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4일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루카 12,1-7
나만의 다락방이 없으면 어쩔 수 없이 사람이 두려워진다.
‘테일 오브 테일즈’(2015)의 ‘젊음의 비밀을 간직한 아름다운 여인’의 줄거리입니다.
어떤 왕국에 여색을 지나치게 탐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왕이 창문을 내다보는데 아랫동네에서 여인의 매우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들렸습니다.
왕은 그 여인을 불렀지만, 여인은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채 집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왕은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그 여인을 유혹하기 위해 신하를 시켜 보석 목걸이를 보냅니다.
그러나 그 집에는 뜻밖에도 목소리의 주인공인 언니와 동생, 자매사이인 두 노파가 살고 있었습니다.
목소리만 예뻤던 것입니다.
그날 밤 왕은 참지 못하고 그 집을 두드립니다.
하지만 언니는 문을 열어줄 수 없습니다.
다만 일주일 뒤에 오면 신체 일부는 보여줄 수 있겠다고 말합니다.
왕의 선물과 사랑을 얻기 위해 진짜 모습을 감추려고 열심히 손을 문지르고 초에 넣어보는 등 큰 노력을 합니다.
어찌하여 일주일 뒤에 손가락 하나를 문밖으로 보여줍니다.
그런데 왕은 그 손가락을 보고 더욱 안달이 납니다.
왕궁에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언니는 왕궁의 모든 불을 꺼 달라고 청합니다. 왕은 그러겠다고 합니다.
아침에 왕은 궁금하여 침대에 있는 여인의 실제 얼굴을 보고는 깜짝 놀랍니다.
그리고 창문 밖으로 이불 채 집어 던집니다. 다행히 이불이 나무에 걸려 죽지 않습니다.
지나가던 마녀가 그녀를 정말 아름다운 여인으로 만들어놓습니다.
여인은 그것이 저주인지도 모르고 잠들어 있습니다.
왕이 지나가다가 그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같은 사람인 줄 모르고 한눈에 반해 바로 결혼을 제안하고 언니는 자신의 결혼식에 동생을 초대합니다.
결혼식에 온 동생은 언니가 어떻게 예뻐졌는지 알고 싶습니다.
하지만 언니는 말해줄 수 없습니다.
자신도 어떻게 예뻐졌는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생이 하도 졸라대자
“몰라, 누가 내 껍질을 벗겨냈나 봐!”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곧이 들은 동생은 고통스럽게 피부 껍질을 벗깁니다. 그렇게 죽어갑니다.
이것이 마녀의 첫 번째 저주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다른 이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옳지 않은 방법을 사용하도록 질투심을 유발하는 것입니다.
언니도 이 저주에서 풀려나지 못합니다.
언니는 급격하게 자신의 옛 모습으로 돌아가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더 있다가는 또 왕에게 내던져질 것이 뻔한 일입니다.
그게 두려워 밤을 틈타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이미 자신이 다른 이의 마음에 들었어도 그 매력이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그 매력을 회복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지 못하면 다른 이의 마음에 들어도 늘 불안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어두운 데서 들은 것을 밝은 데서, 골방에서 들은 것을 지붕에서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복음 선포가 이루어지지 않는 교회는 그래서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로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지붕 위에서 복음을 선포하여 역사에 기록된 교회는 가톨릭교회밖에 없습니다.
첫 복음을 선포할 때 그들이 힘을 얻은 곳은 ‘다락방’입니다.
다락방은 산짐승들에게는 ‘옹달샘’과 같이 언제든 와서 힘을 회복할 수 있는 곳입니다.
위 영화에서 마녀는 한 번 매력을 주고는 더는 자신을 찾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저주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다락방이 있습니다.
성령이 내리는 곳입니다.
저로서는 처음엔 하.사.시.였고 나중엔 성체조배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미워해도 그곳에 앉아 있으면 다시 에너지가 충전되었습니다.
이렇게 나의 다락방이 있을 때 복음을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습니다.
전에 선교 왕으로 뽑힌 한 분이 자신은 길거리 선교를 나가기 전에 항상 성체조배를 했다고 합니다.
세 시간 선교할 것이면 세 시간 성체조배를 하고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야 실패해도 또 돌아갈 곳이 있기에 담대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드라마 ‘가을동화’에서 어린 문근영에게 다락방이요 옹달샘은 바닷가였습니다.
그곳에는 언제나 오빠가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살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우리 자녀들도 인생을 살아갈 때 힘이 들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 힘을 회복할 자리, 곧 기도로 에너지를 회복하는 장소가 꼭 필요합니다.
