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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 (3)] - 5,6,7,8장
1996,1 강의(이근호) 정리(구득영)
* 이제 로마서 5장을 보자.
(롬 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 여기에서 '우리' 대신에 아브라함을 집어넣자는 것이다. 아브라함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그래야 말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경건치 않은 자와 그리스도를 대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 이렇게 계속해서 우리를 죄인으로, 하나님과 원수 된 자로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라는 것이다. 이미 원수 된 우리들을 말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은 더욱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구원해 달라고 부르짖는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하나님을 저주하고 미워하는 원수 된 자들을 구원하셨다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구원이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라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의 편에서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에스겔 36장에서는 '마른 뼈' 라고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아무런 살아날 근거도 전혀 없는 마른 뼈를 말이다. 촉촉한 뼈(?)라면 몰라도 말이다. 헬리콥터가 붕 뜨는데 살려달라고 한다면 그것은 완전히 죽은 마른 뼈가 아니라는 것이다.
* 이런 이야기를 하면, 성경에도 없는 이야기를 지껄인다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과연 그런지 로마서 9장 16절을 한번 보자는 것이다.
(롬 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 성경에서 왜 이렇게 '~가 아니요' 라는 것을 집어넣는가? 그것은 기존의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공박하기 위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뭔가 자기가 하나 해놓으면 그것을 가지고서 폼을 잡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 사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강팍하도록 만들어놓으셨는데, 그 이유는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데 보탬이 되었다는, 즉, 조력자가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것이 가능하다면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이 다 깨어진다는 것이다.
(롬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 이것은 애굽의 바로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씀인데, '이스라엘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이 아닌가?'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높일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이다.
* 로마서 5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죄인들과 비교하시면서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원수 된 자, 경건치 않은 자, 죄인 된 자를 왜 이야기하는가? 그들은 전혀 구원에 도움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어떻게 마음을 좀 착하게 먹고 잘 하면 하나님의 구원에 좀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가장 십자가의 원수 된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 어떻게 저런 인간이 구원을 받겠느냐고 생각하는 그런 인간이, 십자가의 강도나 거지 나사로 같은 말이다. 그런 인간에게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게 임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많이 드러내니까 말이다.
* 그래서 마태복음 18장에 다음과 같은 비유가 있는 것이다.
(마 18:23)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마 18:24)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마 18: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마 18:26)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마 18: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마 18:28)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마 18:29)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마 18: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마 18:31)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마 18:32)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마 18: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마 18: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마 18: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 이렇게 성경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과 죄인 된 우리들을 비교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비록 원수 된 자, 경건치 않은 자, 죄인 된 자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인 공짜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렇게 하지 않고, 자기가 기도원에 가서 40일 금식기도해서 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이 무슨 기독교인가? 갓바위이지 말이다.
* 이렇게 말하면 너무나 수동적이 아니냐고 말할지 몰라도, 그러나 은혜를 받은 사람은 활동적이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인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면, 은혜를 받은 대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교회의 주인이 예수님이지 결코 목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닌가? - 하라고 시켜도 안 한다고?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이 본문을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자기 신학의 중심으로 삼았는데, 물론 동의한다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확증' 이라는 말에 자기의 모든 것을 다 걸었다는 것이다. 더 이상은 없다는 것이다. 자기의 몸을 내어놓았는데, 더 이상 뭐가 있겠는가? 모든 것을 다 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다음에 주님께서는 '네 몸을 나에게 다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는 어떠한가? 이러한 예수님의 몸을 군화발로 짓밟고서 '돈을 달라', '건강을 달라', '교회를 성장시켜달라' 라고 하는 것이다. 몸을 주었으면 모든 것을 다 주었다는 것인데 말이다. 이것이 과연 교회라고 할 수 있는가?
* 여기서 고린도후서 5장을 한번 보자.
(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후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인가? 돈이나 건강이나 교회성장이 아니고, 한 사람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심으로 사랑을 확증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도록 한다는 것이다.
* 그런데 이것을 믿는 자들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도 좋기는 하지만, 그러나 자기 자신이 더 좋다는 것이다. 이런 교인이나 목사들이 많이는 아니더라도, 약 99%(?)정도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는 결코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사도바울의 소원이 한 가지였는데, 무엇인가? 죽는 것, 바로 그것이 소원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은 하늘나라의 그 영광을 올라가서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미쳤다고 군대생활을 계속하겠는가? 하루라도 빨리 제대를 해야지 말이다. 죽기는 죽는데, 자살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고, 복음을 '전하다가 죽자' 라는 것이다.
* 그러니 '나, 오늘 무엇을 하다가 살지' 라는 것이 아니라, '나, 오늘 무엇을 하다가 죽지' 라는 것이 사도바울의 인생관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생을 살아가니까, 차에 부딪혀서 무릎이 왕창 부셔져도 괜찮고, 바둑을 두다가 대마가 죽어도 괜찮다는 것이다.
