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사 복사용지를 10퍼센트 저렴한 이플러스 상표로 납품하는 제지회사는 이윤이 줄었을까. 아닐 것이다. 어떤 조치를 취했을 게 틀림없다. ‘노동력 유연화’, 풀어서 말해, 골치 아픈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바꿨거나 그런 위협으로 노동자의 임금을 동결했을지 모른다. 산업연수원 제도를 십분 활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겠지. 아무튼 기업은 손해 보는 장사를 하지 않았을 텐데, 이마트를 찾은 많은 소비자는 더 저렴해진 복사용지를 계획보다 더 구입할 거고, 복사용지가 충분히 확보된 이상 소비에 너그러워질 것이다. 나도 미뤄두었던 문서를 모두 인쇄했고 이면지가 많이 나왔다.
이윤이 박하면 회사는 물건을 더 만들어 해결하고 싶을 것이다. 이마트 압력에 굴복했을 제지회사는 용지를 더 만들려 애를 쓸 텐데, 해고되거나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기 싫은 노동자는 늘어나는 노동시간과 강도를 감수해야 한다. 제지회사는 규모가 큰 만큼 견딜 여력이 있겠지만 중소기업은 어이할꼬. 소비자는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는다. 이마트와 가까운 곳에 사는 소비자도 승용차를 몰고와 저렴한 물건을 카트에 가득 채울 따름이다. 구입한 물건이 많으니 자동차가 필요하고, 자동차와 물건의 할부 때문에 일을 더 해야 한다. 일에 쫓겨 집에 노상 늦으니 모처럼 시간 날 때 이마트로 차를 몬다. 값이 싸니 많이 사고, 많이 사니 낭비한다.
자동차 없는 알뜰 소비자의 출입을 봉쇄하는 양판점은 대부분의 점원을 비정규직으로 채운다. 인건비를 시간으로 계산하는 이마트도 마찬가지다. 그 비정규직, 양판점 점원으로 들어서기 전에는 어엿한 구멍가게의 사장님이었을지 모르는데, 지금은 양순한 비정규직이다. 비정규직은 규정에 얽매인다. 단순 작업이 반복되는 카운터 이외의 비정규직은 의자에 앉을 수 없다. ‘고객님’이 다가오면 웃는 얼굴로 반갑게 다가가 이 물건 저 물건을 들추며 시선을 끌어야 하고 ‘고객님’이 떠나면 흐트러진 물건을 다시 정리해야 한다. 가끔 휴게실에서 커피 뽑아 마실 수 있지만 곧 제 자리를 지켜야 한다. 이웃 매장의 비정규직과 이야기라도 잠시 나누려면 여간 눈치 보이는 게 아니다. 감시카메라보다 매서운 눈초리, 비정규직 점원의 태도를 살피는 비정규직 직원이 돌아다닌다. 끗발 높은 비정규직에 걸리면 4주간 교육이다. 물론 교육시간은 인건비 산정에 포함되지 않는다.
전국 100군데 지점에서 벌어들이는 이마트의 수익은 중앙으로 집중된다. 중소기업과 농촌, 그리고 노동자들이 어렵게 벌어들인 100군데 지방의 알량한 돈들이 빨려 나간다. 한 군데로. 언젠가 이마트 최고위 경영자의 운전기사에 대한 뉴스가 방송에서 흘러나왔다. 에피소드처럼. 한 번 신고 쌓아 둔 경영자의 구두를 몇 켤레 슬며시 챙겼다 고발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 운전기사를 해고했을 경영자는 구두 수집 취미를 가진 모양이다. 그 구두, 이마트에서 파는 물건과 격을 달리해도 한참 달리하겠지.
양판점은 리바이어던이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개구리의 왕이다. 우리에게도 왕을 보내달라는 개구리에게 제우스는 나무토막을 보냈다. 개구리 사회에 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한데 나무토막은 아무런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개구리의 행동을 전혀 통제하지 않으니 어떤 개구리도 나무토막을 숭배하지 않는다. 개구리는 다른 왕을 요구했고 혀를 쯔쯔 차던 제우스는 황새를 내려보냈다. 왕이 된 황새는 개구리에게 가혹한 규칙을 요구했고 그 규칙을 어길 수밖에 없는 개구리들은 황새에게 잡혀 먹혔다는 우화. 양판점이 그렇다. 중앙의 거대한 권력자인 양판점을 반겨 숭배하는 우리는 양판점이 요구하는 까다로운 규칙에 기꺼이 구속된다. 모셔놓고 공포에 떠는 우리의 리바이어던이다. 이마트가 들어서자 집값이 뛰었다고 반긴 우리 아파트 단지의 주민은 우화 속의 개구리와 다르지 않다.
요즘 우리 아파트 단지에 다시 현수막이 내걸렸다. 이번엔 작고 몇 개 되지 않는다. 화물터미널을 반대한다는 내용이다. 이마트가 들어선 부지보다 더 넓은 면적의 공토에 화물터미널이 들어온다는 소식에 일부 주민들이 구청으로 시청으로 몰려다니며 궐기하고 나선 것인데, 이마트가 들어선지 5년이 넘었으니 아파트 주민도 그 사이 상당히 바뀌었겠지. 이번 화물터미널 소식에 화가 난 주민도 5년 전 화물터미널 소식에 화를 낸 주민처럼 집값을 먼저 생각한다.
이마트가 들어선 화물터미널 부지의 주인은 언성 높이는 5년 전 주민들을 이마트 부지라는 걸 앞세우며 설득했고, 그 설득은 주효했다. 설득된 주민 중 상당수는 이마트 이후 화물터미널이 들어올 거를 알고 있었지만 데모는 힘을 잃었고 지금 다시 주민들이 모인다. 하지만 목소리는 훨씬 약하다. 화물터미널을 막을 위세와 거리가 멀다. 이마트로 들어가는 수많은 승용차는 앞으로 화물터미널을 들고나는 트럭들과 10차선 포장도로에서 엉킬 게 틀림없다. 소음도 대기오염도 늘어나겠지만 사고도 많이 일어나겠지. 물론 집값이 떨어질 수 있겠다. 이마트 프리미엄이 상쇄될 만큼. 조삼모사가 따로 없는 셈이다.
첫댓글 월요일에 올린 글의 뒷부분입니다. 요즘 이 게시판에 제 새 글을 올리려는 마음입니다. 한데 요즘 통 시간을 내지 못해 새글이 원활치 않네요. 그래서 조금 긴 글을 핑게삼아 쪼갰습니다. 앞의 글만 읽어 언뜻 아리송하셨을 텐데, 송구합니다. 이제 글이 모두 모였으니 의견을 나눠주시면 좋겠습니다. 요즘 제가 쓰는 글과 맥락이 조금은 닿고 있는 에세이입니다.
하도 혼을 빼 놓고 마음을 사특하게 만들어서 안 가고 싶지만 동네엔 없는 유기농 코너나 국내산 식료품을 그곳에 가면 살 수 있습니다. 죽전에 새로 생긴 이마트는 값이 어찌나 비싼지 꼭 사기를 당한 기분이 어처구니없게도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