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2:8~10)
이 ‘만드신 바’를 원문 헬라어와 영어번역본으로 살펴 보겠다.
첫번째로 원문 헬라어로 보면 “포이에마”라고 한다. 이 부분을 직역하면 “선한 일을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된 그분의 포이에마 라”는 뜻이다. ‘포이에마’ 헬라어는
영어의 poem 과 같은 어근으로 ‘시, 작품’을 뜻한다.
시인이 하나의 시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이 문장을 다듬고 생각하여 가장 아름답고 적합한 언어로 함축하여
시를 짓는가. 시는 산문과 다르게 정말 꼭 필요한 최소한의 단어만을 사용한다, 그래서 가장 좋은 시는 가장 아름다운 단어들이 꼭 필요한 자리에 필요한 만큼 있는 것이다. 불필요한 단어가 하나도 없는 시, 그리고 그 선택된 단어를 볼 때
그보다 더 적절한 단어가 없는 시, 그게 바로 유명 시인의 시이다.
성경은 우리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다고 말한다. 불필요한
것은 하나도 없이 가장 소중한 재료만을 사용해서 이 세상에서 유일한 예술품으로 우리를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연히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심혈을 기울여 완성하신 아름다운 시이다. 시라는 말이
나왔으니 봄이 되어 거리에 꽃도 참 아름다운데 꽃에 대해 의미가 있는 시 한편을 소개하겠다. ‘김춘수’ 시인이 1953년 동인지에 실은
'꽃'이란 시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의미 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의미 있는 존재)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내가 가진 특징)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그에게 있어서 소중한
존재이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의미 있는 존재)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서로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의미 있는 존재)이 되고 싶다.
위 시를 보면 나는 원래 상대방에게 아무 의미 없는 존재였는데 그가 내 이름을 부를 때 나는 그에게
향기로운 꽃처럼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이 시는 정말 멋지다. 그리고 함축되고 절제된 단어의 나열을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풍성하다.
그런데 성경에도 이와 같이 이름을 부름에 관한 말씀이 있어서 소개한다.
"여호와께서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가 어미 복중에서
나옴으로부터 내 이름을 말씀하셨으며"(사49:1).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아야 한다. 그 분이 우리의 이름을 불렀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이름을 부르신 것이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이름을 부를 때 그때에 하나님께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놀랍지 않는가? 하나님이 내 이름을 알고 계신다. 또한 다른 성경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3:17). 전능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다. 그 분이 지금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데 바로 여러분 때문이다. 여러분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행복해 하신다.
에스프레소 커피를 마셔 보았는가? 한 모금을 입안에 머금고
목구멍을 열면 씁쓸함 속에 감추인 달콤함과 구수함과 신맛이 뱃속 깊이까지 타고 내려온다. 그 향을 느껴
보라. 나는 에스프레소 커피를 입에 머금으면서 잠잠히 이 커피를 누린다. 이 향을 즐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나를 한 잔의 에스프레소
같이 나를 즐기시며, 나를 잠잠히 사랑하신다.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른다’는 히브리어
역은 ‘너로 인하여 즐거이 흥얼거린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나를 잠잠히 누리시고 사랑할 뿐 아니라, 나로 인해 즐겁게 노래를 부르는 그런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나 때문에
즐겁게 노래하시는 것을 상상해 보라.
나는 아들들에게 카톡을 할 때 이렇게 쓴다. ‘사랑하는 아들아! 넌 아빠의 기쁨이란다.” 여러분들도
그렇지 않은가? 하나님께서는 왜 기뻐하시는가? 우리로 인하여
기뻐하신다. 그저 이유 없이 좋으신 거다. 부모가 자식을
이유 없이 사랑하고 무엇이든지 주고 싶은 심정,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마음이다.
두 번째로 포이에마(헬라어)를 영어로 번역을 하면 ‘masterpiece’로
번역될 수 있다. 한국말로 한다면 ‘걸작품’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이라, 그의
걸작품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중세 시대에 유럽에서 기술을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10대
소년의 나이에 거장의 밑에 들어가 도제(견습생)가 되었다. 거장의 작업장에 들어간 도제는 일을 배우면서 온갖 천한 일들을 도맡아 했다.