*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서 믿음이 좋다고 말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자비하고 온유한 성령의 열매들이 있느냐고 하지만, 성령을 받으면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으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할렐루야, 부족합니다' 라고 음성을 깔고 말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무슨 겸손인가, 교만의 극치이지 말이다. 자기를 위장하는 전술이라는 것이다.
* 그리고 장로가 보니까 분명히 엉망인데, 그래도 매일 부족하다고 하니 그냥 넘어가 준다는 것이다. 장로에게는 부족하다고 하면서 부교역자는 반대급부로 박살낸다는 것이다. 신학교 때부터 그런 것이 아니고, 목회를 하면서 먹고살려고 하니까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 그러니 살려고 사는 것이 아니고 죽으려고 살면 된다는 것이다. 선교사로 가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알래스카에 가서 복음이나 전하다가 죽자' 라는 마음으로 가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슨 선교하러 가서 살려고 '돈 보내라, 쌀 보내라' 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런데 요즘 신학생들이 3D 현상을 피해서 신학교에 왔는데, 그런 죽을 고생을 하겠는가?
* 다시 로마서 5장으로 돌아와서 보자.
(롬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 죄라고 하는 것은 권세로서, 인간이 도저히 들 수 없는 맨홀 뚜껑에 갇혀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반대로 은혜의 뚜껑 아래에 있는 사람은 그 뚜껑 아래에 갇혀서 못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가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은혜아래에 있는 사람은 어떤 나쁜 짓을 해도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짓을 하면 얻어터지지만 말이다. 그러니 성도는 제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천당에 갈 수밖에 없는 비참한(?) 운명이라는 것이다.
◈ 성도는 제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천당에 갈 수밖에 없는 비참한(?) 운명이다 !!
* 그러니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없었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죄의 권세아래에 갇혀 있다가, 이제는 예수님의 은혜아래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은혜가 왕 노릇 한다' 라고 하는 것이다.
* 이런 은혜아래 있는 자들은, 첫째로, 자기가 얼마나 못났는가를 깨닫고서 자기의 행위를 부정하는 자들고, 둘째로, 이런 못난 인간도 구원받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은혜임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런 자들을 '의의 종' 이라고 하고,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수의 증인' 이라고 하는 것이다. - 10분 휴식!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 여기서 로마서 5장 19절을 한번 보자.
(롬 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 여기서 한 사람이 순종했다는 것은 예수님을 말하는 것이기에 아브라함은 잘렸다는 것이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의롭다는 것이다. 분명히 순종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의는 어디에서 나왔는가? 한 사람의 순종, 즉, 예수님의 순종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 지금 로마서 4장부터 5장까지 계속해서 예수님과 아브라함을 서로 비교하고 있는데,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처럼 되려고 하지 말고, 먼저 아브라함처럼 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아브라함은 행함으로서 의롭다함을 받지 못하고 다만 누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분이 일방적으로 베풀어주는 은혜로서 말이다.
* 그렇다면, 도대체 아브라함에게 그러한 은혜를 베푼 분이 누구냐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한 사람의 순종이고, 이러한 한 사람 속에는 아브라함도 우리도 전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직 예수님뿐이라는 것이다.
(롬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 여기 한 범죄는 아담을 두고 말하는 것인데, 바로 여기에 아브라함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이 아담의 죄가 아브라함에게로 쏟아 졌고, 그 죄가 온통 이 세상을 시커멓게 먹칠을 해놓았다는 것이다. 캄캄한 죄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죄를 짓지 않을 사람이 도대체 누구냐는 것이다. 숨쉬면 다 죄이고, 만지면 다 죄이고, 넘어지면 다 죄인데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죄 중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이런 죄 가운데 있으면서 순종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순종은 외부에서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제 첫 번째 아담을 완전히 포기하고 새로운 아담, 두 번째 아담을 통해서 죄가 없는 상태로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에는 죄 가운데 있었던 것처럼 이제는 은혜 가운데 거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즉, 과거에 죄가 왕 노릇하다가, 이제는 은혜가 왕 노릇을 한다는 것이다.
* 영생이라는 것은 이렇게 은혜로 주어지는 것인데, 그런데 자기 행함으로 취하려고 한다면 정말로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의 순종으로만 주어지는 것인데, 자기가 순종해서 받으려고 하니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선물인데 말이다.
* 징크스라는 것이 있는데, 인간들은 스스로 법칙을 만든다는 것이다. 예배시간 10분전에 나간다든지 말이다. 만약에 5분전에 나갔다고 하면, 설교시간에 은혜고 뭐고 없다는 것이다. 5분을 늦게 나온 것 때문에 예배시간 내내 시달린다는 것이다. 예배시간 10분전에 나간다는 법칙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 올무에 묶인다는 것이다.
* 그런 것은 그래도 애교로 보아준다고 해도, 만약에 자기가 예배시간 15분전에 나왔다고 하면 그야말로 '뽕!' 간다는 것이다. '내가 믿음이 이렇게 좋다니' 라고 마구 착각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인간은 법칙을 자기가 스스로 만들어놓고 그 법칙에 울고불고 난리를 피운다는 것이다. 정신병자인가, 아니면 나르시시스트인가?
