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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순례와 걸음 여행을 계획하면서 꿈을 꾸는 일이 있다. 하얀 뭉개 구름이 피어 오르는 배경을 뒤로 하고, 걸어서 하늘까지 걷는 일이다. 그런 꿈을 안고 익산 지역 내에 있는 순교 성지를 순례하기 위하여 남도의 새벽 길을 열었다. 박해를 피해 첩첩산중으로 숨어 들어가 천주교를 믿던 순교자들은 자신의 미래에 대하여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순간을 이겨내면 살 수 있고 살아서 당신을 증거하고 말씀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한다면 당신을 만날 수 있다는 일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죽은 자리에 천주님의 증거자로 영원히 부활할 것이라는 확신이 자신을 들 풀처럼 풀꽃처럼 지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들의 녹녹지 않았던 생전의 삶과 사후의 삶을 조명하는 것이 오늘 함께 떠나는 도반들의 순례의 몫이다. 오늘 처음 순례지는 익산 나 바위다. 금강 나암포 위에 있는 아름다운 동산에 있는 천주교 성지가 바로 나 바위 성지다. 내가 바위다 라는 뜻을 지닌 나 바위는 화산(華山)이었다. 조선시대 유명한 학자 송시열은 이곳에 찾아 송림 사이에 앉아 금강을 내려다 보는 풍경에 반했다. 산 밖에서 보는 풍경도 일품이지만 산 안에서 금강을 바라 보는 풍경도 더할 나위가 없었던 것이다.
화산 정상은 반석 같은 바위가 너르게 퍼져 있고 중앙에는 십자가 형태의 돌 줄기가 동서남북으로 연결되어 있다. 또한 북쪽 면은 가파른 절벽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그 암벽 면에 마애 삼존 불이 전해 오고 있다. 마애불에 대한 내력은 강경 부근에 설치된 조세를 걷어 드린 후 쌓아두던 창고로 오고 가는 선박들의 안전을 기원하고 또한 강경 포구를 드나들던 선원, 선박, 화물 등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조성된 수호신 불이라 짐작이 된다.
나바위 성지는 한국인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사제 서품을 받고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그리고 신자들과 함께 라파엘 호를 타고 금강으로 들어와 입국한 곳이다. 1845년 10월 12일 밤 김대건 신부 일행은 황산포 나바위 화산 언저리에 도착했다. 올해는 안드레아 신부님이 입국하신지 172년이 되는 해이다. 이곳에 본당이 설립된 것은 1897년이었고, 초대 주임은 베르모렐 신부였다.베르모렐 신부가 성당을 세울 때는 김대건 신부 일행을 기념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으나 나중에 김대건 신부의 착지(着地)로 알려져 이곳에 성당이 세워진 것은 하느님의 섭리라고 할 수 있다.
- 구교구장 드망즈(Demange)주교는 1912년부터 매년 6월에 화산 정상인 이곳에서 금강을 굽어보며 피정을 하였다, 당시 전라도 교회는 대구 교구 소속이였다, 1905년 베르모렐(Vermorel)신부는 주교의 피정을 돕기 위해 정자를 짓고 드망즈 주교가 이 정자를 망금정(望錦亭)이라 하였다, 참고로 망금정(望錦亭)은 금강을 조망하는 정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잿빛이 하늘을 가렸다. 기운은 봄 기운이 감돌았지만 가려진 빛의 영향으로 잔 겨울이 느껴졌다. 오늘 일정은 무척 동선이 복잡하고 바쁜 일정이다. 화산 성당(당시 성당 이름)은 대구 교구 관할권이었다. 교구 장이셨던 드망즈 주교님의 피정을 돕기 위하여 베르몰렐 주임신부가 1905년 건축한 망금정에 올라 서서 강경 포구 방향과 금강을 조망해 보았다. 고장난 난파 직전의 라파엘호, 안드레아 신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가슴을 졸이며 지금은 비닐하우스로 변해 버린 갈대 숲 사이로 접근해 오는 신부님 일행을 오버랩 해보았다. 그리고 용산 신학교 성당 현관 상단에 설치되어 있는 바다의 별을 떠 올렸다. 물이 새어 들고 거친 파도에 휩쓸려 배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 못하는 라파엘호에 승선한 사람들은 얼마나 가슴을 졸였을까? 승선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기도였다. 거센 파도와 모진 폭풍우를 잠재운 것은 성모님께 드렸던 기도 덕분이였을까?. 지속되는 기도끝에 별이 하늘에 떴다. 바다에 별이 하늘에 마침내 떠 폭풍우를 잠재우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아멘~
그런데 하필 금강 하구를 도착지로 삼았을까? 안드레아 신부님 사제 서품식에 참석하고 함께 귀국길에 오른 사람 중 강경 신자가 있었다 한다. 그 양반 덕분에 강경 수로를 잘 알 수 있어 나 바위로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강경 일대는 조선 3대 시장과 3대 어시장의 역할로 많은 사람이 오고 가고 각종 물류가 쌓였던 곳으로 교통 요충지였으며 한편으로는 국가가 관리는 조세 창고와 국가 비상시 군대가 사용할 군량미 비축 창고도 있어 경계가 삼엄한 편이었다.
