작하자 스님은 할머니 쪽으로 돌아앉았습니다.
"정말 업이 되기 싫소?"
"아이구, 제가 업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안됩니다, 스님 절대로 안됩니다. 인도환생(人道還生) 하든지 극락세계에 가도록 해주십시오."
"정말 업이 되기 싫고 극락에 가기를 원하면 오늘부터 행실을 바꾸어야 하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부터 발은 절대로 이 집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하고, 입으로는 '나무아미타불'만 부르 고, 일심으로 아미타불을 친견하여 극락에 가기만을 기원하시오."
스님의 '집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말씀은 몸 단속을 하라는 것이고, '나무아미타불을 불 러라'는 것은 입 단속, '일심으로 극락왕생할 것을 기원하라'는 것은 생각 단속입니다. 곧 몸(身)과 입(口)과 생각(意)이 하나가 되게 염불 할 것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러나 할머 니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스님, 다시 한번 자세히 일러주십시오."
"보살님 나이가 70이 다 되었는데, 앞으로 살면 얼마나 살겠소? 돌아가실 날까지 '나무 아미타불'을 열심히 부르면 업 같은 것은 십만 팔천리 밖으로 도망가 버리고, 극락세계에 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 오늘부터는 첫째나 둘째 아들 집에도 가지 말고, 이웃집에도 놀 러가지 마십시오. 찾아오는 사람에게 집안 자랑하지도 말고, 오직 이 집에서 이 방을 차지하 고 앉아 죽을 주면 죽을 먹고 밥을 주면 밥을 먹으면서 '나무아미타불'만 외우십시오. 그리 고 생각으로는 극락 가기를 발원하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까?"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
할머니는 다짐을 하면서 큰절을 올렸고, 스님은 옆에 놓아두었던 삿갓을 들고 일어서서 벽에다 건 다음 슬며시 방문을 열고 나갔습니다. 걸망도 그대로 둔 채‥‥‥
'변소에 가시나 보다. '
그러나 한번 나간 스님은 영영 돌아올 줄 몰랐습니다. 사람을 풀어 온 동네를 찾아보게 하였으나 '보았다'는 사람조차 없었습니다.
'아! 그분은 문수보살님이 틀림없다. 문수보살님께서 나를 발심시키기 위해 오신 것이 분 명하다. '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더욱 발심(發心)이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방의 가장 좋은 위치에 스님의 삿갓과 걸망을 걸어 놓고, 아침에 눈만 뜨면 몇 차례 절을 올린 다음 '나무아미타불' 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집안 일에는 일체 간섭하지 않고 10년 가까이를 스님이 시킨 대로 하루 종일 '나무아미타불'만 불렀습니다. 어느덧 할머니는 앞일을 내다보는 신통력(神通力) 이 생겼습니다.
"어멈아! 오늘 손님이 다섯 온다. 밥 다섯 그릇 더 준비해라. "
과연 끼니때가 되자 손님 다섯 사람이 찾아오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루는 막내아들을 불 러 각별히 당부하였습니다.
"얘야, 너희들 공장에 화기(火氣)가 미치고 있다. 오늘은 기계를 돌리지 말고 물을 많이 준비해 놓아라 위험하다. "
그 말씀대로 세 아들은 아침부터 솜틀기계를 멈추고 물통 준비와 인화물질 제거에 신경 을 썼습니다. 그런데 오후가 되자 바로 옆집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서둘 러 옆집 불을 껐습니다. 만약 목화솜에 불이 옮겨 붙었다면 솜틀공장은 삽시간에 잿더미로 변하였을 것입니다. 다행히 할머니의 예언으로 조금도 손상을 입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웃 집의 피해까지 줄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혼도 외증조할머니의 말씀에 따른 것입니다. 손녀인 어머니가 결혼 적령기가 되었을 때, 외증조할머니는 큰아들을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북쪽으로 30리 가량 가면 구름내(雲川)라는 마을이 있다. 그 마을 김창석 씨 네 둘째 아들과 네 딸 상남(上男)이와는 인연이 있으니, 찾아가서 혼사를 이야기해 보아라."
이렇게 외증조할머니는 가 보지도 않고 신통력으로 나의 부모님을 결혼시켰습니다.
마침내 주위에서는 외증조할머니를 일컬어 '생불(生佛)'이라고 부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어느 날부터인가 외증조할머니가 '나무아미타불'을 부르지 않고 '문 수보살'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갑작스런 변화를 걱정한 아들 삼형제는 인근 마곡사의 태허 (경허대선사의 사형) 스님을 찾아가 상의했습니다.
"문수보살을 부르는 것도 좋지만, 10년 동안이나 아미타불을 불렀으면 끝까지 아미타불 을 부르는 것이 좋다. 그리고 앞일을 자꾸 예언하다 보면 자칫 마섭(魔攝)이 될 수도 있다.
내가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이라는 글을 써 줄테니 벽에 붙여 놓고 '나무아미타불'을 항 상 부르도록 말씀드려라."
常放大光明! 언제나 대광명을 뿜어낸다는 이 글을 보면서 할머니는 다시 '나무아미타불' 을 열심히 불렀습니다. 그리고 앞일에 대한 말씀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부지런히 염불 기도를 하다가 할머니는 88세의 나이로 입적하였습니다.
그런에 그때야말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7일장을 지내는 동안 매일같이 방광(放光)을 하 는 것이었습니다. 낮에는 햇빛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으나, 밤만 되면 그 빛을 본 사들이 ' 불이 났다'며 물통을 들고 달려오기를 매일같이 하였습니다. 그리고 문상객으로 붐비는 집 안 역시 불을 켜지 않아도 대낮같이 밝았습니다.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
그야말로 외증조할머니는 염불기도를 통하여 상방대광명을 이루었고, 그 기적을 직접 체 험한 가족들은 그 뒤 차례로 출가, 우리 집안 친가 외가 41인 모두는 승려가 되었습니다.