* 그러나 영생은 무엇인가? 결코 인간들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어떤 법칙으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포장지도 풀지 않은 하늘나라에서 들어온 '수입완제품' 이라는 것이다. 'MADE IN KINGDOM' 이라는 것이다. - 뭐, 영국제품이라고?
* 그래서 로마서 8장 9절에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반대로,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누가 뭐라고 해도 그리스도인이고 말이다. 은혜를 입으면 분명하게 활동을 하는데, 그것이 자기가 만든 법칙에 얽매여서 하는 활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먹든지 마시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법칙 아닌 법칙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율법으로 만들어서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징크스로도 만들지도 않고 말이다.
◈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인간은 하나도 없다 !!
* 그러나 문제는, 사실 인간 자체가 이런 법칙을 만들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만들고 싶어서 만드는 것이 아니고, 가만히 그냥 살다보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가? 한번 생각해 보라. 그러니 이런 인간의 삶 자체를 의롭게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은 반드시 계획을 세우고 나름대로 규칙을 만들어서 움직인다는 것이다.
* 그렇지 않는 인간이 어디에 있는가? 자기가 무슨 백두산 도사인가? 도사들도 자기들 세계에서 나름대로 다 규칙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십자가의 피를 믿으니 나름대로 규칙을 만들어서 살면 되는 것이 아니고, 끝까지 십자가을 붙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 (tape 2 끝)
◈ 그냥 성깔대로 살자 !!
* 자기가 무슨 착한 일을 한다고 설치지 말고 성깔대로 살자는 것이다. 착한 일을 한다고 착한 사람인가? 죄가 바로 옆에서 웃고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쁜 짓을 해야 하는가? 그냥 성깔대로 사는 나쁜 짓인데, 거기에 무엇을 더 더한다는 말인가? 성깔대로 술을 안 마시고 담배를 안 피우면 되는데 말이다. 성깔대로 11시에 교회가면 되고 말이다.
* 그러니 인간에게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만이 선하신 분이고,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는 우리는 부족한 체로 그냥 살아간다는 것이다. 더 나아지려고 뛰지 말라는 것이다. 뛰어봐야 벼룩이라는 것이다.
* 예를 들어서, 정말 우리가 그런 착한 일을 해야만 한다면, 귤을 먹다가도 소말리아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귤이 넘어가겠는가? 밥은 어떻게 말이다. 옷을 어떻게 입을 수가 있겠는가? 조금 비싼 옷을 그야말로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생활이 다 엉망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중 인격자가 되고 말이다. - 소말리아를 생각하라 !
* 실제로 이렇게 '주여, 용서하소서. 오늘도 가난한 자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습니다' 라고 하면서 전전긍긍하는 인간들이 있는데, 그야말로 마귀에 쏙 빠진 놈들이라는 것이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고 했는데, 그야말로 구제를 하고 착하게 살아야 된다는 강박관념에 빠진 정신병자들이라는 것이다.
* 자기 성깔대로 살면 되는데, 아니 사실 인간은 자기 성깔대로 살 수 밖에는 없는데, 그런데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께서 몽둥이를 들고 마구 두들겨 패서 성령의 뜻대로 살게 된다는 것이다. 성령을 받은 사생아가 아니기에 말이다.
* 그래서 마누라가 아닌 다른 여자와는 놀기도 싫고, 밤에 침(?)을 놓기도 싫고, 이제 술도 마시기가 싫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것을 억지로 해야 하는가? 물론 다른 사람들은 '예수 믿고 사람되었다' 라고 할지 몰라도, 사실 자기는 하기가 싫어서 그렇게 안 한다는 것이다. - 과연 싫을까?
* 그러니 그런 행동은 선(善)도 아니고 의(義)도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자기는 그렇게 하기가 싫다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성령의 역사로 볼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렇게 보지 말고 성령의 역사는 '징계'로 보자는 것이다.
(롬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 이렇게 고난도 함께 받는 것은, 우리의 희망사항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결제를 받아서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훈련병이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고난을 받는데, 그 고난이 바로 자기 성깔대로 살다가 얻어맞는 고난이라는 것이다. 훈련 조교를 무시하고 까불다가 말이다. 그러니 맞아도 당연하다는 것이다.
* 예를 들어서, 어떤 골초가 담배를 하루에 두 갑을 피우다가 예수를 믿고 한 갑으로 줄였는데, 사실 그것은 엄청난 고통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의 입장에서?그 사람은 여전히 골초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하루에 한 갑밖에 안 피우는 골초가 이근호 목사의 설교를 듣고 보니까, 이래도 아니고 저래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두 갑으로 원위치를 시켜버렸다는 것이다. 두 갑에서 한 갑으로 줄여도 선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갑으로 줄인 것은 사생아는 징계를 받는다고 하니, 혹시 하나님께 벌을 받을까 싶어서 겁이 나서 억지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하루에 두 갑을 피우는 것이 원래 이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 그러니 주님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억지로 하루에 한 갑으로 줄였다면, 그것은 자기 나름대로의 법칙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징계를 피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 무슨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것은 사실 하나님을 현저히 욕보이는 짓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징계라는 것도 사고가 난다든지 몸이 아프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는다는 것이다.
