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기엔 佛 心 이 가득합니다 ⊙
룸비니산악회 2023"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순례산행 !
대구의 진산으로 1980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최고봉인 주봉 비로봉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봉과 서봉을 거느리고 있으며, 마치 봉황이 날개를 편 것처럼 뻗쳐있다.
정상의 남동쪽으로는 염불봉, 태실봉, 인동, 노족봉, 관봉등이 연봉을 이루고 서쪽 으로는 톱날바위, 파계봉, 파계재를 넘어 여기서 다시 북서쪽으로 꺾어져 멀리 가산을 거쳐 다부원의 소아현에 이르고 있다.
특히 동봉일대는 암릉과 암벽이 어울려 팔공산의 경관을 대표하고 있다. 봉우리의 암벽은 기암이다.
동쪽의 은해사, 남쪽의 동화사, 서쪽의 파계사 및 북쪽의 군위,삼존석굴(국보 109호) 이외에도 많은 문화유적이 산재해있고 크고 작은 사찰과 암자가 많다.
팔공산 관봉(850m)에 평풍처럼 둘러쳐진 암벽을 배경으로 조성된 단독 원각상 갓바위는 보물 제 431호로 지정 되어 있으며, 본래의 이름은 관봉석조여래좌상으로 갓바위라는 이름은 이불상의 머리에 자연판 석으로 된 갓을 쓰고 있는데서 유래 된 것이다. 갓바위는 누구에게나 한가지 소원은 들어준다는 속설을 간직하고 있다.
대구의 진산인 팔공산은 산세가 수려하고 갓바위, 동화사등 볼만 한곳도 많아 특정 계절에 치우치지 않고 사계절 두루 도시민의 휴식처로 인기가 있다.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
비로봉(毘盧峰)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로 16km에 걸친 능선 경관이 아름다우며 대도시 근교에서는 가장 높은 산으로 도시민에게 휴식처를 제공하고 도립공원으로 지정(1980년)된 점 등을 고려하여 선정되었다
동화사(桐華寺), 은해사(銀海寺), 부인사(符仁寺), 송림사(松林寺), 관암사(冠岩寺) 등 불교문화의 성지로 유명하다
팔공총림 동화사는1,500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한국불교의 대표 총림으로서, 조계종 종정예하이신 진제 법원 대종사께서 주석하시며 선원, 율원, 강원에 100여 명의 대중이 상주하며 여법히 정진하는 청정 수행도량입니다.
세계최대의 석불인 약사여래대불을 비롯한 수많은 보물과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동화사는 동아시아 10대 관광명소로 지정되어 연중 내내 수백만 명의 내외국인들이 참배하는 동양의 대표 성지입니다.
또한 국내 유일의 선(禪) 체험관인 불교문화관에는 오색영롱한 부처님 진신사리 7과가 모셔져 있으며, 법화경 7만자를 석각과 판각의 황금경판으로 조성하는 대작불사가 진행중입니다.
약사여래대불 24시간 개방으로 365일 꺼지지 않는 수행기도 도량으로 거듭나고 있는 동화사는 대구시민들의 정신적인 쉼터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총림이란?총림(叢林)은 선(禪)•교(敎)•율(律)을 겸비하고 학덕과 수행이 높은 본분종사인 방장(方丈)의 지도하에 스님들이 모여 수행하는 종합적인 수행도량이다. 범어로는 빈타바나(vindhyavana)라고 하는데, 많은 대중이 화합해 한 곳에 모여 사는 것이 마치 수목이 우거진 숲과 같다고 해서 이렇게 부르고 있다.