십자가 형상의 바위 줄기에 세운 김대건 안드레아 순교비,
김대건신부 순교비는 김대건 신부 100주년에 세워졌다. 상해를 떠나 42일간 바닷길로 입국할 때 타고온 라파엘 호의 크기를 본떠 세운 것이다. 목선의 길이 15자가 순교비의 높이가 되고 넓이 6척이 순교비의 둘레가 된다.
망금정에서 금강과 그 아래 포구를 바라 보고 망신창으로 숨어드는 라파엘호를 상상해 보았다. 사실이 있었기에 역사는 존재한다.
선구자가 남긴 기록은 뚜렸한 남다른 면이 많고 극적인 순간도 곳곳에 남아 있다. 그런역사의 현장에 서서 짧지만 수많은 미혹한 일들에 대하여 묻고 답하고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하느님의 역사에 대하여 난처한 질문을 하늘에 던지고 있었다. 하느님의 종으로서 귀한 자산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조선교회의 첫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어떠한 하늘에서의 용처가 있으셨기에 그렇게 빨리 부르셨는지 모를 일이다. 이런 저런 하느님의 역사하심에 대하여 살펴 보기에는 시간도 부족하였지만 날씨도 차고 빛도 회색빛 일색이었다. 평화의 모후가 계신방향으로 하산 길을 잡았다. 내려 가는 길, 사이에 제 2대 주임신부셨던 소세덕 리볼리또 신부님이 묻히신 묘역이 있다.
1877년. 프랑스에서 출생
1907년.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사제서품
1911년. 조선 입국 낙산 본당 주임 신부
1017년
09월. 대구교구 공소 지도신부
1919년
09월. 나바위 본당 주임신부
1921년
10.21. 소천.
2대 주임 소세덕(Saucet) 신부의 무덤에 잠시 들러 기도의 마음으로 약력을 살폈다.소세덕 신부는 부임 한지 2년 만에 무릎 종양이
악화되어 강경 병원에서 수술을 했으나 선종하셨다, 신부님의 주검은 나 바위 성당을 바라보며 묻히기를 원하던 소세덕 신부의
유언 따라 화산 이곳에 안장 되셨다. 파리 외방전교회에서는 박해 시기에 12명의 사제를 조선에 보내, 9명은 순교 하시고
3명은 탈출한 후 한 분은 프랑스로 돌아 가 수도원으로 들어 가셔서 평생 조선을 위하여 기도를 하시며 선종하신다. 또 다른
한 사제는 전교 사업을 계속하기 위하여 인도의 전교의 임지로 떠나시고 다른 한 분은 주교의 신분이 되시어 조선에 다시
입국하시나 조선 조정에 의하여 거부 당하는 일이 생긴다. 성직자 없이 자생적으로 시작한 종교 천주교, 권력의 중심에서 소외된
걸출한 남인 학자들의 학문적 고찰에서 시작된 종교의 태동은 기존 유교 문명과 충돌하며 조선의 천지를 흔들어 놓는다. 국권을
지키려는 무리들은 국법을 앞세워 처단하고 믿음으로서 새로운 복락을 얻으려는 무리는 십자가의 끈을 놓지 않는다. 국법과 믿음
사이에 존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결국 살육이었다. 조선의 첫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도 나 바위에 첫 발을 딛고 서서 감격
어린 기쁨을 누리며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려는 희망에 부풀었지만 다음 뱃길을 열고 다시 고국으로 입국하려다 백령도 부근 순위도
에서 체포되어 해주 감영으로 압송 된다. 이 후 한양 포도청으로 압송 되어 국문 끝에 순교하신다. 참 어렵고 힘든 고난의 역사가
바로 조선 천주교 지닌 뿌리다. 신부님 묘역을 떠나면서 책을 통하여 숙지하게 된 한국 천주교 박해 사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 갔
다.
내려 가는 길 끝,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 앞에 전부 모였다. 그리고 신자로서 참례하는 마음을 모으고 기도를 드렸다. 평화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환란을 치유하고 미리 예방할 수 있는 길이다. 평화는 인류가 가장 먼저 찾고 실천해야 할 덕목이다.
다음은 안드레아 신부님의 연보다.
1821.8.21 충청도 솔뫼(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김제준(이냐시오)과 고우르술라의 장남으로출생.
1836.4 경기도 용인의 ‘은이 공소’에서 모방 신부에게 세례를받은 뒤 신학생 후보로
선발.
1836. 12.3 앞서 신학생으로 선발된 최양업(토마),
최방제(프란치스코)와 함께 정하상(바오로), 조신철(가를로) 등의인도를 받아 변문으로 출발. 12.28 조선입국을 위해 요동에
머루르고 있던 샤스탕(Chastant,鄭)신부 댁에 도착.
1837.6.7 중국 대륙을 남하하여 마카오에 도착. 이후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대표;Libois신부)에서 칼레리(M.Callery)신부 등에게서 수학.