◈ 인간은 제자리 뛰기 선수이다 !!
* 이러한 우리의 삶은 발전이라는 개념이 없으니 훈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안 되고, '증인' 이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발전한 것으로 여기지만 말이다. 여자를 끊고, 술을 끊고, 담배를 끊고 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제자리 뛰기라는 것이다.
* 이제 로마서 6장을 보도록 하자.
(롬 6: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롬 6: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 사도바울이 5장까지 이렇게 설명을 하니까 꼭 시비를 거는 놈들이 있다는 것이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하니까, 죄를 더 지어도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바울을 죄를 더 짓자고 해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그냥 있어도 죄 속에 갇혀있다는 것이다.
* 사도바울이 주장하는 것은, '죄는 장충 체육관이고 인간은 바퀴벌레이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가 죄를 지으면 짓는 것이고 안 지으면 안 짓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대로 선하게 살아보자고 하면서 설친다는 것이다.
* 그러나 그것이 되는가? 그래서 '착한 일을 합시다' 라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도 마냥 죄인데, 선한 것으로 착각하니 말이다. 좌를 더 짓는다고 더 큰 죄인이 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죄의 권세 아래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옛사람은 죄 아래 있지만, 새 사람은 은혜 아래에 있다는 것이다.
(롬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 여기서 말하는 '세례' 라는 것은, 연합되었다는 의미인데, 사실은 이 연합이라는 말도 어렵고, '함께' 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함께 죽고 함께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어도 죽는다는 것이다.
(롬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 죄에 대해서 죽은 자라는 것은, 죄를 장충 체육관을 본다면,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하나님의 의라는 잠실 체육관 안에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잠실 체육관 안에 있어도 죽을 몸을 가지고 있지만 말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무슨 몸이냐는 것이 아니고, 어느 체육관에 속해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믿는 자는 죽어도 예수님과 함께 한 산 자라는 것이다.
◈ 잠실 체육관과 그 속에서 바퀴벌레인 나 !!
* 그러니 성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행동으로 죄를 짓고 안 짓고 하는 것을 따지니까 도무지 이런 말씀이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다.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는 산 자이다' 라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면 완전주의자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교단체 학생들이 하는 말이, 자기들은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 죄를 지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대답을 듣고 깜짝 놀랐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줄 알고 말이다. 그러니 이 얼마나 자기 기만적인 모습인가?
* 이런 사람에게 해 줄 말은 단 하나, '귤을 먹으면서 소말리아를 생각했습니까?' 라는 것이다. 아니 이 세상에 어디 굶는 사람이 한 둘이고, 헐벗은 사람이 한 두 명인가? 그런데 어떻게 밥이 넘어가고 잠이 오느냐는 것이다. 신장은 왜 두 개나 다 달고 있고, 골수는 왜 기증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 놈들이 결혼할 때는 더 여자를 고르고 조건을 따진다는 것이다.
* 그러면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현상들이 일어나는가? 죄라는 것이 장충 체육관임을 몰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자기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잇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김준곤과 그 일당들에게 매일 중생 된 의지와 이성을 배워놓았으니 알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선한 문화를 이루자고 하고 말이다.
* 아니 도대체 선한 문화가 어디에 있는가? 선한 인간이 하나도 없는데 말이다. 그래서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 역사를 공부도 안 하고, 교회의 역사를 모르니 이런 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역사가 얼마나 추악하고 교회의 역사도 얼마나 더러운가를 안다면 그런 소리는 안 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교회사는 교회의 타락사이라는 것이다.
◈ 쟈크 엘룰 - 교회사는 교회의 타락사이다 !!
* 이렇게 교회의 역사를 본 사람이 '쟈크 엘룰' 이라는 사람인데, '뒤틀려진 기독교'에서 그렇게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선교단체는 이 사람의 책을 또 좋아하니 바보도 아니고 말이다. 자기들을 공격하는 책인데 말이다.
* 그러니 성도는 무엇을 증거하는고 하니, 나 자신은 이렇게 죄로 말미암아 죽어가고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아래에 있으면 이렇게 못난 놈도 얼마든지 살릴 수가 있다는 것이다. 즉, 영광된 몸으로 부활시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가 바로 의의 종이라는 것이다.
* 그러니 설교자는 항상 예수님만을 증거해야지, '이렇게 하면 됩니다' 라는 방법론을 전해버린다면, 성도들로 하여금 어떤 법칙에 다시 얽매이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기존의 한국교회를 비판하고 그래도 제법 십자가를 주장하는 것 같은데, 그런데 알고 보면 또 하나의 법칙을 만든다는 것이다. 성약교회의 김홍전 목사도 그렇고 말이다. 지금 박영선 목사님이 이 문제에 딜레마에 빠져있는데, 성화라는 개념을 버리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율법주의라는 것이다.
