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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6년 10월17일, 35세의 안정복은 경기도 광주 덕곡에서 200리 길을 걸어 안산 첨성촌에 살고 있는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을
찾아가 인사를 올리고 제자가 되었다. 당시 성호는 66세의 노인이었다. 성호가 별세한 후 안정복은 스승과의 만남과 대화를
기록한 ‘함장록(函丈錄)’의 말미에 이렇게 썼다.
“성호가 세상을 떠나심에 평소 선생님에게서 받은 깊은 사랑을 생각해보면 은덕과 의리가
함께 무거운데다 대들보가 무너져
내린 듯한 심경이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이에 옛 문서 상자를 들추어 스승과의 4일간 일록(日錄)을
찾아내어 이제 따로
정리하여 조그만 정성을 붙인다.”
순암 안정복은 유형원의 <반계수록>을 읽으며 학문의 방향을 국가와 사회의 현실을 개선하는 데로 돌렸다.
2년 뒤에는 성호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고 성호와 성호의 문하에 모여든 젊은 학자들과 교류하며 안목을 넓혔다.
그는 유교의 경학을 연구하되 경세치용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으로
경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말년에 지은 <잡동산이>를 통해 안정복의 학문적 관심의 폭과 대상이 얼마나 넓고 자유로웠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유학의 틀 속에서 현실개혁의 길을 찾고자 했던 안정복에게 조선 사회에 빠르게 확산되고 있던 천주교는 매우 위험한
사상이었다.
정부의 박해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권철신 권일신 형제를 비롯해 아끼는 후배들이 천주교 수용에 앞장서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는다.
권철신은 안정복이 지병으로 <동사강목>의 편찬이 중단될 위기에 처했을 때 나머지 편찬을 맡기려했던 후배이며,
권일신은 자신의
사위였다. 성호학파를 이끄는 위치에 있던 안정복이 동료와 후배들을 보호하기 위해 천주교를 반대하는 논
리를 담은 <천학고>와
<천학문답>을 펴낸 것도 이러한 위기의식의 표현이다. 이처럼 안정복은 서학에는 분명히 반대했으나
경세치용을 추구하는 성호의 학문을
온전히 이어받았다. 특히 안정복의 사관과 사론은 성호의 것을 전적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동사강목>에 오롯이 담겨있다.
순암 안정복은 새로운 역사 인식으로 우리의 역사를 정립하였고, 민족사관과 정통 체계를 세우며 수많은 저술을 하였다.
이렇게 20년이 걸려 집필한 책이 바로 동서강목이다. 동사강목은 관찬 사서가 아니라 야사로 분류되었지만, 내용의 정밀도가
높았기 때문에 당대에도 지금도 정사의 위치로 본다. 돈도 없고 1급 사료를 구할 수 없어서 일반 자료를 뒤지고 사실 모순의
변증을 통하여 오류를 수정하는 노력으로 지금과 같은 정밀한 역사서가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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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은 단군조선에서 고려 공민왕까지의 역사를 다룬 편년체의 통사이다.
<주자강목>처럼 강(綱)과 목(目)으로 나누어 강에는 기본이 되는 역사 사실을, 목에는 그 기본 사실의 내용을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비롯한 여러 책에서 찾아내어 밝혀 놓았다. <동사강목>의 줄기는 ‘삼한정통론’이다.
성호의 삼한정통론은 안정복의 역사인식에 큰 영향을 주었다. 중국의 역사가들은 중국 황제를 세계의 통치자로 생각하고
역대 교체하는 왕조를 상속 계보로 줄을 대어 정통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중국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 정통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안정복은 <동사강목>의 범례에 우리나라 역사의 정통을 설정하고 단군, 기자, 마한, 신라, 고려를 정통으로 규정했던 것이다. 중국 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 우리나라 역사의 독자성을 살려낸 것이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왕명을 받아 서거정이
편찬한 <동국통감>의 문제점을 차례로 짚었다. 첫째, <동국통감>에 단군조선, 기자조선 뒤에 위만조선을 붙여 삼조선으로
삼은 것은 부당하다며 비판했다.
왕권을 찬탈한 위만 대신에 마한을 정통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동국통감>에 단군과 기자를 외기(外紀)에 넣은 것은
잘못이라고 꼬집었다. 단군이 처음 나라를 열었고 기자가 문물을 흥기시켰는데 비록 사실이 사라지고 없다고 해도 어찌 전기 잡서를 수록한 중국의 외기와 동일하게 취급할 것인가라는 비판이다. 이처럼 <동사강목>은 단군과 기자의 사실성을 강조해 우리나라
역사 연대의 상한을 크게 높였다.
<동사강목>에 흐르는 사상은 애국과 애민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안정복은 외래 침략자들을 물리친 충신과 명장들을 높이 평가했다. 고구려의 대 수당전쟁, 고려의 대 거란과
몽고전쟁에서 조국을 수호한 민중들의 분투와 을지문덕, 강감찬, 서희같은 영웅들의 빛나는 활동을 상세하게 드러냈다.
우리 겨레의 용감성을 높이 찬양하는 한편 통일신라 이후 문치(文治)를 숭상해 국방에 관심을 두지 않아 나라가 약하게 되었던
사실을 지적하며 통탄했다. 고려 성종이 고을의 병기를 거두어 농구로 개조한 사실을 들어, 외적의 침입에 무엇으로
방어할 것이냐고 비판했다. 또한 국가의 대민 정책에서 백성들을 돌보지 않은 사실을 비판했다. 고구려 고국원왕의 진대법 시행에
관해 베푸는 진(賑)은 좋지만 대(貸)는 백성들에 대한 국가의 착취를 의미하는 것이라며 비판했다.