몸과 말과 뜻을 하나로 모아 염불하고 기도하는 공덕. 그 공덕을 어찌 작다고 하겠습니 까? 그리고 부처님의 불가사의가 어찌 없다고 하겠습니까? 외증조할머니의 염불기도는 우 리 집안을 불심(佛心)으로 가득 채웠고, 41명 모두를 '중노릇 충실히 하는 승려'로 바꾸어 놓는 밑거름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집안 41인의 승려 중 가장 먼저 출가한 분은 나의 큰외삼촌인 김학남(金學南, 190 2∼1955)으로 나의 어머니인 성호 비구니의 바로 밑 동생입니다.
큰외삼촌은 할머니 평등월 보살의 기이한 입적을 접하고 열심히 절에 다니다가, 23세의 나이로 1924년에 출가하였습니다. 처음 만공(滿空) 스님을 찾아가 머리를 깎아줄 것을 청하 자, 만공스님은 사형 혜월(慧月) 스님의 제자가 될 것을 권했습니다.
"나의 사형 중에는 혜월이라는 천진도인(天眞道人)이 한 분 계시지. 혜월 사형은 너무 천 진무구하여 남의 스승이 된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 만약 내가 주선하지 않는다면 사형은 평생 제자를 못 들일거야. 네가 그분의 첫 번째 제자가 되어 봄이 어떠하냐?"
큰외삼촌은 만공스님의 권유대로 혜월스님의 제자가 되어 법안(法眼)이라는 법명을 받았 습니다.
그뒤 큰외삼촌 법안스님은 오대산·금강산·천성산·지리산 등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는 이름 있는 고승들을 찾아다니며 열심히 참선정진을 하였습니다. 오직 바루 하나, 누더기 한 벌로 살면서 선방에만 다녔습니다. 유유자적(悠悠自適), 법안 스님은 그 어떠한 것에도 걸리 지 않았습니다. 어느 때는 무애(無碍)의 행을 거침없이 하였고, 어느 때는 시를 지으며 스스 로의 경지를 점검하였습니다.
일천 봉우리 위의 한 칸 집이여 반 칸은 노승이 반 칸은 구름이 차지했구나 어느 때 서쪽 바람 불어 구름이 날아가면 하나뿐인 창으로 밝은 달이 서로 찾아와 비추네 千峰頂上一間屋 半間老僧半間雲 有時西風雲飛去 一窓明月來相照
이것은 스님이 금강산 토굴에서 지은 시입니다. 이렇게 10여 년을 참선정진하며 지내던 법안스님은 35세가 넘자 해인사 백련암으로 들어와, 영구천(靈龜泉)이라는 조그마한 샘을 파 고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지장기도를 하리라 다짐 했습니다.
스님은 단순히 입으로만 지장보살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지장보살과 하나가 되도록 마 음을 모으고자 했습니다. 처음에는 2시간씩 네 차례, 하루 8시간의 기도를 시작하였으나, 날 이 갈수록 기도 시간은 길어졌습니다.
"지장보살 지장보살 지장보살 지장보살‥‥‥‥
5년이 경과하자 삼매(三昧) 속에 빠져들어 3,4일을 밥도 먹지 않고 대소변도 보지 않고, 마냥 서서 목탁을 두드리며 지장보살을 부를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대중스님들은 " 법안스님이 저토록 기도삼매에 자주 드는 것을 보니 머지 않아 깨달음을 이를 것이다."라고 하면서 칭송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9년이 되었을 때, 법안스님은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끼고 법당을 뛰쳐나오며 외 쳤습니다.
"허공골(虛空骨)을 보았다! 허공의 뼈를 보았다!"
그리고는 짧은 오도송(悟道頌)을 지었습니다.
허공골 중의 유상 무상이여 상 속에는 부처가 없고 부처 속에는 상이 없다 虛空骨中 有相無相 相中無佛 佛中無相
그때 백련암 스님들은 당시 법안스님의 기도성취를 축하하면서 '영구천구년지장기도기념 비(靈龜泉九年地藏祈禱紀念碑)'를 세웠는데, 그 비석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지장기도를 통하여 한 경지를 이룬 큰외삼촌 법안스님은 걸림 없는 법문으로 대 중들을 교화하면서 더욱 자재롭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1955년 가을, 홀연히 서을 도선사 석 불 뒤의 바위 위에 앉아 아무도 모르게 입적하셨습니다.
이처럼 삼매를 이룬 기도는 오도(悟道)와 직결됩니다 깨달음의 원(願)을 세우고 불보살 과 하나가 되면 능히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삼매(三昧)! 부디 삼매를 이를 때까지 좌우를 돌아보지 말고 부지런히 기도하십시오. 반 드시 '나'의 불성(佛性)이 발현되어 우리를 해탈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기도는 정성을 모으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기도는 지극한 마음(至心)으로 시작하여 지 극한 마음으로 끝맺음을 해야 합니다 부처님 앞에서 기도를 올릴 때뿐만이 아니라 기도 전 의 마음가짐부터 지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예로서 나의 부모님께서 생남불공(生男佛供) 을 드리러 다니던 때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불심이 매우 깊었던 우리 부모님은 자식들을 낳기 위해 절을 찾아다니며 정성을 다해 기 도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께 기도를 올릴 때만 정성을 기울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수 확한 첫 쌀을 부처님께 가장 먼저 바쳐야 하는 것으로 여겼던 부모님들은 농사를 지을 때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임했습니다.
공양미를 수확하는 논밭에는 대변을 주지 않고, '관세음보살'과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을 부르면서 고운 풀만 베어다가 거름으로 사용했습니다. 또 벼가 다 익으면 낫으 로 베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직접 벼를 훑어 방아를 찧었습니다 .
