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李舜臣)과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대화
영화 <명량>이 1천7백만 관객을 끌어모으며 한국영화사에 흥행신기록을 세웠다. 이 영화에도 나오듯 당시 이순신 장군에 맞선 일본군 장수는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소설사 복거일 선생은 지난 해 7월 낸 책 [역사가 말하게하라 :대(對)]에서 이순신 장군과 와키자카의 가상 대담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한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펼쳣던 인물들의 가상 대담을 저술한 책이다.
책 중에 나오는 이순신 장군과 와키자카의 가상 대담을 전재한다.
[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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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 |
조선의 장군(1545-1598). 시호는 충무(忠武). 1576년(선조 9년) 무과에 급제하여, 1586년(선조 19년) 함경도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의 조산만호(造山萬戶) 겸 녹도둔전사의(鹿島屯田事宜)가되었다. 그 해 가을에 오랑캐가 침입했을 때 분전했으나 문책을 받아 해임되었다. 그 뒤 전라도 순찰사 이광에게 발탁되어 조방장(助防將)이 되었고, 이어 선전관, 고사리첨사(高沙里僉使), 만포첨사(滿浦僉使), 진도군수(珍島郡守)와 같은 직책을 맡았다. 1591년 2월 우의정 유성룡의 추천으로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그는 곧 일본과의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힘써 준비했다. 특히, 새로운 개념의 전선인거북선(龜船)을 창안해서 건조했다. 1592년 일본군이 침입하자,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협력하여 일본 함대들을 잇달아 깨트리고 제해권을 확보했다. 그런 공적으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어 온 조선 수군을 지휘했다. 1597년 1월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일본군의 반간계(反間計)에 속은 조정에 의해 해임되고 한성으로 압송되어 고문 끝에 사형을 선고받았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정탁(鄭琢)의 변호로 가까스로 형이 면제되어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했다. 그의 후임인 원균의 실책으로 조선 함대가 칠천량 해전에서 괴멸되자, 1597년 8월 다시 수군통제사가 되었다. 남은 12척의 배로 명량 해전에서 일본 함대를 깨트려 전라도의 제해권을 회복했다. 1598년 7월 수사제독 진인이명의 수군을 이끌고 오자, 함께 작전을 펴서 순천성의 고니시 유키나가 군대를 공격했다. 일본군이 조선에서 철수할 때, 고니시의 군대를 끝까지 포위하고 구원하러 온 일본 함대를 11월에 노량에서 크게 깨트렸다. 임진왜란의 마지막 싸움인 이 해전에서 총에 맞아 전사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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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카자카 야스하루 |
일본의 장군, 정치가 (1554-1626).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을 암살한 아케찌 미쓰히데(明智光秀)를 섬겼으나, 1582년 아케찌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패사한 뒤엔 도요토미의 측근이 되었다. 1587년 도요토미가 규슈를 정복할 때와 1590년 오다와라(小田原)를 포위해서 호오조오씨(北條氏)를 공격했을 때, 도요토미의 함대의 일부를 지휘했다. 1592년 일본이 조선이 침입했을 때, 육전과 해전에서 활약했다. 한산도해전에서 70여 척의 함대를 이끌고 이순신의 조선 함대와 싸워, 함대를 거의 다 잃고 가까스로 탈출했다. 1597년의 정유재란에선 제7진으로 조선에 다시 침입했다. 1597년 7월 칠천량 해전에 참가해서, 원균이 이끈 조선 수군을 완파했다. 8월엔 남원 싸움에 참가했다. 이어 9월에 일본 함대의 일원으로 서쪽으로 진출했다가 명량 해전에서 이순신의 조선 함대에 패배했다. 1600년의 ‘세키가하라(關原) 싸움’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秀賴)를 지지하는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의 군대에 속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군대로 전향해서 도쿠가와의 승리에 공헌했다.
<대담>
사회: 두 분은 싸움터에서 여러 번 맞서셨지만, 가까이서 대면하신 것은 처음이시지요?
이순신: 그렇습니다. 와키자카 장군, 반갑습니다.