고려 광조의 노비안검법에 관한 안설에서 그 제도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문종 때 억울하게 죽은 노비의 옥사에 분노하며 옥사를
신중하게 다룰 것과 그 개혁을 주장했다. 이러한 비판은 안민을 정치의 핵심으로 여기는 경세치용의 관점에서 나온 것이다.
<동사강목>의 가치를 한결 높여 준 것은 마지막 부권이다. 고이, 괴변설, 지리고 같은 편목이 들어 있는 부권은 단군설화와
진흥왕 정계비를 비롯하여 역대강역고, 분야고에 이르기까지 성실하게 고증한 역사 연구의 역작들이다.
왕산(旺山) 허위(許蔿 18
54~1908)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며 구한말의 의병장이다.
허위는 1855년 4월 2일 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의 선비가문에서 태어났다. 자라면서 학문을
익혀 성호 이익의 학문을 이은 학자가 된다.유문(儒門)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작은아버지
해초공(海樵公)과 맏형 방산공(舫山公) 허훈의 가르침을 받았다.허훈은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학문을 이은 학자였다. 그러던 중 1895년 명성황후의 시해와 단발령 소식을 듣게 된다.
이에 상주와 김천 등지에서 유생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다.
"나라에 환란이 발생하였으니 모든 사람들이 몽둥이와 호미를 들고일어나면
적들도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다."
김천에서는 장날에 읍으로 들어가서 의병을 모아 무기고를 습격한다.
성주에서 진을 치고 대구를 공격하려 하였으나 관군의 공격으로 패퇴하고 만다.
그는 1899년 45세가 되던 해에 관직에 나아가 원구단참봉을 시작으로 중추원관리,
평리원재판장, 의정부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후 일제가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자 다시 의병을 조직하고 거사에 나선다.
1907년에는 경기도 연천과 적성 등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강원도의 이인영 부대와 협력하여 13도창의군을 결성하게 된다.
이후에도 임진강 유역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지만 1908년 6월 11일 양평 유동 골짜기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다. 4개월후인 1908년 10월 21일 서울 서대문감옥에서 51세의 나이로 순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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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동안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가두고 사형시킨 서대문형무소(당시 경성감옥)의 제1호 사형수로 교수형이 집행된다.
서울 동대문에서 청량리까지의 도로이름은 왕산로(旺山路)다. 왕산로는 바로 왕산 허위의 호 왕산(旺山)에서 비롯되었다.
1907년 해산된 군인들과 의병이 힘을 모아 13도창의군을 창설한다. 허위가 이끄는 선봉대가 서울탈환에 나서게 된다.
허위의 부대는 동대문밖 30리 지점까지 진격을 하였다.후원부대의 지원이 단절되고 탄환마저 부족해지면서 일본군에 밀리고 만다.
서울탈환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그의 용맹은 도로의 이름 왕산로(旺山路)로 남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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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은 그의 책 <단재 신채호 평전>에서 단재 신채호가 조국을 떠나
만주로 가는 대목을 이렇게 기술한다. 그 부문을 옮겨 싣는다.
조선후기 탐관오리를 피해서,또는 흉작으로 먹기 살기위해 많은 우리 백성들이
압록강을 건넜다. 나라가 망한 후에는 일제의 폭압을 피해서 역시 이 강을 건너
조국을 등지는 유랑민이 많았다.
그래서 한때는 유랑민들의 <압록강 민요>가 유행하였다.
이 서방 떠나던 날
흐르는 눈물이
마르기도 전
김서방 또 짐 꾸리네
삼천리 강토가
넓다르다만
오척의 신구도
둘 곳 없다네
넘기는 백두산
원한에 닿고
건너는 압록강
눈물에 부니
닥치는 요동벌
한숨에 차네.
괴나리 봇짐을 달랑 맨 청년은 기차가 중국의 안동현(지금의 단둥)에 도착할 때까지
고국 땅을 바라보면서 차마 떨어지기 어려운 발길로 만주대륙을 밟았다.
괴나리 봇짐 속에는 <동사강목(東史綱目)> 한질이 들어있었다.
몇 해 전 순암 안정복의 후손으로부터 빌린 원본이 있었다.
몇 번이나 읽고 애지중지하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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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은 본래 천성이 청절하고 거래가 분명한 성격이었으나 이 책만은 자기 손에서
떼놓을 수 없었던지 망명길마저 싸가지고 떠난 것이다.
청년이 고국을 떠나면서,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정처없는 망명길에 메고간
<동사강목>은 안정복이 20여 년에 걸쳐 쓴 단군조선으로부터 고려말까지 다룬 20권 20책의 통사(通史)다.
청년지사가 글을 쓰고 역사를 연구하고 독립운동을 하는 데 이 책에서 영향을 받은 바 적지 않았다.
20세기 초 만주벌판에 흩어져 있는 고구려 유적을 답사하며 비어 있던 고대사를 복원했던 단재 신채호를 비롯하여
박은식, 정인보 같은 민족사학자들에게 <동사강목>은 역사연구의 나침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