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원안씨의 기원과 갈래
태원안씨는 고려 말의 명장 안우(安祐)의 아버지 안만세(安萬世)를 비조(鼻祖)로 삼고 있다. 그런데 안우의 행적은 역사서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된 반면 안만세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에 찾아 볼 수 없다. 더구나 고려사 열전에 안우가 탐진인(耽津人)으로 되어 있고, 10세손으로 모두 문과에 급제한 홍(鴻), 봉(鳳), 곡(鵠) 세 사람의 문과 방목(榜目)에는 충주인(忠州人)으로 되어있어 이러한 자료만 살펴보면 탐진 안씨, 혹은 충주 안씨로 오인할 수도 있다.
안홍은 『을사록(乙巳錄)』이라는 책을 저술하였고, 안곡 또한 유고(遺稿)가 있었다 하니, 이 문집들이 발견된다면 태원안씨에 대한 많은 사실을 알 수 있을 듯하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으로서는 찾을 수 없고, 가장 확실한 기록은 안곡이 쓴 그의 형 안봉(安鳳)의 행장(行狀)이다. 그 행장에 “안우의 아버지는 중국 태원(太原) 사람이며,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순제(順帝) 때 예부상서(禮部尙書: 혹은 어떤 기록에는 예부시랑(禮部侍郞)이라 함. 예부상서는 조선조의 예조판서, 시랑은 참판에 해당한다)의 지위로 노국대장공주를 배종(陪從)하여 고려에 왔고, 고려에서는 예의전서(禮儀典書: 조선조의 예조판서에 해당)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상은 그 집안의 후손이 쓴 글인 만큼 과연 원나라의 예부상서였는지 하는 의구심이 가기도 하지만, 타국에 사신으로 파견될 때는 직함을 올려주는 관례가 있었으므로, 원래 관직이 예부 시랑이었지만 상서로 올렸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태원 사람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안곡의 글만큼 신빙성이 있는 사료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조상이 원 나라 태원 사람이라고 해서 자손들에게 하등 이익이 되거나 자랑스러울 것도 없고, 조선 건국 당시는 반원 친명파가 득세할 때였으므로 오히려 불리한 처우를 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태원(太原)은 춘추 시대 진(晉) 나라의 수도였으며, 진나라 제후들의 위패를 모신 진사(晉祠)가 있는 곳이다. 지금은 중국 산서성의 성도(省都)이며, 북경 서남쪽 514km에 위치한 인구 330만 정도의 대도시이다.
그렇다면 앞서 언급한 충주인이니, 탐진현 사람이니 하는 기록은 어찌된 것일까? 조선 시대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주민등록등본에 해당하는 준호구(準戶口)를 반드시 제출해야 한다. 안봉과 안곡이 과거에 응시할 당시에 비록 그들이 서울에 거주하고 있었더라도 호적지는 충주였을 것이고, 그리하여 충주인으로 기록된 것이지 충주가 본관이라서가 아니다. 사실 그 당시에는 호적지와 본관이 일치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태원안씨의 경우는 본관이 중국의 태원이었으므로 그것을 그대로 기재할 수 없었기에, 호패를 발급 받고 생활의 터전이었던 충주에 호적이 등록되어 있었으므로, 막연히 충주 안씨로 불리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안우 열전에 탐진인(耽津人)으로 기록된 것은 어째서일까? 중국에는 탐진이라는 곳이 없고, 고려시대의 탐진현과 도강현(道康縣)이 하나로 합쳐진 것이 현재의 전라남도 강진(康津)이다. 고려사가 편찬된 것은 안우가 타계한 지 거의 100년 뒤이다. 그렇다면 안우의 자손이 3~4대까지 내려왔을 것이고, 이 중 일부가 전남 강진에 자리잡고 살았을 수 있다. 그러면서 과거에 응시하면서 그의 조상을 안우로, 본적지를 탐진으로 기록하였기 때문에 안우 열전을 기록하는 자가 이것을 참고로 하여 탐진인으로 기록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요약하면 공민왕이 원나라로부터 돌아와 고려왕으로 즉위할 때(1352년) 원나라의 예부시랑으로 노국 공주를 모시고 있던 안만세가 그의 아들 안우와 함께 고려로 왔다. 이 때 안우는 40여세의 나이로 공민왕이 원나라에서 노국대장공주와 결혼할 때부터 그의 부친과 함께 공주와 공민왕을 수행해왔다. 고려에 왔을 때 안만세는 이미 나이가 60세가 넘어 활동을 별로 한 적이 없고 안우는 40세의 한창 나이로 곧바로 원의 사절 및 홍건의 전투에 큰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태원안씨의 족보에 포함된 세계도(世系圖)를 보면 시조 만세(萬世)로부터 8세 인지(仁知)까지가 독자(獨子)로 되어 있다. 즉 시조 만세가 우(祐)를 낳고, 우는 장성현감을 지낸 덕신(德新)을 낳고, 덕신은 곡산(谷山) 부사를 지낸 세평(世平)을 낳고, 세평은 남원 부사 도적(圖積)을 낳고, 도적은 성균관 박사인 창(昌)을 낳고, 창은 승사랑(承仕郞) 을생(乙生)을 낳고, 을생은 예빈시 주부(禮賓寺主簿) 인지(仁知)를 낳고, 인지에 와서야 비로소 평산 부사(平山府使) 맹손(孟孫)과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중손(仲孫) 두 아들을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과연 족보대로 8세에 이르기까지 독자(獨子)로 내려 왔을까, 아니면 족보에 다른 자손들이 누락된 것일까? 이 점에 대한 현재 자손들의 견해는 족보대로 독자라는 설과 거기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는 설로 나뉘어 있다.
