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다리의 추억
이 원 규/소설가
배다리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60년 봄, 그러니까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였다. 집이 있는 서곶 연희동은 전기도 안 들어오는 인천의 오지였다. 가좌동 해협에 인천교가 개통되기 전이라 시내까지 오려면 버스가 십정동과 주안을 거쳐 종점인 동인천역에 이르기 때문에 한 시간 반 정도 걸렸다. 그리고 하루 4~5회밖에 없었다. 그래서 시내학교 입학은 유학이나 마찬가지였다. 서곶초등학교 동창생 130여 명 중 시내로 유학 온 사람은 10명 안팎이었다. 당시 인천고교가 배다리 인근에 있었는데 그해 캠퍼스 안에 상인천중학교를 병설했고 1회 입학생이 된 것이었다.
나는 송림동 동산고둥학교 뒤쪽 부처산 기슭에 있던 고모님 댁에 기숙하게 되었다. 물론 배다리에 처음 온 것은 아니었다. 아버님(薰 자 益 자)이 인천시 공무원으로 일하셨기 때문에 다른 친구들보다는 시내 나들이가 많았다. 그리고 학교를 대표하여 백일장에 나가기 위해 시내에 여러 번 왔다. 그때마다 대개는 배다리를 바라보며 지나다녔다.
그해 중학교에 입학하고 송림동에서 30분을 걸어 학교에 갔다. 뒷날 동구청이 앉은 도축장 앞 언덕을 걸어올라 동인천경찰서 정문을 지나(당시는 그쪽에 정문이 있었다) 지성소아과 앞을 거쳐 학교로 갔다. 송림동엔 양은공장이 많았다. 쌔애앵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가 큰길까지 울려 나왔다. 노란 양은 판을 모터 머리에 붙이고 돌리다가 목형 틀을 들이대면 순식간에 양은그릇이 만들어져 나왔다. 도살장 언덕에서는 누런 소들이 움메 하고 울면서 끌려 들어갔고 비오는 날이면 비린내가 풍겨 나왔다. 문화극장 앞을 지나 금곡동에 들어서면 꿀꿀이죽 냄새가 났고 배다리에 도착할 즈음에는 납작한 쇠막대기로 양철판을 두드려 버킷이나 연탄 화덕을 만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인천고, 상인천중 정문 앞에는 대나무 장대들이 높이 선, 그리고 양철을 두드리는 공작소들이 즐비했다. 탕탕 탕탕 박자를 맞춰 두드리는 소리는 교실까지 들려왔다. 입학하던 해 4월 어느 날, 동인천경찰서 정문 앞에 기관총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다음날 교문을 밀어제치고 뛰쳐나간 고등학교 형들을 따라 배다리로 달려갔고 형들이 자유당 당사(아마 지구당 사무실이었던 것 같다)에 돌을 던지는 것을 구경했다.
때로는 경찰서 앞길을 버리고 쇠뿔고개로 걷기도 했다. 줄줄이 늘어선 헌책방들, 그리고 술찌꺼기 냄새 풀풀 나는 양조장 앞을 지나서 걸었다. 헌책방에서는 아마 달이 지난『학원』을 샀던 것 같다.
1962년엔가 인천교가 개통되어 서곶까지 통학시간이 단축되고 송림동 고모 댁을 나왔지만 인천고로 진학했으니 배다리 인연은 5년으로 이어졌다. 버스에서 내려 먼지가 뽀얗게 나고 비오는 날 이면 질척질척한 참외전거리를 지나 학교로 갔다. 서해의 밀물과 집중호우가 겹칠 때는 배다리가 침수되어 연못처럼 물이 고이기도 했다. 그리고 가끔은 헌 참고서를 사러 헌책방 거리에 가곤 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중학교 시절부터 열심히 고전음악을 들었던 탓으로 ‘라디오 게임’이라는 KBS 라디오의 학교 대항 실력대결 퀴즈 프로그램에 음악문제 선수로 뽑혀 나갔다. 자랑 같아 쑥스럽지만 20여명의 선수 중 1학년은, 문학의 천재라고 불렸던 이운원 군과 나 둘뿐이었다. 그때 붉은 벽돌로 지은 인천고 강당에서 방송대결을 했고 나는 시벨리우스의 교향시「슬픈 왈츠」를 맞춰, 인천여상 대표로 나온 누나의 친구와 싸워 이겼다. 그리고 그해 배다리의 기독교사회관에서 열린 고교생 음악 감상회에서 해설자로 데뷔했다. 마룻바닥이 깔린 교실 두 개쯤 되는 공간이었고 여학생들이 많아서 쩔쩔 매며 모차르트의「피가로의 결혼」아리아들을 설명했다. 배다리에서 가진 가장 행복한 추억이다.
대학생이 된 뒤에는 송림초등학고 뒤편에 사시던 누님 댁에 기숙했다. 헌책방 거리 출입이 저절로 빈번해졌다. 100권이 넘는 정음사, 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이나 한국문학전집, 개인 창작집, 월간『현대문학』을 대부분 거기서 사서 읽으면서 모았다.『현대문학』은 10여 년에 걸쳐서 차근차근 모두 사 모았는데 지금 나처럼 전권을 소장한 사람은 다섯 명 정도라고 한다.
대건고교 교사가 된 뒤에도 송림초등학교 뒤편 누님 댁에 얹혀 있었으니 20년쯤 배다리 인근에서 살았던 셈이다. 결혼하고 그곳을 떠났지만 기다란 실이 허리를 묶은 듯 계속 이어졌다.
정년퇴임을 하신 아버님이 어느 날 여생을 인천향토사 연구에 열중하겠다고 선언하셨다. 찬성의 말씀을 드리고 그 후 여러 가지 참견을 하곤 했다. 아버님이 남기신향토사 저술은 8권, 당신은 많은 자료들을 창영동 헌책방거리에서 구하셨다. 그리고 나도 집필방향을 인천 근대사와 분단 극복 쪽으로 돌리고 장편「황해」등 인천 배경 소설들을 썼다. 역시 많은 자료를 창영동에서 구했다. 어느 날은 아벨서점에 들렀다가 우연히 아버님과 마주치기도 했다. 아버님은 그냥 “소설쟁이 왔냐?”하고 무뚝뚝하게 한 마디 던지셨다. 나는 “네”하고 대답했고 아버님이 좋아하시는 게장백반집으로 모시고 갔다.
뒷날 건축학 전공을 시작한 아들이 구할 책이 있다며 아벨서점에 가자고 했다. 고건축 관련서적이 있음을 확인한 것 같았다. 그래서 3대가 아벨서점 단골이 됐는데 아들이, 내가 아버님처럼 세상을 떠난 뒤에도 인천 자료를 찾기 위해 창영동에 갈지도 모르겠다.
지난해 겨울에는 배다리 시(詩)다락방에서 인천작가회의 주최로 작가와의 대화에 초청되어 강연을 했다. 1963년에 기독교사회관에서 음악해설을 하고 45년 만에 배다리 강연을 한 셈이었다. 청중들은 몰랐겠지만 나는 거기가 배다리라서 떠오르는 추억들에 잠긴 채, 그리고 돌아가신 아버님을 그리워하며 행복한 강연을 했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인간에게 추억을 연결해주는 것은 공간이다’라고 했다. 배다리는 소중한 추억의 일부이다. 내게만 그런 게 아니라 인천인들의 가슴에 향수를 불러오는 소중한 장소이다. 고맙게도 다른 곳과 달리 발전의 바람을 피해 그 옛날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 그래서 거기 갈 때마다 마음이 푸근해진다. 그 푸근함을 오랫동안 더 안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