1837.8. 마카오 민란으로 인해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신(1838년겨울 귀환)
1841.11. 마카오 민란으로 인해 다시 마닐라로 피신(11월에 귀환)
1841.11. 최양업과 함께 철학 과정 이수, 신학 과정 입문.
1842.2.15 메스트를 신부와 함께 프랑스 함대 세실 함장의 에리곤호에 탑승하여 마카오를
출발
1842.10.26 요동의 백가점(白家店)도착. 최양업,메스트로 신부와함께 소팔가자(小八家子)로 감.
1842.12.27 조선교회의 밀사 김 프란치스코 상봉.
1842.12.29 변문 출발. 의주를 통해 조선에 귀국(1차
귀국)
1842.12,31 압록강을 다시 건너 중국측 변문으로 감.
1843.3. 변문으로 나가 조선교우와 접촉한 뒤 백가점으로 귀환 2차 탐색)
1843.4. 소팔가자로 거처를 옮겨 최양업과 같이 신학 공부.
1844.2.4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북방 입국로 탐색을 우해 훈춘으로 출발(4차 탐색)
1844.3.8 훈춘을 거쳐 조선에 귀국(2차 입국), 경원에서
조선교우 상봉.
1845.1.1 조선교우와 상봉하여 조선에 귀국(3차
입국)
1845.1.15 서울 도착. 돌우물골(석정동)에 유숙.
1845.4.30 선교사 영입을 위해 현석문(가를로)등 11명의 조선인교우들과 함께 제물포 출발(6,4 상해 도착)
1845.8.17 상해 금가항 성당에서 사제 서품.
1845.8.24 상해에서 약 30리 되는 만당 성당에서 첫 미사.
1845.8.31 페레올 주교,다블뤼 신부와 함께 라파엘(Raphael)호를타고
상해 출발.
1845.9.28 제주도 용수리 해안가에 표류끝에 도착, 감사미사 후 배를 수선하여 다시항해
1845.10.12 충남 강경 부근의 황산포 나바위에 도착.
1846.5.14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자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해 주교의 지시를 받고 교우들과 함께 마포를 출발.
1846.6.5 체포됨.
1846.6.9 해주 감영으로 압송.
1846.6,21 서울 포도청으로 이송.
1846.8,29 조선 교우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회유문 작성.
1846.9.15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음.
1846.9,16 새남터에서 군문효수 형으로 순교.
1846.10.26 이민식(빈첸시오)에 의해
미리내에 안장됨.
1857.9.23 가경자로 선포됨.
1901.5.18 유해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성당으로 이장.
1925.7.5 시복됨.
1949.11.15 한국
성직자들의 대주보로 결정. 로마 교황청에서 7월 5일을 김대건 신부 축일로 정함.
1960. 7. 5 시복됨.
1984. 5. 6 시성됨.
이른 아침에 도착한 덕분에 성지 곳곳은 침묵이 흘렀다. 잿빛은 무겁고 쓸쓸하고 암울한 기분을 들게 한다. 빛이 사라진 모습이다. 새벽 시간이 풀리면 조금 좋아 지려나 하였으나 잿빛은 쉽게 물러가지 않았다. 화산에서 내려 온 순례자들은 안드레아 신부님 동상 앞에 서서 참례를 가졌다.
송림으로 보기 좋게 감싸진 화산 정상 부근, 꼭 밥 사발을 엎어 놓은 형상이다. 육신을 지탱하려면 먹을 것을 먹어야 한다. 영혼을 맑게 하려면 하느님의 말씀을 영의 그릇에 항상 담아 놓아야 한다. 조선 교회의 첫 사제를 사발처럼 생긴 아름답고 화려한 화산에 담아 주신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반석이 아니면 쉽게 무너지고 쓸어내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세월의 힘이다. 영구함을 깃들게 하시려는 목적에서 반석에 조선의 첫 사제 영을 담아 주신 것이다. 화산에 올라 혈 자리에 세워진 100주년 안드레아 신부 기념탑과 금강을 바라보며 피정을 하였다는 망금정에 서서 당시 모습을 그려보니 감회가 깊어 졌다. 하나 아쉬운 점은 변해 버린 금강 물줄기다.망금정 절벽 밑으로 흐르던 금강 물줄기는 1925년 경 식민지 때 일본 사람들의 의하여 강뚝을 내어 쌓고 간척 사업을 하여 지금의 지형으로 바뀐 것이다.