이렇게 수확을 하고 나면 아버지 법진(法眞) 거사는 손수 만드신 무명베 자루에 쌀을 한 말 담습니다. 그리고 깨끗한 무명옷으로 갈아입으신 다음, 그 쌀을 지게에 얹어 마곡사 대원 암까지 짊어지고 가서 불공을 드렸습니다. 집에서 절까지는 80리 길인데, 그 먼 길을 생남기 도를 위해 다니셨던 것입니다.
한번은 평소와 같이 쌀을 짊어지고 마곡사 대원암으로 향하였는데, 그날따라 마침 배가 사르르 아픈 것이 자꾸만 방귀가 나오려는 것이었습니다. 억지로 참고 또 참으며 가다가, 대 원암을 10리 남겨 놓은 지점에서 시냇물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를 건너뛰다 그만 방귀를 뀌 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러 가다가 방귀를 뀌다니! 가벼운 방귀 기운이 이미 위로 솟아 쌀로 올라갔을 것이 아닌가?'
방귀 기운이 섞인 쌀로는 공양을 올릴 수 없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그 쌀을 도로 짊어지 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다른 벼를 손으로 훑어 방아를 찧은 다음, 그 쌀을 새 자루 에 넣어 다시 80리 길을 걸어서 불공을 드리러 가셨다고 합니다.
기도하기 전의 정성이 이러했거늘 기도할 때의 정성은 어떠했겠습니까? 또 이렇게 정성 을 다한 기도 끝에 저를 낳았으니, 부모님의 은혜를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분명 알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기도하러 가는 마음가짐을 이렇게만 가진다면 그 기도는 이미 이루어진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기도는 정성입니다. 내 정성을 내가 기울이면서 불보살님께 기원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내 정성 내가 들이고, 내 불공 내가 드리고, 내 기도는 내가 하고, 내 축원은 내가 해야 참 불공이요 참 기도입니다. 남이나 스님네가 대신 해주는 것은 모두가 반쪽이기 때문에 결실 또한 늦을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의 시작부터 끝까지 제 정성을 제가 남김없이 바칠 때 부처님의 자비 광명이 환히 비쳐 오게 되어 무명업장(無明業障)이 소멸되고, 기도성취는 저절로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 다.
우리 모두 마음을 지극히 모아 내 기도를 내가 하는 불자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부처님 께서는 틀림없이 우리를 기특히 여기실 것입니다.
1940년대 전반기 우리 가족이 모두 출가한 직후의 이야기입니다. 나의 어머니인 성호(性浩) 비구니는 전생부터 불법에 인연이 많아서인지 출가 전부터 절에 가시기를 좋아하였고, 절에 가서는 절을 하고 살림살이를 마련해 주기를 좋아하셨습니다. 그 당시 대구 동화사 내 원암은 거의 무너지다시피 한 아주 가난한 절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가실 때마다 바가지와 작 은 그릇, 단지 등 필요한 살림살이를 무시로 사서 날랐습니다.
어느 날 갖가지 살림살이를 소달구지에다 가득 싣고 내원암으로 올라가는데, 짐끈을 제 대로 묶지 않아 실은 물건들이 덜거덕 덜퍼덕 흔들렸습니타. 어머니는 끈을 단단히 묶기 위 해 수레를 세우고 수레바퀴 옆에 바짝 붙어서서 끈을 다시 묶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있던 소가 갑자기 앞으로 달려나갔고,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어머니 발 등 위로 수레바퀴가 넘어갔습니다. 그 때의 수레바퀴는 지금의 고무바퀴와는 달리 나무에다 쇠를 두른 아주 딱딱한 것이었습니다. 빈 수레라 하여도 무거운데, 거기다 짐을 실었으니 그 중량이 얼마이겠습니까? 연한 두 발이 사정없이 바스러지는 순간, 어머니는 기절하여 대 구동산영원에 입원하였습니다.
우리 가족들은 걱정을 하며 입원실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혼자서 싱글싱글 웃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 아프지 않으십니까?"
"두 발등이 다 부셔졌는데 안 아프면 되는가?"
가히 백천겁이 지나더라도 한 번 지어놓은 업은 없어지지 않나니 인연이 닥쳐오면 그 과보를 면할 수가 없느니라 假使百千劫 所作業不亡 因緣來遇時 果報難免矣
처녀 시절 사서삼경을 모두 읽으신 데다 말도 잘하고 문장을 잘 하셨던 어머니는 아픈 중에도 이 게송을 읊으시며 자꾸 빙그레 웃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어리둥절해하는 가족들에 게 어머니는 웃는 까닭을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발등을 다쳐 기절을 하는 바로 그 찰나에 닭 한 마리가 퍼덕퍼덕 날개를 치며 달 아나는 것을 보았다.
3년 전에 할아버지가 집에 오셔서 점심 진지상을 차리는데, 부엌 안으로 닭 한 마리가 들어와서 먹을 것을 찾아 왔다갔다하며 목을 넘실거리더구나, 그래서 닭을 쫓기 위해 아무 생각 없이 부지깽이를 던졌는데, 그만 닭다리에 정통으로 맞아 다리 둘이 몽땅 부러져 나갔 단다. 닭은 크게 소리내어 울면서 두 다리가 간당간당한 상태로 황급히 밖으로 날아 나갔 지‥‥‥‥
기절하는 순간, 닭이 달아나는 영상을 본 어머니는 직감적으로' 그 때의 닭이 죽은 다 음 지금의 저 소가 되어 악연을 갚는 것'임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 때 닭의 다리를 일부러 부러뜨린 것이 아니듯이 저 소도 일부러 내 발등을 부 러뜨리려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벌이 달려들자 피하기 위해 갑자기 수레를 끌었을 것이야. 평소 때였다면 소 모는 일꾼에게 그릇들이 움직이지 않게 끈을 좀 잘 매달라고 하 였을텐데, 과보를 받을 때가되어서인지 이상하게 직접 끈을 조여매고 싶어졌거든! 이렇게 인과가 분명할 데가 어디 있느냐? 3년 전에 지어놓은 업을 이렇게 빨리 받았으니, 그 전에 지은 죄업도 어지간히 갚아진 것이 아니겠니. 나는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
이러한 마음가짐 때문인지 한 달 남짓 병원에서 치료하자 바스러진 발등이 완전히 붙었 으며, 돌아가실 때까지 발이 아프다는 말씀은 한 번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형제는 2남2녀 입니다. 내 위로 누나와 형님, 아래로 누이동생이 있습니다. 우리 가 족 6명 중 가장 먼저 출가하여 중이 된 사람은 누나 응민(應敏) 스님입니다. 나보다 6세 위 인 누나는 아버님이 열심히 불공을 드린 끝에 1923년 6월 28일에 태어났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근대 선종의 중흥조로 추앙받고 있는 경허(鏡虛) 대선사의 형님인 태허 (太虛) 스님이 말년에 머무셨던 공주 마곡사의 한 암자로 불공을 드리러 자주 다녔습니다.
