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봉기한 항일 독립운동이 3·1운동(三一運動) 또는 3·1 만세운동(三一萬歲運動)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독립운동을 태동시키고 불을 댕기고, 확대한 주도세력이 바로 우리 교회의 신앙선배들이었다.
즉 3·1운동을 시작한 독립단체인 '신한청년단'을 결성하고 이를 이끈 인물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다.
물론 민족대표 33인의 종교적 성향에서 보듯이 이 운동은 기독교계 이외에도 당시 천도교와 불교계 등과의 연합에 의해 추진된 초종파적인 민족연합운동이었다.
강원도 영월군 서면 옹정리 선암마을
그리고 이 운동의 기본적인 방법은 독립청원 운동이었다. 독립협회의 민권 국권 운동에서 애국계몽기의 '신민회'의 비밀결사 운동에 이르는 일련의 민족운동을 이끌어간 중추적인 인사들도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다.
당시 기독교 교세는 전인구 1,700만 명 중 2%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이러한 열악한 교세를 가지고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기독교 측 인사가 16인이나 참여하였다는 사실은 교회가 얼마나 신실한 지도자들을 품고 있었는가 알 수 있다.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있던 시각에 평안북도 북단에 위치한 의주 지방의 서부교회에서는 유여대 목사의 진두지휘에 따라 전 교인들이 의주 시내로 뛰쳐나가 만세시위를 펼쳤는가 하면, 당시 장로교 총회장인 김선두 목사는 평양 숭덕하교 교정에서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이렇게 하여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에 파급되기 시작한 만세운동은 그 불길이 북쪽으로 평양, 의주를 시발로 선천, 정주, 안주, 진남포, 원산, 그리고 해주, 사리원, 연백 등 비교적 기독교세력을 기반으로 했던 지역을 중심으로 이어져갔다.
남쪽에서는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뜨겁게 진행되었는데, 파고다공원에서는 경신학교 출신 전도사 정재용이 운집한 4,000여명의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함으로써 기독교 주도의 3·1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대구에서는 3월 8일 남산교회 이만집 목사의 주도하에, 부산에서는 3월 11일 일신여학교 학생들과 기독교인들이, 그리고 전주에서도 3월 13일 천도교인들과 연합하여 기독교인들과 신흥학교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태극기를 들고 시내로 쏟아져 나오기도 하였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분의 이름은 유관순... 유관순은 일제 강점기에 3.1운동으로부터 시작된 만세운동을 천안에서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사망하였다.
1916년 미국인 선교사의 추천으로 이화학당 초등부 3학년에 편입하고, 1919년에 이화학당 고등부에 진학하였다. 3월 1일 3.1 운동에 참여하고 3월 5일의 만세 시위에도 참여하였다. 총독부의 휴교령으로 천안으로 내려와 후속 만세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감옥에서 복역 중 1920년 9월 28일에 타살로 사망했다.
그 외에도 3·1운동에 참여했다가 감옥에 갇힌 사람들은 서울 안동교회 김백원, 승동교회 차상진 목사와 연동교회 함태영, 양평 지평교회 김경덕, 남대문교회 이갑성, 김원벽 등 이었다.
이들은 3월 12일 서울 서린동 음식점 영흥관에 모여 당시 조선총독 하세가화에게 보낼 장서를 기초하고 그것을 종로 보신각에서 군중들에게 낭독한 것이다.
차상진 목사가 작성한 '12인의 장서'는 총독에게 보낸 글이지만, 총독에게 독립운동의 당위성을 설파하면서 끝가지 굴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추구하겠다는 도전의 메시지였던 것이다.
당시 '동양평화'를 내세우며 한국침략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던 일제당국에 대한 기독교인의 논리적 반박으로 돋보이는 활동이었다.
자신들을 3·1민족 대표의 후계자로서 과거의 조선인이 아니고, 세계의 대세를 알고 문명의 정도를 깨달은 '신조선인'으로 규정하면서, "조선 독립은 민족요구의 정의인도(正義人道)이며, 필연의 공리천칙(公理天則)으로 확신한다"라고 선언하여, 징역 8개월의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다.
그리고 진위군 회화리교회는 만세사건으로 3개월 동안 교회문을 닫아야 하는 아픔을 겪었고, 안성군 원곡면 가천리교인들도 옥고를 치렀다.
비록 3·1운동이 민족해방과 조국의 독립은 성취하지 못했지만 이 운동이 대외적으로 당시 서구 열강의 식민지 내지 반식민지 아래 신음하고 있던 여러 약소민족에게 독립정신과 독립운동의 불길을 일으키는 '불씨'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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