이른 새벽을 집을 나선 후 먼 길을 달려와 피곤할 법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순례참여 자매님들이시다. 잠시 밴치에 앉아 계신 모습이 앵글에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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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래 종교가 들어오게 되면 어느 국가든 토착 종교와 마찰을 불러 일으키기 마련이다. 고구려 때 들어 온 불교도 정착할 때 까지 수많은 마찰이 있었다. 그 마찰을 슬기롭게 해결하기 위하여 일정 부분을 타협하게 된다. 그런 부분이 잘 나타나는 곳은 건축 분야에서 많이 찾을 수 있다. 불가(佛家)에서 가장 존귀한 전각은 大雄殿이다. 큰 영웅을 모시곳 이기에 대웅전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대웅전에 비해 보 잘 것 없는 각(閣) 즉 누각에 불과하지만 표면 상으로는 보존자리 위에 세워져 있는 각이 있다. 그 각은 산신각과 칠성각으로 대부분 대웅전 뒤편에 자리를 잡고 있다. 민족 신앙인 두 개의 누각을 대웅전 뒤에 세워 타협을 본 것이다. 이 처럼 지독한 박해의 시기를 보낸 후 천주교는 한불통상 조약과 함께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된다. 그리고 속속 조선 교회 전교를 위하여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입국을 하게 된다. 온갖 박해를 이겨내고 드디어 그리스도가 승리 한 것이다. 강경 건너 나 바위를 전라도 선교 교두보로 삼고 성당 건립을 착수하기 시작한다. 험난했던 박해시기 순교한 선배 사제들의 삶을 기억하고 새로운 종교의 자유 앞에 펼쳐나갈 전교 사업을 염두에 두었을 때 집회소를 토착 건물 형태로 짓고 그 안에서 성무와 함께 미사를 집전한다는 것은 일종의 미신자들과의 타협이였던 것이다.
한불 통상 조약 체결 후 뮈텔주교에 의하여 화산 본당으로 세워 진다. 전북에서 전동, 수류, 고산 성당에 이어 4번째 봉헌 된 성당이다.초대 주임 신부로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베르모렐 신부가 부임하였다. 당시 화폐로 4000원을 지불하고 화산과 농경지를 매입 후
성당을 세웠다. 설계는 약현 성당을 설계한 프와낼 신부가 하였고 벽돌공과 목공은 전부 중국인이었지만 자재 운반과 터 고루기는 전부 내국인 신자들 몫이었다. 목재는 화산에서 30리 떨어진 임천군 지저동 뒷산에서 소나무를 벌채하여 운반 사용했다.
처음 건축 시 성당벽은 흙 벽으로 세웠고 기와 지붕으로 바닥은 전부 마루를 깔았다. 처음에는 프랑스에서 제작해 온 종을 한옥 종탑에 설치하였으나 종소리 진동 여파로 건물이 뒤틀리고 종 탑에 벼락을 맞아 성당 입구를 고딕식 건축 종 탑으로 바꿔 증축하였다.
나바위 성당 건축력은 다음과 같다.
1897년 뮈텔 주교에 의하여 전라도 지방 전교 전진 성당으로 화산 성당 설립
1906년 순수 한옥으로 성당 건립
1916년 수차례 증축을 통하여 현재 절충식 성당으로 변모 됨
(1916년 일본에서 귀국한 페랑 신부의 도움으로 외벽을 벽돌로 교체하고 바깥 툇마루를 회랑으로 만들고
출입구 전면을 벽돌로 종 탑으로 증축하였다)
1922년 회랑을 보수함
1980년 6차례 이상 보수 및 주변 증축 공사
1987년 국가 문화재 사적 318호로 지정됨
1989년 주변 화산 면과 혼동을 막기 위하여 나 바위 성당으로 개명함
나바위 성당은 1916년 대대적인 증축 공사를 시행 한다. 공사 책임자는 페롱 신부였고 재원은 미국 카돌릭 교회에서 도와 준다.
당시 개수 증축 보수 공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한옥 성당 흙벽을 붉은 벽돌 조적으로 바꾼다.
- 툇마루 를 전부 걷어 낸 후 회랑으로 동과 서쪽을 전부 바꿨다.
- 지붕위에 설치된 종루를 걷어낸 후 고딕 양식의 3층 직선 종탑을 세우고 프랑스에서 제작해 온 종을 걸었다.
- 전면부 출입구를 아치형으로 변경하였다.
- 지붕과 측면은 한옥 형태로 남긴 후 지붕 아래 옆면에는 팔쾌를 상징하는 팔각 채광창을 동서남북 돌아 가면서 넣었다.
- 지붕 처마 위마다 십자가를 세웠다.
베르몰렐 (한국명: 장약실) 요셉 신부는 화산 성당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가난에 굶주리는 신자와 백성들의 삶을 경험한다. 당시의 경험을 자신의 사목 비망록에 다음과 기록한다. – 다른 사람의 토지를 빌려 농사를 짓을 수만 있어도 조선 신자들이나 백성들은 행복해 하지만 현실은 그 마저 할 수 있는 기회가 없어 대부분 신자들이나 백성들은 가난에 허덕인다.
돈만 준비된다면 많은 전 답을 사들여 비 신자들 사이에 끼여 외롭고 힘들게 사는 신자들을 이주 시켜 행복한 신자 부락을 만들고 가난한 백성들도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 주고 그들도 신자로 만들고 싶다고 고백한다.-_
신자들은 가난하면서도 성당 건축에 노동을 제공하고 심지어 헌금도 봉헌하면서 성당을 건축 하는데 일조 한다. 드디어 1911년 9월 대구 교구 드망즈 주교님의 주례로 성당 봉헌식을 갖는다. 또한 베르모렐 요셉 신부님의 열성 적 인 전교와 비 신자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깨달은 마을 주민들은 성당 건축이 완성되자 마자 87명의 성인들이 세례를 받는다. 이후 신자 수는 급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한다.