태허스님은 기골이 장대하고 호기가 빼어났으나, 곡차를 즐겨 마시는 흠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우인 경허선사가 찾아왔습니다.
"형님도 이제 나이 50이 넘었으니 술 그만하시고 마무리를 잘 지으셔야지요. 중노룻도 잘 하지 못하고 부모님도 잘 모시지 않았으니 양가득죄(兩家得罪)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 까?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참선정진 하십시요. "
"양가득죄라‥‥‥‥ 불가에도 속가에 대해서도 모두 죄를 지은 꼴이라? 아, 그렇구먼.
자네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러하네. "
그때부터 태허스님은 그토록 좋아하던 술을 끊고 산문밖 출입을 금한 채 열심히 참선수 행을 하였습니다.
어느 날 아버님이 생남불공(生男佛供)을 위해 마곡사로 찾아갔을 때 태허스님은 근근히 불공 축원을 끝내고 내쫓듯이 말씀하셨습니다.
"거사야,"
"예."
"내가 지금 많이 아프다. 기운이 하나도 없다. 불공드리러 왔다가 송장 보면 재수 없다는 말이 있네. 빨리 가게, 빨리 가."
아버지는 태허노스님이 방으로 들어가 눕는 것을 보고 절을 떠났습니다. 절 일주문을 벗 어나자마자 태허노스님이 돌아가셨음을 알리는 열반 종소리 가 '쿠왕 쿠왕' 울리는 것이었 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열반 종소리가 아버지의 목덜미를 잡아끄는 듯했습니다. 집에까지 80리 길을 오면서 그 종소리는 계속 아버지를 쫓아오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 일이 있은 뒤 어머니는 바로 임신을 하여 누나를 낳았고, 부모님들은 누나를 태허스 님의 후신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 뒤 누나는 당시 여성으로서는 수재가 아니면 입학하기 어렵다는 공주여자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우리 가족 중 가장 먼저 출가하여 금강산으로 갔다가 이듬해인 1941년부터 수덕사 만공(滿空) 대선사 밑에서 수행하였습니다. 태허 노스님은 만공스님의 출가시 스승인 은사였 으니 전생의 스승과 제자는 금생의 제자와 스승이 된 것입니다.
응민스님은 수덕사 견성암에서 용맹정진하여 만공스님으로부터 '한 소식한 비구니'라는 인가를 받았고, 그 뒤에도 평생을 참선정진과 후학들의 지도에 몰두하였습니다. 한국 비구니 중 그만한 분이 드물다고 할 정도로 공부를 잘하시다가 1984년 12월 15일에 응민스님은 입 적한 것입니다.
응민스님은 불가의 상례에 따라 49재를 지냈습니다. 21일째 되는 날 지내는 3재는 대구 에서 지냈는데, 재는 내가 집전을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재를 지내면 염불 ·독경에 범패까 지 곁들이기가 일쑤이지만, 그날은 모든 절차를 생략하고 선법(禪法)에 의해 천도를 했습니 다. 나는 조용히 죽비를 치고 입정(入靜)에 들어 누님 영가(靈駕)에게 일렀습니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하나는 어디로 가는가(萬法歸一 一歸何處)."
그런데 불현듯 한 생각이 떠올라 영가에게 마음속으로 일렀습니다.
"응민스님. 미국 구경 한번 안할라요? 미국 한번 가보시오. 미국 펜실바니아에 가면 소영 이가 있는데 그 집에 태어나면 참 좋을거요. 부자집이니까 공부도 많이 하고 미국 구경도 많이 할 수 있을 거고, 참 좋을 거구먼."
이렇게 잠시 한 생각을 했었는데 영검이 통했던지 그날 밤 내 여동생 쾌성(快性) 스님 꿈에 응민스님이 나타나 묻는 것이었습니다.
"쾌성아. 일타스님이 나보고 미국 가라고 그러는구나. 그렇지만 서울도 혼자 못가는 내가 미국을 어떻게 혼자 갈 수 있겠니."
"언니, 일타스님이 좋으니까 가라는 것 아닙니까. 걱정말고 가세요. 미국은 비행기만 타 면 금방 갈 수 있는데 뭐! 비행기 타고 가면 자동차로 마중 나와서 싣고가니 조금도 걱정 없소. 3살 먹은 어린애도 비행기만 타면 가는데 언니가 못 갈리 있겠어요? 가소, 가소."
"아, 그건 그렇겠네. 그런데 소영이가 누군가? 소영이가 누군데 소영이 집에 가라고 하 지?"
"그전에 언니한테 아주 좋은 두루막 장삼을 해준 사람 있잖아요. 언니가 너무 좋은 것이 라 중이 입을 것이 아니라고 한 그 두루막!"
