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다큐멘터리 한 편을 만들어보자. 주인공은 ‘공동경비구역 JSA’로 거대한 성공을 거두며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영화제작자 심재명씨(명필름 대표). ‘접속’ ‘해피엔드’에 이은 이 영화의 성공으로 심씨는 젊은 여성들에게 영화계 울타리를 넘어 ‘꿈을 이룬 이’의 역할 모델이 되었다.
#1.프롤로그
인터뷰 대상자를 추천하려 생각에 잠긴 방송인 박경림 모습이 멀리 보인다. 사각형 얼굴이 화면 가득 클로즈업 되며 컷이 바뀌면 걸걸한 목소리.
⊙박경림-‘공동경비구역 JSA’를 통해 실력으로 여성 핸디캡을 극복한 ‘명필름’ 대표를 인터뷰해주세요. 그 에너지로 우리 영화계를 어떻게 바꾸고 싶은지 물어봐주시고요.
장면 바뀌면 ‘명필름’ 팻말이 붙은 서울 명륜동 한옥 나무 대문.
카메라가 사무실로 개조한 한옥 마당을 훑을 때 보이스 오버(화면 밖 목소리)가 깔린다.
⊙“영화계를 바꾸겠다는 생각보단, 제작자로 적어도 두 원칙은 지키겠다고 다짐할 뿐이죠. 내 자신과 명필름, 한국영화사에 부끄럽지 않을 작품을 만들겠다는 책임감, 그리고 일단 시작했으면 자신있게 밀고나간다는 소신입니다.”
말이 끝날 때 쯤이면 어느새 화면 안에 들어와있는 여성. 침착한 모습의 심재명(38)씨다.
#2.담장 밑
일요일 오후 4시. 마당에 내놓은 의자에 앉은 두 사람을 부감으로 내려다보던 카메라가 날렵하게 몸을 낮춰 심씨 얼굴로 다가가면.
⊙심재명-대학 졸업 후 서울극장 카피라이터 모집 공고를 봤어요. 어려서부터 영화를 무척 좋아했는데, (잠시 멈춘 뒤) 실제 영화사는 냉혹한 곳이더군요. 전 영화를 만들 때 출발은 순수해도 제작만큼은 철저히 따져가며 합니다.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걸 그때 배웠으니까요.
내레이션-몇해 전 종로3가 지하도에서 우연히 그를 본 적이 있다. 벽에 붙은 영화 포스터들을 꼼꼼히 뜯어보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끼고 돌아보면 인사해야지, 생각했지만 허사였다. 그는 끝내 뒤돌아보지 않고 포스터에 붙박여있었다.
#3.마당
⊙심-항상 여성임을 의식해요. 명필름 첫 영화도 페미니즘적 주제를 다룬‘코르셋’이었어요. 영화 속에서 여성성이 왜곡되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그간 한국영화는 남성 시각으로 만들어졌는데, 이제 여성 영화인들이 다른 시각으로 활력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질문자-(TV 연예 뉴스 화면이 자료로 삽입되면서)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은퇴 논란이 이는 심은하씨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심-은하씨는 사회 속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확고히 위치 정립을 하지못한 것 같습니다. 대중은 이제 이혼한 여배우에게도 박수를 칠 정도로 성숙했는데, 오히려 배우들이 퇴행적인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내레이션-그의 삶을 다룬 수필집을 내자는 제안을 전한 적이 있다. 예의바르게, 그러나 분명하게 거절했다. “커리어 우먼의 환상을 심어주는 폐해를 남기고 싶지 않아서”가 이유였다.
#4.사무실
책상 두개가 눈에 띈다. 친동생인 심보경 기획이사와 함께 쓰는 방.
책상엔 갖가지 자료가 치쌓여 책 하나 놓을 공간도 없다.
⊙질문자-‘공동경비구역 JSA’가 명필름 대표작이 됐는데요.
⊙심-시작은 작고 순수했는데 개봉 후 엄청난 파장이 이는 걸 보고 영화의 사회적 역할을 다시 생각했습니다. 외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내용적으로 다양한 분석을 받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웃으며) 흥행이 좀 덜 됐으면 훨씬 더 진지하게 평가받았을 것 같아요.
#5.툇마루
사양. 이은 감독과의 결혼생활이 화제에 오른다.
⊙질문자-생활 전체가 영화에 얽혀 있는 것 같습니다.
⊙심-하루 24시간이 영화로만 꽉 차 있죠. 답답하기도 하지만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좋아하는 일을 계속 할 수 있다는 건 큰 행복입니다. 우리 부부는 영화적 동지애가 99%를 차지할 거예요.
⊙질문자-영화를 빼면 삶에서 뭐가 남을 것 같습니까
⊙심재명-(잠시 생각한 뒤 또렷하게) 가족이 있습니다. 아이(딸)를 키우는 일은 제 인생에서 아주 소중한 일입니다.
⊙질문자-다음 인터뷰 대상자는 누구를 추천하시겠습니까.
⊙심재명-최근 여성민우회가 ‘아름다운 병원’으로 선정한 ‘은혜산부인과’ 장부용 원장이 어떨까요. 제왕절개율이 전국 최저라는데 그런 신념을 갖게 된 계기가 궁금하네요.”
#6.에필로그
심씨가 대문을 나서는 질문자를 배웅하고나서 화면이 완전히 어두워지면.
내레이션-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순간으로 대학 시절 프랑스 문화원에서 잔 모로의 ‘사춘기’를 보고난 뒤 안국동 길을 걸어나오던 일을 꼽았다. 초라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삶, 그리고 영화에 대한 열정이 초저녁 정적과 혼재된 그 귀가길을 그는 잊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