나바위 성지에는 특별한 곳이 있다. 그 한 곳이 치유의 경당이다.
표지 석처럼 접어 세운 철판에서 당신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 그분은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셨다. (마태 8.17)
그리고 신자들의 기도로
구세주 예수님, 당신의 수난의 공로로 이곳을 찾는 이들의 병고를 낫게 하시고 상처 받은 영혼에 치유를 허락하소서
측면에는 - 이 사람을 보라( Eccn Homo, 요한 19.5) - 새겨져 있다.
치유는 새로운 활력이며 새로운 육신의 출발이다. 치유의 경당으로 오르며 이 사람을 보라 라는 복음서를 읽고 나즈막한 비명을 지르게 되었다. 당신을 통해 나의 복락만 빌었지 언제 당신이 묶여 있는 사실을 깨닫고 염려한 적이 있었는가! 우선 치유를 얻으려면 철저하게 자신의 허물부터 벗겨내야 한다. 우선 하느님과 화해를 해야 한다. 마침 사순 시기다. 개인적인 하나의 사순 구도 행위지만 사순~~이란 뜻에서 4개의 새싹을 만드는 시기라고 정하고 그 싹을 키운다.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성목으로 만들어 4그루의 나무를 마음 그루터기에 심고, 일 년을 산다. 그렇게 평생을 산다는 약속은 거짓이다. 아니 그럴만한 자신이 없는 것이다. 일 년씩 잘만 살아도 그것이 쌓이면 부족함이 없다. 마음을 올려 회개하고 빌며 나의 뜻을 전해 올렸다. 부족함이 깃든 기도라면 당연히 응답해 주시지 않을 것이다. 각오한 일이다. 치유할 수 있는 기회로 다가 갈 수 있는 치유의 경당~~ 참 현대인들에게 소중한 공간이며 마음에 진리를 심어주는 회당이다. 당신의 뜻대로 이뤄지시고 언제 어디서나 찬미 할 수 있는 회개의 문을 열어 주옵소서 또한 나를 버리고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도와 주옵소서 아멘~~ 마음의 기도를 드리며 살며 시 덧문을 닫고 물러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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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위 성당의 건축 양식은 처음엔 한옥 형태를 취했다가 1916~1917년에 흙 벽은 서양식 벽돌로 하고, 용마루 부분의 종탑은 헐고 성당 입구에 고딕식 벽돌을 붙여 종탑을 세웠고, 외부 마루는 회랑으로 바꿨다. 이러한 건축 양식의 특이함으로 국가지정 사적 제318호로 지정되어 있다. 성당 제대 주변에는 세례 대와 성상 등 중국 남경 성 라자로 수도 원에서 제작하여 성당 건축 때 들여온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순례자라면 누구나 다가 가 한 줄의 복음을 이어 쓰기에 참여할 수 있는 기도의 공간이 준비되어 있다. 믿음을 갖고 있는 자라면 자신의 복음을 정리하는 한 줄의 복음서를 갖고 있다. 혹시 자기 차례에 당도 하였을 때 적으며 환희심에 빠져 깊은 사색과 묵상을 통해 자신의 신앙적 정체성을 생각해 보는 귀중한 시간을 얻는 기회도 될 것이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자기 차례에서 구하는 하느님의 말씀이 삶의 보석이 될 것이다.
어느 성전이든 성지의 경당이든 성체 조배를 모시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나바위에서 갖는 성체 조배는 특별한 은사가 있는 것 같다.
천신만고 끝에 성모님의 은총에 힘 입어 거친 풍랑 속을 가르며 도착한 안드레아 신부님의 도착지라 그랬을까? 아니면 지상에서 신자들과 더불어 오랜 사목적 친교의 시간을 주지 못하고 하늘의 용처로 불러 올리신 하느님의 미안함의 은덕인지 모르겠지만 은혜가 느껴지는 곳이다.
일부 순례자들께서는 나 바위에서 더 머물기를 원하고 있었지만 그럴 수 는 없었다. 순례자를 위한 미사가 있는 곳은 유일하게 천호성지 뿐이다. 이미 미사 참여에 대하여 알렸고 식사 문제까지 신청해 놓은 상태이기에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시간이 부족하여 바로 천호 성지로 이동해야 한다. 그리고 여산 숲정이 성지는 귀향하면서 잠시 들러 가는 것으로 일정표도 변경해야 한다. 재촉하며 내려서서 천호 성지로 이동하였다.
여러 차례 전화를 담당 수녀 님께서 주셨다. 부활 성당 앞 까지 나와 주셨다. 성지와 관련한, 그리고 미사 참례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어 주시며 환대해 주셨다. 순례자들은 성전 입당 전에 미사 예물과 마음을 가다듬고 준비하며 입당 착석한 후 주님을 맞을 준비를 끝냈다.
긴 침묵이 흐르고 마르티나 자매님께서 성가 반주를 자임하시겠다 하셨다. 수녀님께 말씀드려 승락을 받은 후 자매님은 반주석에 앉으시고...