"아, 그 사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응민스님은 그냥 선 채 뒷쪽으로 쭉 물러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에 있는 소영이도 같은 꿈을 꾸고 아기를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지금 여덟 살 된 아이의 눈도 얼굴도 행동거지도 영락없이 응민스님 살아 생전의 모습을 닳았습 니다.
이렇듯 누나 응민스님은 과거 ·현재 ·미래 삼생(三生)의 모습를 우리들 가까이에서 보 여주었습니다.
나는 젊은 시절, 수도 생활의 장애를 극복하고 힘을 얻기 위해 세 번의 기도를 했습니다.
그 첫번째는 6·25 전쟁이 일어나 피난길에 올랐던 22세 때의 일입니다.
20대 초반 통도사 강원을 졸업한 나는 대학에 진학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한 면(面)에 대학생이 한 명 있을까 말까 하던 시절이었고, 우리나라에 대학교도 몇 개 되지 않을 때였습니다.
내가 당시에 그토록 대학을 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출세나 명예욕 때문이 아니었습니 다.
'그동안 한문 공부를 하여 어느 정도 문리(文理)가 터졌으니 이제부터 현대학문을 배우 자 그래서 순전히 한문으로만 이루어진 불교경전을 현대적으로 풀이하고 해석한다면 이 얼 마나 좋은 일이랴.'
이렇게 생각한 나는 서울 동국대학의 입학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 서울로 향했는데, 때마 침 6·25 전쟁이 터졌습니다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려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그만 안양에 서 인민군에게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아지트인 동굴 속으로 나를 끌고 들어가 꼬치 꼬치 캐물었습니다.
"너는 뭐하는 사람이냐?"
"중입니다. "
"중이 뭐냐?"
"부처님의 법을 배우고 닦는 사람이오."
"이거 순 부르주아 아니야? 인민들의 피를 빨아먹고 무위도식하는 족속들 아니야?"
그들은 점점 거칠어지면서 무지막지하게 대하였고, 나는 묵묵히 있었습니다. 더욱이 당시 는 잡히는 젊은이들을 모조리 인민군 의용군으로 끌고 가서 총알받이로 세울 때였습니다.
'아, 이거 잘못 걸려도 크게 잘못 걸렸구나. 이제 꼼짝없이 의용군으로 끌려가서 죽게 되 었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조금 있으니 정치공작대원인 듯한 말쑥한 사람이 굴 안으로 들 어왔습니다. 당시 정치공작재원들은 학식도 있고 나름대로 교양이 있는 사람들 중에서 뽑았 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나를 보더니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중이구만. 팔뚝 좀 걷어 보지!"
그래서 옷을 걷어 팔뚝을 내보였더니 단번에 얼굴이 부드러워졌습니다.
"연비 자국이군요. 나도 불교신자요."
그러면서 내 팔뚝을 조심스럽게 만지더니 꿇어앉아 있던 내 몸을 일으켜 세우고 의자도 갖다 주고, 그 당시만 해도 귀했던 사이다까지 대접하였습니다. 그리고 통행증을 하나 써 주 면서, '어디든지 가다가 인민군들이 잡으면 이 통행증만 보여 주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것 도 모자라 차를 태워 드리겠다면서 기다리라고 하더니, 트럭이 한 대 오자 명령을 내렸습니 다.
"이 스님 가시는 데까지 잘 모셔 드려라."
그 연비 덕분에 안양에서 김천까지 편안하게 차를 타고 내려온 다음, 진주 집현산에 있 는 응석사(凝石寺)로 걸어서 갔습니다.
응석사에 도착했을 때는 매우 지친 상태였는데, 다행히 주지스님이 쌀밥 한 사발과 반찬 으로 간장 한 종지를 주었습니다. 나는 한 종지의 간장을 모두 밥에 부어 싹싹 비벼서, 사흘 굶은 사람처럼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밥그릇을 비우자마자 주지스님이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나에게는 주민증도 병적계도 없었기 때문에 함부로 돌아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여차하면 붙잡혀서 총 알받이 노릇을 하거나 빨갱이로 몰려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가라고 해도 떠 나지 않자 주지스님의 마음도 바뀌었습니다 .
"그렇다면 공양주(供養主) 소임을 맡아라."
"예."
나는 열심히 밥을 짓고, 설거지도 아주 깨끗이 했습니다. 주지스님은 만족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
"공양주 노릇, 아주 잘하는구먼."
며칠이 지나자 불공이 아주 많이 들어왔습니다. 주지스님은 나에게 불공 올리는 일을 거들 것을 명하였고, 독경을 남 못지 않게 하였던 나는 목탁을 치면서 유창하게 염불을 하 였습니다. 그러자 주지스님은 공양주를 그만두고 부전(불공 드리는 직책)을 보라고 하였습니 다. 얼마 동안 부전을 보다가 어느 날 문득 한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공부를 제대로 하려면 생에 대한 애착을 끊고, 무상대발심(無上大發心)을 하여 대도인이 되어야 한다. 기도를 하자. 기도를 하여 힘을 기르자. 7일을 기한으로 정하고 옴마니반메훔 1도를 하되, 잠을 자지 말자.
이렇게 결심하고 나는 부지런히 기도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앉아서 하다가 졸음이 오기 시작하자 서서 옴마니반메훔을 외웠습니다. 그러나 졸음은 정말 참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깜빡깜빡 조는 사이에 목탁은 손에서 미끄러져 나가 발등을 찧었습니다. 몇 번 발등을 찧고 는 '서서 하는 것도 안되겠다' 싶어 마당을 돌아다니며 염불을 했습니다.
"옴마니반메훔 옴마니반메훔‥‥‥‥ "
끊임없이 옴마니반메훔을 찾고 비몽사몽간에도 옴마니반메훔을 찾다가 6일째 되는 날, 은행나무 밑의 평상에 잠간 앉았는데 그 즉시 은행나무에 머리를 기댄 채 잠들어 버렸습니 다.