(히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 여기서 말하는 거룩함을 우리가 만들었는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얻었다' 라는 것이다. 외부에서 주어졌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예수님께서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말이다. 지금 히브리서가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과거 구약 때 제사장이 피를 뿌림으로 말미암아 세속적인 그릇이 제상에 사용되는 거룩한 그릇이 된다는 것이다. 피뿌림으로 죄사함을 얻었다는 것이다.
* 그러니 이것이 너무나 분명하지 않은가? 너무나도 확실하고 놀랍기 때문에, 그러한 충격을 줄이기 위해서 '서서히' 라고 주장하는 것이 소위 '성화교리' 라는 것이다. 'NO!' 라는 것이다. 피로 말미암아 단번에 거룩함을 얻었다는 것이다. 돈오점수(?)가 아니고, 돈오돈수(?) 라는 것이다.
* 질문 - 그런데 성화를 주장하는 분들은 로마서 8장 30절을 인용하기도 하는데, 어떻습니까?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답변 - 로마서 8장 30절이 성화를 말하는 것인가? 이 본문은 그 일을 하시는 분이 오직 성령이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즉, 누구 소관이냐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우리가 체육관 안으로 들어가는데, 서서히 들어가는가? 그냥 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주시는 것을 우리는 받으면 되고 말이다.
* 베드로전서 2장에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한다는 말씀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체육관 안에 되었는데, 왜 자기가 자꾸만 하려고 하는가? 그냥 안에 있으면 되는데 말이다.
(벧전 2:2)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 그렇게 해서 이렇게 체육관 안에 돈도 한푼 안내고 들어왔으니 미안하지 않는가? 바로 이런 미안한 마음을 두고서 천국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주님, 감사합니다. 넣어주시니 말입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 안에서 소말리야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소말리아가 없었으면 설명도 제대로 안 되는데, 그러니 소말라야가 있음도 고맙지 않는가?
* 그리고 여기서 '자란다' 라는 표현을 성장해 가는 모습이 아니라, 원래의 모습이 드러난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야고보서에서 이야기하는 행함도 이러한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의 결단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믿더라도 화끈하게(?)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행함은 인간의 윤리와 도덕이 아니고 믿음의 차원이라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로마서의 경우라면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야고보서 -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의 결단력을 의미한다 !!
* 그래서 야고보서에서 행함을 이야기하면서,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의 예를 들었는데, 아니 거짓말이 무슨 윤리적인 행함인가?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그것을 히브리서에서 뭐라고 하는가? 분명히 믿음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화끈하게 믿었으면 자기 아들도 죽이려고 하고, 간첩을 숨겨주고 거짓말까지도 서슴치 않고 하느냐는 것이다.
* 이러한 하나님의 너무 고마워서 미안하지 않느냐고 하는데, 이 미안함이 없어서 지옥 가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유익한 종이 아니라 무익한 종이고, 마구 놀면서 천당 가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백수가 아니가? 할 줄 아는 것이 뭐가 있는가? 아이들이나 줄줄 낳지 말이다.
* 이렇게 마구 마음놓고 죽어도 좋다고 하면서 놀면서 사니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욕심이 없어 보이니까, 아주 겸손해 보이고 온유해 보인다는 것이다. 자존심이고 뭐고 없는 것이다. 실제로 내세울 것도 없고 말이다. 물론 마누라는 열을 받지만 말이다. 마귀는 무엇을 노리는가? 인간의 욕망에 빌어 붙는 것이다. 그래서 도와주고 말이다.
* 칼빈주의가 무엇인가? 인간의 전적부패, 저항할 수 없는 은혜가 아닌가? 요즘 이런 것을 가르치는 신학교가 없다는 것이다. 이근호가 이런 칼빈주의를 달고 나오니 이단이라고는 말못하고, '과격하다, 극단적이다, 선배대접을 안 한다' 라고 시비를 건다는 것이다.
* 여기서부터 로마서 8장을 계속해서 보도록 하자.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 여기서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알아서 무엇을 같이 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선으로 그렇게 일을 인도하시는 것이다. 성령께서 말이다. 그러니 잠실 체육관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우리는 바퀴벌레이고 말이다. 그분의 피가 그만한 효과가 있는 것이다. 영비천이 아니고 말이다. - 다같이 마시자, 예수님의 피 !
(히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 그래서 이렇게 히브리서 9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피흘림이 없은즉 죄사함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충격적인 말인가? 피를 흘려야 한다는 것이다.
(롬 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 하나님은 예수님의 몸만 구원하신다 !!
* 잠실 체육관 관장님이 모두 다 알아서 조치를 하는데 우리가 무슨 힘이 설치겠는가? 가만히 있어도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안에서' 의롭게 되고, 구원을 받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예수님의 몸만 구원하시는데, 우리는 그 지체니까 함께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롬 8: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 아니, 체육관 주인이고 관장인 황비홍(?)이 괜찮다고 했는데, 감히 어느 누가 와서 시비를 거느냐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괜찮다는데 말이다.