이 견습생은 약 7년간 장인 밑에서 일을 배운 후 직인(숙련공)이 되어 다시 3년 이상 일을 배운다. 그 후에 마지막 장인(달인)이
되기 위해 작품을 만들어 시험을 치르게 되는데 이 작품을 '마스터피스
masterpiece' 라고 부른다. 이 작품이 합격 되어야 장인이 되는 것이다.
당시에는 아무나 가게를 열어 장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장인만이 가게를 열 수 있었다. 따라서 이 마스터피스는 10여년 이상 기술을 익히기 위해 고생을
한 사람의 모든 기술과, 노력과, 정성이 집대성된 최고의
걸작품인 것이다. 그야말로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세상에서 유일한 걸작품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런 걸작품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것도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걸~걸작품이다. 수십
억 사람들 중에 나와 똑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상품은 비교할 수 있으나 작품은 비교할 수 없다. 이 걸작품에는 작가의 의도와 정신이 깃들어져 있으므로 비교할 대상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최고의 걸작품이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누구인가? 바로
‘교회’이다. 개인적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닌 단체적인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걸작품인 것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2:8).
하나님께서는 10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걸작품이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8절에서 걸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믿어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기대하시고, 계획하신 작품으로 살기
위해서는 먼저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말하고 있다. 어떤
구원 받을 일을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거저 주시는 은혜로 인해 구원을 주시는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이 구조대원의 손을 잡아야 살 수 있듯이, 우리도
손을 내밀어 하나님이 보내주신 구조대원, 예수님의 손을 잡아야 비로소 한편의 아름다운 시요, 걸작품으로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걸작품'으로 만드신 이유가 무엇인가? 10절을 보면 '선한 일을 행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신다. ‘선한 일’은 무엇인가? 세상
살면서 착한 일을 하는 것인가? 아니다. 에베소서 2장 마지막 구절을 보면 ‘선한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엡2:21~22).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하실 성전으로 지어져 가고 있다. 이것이 ‘선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목적을 위해 우리를 구원하시고 걸작품으로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은 많은 것들을 만드셨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하늘과 땅은 하나님의 걸작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셨다. 하지만 사람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완전한 걸작은 아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걸작품은 구원 받은 성도들이 모인 교회인 것이다. 이 교회 안에 들어오기 전에 우리는
나그네였으며 세상에서 소망도 없었던 자들이었다. 하지만 이 교회 안에 들어 와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고 한 식구가 되었다.
어제 교회에는 나오지 않지만 단지 몇 번 성도들과 만난 적이 있는 어떤 분이 내게 이런 말을 하였다. ‘래서교회에 대해 잘은 몰라도 모두가
다 한 가족과 같이 느껴집니다. 전 이런 교회가 좋습니다’. 그
말을 듣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우리는 하나님 집에서 함께 사는 한 식구이다. 한 지체가
울면 함께 울고 기쁠 때 함께 웃는다. 함께 모일 때 마다 즐거움과 풍성함의 잔치를 누린다. 이 세상 어디에서 이런 기쁨을 맛볼 수 있는가? 원래 우리는 남남이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피로 형제 자매가 되어 서로 가까워졌고 우리 사이에 막힌 것들이 허물어졌다.
모자이크 작품을 보자. 한 조각, 한 조각은 보잘것없는 조각에 불과하다. 또한 모양도 색깔도 다르다. 그렇다. 모자이크 작품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조각의 모양도 색깔도
달라야 한다. 나와 다른 사람이 생각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신앙 스타일이 다르면 어떤가? 달라야 가장 멋진 그림, 멋진 걸작품이 나오게 된다. 이렇게 다른 조각들이 모여서 자기에게 주어진 위치에서 은사를 발휘하여 서로가 서로를 섬기게 될 때 아름다운
작품으로 만들어져 가는 것이다.
내가 잘났고 네가 못 났고 따지는 것은 의미 없다. 내가
옳고 네가 그름도 의미 없다. 다른 지체들이 나랑 모양도 다르고 색도 다를지라도 더 존중하고, 더 사랑하고, 참아주고, 감싸줌으로
한 폭의 아름다운 모자이크 걸작품으로 우리 교회는 완성될 것이다.
‘사랑의 종소리’라는 복음송가가 있다. 이 찬송을 부르면서 가사를 잘 음미함으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 안에서 함께 손 잡고 이 길을 가자.
20140420하나님의 걸작품.doc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