순간, 허공 전체가 나의 입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서유기》에 등장하는 황금대왕이 자기가 들고 있는 병 속으로 무엇이든 '들어오너라' 하 면 확 빨려 들어가듯이, 허공이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이 꿈에서 깨어나자 그토록 기도를 방해하던 졸음도 저절로 사라져서 7일 기도를 잘 마 칠 수 있었습니다. 때마침 찾아온 마을 이장은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내가 주민증이 없는 것을 알고 만들어다 주었으며, 기도를 잘 마친 나는 더욱 도심을 발하여 정진하였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하면 힘을 얻게 되고, 생각하지도 않은 좋은 일이 생기게 됩니다.
부디 수행을 하다가 뜻과 같이 되지 않는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러한 때에 필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다시금 마음을 굳게 가지고 기도를 하게 되면 힘이 샘솟게 됩니다.
기도로써 시련을 극복하여 불보살님께로, 그리고 불보살의 경지로 더욱 가까이 다가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의 기도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와 같을 때는 거듭 거듭 기도하여 도심(道心)이 걸림 없을 때까지 행하여야 합니다. 바로 그와 같은 경우가 나 의 두번째, 세번째 기도입니다.
나의 두번째 기도는 허공을 삼킨 첫번째 기도를 하고 한달 가량 지난 다음, 응석사 내원 토굴(內院土窟)에서 했습니다. 그러나 이때의 기도는 소리내어 염불을 한 것이 아니라, 7일 동안 단식을 하면서 부처님의 위대함과 불법의 깊은 진리를 고요히 관조하는 기도였습니다.
7일 단식이 끝나는 날, 나는 꿈을 꾸었습니다. 응석사에서 대변을 보자 그 똥이 집현산 응석사의 10리 계곡을 타고 홀러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멕켄나의 황금계곡에 황금물 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나의 똥은 조금도 역겨운 냄새를 풍기지 않고 거대한 흐름을 이루어 흘러내려갔습니다.
내가 조실스님인 금오선사(金烏禪師)께 꿈 이야기를 하자, 스님은 아주 멋진 해석을 내려 주셨습니다.
"몸 속의 똥이 빠져나가는 꿈은 업장소멸(業障消滅)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똥이 골 짜기를 가득 채우며 10리 길이나 이루었다니 업장소멸이 얼마나 많이 되었겠느냐? 일타 수 좌는 정말 기도다운 기도를 한 것이 틀림없구나."
진주 응석사에서의 두 차례 기도를 마치고 나는 외삼촌 진우(震宇) 스님이 머물고 있었 던 전주의 조그마한 절로 가서 동네 아이들을 모아 공부를 가르쳤습니다. 마침 그 절에는 내가 어려서부터 그토록 읽고 싶어했던 일본어판 《세계문학전집》이 있었습니다. 경찰 간 부 한 사람이 피난을 가면서 맡겨놓은 것이었습니다.
나는 책 속에 파묻혀 읽고 또 읽었습니다. 재미없는 것은 한 차례, 재미있는 것은 거듭거 듭 읽었습니다. 몬테크리스토 백작, 레 미제라블, 플루타크의 영웅전, 비스마르크 등을 모두 탐독했습니다.
그리고 그냥 넘어가기가 아까운 문장, 마음에 속 드는 글귀들은 대학노트에 촘촘히 적어 넣었습니다. 쓰고 쓰고 또 쓰다 보니 어느덧 대학노트가 20권이나 되었습니다. 나는 그 노트 의 표지에 '문학의 자물쇠'라는 뜻으로 〈文學鎖談〉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혼자 문학도가 되는 꿈을 꾸어 보기도 했습니다.
'이만하면 나도 능히 글을 쓸 수 있겠구나 작가가 될까? 시인이 될까?'
그러나 전쟁은 나를 그 절에 있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1·4 후퇴가 시작되어 피난을 가야만 했고, 문학전집을 보면서 기록한 대학노트를 그 절에 버려둔 채 떠나야 했습니다. 그 런데 아름다운 저녁 노을, 수려한 경치를 볼 때마다 〈문학쇄담〉생각이 나는 것이었습니다.
그 노트에 적어 놓은 표현을 살짝 인용하여 가미하면 지금의 이 장면을 아주 멋진 문장 으로 묘사할 수 있을텐데‥‥‥
선방에서 참선을 한답시고 앉아 있으면 이 같은 생각들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거기에다 못 가게 된 대학 진학에 대한 미련까지 되살아났습니다. 자연 참선이 올바로 될 까닭이 없 었습니다.
혼란 속에서 나의 발길은 해인사로 향하였고,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는 장경각(藏經閣)을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담아 놓은 팔만 개가 넘는 대장경판!
'아, 부처님이야말로 세계에서 제일가는 작가로구나 세계에 4대 문호, 5대 문호가 있다 고 하지만 어찌 부처님과 비교할 수가 있으리.'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신심이 샘솟듯이 일어났습니다.
'그래. 이 장경각에서 기도를 하자. 이렁저렁 시적부적 세월만 보내는 중노릇을 해서는 안된다. 올바로 발심(發心)이 되지 않으면 공부의 진척이 있을 수 없다. 대발심(大發心)을 하겠다는 원을 세우고 기도해 보자.'
나는 해인사 스님께 기도할 것을 허락받고 7일 기도를 시작 했습니다. 그리고 목탁을 천 천히 치면서 천천히 '서가모니불'을 부르면 마음이 느슨해지기 때문에, 목탁을 빨리 치면서 빨리 '서가모니불'을 부르는 염불법을 택했습니다. 또한 당시는 전란 중이었으므로 적군의 표적이 된다는 이유 때문에 밤이 되면 촛불을 켜지 않고 향만 한 가치 피워 놓은 채 기도를 해야 했습니다.