(롬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 여기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 라는 것은 출애굽기를 보아야 이해가 되는데, 20장 6절을 보자.
(출 15:6)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 주의 오른손의 권능으로 무엇을 하셨는가? 홍해바다를 갈랐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홍해바다가 갈라지는 것이 기적인가, 아니면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기적인가?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더욱더 큰 기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아직도 그런 시시한 것을 바라는가? 바다가 갈라지면 뭘 하고, 병이 나으면 뭘 하는가? 크신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것이다.
* 그런데 우리 같은 죄인이 예수를 믿는 것은 별로 이고, 교인이 50명이다가 500명이 되는 것이 큰 은총인가? 그러니 지금 한국교회는 정말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가 아닌 놈들은 다 물러가라는 것이다.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오늘날 교회에서는 이런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 오면 저주를 받았다고 가르치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가운데서 사랑이 있음을 큰복을 받았다는 것이다. 아프지 않고 죽지 않는 자들이 어디 있는가?
* 그러니 그런 원수들을 두려워말자는 것이다. 사실은 내 몸이 가장 큰 적이고 말이다. 신문에 광고를 내면서 전 세계를 부흥회를 인도한답시고 돌아다니는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잘 되는 것도 배아파하지 말고 말이다. 그냥 두면 주께서 다 알아서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일만, 즉, 예수님의 증인만 되면 된다는 것이다.
* 다시 로마서 6장으로 돌아가자.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 참으로 표현이 묘한데, '삯' 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행함의 대가라는 것인데, 죄의 대가는 사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반해서 하나님의 은혜는, 즉, 선물은 영생이라는 것이다. 우리들 행함의 대가는 죽는 것이고 말이다. 나이가 많고 병이 들어서 죽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 그런데 의외로 사람들이 이렇게 죽는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저렇게 종합병원과 영안실이 잘 되는데 말이다. 죽어가면서도 자기가 잘났다고 하니, 도대체 바보도 아니고 말이다. 예수를 믿으면 죄를 안 짓는다는 인간도 있고 말이다. 그런 인간은 안 죽는가?
* 예를 들어서, 홈플러스에 가서 물건을 샀는데 마지막에는 계산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삯이라고 하는데, 그 결과가 '죽음' 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모두가 다 이렇게 삯을 계산해보면, '사망' 이라는 것이다. 무엇을 했던지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영생을 선물로 받는다는 것이다. 삯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런데 무슨 성화가 있는가? 의롭다 하는 것도, 영화롭게 하는 것도 말이다. 죽는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입을 막아버린다는 것이다. 왜 체육관을 모르는가?
◈ 죄는 우리의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권세이다 !!
* 사도바울이 죄를 짓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은 죄의 값으로 죽고 하나님의 은사가 영생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무슨 죄를 안 짓는다고 할 수 있는가? 죄에 거하지 말라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하고. 하기 싫다고 안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체육관 속에 있는 바퀴벌레라는 것이다. 그래서 죄라는 것은 짓고 안 짓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권세라는 것이다.
* 그래서 로마서 5장에서, 한 사람의 범죄함으로 죄가 쏟아져 들어왔다는 것이다. 내가 짓고 안 짓고 하는 문제가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우리의 선택사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도 마귀에게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 주기도문에서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라는 것은, 공관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이전이기에 일종의 과도기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서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기도와 바울서신에 나오는 기도를 서로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 그래서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기도는 구약의 것들을 그대로 가지고 오는데, 그래서 '완전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기도는 십자가와 부활을 염두에 두고, '주여, 우리를 용서하옵소서'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여기서 에베소서 3장을 한번 보자.
(엡 3:14)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엡 3: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엡 3: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엡 3: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엡 3: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엡 3: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 교회에서 이런 기도를 해 보라. 목회성공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의 기도는 주님께서 주신 사랑을 많이 알기를 기도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잘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 만약에 우리가 바퀴벌레로서 체육관 밖으로 나올 수가 있다면, 우리 힘으로 천국에 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대교적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체육관 안에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있는가? 그러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사람은 그렇게 안 한다는 것이다. 주님의 그 사랑과 넓이와 깊이를 아는데도 바쁜데, 여자를 밝히고 말고 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취미도 없고 말이다. 싫은데 왜 억지로 해야 하는가? 날마다 여자가 땡기지만 성령께서 그것을 막아주신다는 것이다.
* 질문 - 목사님께서 어느 책에서 '죄를 지으려면 용서를 반납하라' 라고 하셨는데, 무슨 뜻입니까?
* 답변 - 그 말의 의미는 용서를 반납하고 죄를 지으라는 것이 아니고, 결코 용서는 반납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 만큼 하나님의 은혜가 견고하고 확실하다는 것이다.