그래야 복음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이름을 부끄럽게 여기면 하느님도 우리를 부끄럽게 여길 것입니다.
복음은 사람이 두렵지 않아야 선포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나에게 성령께서 내리는 다락방이 꼭 필요함을 잊지 말고 나만의 다락방을 꼭 가지고 있어야겠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14일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하느님 사랑으로 인해
우리 모두 이 땅에 멋진 ‘소풍’을 온 이상, 우리네 하루하루의 삶이 기쁨과 행복으로 충만해야 할텐데, 너무나 자주 불행하다고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우리 인간들의 ‘무지’(無知) 때문이 아닐까요?
다른 무지에 앞서 존재에 대한 무지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 자신에 대한 무지, 이웃에 대한 무지, 하느님에 대한 무지로 인해 우리는 그렇게 자주 불행을 느끼리라 저는 믿습니다.
하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오늘 복음은 너무나도 명백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머리카락 수효까지 다 세고 계시는 분!’
인간의 머리카락 숫자는 약 10만개 정도라고 합니다.
하루에 40-50개 정도 빠지고 또 다른 머리카락이 생성됨을 되풀이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수많은 우리 인간들의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세고 계시지는 않겠지요?
이 말은 그만큼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말일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만큼 우리를 잘 알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우리에 대한 사랑이 극진하다는 말입니다.
내가 아무리 부족해도,
내가 아무리 비참해도,
내가 아무리 죄인이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지켜보시며, 나를 위해 애쓰시고, 나를 구하시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만 큰 오산입니다.
내 입술이나 내 코에 묻은 얼룩을 나는 모르는데
나를 쳐다보는 다른 사람들은 다 알고 있듯이 어떤 경우 나에 대해 다른 사람은 다 아는데, 나만 나를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노력이 나를 알기 위해 나를 떠나는 노력입니다.
나를 찾아 자주 여행을 떠나야 합니다.
나를 보다 정확히 보고, 나를 보다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해 더 큰 기준이자, 더 큰 잣대이신 하느님께로 나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나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분이신지요?
얼마나 나에게 큰 가치와 등급을 매기시는 분이신지 모릅니다.
내게 대한 사랑이 얼마나 큰 분이신지는 십자가상의 예수님 모습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의 존재 전체, 당신의 목숨까지 걸고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정말 하찮은 존재이지만,
정말 가련한 존재이지만,
정말 슬픔과 고통의 존재이지만,
정말 약한 존재이지만,
하느님 그분의 사랑으로 인해 강건해집니다.
그분의 자비로 인해 성화됩니다.
우리 인생이 비록 죄와 죽음의 그림자로 얼룩져있다 할지라도 그분 안에 머무름으로 인해 환히 빛납니다.
우리가 비록 어둠속에 앉아있다 할지라도
하느님 그분의 현존으로 인해 밝게 빛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0월14일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복음: 루카 12,1-7: 너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1절) 말씀하신다. 그들의 누룩이란 그들의 겉꾸밈, 즉 위선을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해야 할 대상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말씀하신다.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 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4-5절). 그분은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마태 10,28) 분이시다. 그분만이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셨다. 그러므로 육신을 죽일 수 있을 뿐인 자를 두려워하고,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을 그분은 지옥에 던져버릴 것이다. 그분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 자녀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할까, 혹은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실천하지 못할까 나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참으로 그분을 두려워할 때, 즉 당신의 말씀과 뜻 그리고 당신의 일을 올바로 선택할 수 있을 때,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지혜를 차지할 수 있게, 당신의 생명에 참여하게 해주실 것이다. 율법 교사나 바리사이들의 위선적인 삶이 아니라, 참으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랑을 실천하며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단돈 두 닢에 팔리는 참새 다섯 마리조차 하느님께서 돌보아 주신다고 하신다. 그러면서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다고 하신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자상하게 보살펴주시는지 알 수 있다. 미물까지 보살펴주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잊지 않으신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우리를 찾아오신 분이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그분을 알고 또 올바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우리는 여러 가지 구실 때문에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하느님을 외면하고 있지나 않은지? 아니, 외면하고 있는 것조차도 모르고 있지나 않은지? 우리의 신앙생활 안에 바리사이파 사람의 모습이 재현되지나 않는지? 그분을 안다고 하지만 우리의 삶을 통하여 진정으로 그분을 알고 증언하고 있는지? 이러한 여러 가지를 반성하면서 우리의 삶을 이루어가야 할 것이다. 하느님을 선택하고 사랑해 드리는 것이 우리의 성소이며,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서 하느님의 모습을 완성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