입당 성가와 함께 제대에 오르신 주례 사제께서 순례자와 덕담을 나눔 해 주시고 미사 집전에 혼신을 다해 나가셨다.
독서가 이어 지고 복음이 전해지면서 마음에는 평화가 정착되고 감사의 마음으로 봉헌 의식을 치렀다.
기쁜 마음으로 성체 성사를 맞이하며 자신에 대한 다하지 못하는 신앙적 도리를 꾸짖고 악습을 철폐하겠다는 약속도 드리며 성체를 모신 후 다시 기도로서 마음을 모았다.
미사 참례 후 환한 미소로 긍정적인 화답으로 형제적 친교 안에서 피해 갈 수 없는 사진으로 증거해 두었다.
그리고 정해 진 점심 시간, 정각 12 시,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점심 나눔의 시간을 함께 공유하였다. 밥에 기름이 흐르고 찬의 모든 곳에는 단백함과 맛갈스런 손맛이 묻어 났다. 수고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은혜로이 내려 주신 음식에 감사하며 든 점심 시간이었다.
하느님을 찾고 부르며 살았던 마을 천호(天呼), 그 마을 뒤에는 또 다른 이름의 천호산(天壺山)이 있다. 호리병 같은 작은 병을 뜻하는 壺자를 사용하여 천호산이라 사람들은 부른다. 산은 높지 않으나 어머니의 치마폭 처럼 아니 하느님과 성모님의 넉넉한 사랑과 자비의 품처럼 아주 넓다. 그리고 피해 살기에 적당한 계곡과 구릉지가 많으며 밖에서 보면 볼 수 없도록 휘어진 계곡 길은 피난처로서 안성맞춤이었다. " 하느님을 연신 부르며 살아 가는 사람들 박해시기 마다 쳐들어 온 포졸들에 의하여 체포되어 참수, 교수, 백지사, 수장, 장살 등의 집행으로 순교의 길을 떠난다. 그리고 순교자들은 천호산 곳곳에 묻히고 산자들은 은신하며 그리스도의 승리를 기다린다. 순교자들의 피를 담은 산, 그래서 천호산(天 壺 山)이라 부르는 것이다. 지척에 순교터인 여산 숲정이가 있고 그 앞에 조선 최초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천신 만고 끝에 귀착한 나바위가 있다. 사제로서 첫 고귀한 믿음과 순교로서 믿음을 완성한 신자들이 함께 모여 있는 거룩하고 성스런 곳이 바로 나바위, 여산 숲정이, 천호성지 인 것이다.
천호성지 묘역에는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6명 성인 중 성 정문호(바르돌로메오), 성 손선지(베드로), 성 이명서(베드로), 성 한체권(요셉0과 충청 공주에서 순교한 김영오 아우쿠스티노)와 여산 숲정이에서 순교한 10명의 이름 모를 무영 순교자가 모셔져 있다.
순례자들은 모두 모여 제물을 진설 한 후 잔을 따라 올리고 절을 한 후, 성가를 부르고 기도를 드렸다. 이런 의식만으로 순교자를 향한 마음을 다 전할 수 없지만 나머지 몫은 하느님께 전하며 긴 시간 동안 묘역에 머물렀다. 음복을 하고 담소하며 시간을 지체하다 묘역을 떠나 순교자들과 그 가족들이 박해를 피해 살던 천호산 기슭을 걸음여행으로 걷기로 하였다.
가상칠언(架上七言) 묵상 길 시작되는 언덕 길에 섰다.
제 1언 : 아버지 저 사람들은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루카23,34)
제 2언 :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루카 23,43)
제 3언 :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 아들입니다. 이 분이 네 어머니이시다.(요한 19.26-27)
제 4언 :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복음 27-46)
제 5언 : 목 마르다(요한 19,28)
제 6언 : 이제 다 이루었다(요한 19.30)
제 7언 :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가상칠언 길이 끝나는 지점이다. 천호성지 - 놋짐재 - 가상칠언길, 끝 지점 이정표 앞에서 촬영을 해 두었다.
그리고 방향을 틀어 여름골 낙수골 가는 길로 접어 들었다.
낙엽이 아직도 수북하다. 가파르고 조심 조심하며 내려 섰다.
그리고 만난 대 숲~~ 신앙 공동체를 꾸리며 깊은 산 중에서 들 풀처럼 들 꽃처럼 살았을 선조들 모습이 떠올랐다. 대처럼 지조를 지켰던 하느님의 백성들...
대 숲을 빠져 나가면 감나무 밭이 나온다 그 앞에서 바로 내려가면 낙수골 위로 붙어서 오르면 여름골이 된다. 낙수골 방향으로 내려와 산으로 오르는 길을 몇 번 꺽어 틀었다. 봄 볕이 참 좋은 오후다. 양지 바른 곳에는 쑥 새순이 자라고 별 꽃도 보이기 시작했다.