새벽부터 장경각에 있는 법보전(法寶殿)전에서 정성껏 기도를 하였지만 향불 하나밖에 없는 깜깜한 한밤중이 되자 졸음이 찾아 들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졸음을 쫓기 위해 장경각 경판 사잇길을 돌며 '서가모니불'을 찾았습니다.
깜깜한 장경각 안를 돌다가 조금이라고 졸게 되면 뽀족 튀어나온 경판의 모서리 부분에 머리를 부딪치게 됩니다. 깜빡 깜빡 졸던 나는 수없이 경판에 머리를 부딪쳤고, 부딪치고 나 면 정신이 번쩍 들어 다시 기도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리고 끼니때만 되면 당시 해인사에 계셨던 자비보살 인곡(仁谷) 스님이 어김없이 오셔 서 나의 귀를 당기며 재촉했습니다.
"가자. 밥 먹으러 가자."
목탁을 놓고 대중방으로 가서 얼른 밥 한술을 먹고는 양치질을 하고 화장실을 찾은 다 음, 즉시 돌아와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이렇게 6일을 기도하고 저녁 무렵 소변을 보러 나왔는데, 마침 장경각 뒤쪽에서 지게에 물건을 한 짐 진 사람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지게에 진 것이 무엇입니까?"
"송이요."
"얼마요?"
"2만원이오."
마침 나에게는 꼭 2만원의 돈이 있었습니다. 2만원을 모두 주고 송이를 몽땅 산 나는 부 엌으로 가져가서 기쁜 마음으로 적도 굽고 국도 끓였습니다.
"야, 이게 진짜 기도다. 진짜 기도 회향(回向)이다!"
나는 그 송이로 열심히 음식을 만들어 부처님 전에 올리고, 또 대중공양을 했습니다. 그 리고 이튿날 새벽, 3시에 기도 회향을 하고 새벽예불에 참여한 다음 7일만에 처음으로 등을 방바닥에 붙이자 곧바로 잠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 꿈속에 우리 친척인 비구니 스님 한 분이 바랑을 짊어지고 나타났습니다.
"네가 아끼던 대학노트를 가지고 왔다. "
"정 말입니까?"
너무나 반가웠던 나는 황급히 달려들어 스님의 바랑에서 노트를 뽑았습니다. 나의 글씨 로 빽빽이 채워져 있는 20권의 대학노트! 기쁨에 겨워 열심히 공책을 넘기며 살펴보고 있는 데, 나의 도반인 창현(昌玄) 스님이 다가오더니 버럭 고함을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영 책 껍데기를 못 벗어나는구먼! 야, 선방에서 책을 주무르고 앉아 있으면 선방 망한다 는 사실도 모르느냐? 에잇! 안되겠구먼."
창현스님은 나에게 달려들어 대학노트 20권을 모두 빼앗아 쥐고, 양손으로 확 잡아 찢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20권의 노트가 한번에 다 찢어지면서 콰르르 가루로 변해 버 리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온몸을 감쌌습니다.
"야, 이놈아! 책을 보면 내가 봤지, 네놈하고 무슨 상관이냐?"
한바탕 싸우려고 벌떡 일어서다가 나는 한 생각을 쉬었습니다.
'에라, 책을 봐서 뭐할꼬? 치워 버리자. 본래 없었던 것으로 요량하지 뭐.'
그리고는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이때부터 나는 사교입선(捨敎入禪), 문자를 버리고 참된 자기를 찾는 참선 공부에만 열심히 매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전에는 나의 바랑 속에 책이 반 이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틈만 나면 책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와 꿈을 꾼 다음부터는 학문에 대한 애착심이 남김없이 떨어졌습니다. 아울러 기도의 원력대로 발심이 올바로 이루어져서 참선수행을 본격적으로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네번째 기도는 26세 때인 1954년 여름 오대산 적멸보궁(寂滅寶宮)에서 행하였습니다.
세번째 기도 이후 선방을 다니면서 부지런히 정진하였지만 아직 수행승으로서 부족한 것 이 많고 장애가 많다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나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결정코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를 해결해야만 한다.'는 굳센 마음가짐이라는 것을 알 고 있었던 나는 중대 결단을 내렸습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속가에 갈 사람이 아니다 중노릇 아닌 딴 짓을 할 사람도 결정 코 아니다. 오로지 불법을 위해 살다가 죽을 몸인 것만은 분명한 것! 이 기회에 결정심(決定心)을 완전히 다져 놓아야만 한다. 연비를 하자. 손가락이 없으면 세속적인 모든 생각이 저 절로 뚝 끊어질 것이고 손가 없는 나에게 누가 사람 노릇 시키려고도 않을테니‥‥‥‥
그래서 오대산으로 들어갔습니다. 막상 연비를 하기 위해 오대산으로 들어가기는 했으나 가자마자 성급하게 할 것도 아니고 하여, 여름 한철 석 달 동안 연비에 대한 생각도 점검할 겸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하면서 열심히 정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대관령 꼭대기 에 구름 한 점이 날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구름은 마치 내가 날아가는 것처럼 느껴졌 습니다.
'이 몸뚱아리는 뜬구름과 같은 것이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인가. 사람의 일생 또한 저 뜬구름과 같이 어디선가 왔다가 어디론가 가 버리는 것에 불과한 것. 이러할 때 깊 은 연(緣)을 심어 놓지 않으면 그야말로 허생명사(虛生虛死)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오대산 과 같은 좋은 도량에 왔을 때 이 마음을 깊이 다지고 연을 심어야 하리.
이렇게 생각하고 그날 《능엄경》 제6권 사바라이장(四波羅夷章)의 연비(燃臂)에 대한 구절을 다시 한번 죽 읽었습니다.