총림(叢林)이 되기 위해서는 승려들의 참선수행 전문기관인 선원(禪院)과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 전문교육기관인 율원(律院), 염불 전문교육기관인 염불원(念佛院) 등을 모두 갖춰야 한다. 그러나 염불원을 별도로 갖춘 사찰이 거의 없다 보니 일반적으로 총림이라고 하면 “선원, 강원, 율원을 두루 갖추고 있는 사찰”이란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총림은 일반 사찰과 달리 총무원으로부터 상당한 자율권을 보장받아 사찰을 운영한다. 또, 큰 사찰이나 선원의 최고 어른스님을 '조실'이라고 하지만 총림에서의 최고 어른스님은 방장(方丈)스님이라고 칭하고 있는데 이는 ‘일방의 큰 선지식(一方之師)’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방장스님은 총림의 모든 대중들을 통리하며 화합을 이루고, 각종 행사와 결제ㆍ해제 때 법어를 통해 불제자들을 이끌어 가는 지대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팔공총림 동화사 국제관광禪체험관(법화보궁)은 동화사의 상징인 약사여래대불 지하에 조성된 전국 유일의 선(禪)을 테마로 한 체험관입니다.
2012년 4월 1일에 개관한 체험관은, 지하 1층 2710.2㎡ 규모로 전통禪수행관, 초조대장경 밀레니엄관, 禪문화관, 천년도량의 터 팔공산, 정진의 터, 명상의 터, 다도의 터 등 7가지 테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선체험관은 한국 선불교의 역사와 정신을 재정립 하고, 팔공산과 동화사를 찾는 내외국인 관광객들에게 동양 정신문화의 정수인 간화선 수행법을 소개하며, 글로벌 트렌드인 선, 명상, 수행 등을 신한류 문화상품으로 개발해 관광산업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하는 등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천년 고찰로 석조 통일약사여래대불로 유명한 동화사가 체험관을 통해 선을 테마로 한 독특한 문화관광지가 되고, 특히 생활 속의 선 수행을 전파함으로써 현대인들에게 마음의 번뇌, 갈등을 치유하고 힐링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또한 법화경 7만자를 서각, 석각의 황금경판으로 각각 조성하는 대작불사가 진행 중이며, 2014년 7월 1일 능도 덕문 주지스님이 소장하고 있던 부처님 진신사리 7과를 이운해 모심으로써 법화보궁(法華寶宮)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이 난야(蘭若)는
스님들의 수행공간
입니다.
참선수행을 위하여
출입을 금지합니다."설법전 아래 돌계단을 내려와 동화사 계곡 위의 해탈교를 건너 위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오른편에 이런 표지판이 길을 막는다. 난야(蘭若)란 인도어 ‘아란야(Aranya)’를 한자로 음역한 말로 적정처(寂靜處), 즉 ‘고요한 곳’이라는 뜻이다. 바로 동화사 금당선원(金堂禪院)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금당선원은 동화사 경내에서 가장 고즈넉한 수행처다. 선원 외에 수마제전과 극락전, 천 년이 넘은 3층석탑과 석등이 마당에 자리해 있다.
금당선원은 한국불교의 대선지식이신 진제 법원 종정예하의 지도 아래 전국에서 운집한 발심한 납자(衲子)들이 자신의 본래면목을 깨닫기 위해 화두와 씨름하며 용맹정진하는 한국 제일의 수행공간이다.
참선공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눈밝은 선지식의 가르침과 지도이다. 금당선원에서 정진하는 납자들은 공부하다가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즉시 선지식을 찾아뵙고 점검을 받을 수 있기에 사견(邪見)에 떨어져 시간을 허송하는 일이 없다. 하안거, 동안거 결제 법문뿐만 아니라 매월 음력 보름에 종정예하의 고준한 선(禪) 법문을 들으며 신심을 다지고 정진에 매진할 수 있다.
금당선원에서는 석 달간의 하안거, 동안거 외에도 봄ㆍ가을 산철에 두 달씩 정진하고 있다. 결제 기간 중에는 아침 발우공양과 사시 법공양을 행하며, 중간 죽비는 치지 않는다.
수많은 선사들을
배출한 선 수행의
중심지한국불교의 힘은 청정 수행의 풍토이고, 청정 수행의 핵심은 선방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동화사 금당선원은 한국불교의 선맥을 이은 역대 선사들을 배출해 낸 선 수행의 중심지다.