1363년 안우가 억울한 죽음을 당할 때 그의 아들 덕신이 10여세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덕신의 출생 연대는 1350년 경으로 추정되며 그 밑으로는 출생 년도가 기록되지 않았고, 7세 을생에 와서야 홍희(洪熙) 을사 3월 1일 생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서기로 따지면 1425년으로 세종 7년이다. 덕신의 출생으로부터 을생의 출생까지는 75년간이며, 이 사이에 세평과 도적과 창이 태어났으므로 평균 약 19년이다. 그렇다면 18세에서 20세 사이에 대를 이었으므로 네 사람이 모두 장자일 가능성이 높다. 지방 수령의 벼슬을 한 5대가 모두 열아홉 스물에 첫 아들을 낳고, 그 후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하기 어렵다. 더구나 10세 봉(鳳)이 죽었을 때 그의 장지(葬地)를 처음에 양주군 해등촌(海等村) 선산에 정했는데, 일가(一家)의 친족들이 선조의 묘에 너무 바짝 붙였다고 반대하여 결국 광주군 마천리(廣州郡馬川里)로 바꾸었다는 내용이 안봉의 행장에 적혀 있다.
만약 족보대로 안우 이후 계속 독자로 내려왔다면 안봉의 장례식에서 그의 묘지에 대해 반대할 친족이 없었을 것이다. 당시 기록된 친족에는 동생 안곡과 그의 아들 및 손자가 있고, 문과에 급제한 종형 안홍은 이미 고인이 되었고 그의 아들 승업이 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반대한 친족들이 있었다는 것은 안우 이래 5대에 걸쳐 계속 독자로 내려오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왜 족보에는 독자로만 전해온 걸로 되어있는 것일까? 그것은 후에 족보를 만들 때 다른 조상들이 명단에서 누락되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안우는 비명으로 타계하였지만 그를 모함한 김용 역시 다음 해에 역모로 처형되었으므로, 안우는 곧바로 명예를 회복하였고, 문종 때에는 고려의 공신으로 숭의전(崇義殿)에 배향되었다. 안우의 자손들이 조선의 개국에 적극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고려를 위하여 끝까지 충절을 고집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중국에서 건너온 사람들로 이 나라의 정치 변동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국외자요 방관자의 입장에 놓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공신의 반열에 들었으므로 공신의 자손은 장자에 한하여 벼슬을 주게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장자들은 모두 고을 수령 이상의 벼슬을 하였고, 이 사람들만 기억 속에 혹은 기록으로 집안에 전해져서 족보에 마치 독자로 계속 내려온 것처럼 기재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족보에 의하면 4세 세평(世平)이 문과에 장원 급제하고, 5세 도적(圖積)이 문과에 급제했다고 적혀있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 문과에 급제한 사람은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 모두 등재되어 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태원안씨 가문에서는 서운하겠지만 사실을 밝히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입장에서는 공식 장부인 『문과방목』을 더 신뢰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안곡이 쓴 안봉의 행장에도 세평(世平)은 유학(幼學)이요, 도적(圖積)은 남원부사로 기재되었을 뿐 문과 급제의 기록은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아마 세평(世平)과 도적(圖積)이 각각 과거와 유사한 취재(取才) 등의 시험에 합격하였을 것인데, 후손들이 이를 문과 시험으로 오인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조선시대에는 문과 이외에도 취재(取才) 백일장 등 많은 종류의 시험이 있었다. 그래서 문과 급제 없이도 고을 수령을 맡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두 사람은 공신의 장자였으므로 당연히 자격이 주어졌다고 할 것이다.
조선 초기에 태원안씨 일가에서는 맏 종손 계열이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을 중심으로 생활의 터전을 지키며 여러 고을의 수령직을 맡아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집안에서 전해 오는 이야기도 그러하고 또 6세 창(昌)의 묘가 개성에 있는 점으로 미루어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7세 을생(乙生)으로부터는 3대에 걸쳐 경기도 양주군 해등촌(京畿道楊洲郡海等村)에 묘소를 정한 것으로 보아 이곳을 근거지로 하며 한양을 오갔을 것으로 보인다. 시기적으로 보면 조선 초기부터 9세 맹손(孟孫)이 죽은 1547년 즉 명종 2년까지로, 안우의 죽음으로부터 180여 년이다. 보통 1세대가 교체됨에 30년이 걸리는데 20여 년밖에 걸리지 않았음은 초기 족보에 장자만 기재되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첫댓글 좋은정보 감사합니다 읽어보아도 이해가잘되고 헷갈이네요
관건은 오성군 안우장군이 태원안씨 안만세의 아들이냐? 탐진안씨 안원린의 아들이냐? 입니다 현재는 탐진안씨 안원린의 아들로 순흥안씨 경신보에 등재가 되어 있어나 태원안씨 족보에도 똑 같은 내용으로 등재가 되어 있습니다.
상세한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