쟈겟 소매를 걷어 시계를 보았다. 시간 여유가 없었다. 되재 성당을 탐방하고 여산까지 순례를 하려면 부족한 시간이다. 전화를 걸어 차를 부르고 마을회관 앞으로 전부 모이게 하였다. 약 20분 정도 차량에 탑승하여 되재 성당으로 향하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천호산 줄기가 선명하게 다가 왔다. 첩첩산중 숨고 공동체를 이루며 신앙 생활하기에 적당한 산의 세력이 치마 폭처럼 퍼져 있었다. 그 사이는 차는 되재 성당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조선에서 약현 성당 다음으로 세워진 성당이 바로 되재 성당이다. 약현은 바로 藥草고개에 따온 것처럼 되재는 성당 뒷산 이름에서 따온 명칭이다. 해발 300m의 승치산(升峙山)이 바로 되제 성당 뒷산 이름인데 升 되를 말하는 한자어로서 되박을 엎어 놓은 형상의 산을 뜻하고 그 산에 치(峙) 즉 재를 이야기 함으로 되재가 된 것이다. 한옥 형태의 성전으로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여 성전 중앙에 칸막이를 설치하여 남과 여를 구분하여 앉아 미사를 봉헌하도록 한 것이다. 남녀칠세 부동석의 이치를 따른 것이다. 전란으로 소실되어 성당 터만 남아 있던 것을 관할청에서 비용을 투입 복원 하였다.
약현 성당의 뒤를 이어 1895년 한강 이남에 처음 세워졌으며 한옥으로 최초 성당이 바로 되재 성당이다. 화산 되재 성당은 6.25 동란 당시 화재 전소 되었다. 1954년 공소로 재건하여 맥을 이어 오다 2004년 7월 전북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되재 성당 복원 사업은 2005년 발굴 조사를 시작으로, 성당 복원 종탑 복원, 진입로 및 화장실 신축 공사 등 약 10억 원을 투입하여 복원하였다.
축성식은 2009년 9월 24일 전주 교구 이병호 주교, 고산 성당 권순호 주임 신부와 신자 등 400 여 명의 참석한 가운데 태이프 절단,시작기도, 독서와 복음, 성찬 등 미사 전례와 함께 경과 보고, 축하연 순으로 이어졌다. 성당은 엣 축성한 것처럼 정면 9칸, 측면 5칸 팔작 지붕 형태로 복원되고 실내도 남, 여 구분 좌석과 남,여 각각 다른 출입문과 연장자와 어린아이에 대한 배려를 중심으로 조성되었다.
되재 성당 참례를 마친 후 차량으로 이동하여 여산 성지에 도착하였다.
전북 여산은 작은 고을이었다. 그러나 이 고을 여산 송씨로 태어난 여인이 있었는데 그 여인은 세종대왕의 왕자 영웅대군 의 부인 대방군 부인 송씨는 그녀의 고모이자 시 숙모였다 그런 영향으로 단종과 인연을 맺고 왕비가 되었는데 그이가 바로 정순왕후(定順王后)다. 1440년 출생하여 1521년 7월 7일(음6월 4일) 졸한 조선 단종(端宗) 정비다. 시호는 단량제경정순왕후이며 여랑부원군 송현수의 딸로 본관이 여산이다. 1454년 간택령에 따라 왕비 교서를 받은 후 즉위하였다. 그러나 남편 단종이 강등되면서 군부인으로 격하되었다가 관비가 된다. 미모가 출중했던 정순왕후 송씨를 신숙주가 자신의 종으로 달라 했다가 물의를 빚기도 하였다 한다. 이후 세조는 아무도 범하지 못하게 정업원으로 보냈다. 나중에 자신의 처사가 잘못됨을 알고 어렵게 살고 있는 정순왕후에게 가옥과 재산을 보냈지만 받지 않았다 한다. 중종 때 부터 복위가 거론되었지만 실현되지 못하고 1698년 숙종 때 송시열, 김수항의 건의로 복권 된다.
단종과 함께 복원되었다. 단종 사후 남편 노산군의 명복을 빌며 살다 진접 사릉에 묻혔는데 능의 소나무가 동쪽 방향으로 굽는다는 전설이 이어져 왔다. 왕비의 출신지인 여산이라 동헌이 만들어 지고 형무를 관장하는 업무 부서가 있어 천주교 박해인 병인박해 당시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여산으로 끌려와 교수형, 장살형, 백지사형, 참수형, 수장형 등으로 순교를 당하게 된 것이다.
늦은 시간 여산에 도착하였다. 여산 고을이 다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성당 조촐하면서 순교의 역사를 꿰뚫고 있는 듯한 거룩한 위엄이 순례자를 반겨 주었다. 성전과 순례자의 집 사이에 있는 성모님 동산, 이른 봄 오후 햇살이 찾는 등이들의 마음을 편하게 이끌어 주신다. 등을 돌려 세웠다. 우측으로 여산 숲정이가 보이고 좌측으로 여산 동헌과 백지사 처형장, 그리고 그곳에서 몇 집 건너 교수형 터인 시장 골목이 보였다. 여산 송씨 가문과 깊은 인연이 서린 곳, 가문의 대대 영광으로 이어질 왕비를 배출한 가문이었지만 선왕의 유훈을 거절한 자식은 끝내 조카를 폐위 하고 장자 원칙의 군왕 선발 까지 물거품이 되게 한다. 그리고 여산 송씨 가문도 멸문될 정도의 박해에 시달려야 하였다. 권력의 자리는 늘 위태로운 자리였다. 기울어 가는 봄의 했살 속에서 역사에 대한 관조는 참 쓸쓸하였다. 걸어서 동헌 아래 백지사 형장 터로 자리를 옮겼다 골목으로 이어지는 길이 꼭 역사의 굴곡 진 면을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걷게 되었다.