내가 열반한 뒤에 어떤 비구가 발심하여 결정코 삼매를 닦고자 할진대는 능히 여래의 형상 앞에서 온몸을 등불처럼 태우거나 한 손가락을 태우거나 이 몸 위에 향심지 하나를 놓고 태우면 내가 말하는 이 사람은 비롯 없는 숙세의 빛을 한순간에 갚아 마치리니 길이 세간을 멀리 떠나 영원히 모든 번뇌를 벗어나리라 만약 이렇게 몸을 버리는 작은 인을 심지 않으면 무위도를 이룰지라도 반드시 사람으로 돌아와 그 묵은 빛을 갚으리니 내가 말먹이보리를 먹은 것과 조금도 다틀 바 없도다 若我滅後 其有比丘 發心決定 修三摩提 能於如來 形相之前 身燃一燈 燒一指節 及於身上 熱一香炷 我說是人 無始宿債 一時酬畢 長損世間 永脫諸漏 若不以此 捨身微因 縱成無爲 必還生人 酬其宿債 如我馬麥 正等無異
그리고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매일 3천배씩 7일 동안 기도를 드린 후, 오른손 네 손가락 열두 마디를 모두 연비(燃臂)하였습니다. 출세·명예·행복 등 사람 노릇하겠다는 미련을 손 가락 열두 마디의 연비와 함께 깡그리 태워 버리고, 나는 홀로 태백산 도솔암으로 들어갔습 니다. 그곳에서 6년 동안 조그마한 갈등도 없이 참선정진하면서, 아주 열심히 부처님 제자답 게 살았습니다.
일평생과도 바꿀 수 없는 그 6년의 참된 공부! 그것은 네 번의 기도를 통해 얻은 힘이 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갈등이 있으면 기도하십시오. 장애가 많고 공부가 잘되지 않으면 기도를 통해 거듭 발심하십시오. 불보살님께서는 틀림없이 큰 힘을 주실 것입니다.
나의 다섯번째 기도는 1960년 구례 화엄사의 4사자삼층석탑 앞에서 행하였습니다.
6년 동안 도솔암에서 수행한 후 청담스님 등의 권유로 태백산을 내려온 나는 지리산 쌍 계사에서 한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비구승단(比丘僧團)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던 이승만 대통령이 4·19로 물러 나게 됨에 따라, 한동안 움츠리고 있던 대처승들이 일어나 불교계는 다시 혼란 속으로 빠지 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 불똥은 쌍계사에까지 번졌습니다. 폭력을 휘두르며 쌍계사를 점령 하려는 대처승들에 밀려 우리는 화엄사로 옮겨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화엄사 또한 안전지대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대처승들과 매일같이 싸울 일도 아니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부처님의 제자는 열심히 수행을 해야 한다. 기도로써 이 도량을 지키자.
부처님께서는 이곳을 틀림없이 정법(正法)의 땅으로 보호하실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나는 7일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낮에는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므 로 밤에만 기도를 했습니다. 저녁 예불이 끝나면 정성껏 달인 작설차 한 잔을 4사자석탑에 올리고 기도를 시작하여 새벽예불 때까지 '서가로니불'을 부르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특히 그때 나는 살구나무로 만든 목탁을 치면서 '서가모니불'을 불렀습니다. 살구나무 목 탁은 아주 연하면서도 듣기 좋고 멀리까지 울려퍼지는 특징이 있었으므로, 내가 치는 목탁 소리는 구례읍 가까이의 마산면에까지 울려퍼졌다고 합니다.
마침내 기도 회향일인 7일째 새벽, 나는 '서가모니불'을 부르며 무아지경에 빠져들었습니 다. 그런데 조금 지나자 지장암 노스님과 젊은 스님들이 올라와서 나에게 예배를 올리는 것 이었습니다.
"스님, 정말 장하십니다. 스님의 기도에 부처님께서 감응하셨음인지 큰 방광이 있었습니 다. 그 빛이 이쪽에서 솟아 멀리 천은사 쪽으로 높이 높이 뻗어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염불에 몰두해 있었기 때문에 방광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제트기의 꼬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 같은 것이 탑 위에서 천은사 쪽으로 뻗어가는 것을 느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침이 되자 화엄사 밑의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예배를 하면서 다시 말했습니다.
"스님, 오늘 새벽에 탑 주위에서 하늘로 치솟는 방광이 한 시간 이상 계속되었습니다. 이 러한 이적이 어찌 그냥 생겨난 것이겠습니까? 저희들은 오직 스님의 도력으로 여기고 있습 니다. 스님, 부디 이 화엄사에 오래 머물러 계십시오. 옳은 스님만 계시면 화엄사는 틀림없 이 자리가 잡힙니다. 저희들도 스님을 모시고 열심히 이 절을 지키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화엄사는 대처승과의 싸움이 없는 조용한 절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낮에는 토종벌들이 4사자탑으로 몰려들어 새까맣게 탑을 감싸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스님들이 통을 만들어 바가지로 이 벌들을 받았더니 3통 분량이나 되었으며, 이후 토종벌들 은 많은 꿀을 스님들께 제공했습니다.
기도 끝의 방광은 화엄사를 무쟁(無諍)의 수도처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 행자에게는 먹을 것이 저절로 찾아 든다'는 옛말 그대로, 당시 먹을 것이 변변치 않았던 우 리에게 토종벌들까지 스스로 날아와 보약 공양을 올렸던 것입니다.
일타 스님의 저서
첫댓글 감사감사합니다^^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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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힙니다.
조금 기도하고 큰복 바라는 저같은 불자가 자주 읽고 지침을 삼아야 할 글이군요. 감사합니다.
아...참으로 그물같이 짜여진 업과 인연의 그물입니다....나무아미타불...오직 기도와 정진 뿐....()()()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일타스님의기도의영험은.....신심으로환희심은일으키니다.감사합니다.일심으로기도합니다.
고맙습니다..나무아미타불 ()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