1900년 경허 스님이 금당선원을 개원한 이후 동광, 남옹, 고암, 인곡, 석우, 승찬, 효봉, 구산, 향곡, 서옹 스님 등 수많은 고승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1925년에는 동광(東光) 스님이 금당선원에서 안거했다. 이때 남옹(南翁), 고암(古庵), 인곡(仁谷) 스님 등이 함께 정진했다고 한다. 1927년에는 조실 허운송(許雲松) 스님이 여기서 후학을 지도했다.
성철(性徹, 1912~1993) 스님이 29세 되던 1940년 겨울 동안거 때 조주 선사의 ‘무(無)’자 화두를 타파해 오도송을 읊었던 곳도 바로 금당선원이다.
1942년에는 남옹 스님이 입승을 맡고 9~14명의 납자들이 금당선원에서 안거하였다. 1943년에는 15명, 이듬해에는 학봉(學峯) 스님과 17명이 안거하였다. 정화운동 시절 조계종 3대 종정을 지낸 석우 스님 역시 1956년부터 1958년 2월까지 금당선원을 이끌었다. 1957년부터 1960년까지는 송광사 조계총림의 방장을 지낸 승찬(僧讚) 스님이 선원의 입승을 맡았다.
이처럼 금당선원은 일세를 풍미한 많은 선지식들이 거쳐 간 곳이다. 효봉 스님은 1958~1959년 이곳 선원에서 수행하고, 다시 1963년부터 1966년 5월까지 선원의 조실방인 미소실(微笑室)에서 후학을 길렀다. 당시 구산(九山, 1909~1983) 스님도 주지를 맡아 선원에서 정진하였다. 1970년에는 서옹(西翁, 1912~2003) 스님이 조실을 맡았고, 1976년에는 큰방을 증축하여 대중의 선방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후 1977년까지는 향곡 스님이 조실로서 수행을 지도하였다. 1980년 동화사는 종단의 수좌도량으로 지정되었다. 수좌의 대표로서 범룡 스님이 주지 및 선원의 선덕 소임을 맡고, 관응(觀應, 1910~2004) 스님이 조실을 맡았다.
수많은 제국(帝國)이 부침을 거듭했어도 청빈과 가난의 공동체인 승가(僧伽)는 여전히 싱싱하게 살아있다. 그것은 일상에 매몰되지 않고 치열하게 수행하는 스님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불교의 중심을 이루는 영남불교의 성지로 산문을 연 팔공산 동화사 금당선원은 오늘도 ‘자신의 본 마음의 성품’을 보기 위해 수행자들이 치열하게 정진하고 있다.
금당선원의
역사금당선원 자리는 통일신라 때 금당암이 있던 곳으로 832년 심지(心地) 왕사가 동화사를 중창했을 당시의 영역도 바로 이곳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 동화사는 현재의 수마제전 부근에서 작은 암자로 출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때 금산사 진표 율사로부터 법주사 영심 대사로 전해진 불골간자를 심지 왕사가 받아 팔공산에 와서 던졌고, 그 불골간자가 떨어진 자리에 동화사를 지었다고 한다. 바로 지금의 금당선원 자리다.
동화사에 선원이 생긴 것은 400여 년 전으로 추정되지만, 금당선원이라는 정식 이름으로 개원한 것은 1900년 경허 스님에 의해서다. 경허 스님은 한국불교의 근현대를 개창한 대선사로 당시 극락전, 수마제전, 청풍당 등의 전각으로 구성된 금당암(극락전)에서 납자들을 지도하며 한국의 선풍을 크게 일으켰다.
역대 선지식의 중요한 수행처였던 금당선원은 한동안 문을 닫았다가 1994년 현 방장스님이신 진제(眞際) 대선사께서 금모(金毛) 스님 등 수좌들과 힘을 모아 다시 개원하였다. 당시 주지였던 무공(無空) 스님이 적극 후원하여 30명 안팎의 스님들이 모여들었다. 1996~1997년에는 진허(眞虛) 스님이, 1998년에는 지해(智海) 스님이 선원장을 맡았다. 1999년부터 2014년까지는 영진스님, 지환스님, 효광스님이 선원장을 맡았으며 그 이후로 지용(智勇)스님이 선원장을 맡고 있다. 그리고 현 종정예하이신 진제 대선사께서 1994년부터 지금까지 조실로 계신다.