* 어느 여자가 남편과 이혼을 하고 새로운 남편을 얻어서 사는데, 이 새로운 남편은 그야말로 '잘했군 잘했어' 라는 것이다. 뭘 해도 말이다. 그래서 누가 옆에서 보다가 너무하지 않느냐고 하면, 그 새로운 남편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 '저는 아내를 사랑합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그래서 로마서 4장에서,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신 분을 믿는 자에게는 그러한 믿음을 의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남편 하나는 끝내준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복음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롬 4:5)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 여기서 신앙의 샘물을 잠시 살펴보자. - [ 신앙의 샘물 - 22. 사랑 ]
♨ 사랑은 모든 것을 주고 그 대상을 자기 것으로 삼는 행위이다.
* 여기 사랑의 자리에 예수님을 넣어보자. 예수님은 모든 것을 주고 그 대상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것' 이라는 것이다. 이런 자들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받은 자라는 것이다.
* 이제 로마서 7장을 보자.
(롬 7: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 사도바울은 예수님에게 완전히 미쳤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에게는 2002년 월드컵이고 IMF고 뭐고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언제나 예수님이고 그분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롬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
* 여기서 '영의 새로운 것'은 성령을 두고 말하는데, 법이라는 것은 우리가 지켜야 하지만, 성령이라는 분은 어르신이고 인격체이기에 우리가 그분에게 복종하면 된다는 것이다.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자기가 아들이라고 한다고 해서 모두 아들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롬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은 최초의 분은 누구이신가?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서 간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영인 성령을 받아서 말이다.
* '아버지' 라고 부른다고 해서 하나님 아버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성령으로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을 '아버지' 라고 불렀던 그러한 마음으로 부를 때만이, 그 사람이 진짜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참된 신자라는 것이다.
* 이럴 때 어떻게 이 세상이 무서워 보였겠는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율법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함을 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야단치는 아버지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에게로 가는 것이 소원인데, 그런데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이, '올 때 오더라도 복음을 전하고 오너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제는 옛 남편은 완전히 버리고 새로운 남편과 그야말로 꿈같은 달콤한 신혼살림을 즐기고 있는데, 어디서 구닥다리가 와서 시비를 거느냐는 것이다. 전혀 이제 그런 옛 사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율법을 가지고 시비를 걸자 예수님은 그들을 보고 '너희의 아비는 마귀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너희들은 마귀새끼라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에게 안식일과 십일조와 같은 율법을 갖다 대느냐는 것이다.
* 예수님께서 이러한 자들에게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는데, 그런데 다시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그 정신을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주심으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셨던 일이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살아가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다.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 아버지와 아바 아버지는 다른데, 아바 아버지는 성령 받은 사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나도 할 수 있다고 하면서 '아바 아버지' 라고 부를 수는 이겠지만, 그러나 그렇게 부른다고 해서 하나님 아버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성령으로 인도하심으로 홀로 고난을 받으면서 하나님과의 친밀했던 관계성, 바로 그러한 그 마음으로 아버지를 부를 때만, 그런 사람만이 진짜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자라는 것이다. 이것을 '아바, 아버지' 라고 하는 것이다. - 아빠 !
◈ 아바 아버지 - 예수님이 세상에서 성령의 인도로 고난받으면서 불렀던 그 마음으로 !!
* 성도 - 하나님 아버지요, 지금 정말 힘들어 죽겠어요. 그냥 좀 데려가 주이소.
* 하나님 - 그래 안다. 하지만 그 길을 걸어야 한다. 나도 다 당했다. 그러나 그 길을 걸어야 영광의 길이 나온다. 내가 함께 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걸어라. 알겠지.
* 로마서가 무엇인가? 인기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니고, 그야말로 소외당하고 핍박받고 외로운 자들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편지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로마서를 제대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한국교회가 1200만 명이 되면 안 되고, 한 1200명 정도 같으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매일 같이 쫓기고 놀림을 당하면서 말이다. 마치 개화기의 동학교도들처럼 말이다. 대원군에게 얼마나 핍박을 당했는가?
* 그러니 지금 우리에게 감옥에 갇혀있는 사도바울과 같은, 섬에 귀향을 가 있는 사도 요한과 같은 그런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침대에 덜렁 누워서 아이스트림을 입고 물고 야구나 보면서 마구 즐기고 있는데, 무슨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라는 말이 실감이 나겠는가?
(롬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 선한 일을 하고 싶다고 해서 착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목사가 좋은 소리한다고 그대로 사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말은 듣되 행동은 본받지 말라고 하지 않았는가? 인간은 무엇이 선한 것인 줄 알면서도 행하지를 못하는데, 그것은 인간이 죄의 권세 아래에 있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 구원 - 어떤 세력에 붙잡혀서 꼼짝못하는데, 거기에서 빼내어주는 것 !!
* 구원이라는 것은 어떤 세력에 붙잡혀서 꼼짝못하고 있는데, 거기에서 빼내어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구출이라는 것이다. 자기가 알아서 나오는 것은 구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까?' 라는 것은, '당신은 어느 세력이 붙잡혀서 꼼짝달싹도 못했습니까?' 라는 질문과 같다는 것이다. 출애굽기가 그 원형이라는 것이다. - EXODUS !