여산 동헌 앞 백지 사 형장 터다. 백지 사가 처음 보인 것은 남한산성 순교 터에서 부 터였다. 백지 사란 문자 그 대로다. 많은 사람들을 죽이기 위한 손 쉬운 방법으로 채택 된 사형 방법이다. 죄인을 십자틀에 묶어 놓고 화선지나 창호지를 얼굴에 덮고 물을 붓는다. 그리고 겹겹이 붙여 나가며 물을 붓기를 반복하면 결국 호홉이 끊겨 사망에 이르게 하는 방법이다. 다가 가서 보기 조차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귀한 생명을 주신 분을 위하여 들 꽃 지는 것처럼 던져 버린 순교자의 들꽃 같은 마음을 쉽게 다가 가 볼 수 없었다.
우선 지는 해를 등에 업고 응시하였다. 그리고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다가 갔다. 모자란 공기를 더 들여 마시기 위하여 얼굴 전체를 팽창 시키고 열린 구멍마다 벌려 기를 쓰는 모습이 너무 처절하였다. 명치 끝 까지 연결되는 호흡 관이 길지도 않은데 몇 모금만 닫혀도 주어가는 것이 사람의 생이다. 순교자들에게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변절이 문제였고 영혼만 그대로 보존한 채 다가 가면 천국에 들 수 있다는 믿음을 영혼 때문에 죽음과 바꿀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숙연한 마음으로 호홉이 단절되어 가는 과정을 상상하며 서 있었다. 허리를 굽혀 물러 나와 시장 통으로 바뀐 교수현 자리는 생략하고 걸어서 여산 숲정이로 향하였다. 길을 건너 숲정이 초입에 서서 성지를 바라 보았다. 지금은 너무 쓸쓸하였다. 가을에 오면 들녘이 황금 불결을 이루고 그 배경으로 서 있는 성지
또한 거룩함이 ....
참수 형장은 특별한 조건이 따른다. 사대문 안에서는 안된다. 사직단과 종묘 밖에서 이뤄져 하고, 물이 흘러야 한다. 그리고 왕래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 왕가에 누군가 병이 들거나 혼례가 예정되어 있어도 참수는 잠시 멈추거나 지방으로 이전하여 시행하였다. 그 대표적인 곳이 바로 갈매못이다.
모두 모여 기도를 드리며 3월 성지 순례를 마무리 짓는 시간을 갖은 후 서울로 향하였다. 아직 겨울 기운이 남아 있는 산간지방 기호지방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들었던 천호산, 승치산 일대. 그러나 그들도 병인 박해 만큼은 피해갈 수 없었다. 내포지방 명당 자리에 있는 대원군의 부친 남은군의 묘 도굴 사건으로 병인박해는 1866부터 시작하여 1875년 경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씨를 말리겠다는 의지로 진행된 박해는 모든 것이 지독하게 진행되었다. 배교자도 제일 많았고 순교자도 제일 많았던 박해가 바로 병인박해였다.
어린아이는 처형을 삼가했었는데 옥에 가두었다가 15세가 되면 처형했던 박해가 바로 병인박해다. 읽었던 병인박해 순교사를 반추하며 눈을 감았다. 차는 서울로 달리고 있었다.
참수 장소인 여산 숲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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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기다려지는 69차 성지순례와 걸음여행....
새벽부터 분주히 준비하여 장소로~
뻐스도~ 반가운 님들도~
새벽부터 달리는 뻐스안에서 오늘의 성지를 마음에 그려 보았습니다.
하루동안 곳곳의 성지를 안내해 주시고
상세히 설명해주신 리더님께 다시 감사 드립니다..
혹 잊을세라~
카페에다 상세히 올려주신 글~
더욱 감사 드립니다. 꾸벅
함께 하신 형제. 자매님 사랑의 마음 전합니다~^^♡♡♡
동감입니다. 꾸벅^^
봄 빛이 그리워지는 3월...감사합니다
성지걸음에 함께 하시고자 문을 두드리는 분들이 많이 계셨으나...
한정된 차량 문제로 고민 하였으나,,,
기다려준 자매님들 함께 순례를 하게되어서 기쁜 하루였습니다..
오늘 순례여정은 당일로 다녀오기는 쉽지않은 곳인데..
나바위 성지.천호성지, 되재성당, 여산 숲정이,백지순교터..
곳 곳을 여유롭게 순례할수 있었던것은 리더이신 쌤님의 철저한 계획과
늘 차량 수고하시는 이영관님 수고 덕분이라 생각 합니다...
고맙고
엉터리 계획을 그렇게도 칭찬을 해 주시니 참>>>> 더 잘하라 하시는 충고로 귀담아 듣고 심기를 모아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