팔공산 은해사 (대한불교 제10교구본사)
은해사는 지난해부터 입장료와 주차료가 무료이다.
주차를 하고 은해사를 다녀와도 되지만 주변 암자를 가고자 할때는 차를 일부 가지고 천왕문을 통과하기도 하니 잘 생각하셔서 결정하셔야 한다.
저희도 백흥암과 중암암을 다녀오기 위해 어느 시점까지는 차를 가지고 갔고 은해사는 내려오면서 들렀지만 본사 은해사부터 알기쉽게 포스팅을 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본사 영천 팔공산 은해사
은해사는 조선 31본산, 경북 5대 본산,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의 자리를 지키는 경북지방의 대표적 사찰이다.
그리고 교구 본사중 본존불로 아미타불을 모시는 미타도량으로도 유명하다. 신라 41대 헌덕왕 1년(809년) 혜철국사가 해안평에 창건한 사찰이 해안사인데 이 해안사로부터 은해사의 역사가 시작된다. 현존하는 암자만도 여덟 개가 있고 말사 숫자가 50여 개에 이르고 한국 불교의 강백들을 양성, 교육하는 "종립 은해사 승가대학원"이 있는 사찰이기도 하다.
불, 보살, 나한 등이 중중무진으로 계신 것처럼 웅장한 모습이 마치 은빛 바다가 춤추는 극락정토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은해사이다.
또 은해사 주변에 안개가 끼고 구름이 피어 날 때면 그 광경이 은빛 바다가 물결치는 듯 하다고 해서 은해사라고도 한다.
신라의 진표율사는 "한 길 은색 세계가 마치 바다처럼 겹겹이 펼쳐져 있다. (一道銀色世界 如海重重)" 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은해사는 현재 말사 39개소, 포교당 5개소, 부속암자 8개소를 관장하고 있는 대본사이다. 1943년까지만 하더라도 은해사에는 건물이 35동 245칸에 이르러 대사찰의 위용을 자랑했지만, 현재 은해사 본사 내에는 19개 건물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은해사)
주차장 끝자락 한 눈에 보기에도 크기가 상당한 팔공산 은해사 라는 편액이 붙은 일주문을 지난다.
편액의 글씨는 오랫동안 해인사 주지와 은해사 조실을 지낸 동곡당 일타 대종사(1929~1999)가 쓴 글씨라고 되어있다.
아래층엔 범종이 달려 있다.
위쪽으로는 가운데 법고 대신 커다란 둥근 금고가 걸려있다.
금구(金口) 또는 반자(飯子)라고도 하는 쇠북을 말한다. 사찰의 종루나 처마 밑에 걸어두고 공양시간을 알리거나 대중을 집합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지만 요즘은 법당에서 예불을 올릴 때 종송과 함께 의식에 사용되며, 주로 청동으로 만든다. 고 하는데 종각에 있기는 흔하지 않다.
삼천불전은 종무소와 마주보며 있으며 삼천불의 불상을 모신 전각을 말한다.
은해사 삼천불전
삼천불전은 종무소와 마주보며 있으며 삼천불의 불상을 모신 전각을 말한다.
가운데 주불은 아미타불 좌우 협시로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모셨는데 후불탱화가 몹시 화려하고 인상적이다.
최근에 조성되었는지 한창 삼천불과 복장용 불감을 묘연하고 있는 중이었다.
주 전각들이 있는 은해사 극락보전이 있는 마당으로 가 본다. 왼쪽으로는 설선당이 오른쪽으로는 심검당 그리고 가운데가 중심전각인 극락보전 즉 대웅전이다.