* 다시 말해서, 우리를 예수님께서 탈출시켜주셨기에, 우리는 이제 그분의 똘마니(?)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 똘마니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하는데, 로마서 1장 6절을 보자.
(롬 1:6)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 이제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것' 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소유된 자들이라는 것이다. 옛날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의 종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영어로 'CHRISTIAN'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 이제 로마서 8장을 보자.
* 이 로마서 8장은 제가 봉화에서 집사로 있을 때 암송했던 구절인데, 그러나 성경말씀을 깨닫는데 외운다고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억은 나지만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상을 타기 위해서 외워서 그런지 말이다. 머리 좋은 젊은 학생들은 외우고, 믿음이 좋다던 권사들은 안 된다는 것이다. 농띠치는 장로들도 물론 안 되고 말이다. 그래서 장로들은 그런 부끄러움을 면하기 위해 심사위원을 맡는다는 것이다. 그런 머리는 얼마나 좋은지?
(롬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이 본문을 보면, 못하는 육신과 조금 나은 육신과 그렇게 육신끼리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하지 못하는 우리와 하나님과 비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처럼 되라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친히 다 해주신다는 것이다.
* 예를 들어서, 우리는 기도를 못하는데,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가 기도를 잘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기도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제대로 인도해 가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불러서 의롭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이다.
* 이것이 제대로 된 남편이 아닌가? 남편이 되어서 집구석에 쳐 박혀 있고, 마누라보고 돈을 벌어오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무슨 사랑인가? '여보, 사랑해' 하면서 밤에만 즐겁게 해주고 돈벌어오라고 한다면 그것이 무슨 남편인가? 남창(男娼)이지 말이다.
* 그런데 요즘 한국교회는 뭐라고 말하는가? '예수님, 가만히 계십시오. 저희들이 모두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들이 무슨 옹녀인가? 이것은 그야말로 남편을 완전히 무시하고 모독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 설교를 하면서 한번 식 이런 예화를 드는데, 요즘 한국교회는 예수님을 뒷방의 늙은이로 생각하고 일주일에 한번 식 찾아 뵙는 그런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흰 봉투에 돈이나 조금 넣어서 말이다. 그렇게 하면 예수님께서 좋다고 하겠는가?
* 한국교회 : 예수님, 저희들 왔습니다.
* 예수님 : 응 그래 왔나. 차도 많이 막히는데 온다고 고생했지.
* 한국교회 : 아닙니다. 참 여기 십일조하고 감사헌금을 용돈으로 쓰시라고 조금 가지고 왔습니다.
* 예수님 : 고맙구먼. IMF 라서 돈도 없을 긴데, 잘 쓸기라.
* 한국교회 : 그리고 이번 수요일에는 사업상 바빠서 못 오겠습니다.
* 예수님 : 괜찮다. 일주일에 한번만 와도 복 받을 수 있다. 전화나 한번 하거라. (콜록 콜록)
* 한국교회 : 예, 알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럼 이만.
* 그런데 사실 이렇게 일주일에 한번 식 찾아오는 것도 예수님이 좋아서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니라, 미리 모든 액운을 다 막아보자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알종교가 아닌가? 다시 말해서, 한국교회는 누가 뭐라고 해도 이단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철학과 신학의 허상' 에서 '신화의 제단'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 뽈 디엘의 [ 그리스 신화의 상징성 ] 서평 참고 !
* 사실 이것은 모두가 목회자의 책임이라기보다는 민중들이 그렇게 원해서 만든다는 것이다. 십일조 봉투를 하나 들고서 모든 것을 다 해결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손수건을 흔들면서 여유 만만하게 예배당 문을 나선다는 것이다.
* 이런 설교하면서, 예수님은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했는데, 차마 '이 개새끼들아!' 라는 소리는 감히 못하고, 이렇게 하다가는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구원받는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가?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그렇게 왜곡시켜서 자기 마음대로 하셨는가?
* 어제 오관석이 지금 우리가 있는 이 기도원에 와서 사기를 쳤는데, 외제차를 타고 왔다는 것이다. 그런 차를 타고 다니려고 하면 사기를 안 치고 되겠는가? 그런 놈을 도와주는 것이 장로이고 말이다.
* 그러니 제대로 예수님을 전하면 어느 놈이 좋다고 리무진을 사 주겠는가? 물론 겉으로는 '목사님, 은혜 받았습니다' 라고 하면서, 당장에 보따리를 사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주여, 제가 5000명을 모으겠습니다' 라는 놈들만 찾는다는 것이다.
* 원래는 이런 것이 합동 측이 먼저 시작했고 상당히 심했는데, 그런데 이제는 밑천이 딸려서 그런 짓도 주춤거리며 헤매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오히려 통합 측이 난리라는 것이다. 노골적으로 시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 노골적으로 10분 휴식 !
출처:www.woorich.net/우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