입구에는 쌍 사자가 받쳐든 멋진 석등 두 기가 양쪽으로 있다.
은해사 극락보전(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67호)
입구에 양쪽으로 행사때 괘불을 걸어서 법회를 보는 당간 두 기가 서 있다. 설명글에는 대웅전이라고 표기가 되었지만 편액은 극락보전이다.
은해사는 원래 해안사로 신라 현덕왕 1년(809) 혜철국사가 운부암 아래 해안평에 지었다. 그러나 인종 1년(1544)에 큰 불이 나서 없어졌다가 명종 1년(1545)에 천교화상이 현재 위치로 옮겨 다시 세웠다.
■은해사 극락보전 삼존불
후불탱화 (경북도 유형문화재 342호)
가운데 주불은 아미타불 좌보처 관세음보살 우보처 대세지보살 입상을 모셨다.
관음보살은 정병을, 대세지보살은 서책이 놓인 연봉을 잡고있다.
후불탱화는 세마포(細麻布)에 종이를 여러 겹으로 배접한 바탕 위에 중앙의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협시보살만을 배치한 아미타삼존도이다. 남색 하늘 바탕에 갈색과 녹색 구름을 그렸고, 부처와 보살상을 홍색과 녹색 위주로 그려 다소 무거운 느낌을 주지만 세련된 필치를 보이고 있다.
그림의 아랫부분에 적힌 화기(畵記)에 따르면 이 후불탱화는 조선 영조 26년(1750)에 화원(畵員) 보총(普摠)·처일(處一) 등에 의해 조성되었다고 한다.
삼존불 불단 위 천정을 보면 용머리 둘과 가운데 그리고 닫집 가운데도 독특한 용머리가 있고 화려한 새 두마리도 독특하다.
■극락보전 칠성탱화
■극락보전 삼장보살탱화(경북도 유형문화재342호)
삼장탱화는 세마포 다섯 쪽을 연결하여 종이를 여러 겹으로 배접한 바탕 위에 가운데에 천장보살, 왼쪽에 지장보살, 오른쪽에 지지보살의 3대 보살을 배치하고, 그 주위에 각 보살의 협시 및 권속들을 그린 것이다. 작품의 제작시기 및 예술성에 있어 후불탱화와 유사하다.
화기에 의하면 이 삼장탱화는 조선 영조 31년(1755)에 화원 상오(常悟)·관령(貫伶)·성청(性淸)·성징(性澄) 등 12명에 의해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라고 한다.
■은해사 괘불탱(보물 제1270호)
자료출처 문화재청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이 열릴 때 법당 앞 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기 위해 만든 대형 불교그림를 말하는데, 이 불화는 거대한 화면에 불을 단독으로 그린 형식으로 비단바탕에 채색되었다.
이 괘불의 불(佛) 좌우로 대칭되게 장식을 넣어 자칫 단조로워지기 쉬운 화면을 조화롭게 나타내었다. 녹색의 머리광배에 붉은색의 옷을 입고 있으며, 둥근 얼굴에는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어깨선 또한 둥글게 처리되어 전체적으로 원만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를 나타낸다. 화면 윗부분의 양쪽에는 새와 덮개 장식이 있고 중앙부의 양쪽으로는 모란이 배치되어 있어 불세계의 평화스러움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황토바탕에 붉은색과 녹색이 주로 사용되었으며 필치가 매우 정밀하면서도 세련되어 활기찬 인상을 준다.
영조 26년(1750)에 제작된 이 괘불은 연꽃이 활짝 피어난 연못으로부터 천상세계로의 상승을 나타낸 상징적인 화면구성을 하고 있으며 원만한 형태, 세련된 필선, 적절한 색의 조화 등이 매우 돋보이는 18세기 불화 중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문화재청)
극락보전 뒤쪽으로 전각 하나가 있는데 단서각이라는 흔히 보지 못한 전각의 이름이다.
설명글이 잘 되어 있어 쉽게 이해가 간다.
나한을 모신 전각 나한전을 말함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