와키자카: 이 장군, 정말로 반갑습니다. 이리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사회: 조선에선 임진왜란이라 불리고 일본에선 ‘분로쿠. 게이쪼의 역’이라 불리는 전쟁은 참전한 조선, 일본, 중국 모두에게 역사적 변곡점이 되었습니다. 후세에 미친 영향이 워낙 커서, 전쟁이 끝난 지 4백 년이 넘었지만, 여진(餘震)은 아직도 느껴집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타이코오(太閤)가 전쟁을 일으킨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와키자카: 타이코오께서 명의 정복에 나서신 사정에 대해서 후세의 역사가들은 여러 가설들을 내놓았습니다. 아시카가(足利) 바쿠후의 쇼군(將軍)들이 중국에 스스로 신하라 몸을 낮추었다는 사실에서 자존심이 상했다는 주장도 있고, 사회 안정에 큰 위협이 되는 군사들을 처리하려 했다는 주장도 있고, 출신이 미천해서 자신의 영지와 직할군이 없었던 터라 조선 출병을 통해서 자신의 직할군을 만들려 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타이코오께선 처음부터 명을 정복해서 제국을 세우려 하셨고 조선에 출병한 것은 그런 정복 과정의 첫 단계였다는 점입니다. 그런 야망이 없었다면, 바다를 건너는 정복 사업에 나설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다른 요인들은 정복 사업을 정당화한 부차적 요인들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타이코오께서 ‘정명(征明)’을 처음 언급하신 것은 1585년 간빠쿠(關伯)가 되신 바로 뒤인데, 당시엔 아직 저항 세력이 곳곳에 남아 있어서 정권이 안정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타이코오께서 ‘정명’의 실행을 밝히신 것은 1590년 동북부지역을 평정하고 돌아오시면서 고니시 유키나가와 모오리 요시나리(毛利吉成)에게 대륙침공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우라고 지시하셨을 때입니다.
사회: 명을 정복해서 제국을 세운다는 계획은 너무 무모한 생각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에선 반대하는 목소리가 없었습니까?
와키자카: 중국 정복은 결국 무모한 일이었다는 것이 드러났지요. 그러나 당시 ‘정명’이 무모하다고 얘기한 사람은, 내가 아는 한, 없었습니다. 중국 정복을 처음 얘기한 사람은 실은 오다 노부나가 우대신(右大臣)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의 군사 지도자들에게 중국 정복은 결코 허황된 꿈으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서부 일본 사람들은 몇 백 년 동안 왜구(倭寇)로 중국과 조선의 해안 지방들을 약탈했으므로, 중국의 방비가 허술하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중국이 문관들을 우대해서 싸움에 약하다는 실정도 잘 알아서, 당시 우리는 명을 ‘장수국(長袖國)’이라고 불렀습니다. ‘소매 긴 옷을 입고 무슨 싸움을 하겠느냐?’는 비아냥이었지요. 그래서 중앙 정부가 주관하는 본격적 원정은 서부 지역 다이묘(大名)들과 무사들에겐 매력적이고 실제적인 사업으로 비쳤습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당시 일본 사회는 아주 역동적이었습니다. 오랜 전국시대가 끝나고 사회가 통합되자, 갑자기 힘이 넘쳤습니다. 그래서 둘레의 작은 나라들에게 복속을 요구했고 조선에 대해서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 대외적 팽창의 목표로 중국 대륙이 떠오른 것은 자연스러웠습니다.
이순신: 많은 나라들로 나뉘어 서로 싸우던 전국시대가 끝나고 하나로 통합되자, 일본사회가 문득 힘이 넘쳤다는 얘기가 흥미롭네요. 중국 역사에도 비슷한 경우들이 있잖아요? 전국시대가 끝나고 진(秦)에 의해 통일되자, 중국이 갑자기 사방으로 팽창했지요. 그리고 많은 나라들이 흥망했던 남북조시대가 끝나자, 바로 수와 당이 강대한 제국이 되었지요. 서양 역사에도 그런 경우들이 많습니다. 두드러진 경우는 작은 도시국가들로 나뉜 그리스가 마케도니아에 의해 통일되자, 바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제국이 나왔지요. 현대엔 많은 공국들과 도시들의 연합이었던 독일이 프로이젠에 의해 통일되자, 단숨에 유럽에서 가장 강한 제국이 되었습니다.
와키자카: 그 말씀을 들으니,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분로쿠. 게이쪼의 역’에서 우리 일본군이 지닌 조총이 큰 몫을 했습니다. 조총은 원래 1543년에 규슈 남쪽 다네가시마(種子島)에 표류한 포르투갈 사람들이 준 화승총을 모방해서 만든 것이었습니다. 당시 일본 사람들은 ‘뎃포(鐵砲)’라고 불렀습니다. 일본장인(匠人)들은 이 무기를 개량해서 점점 위력적인 무기로 만들었습니다. 이 새로운 무기가 지닌 가능성을 일찍 깨달은 오다 노부나가 우대신은 1575년 다케다씨(武田氏)의 군대와 싸운 ‘나가시노 싸움’에서 뎃보로 무장한 보병들로 적의 기병들을 크게 깨트렸습니다.
그 싸움에서 뎃보의 위력이 입증되자, 모두 뎃보를 효과적으로 쓰는 방법을 연구하고 실험했습니다. 그래서 전술과 병제가 근본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싸움이 벌어지면, 먼저 뎃보조(鐵砲組)가 사격합니다. 뎃보조가 다시 장전하는 사이, 활을가진 궁조(弓組)가 활을 쏩니다. 상대가 제압되면, 장교인 기사(騎士)가긴 창을 든 장병조(長柄組)를 이끌고 돌격합니다. 뎃보가 쓰이면서, 전술이 빠르게 진화한 것이지요. 이 전술은 현대적 특질을 지녔고, 아직 중세적 전술을 쓰는 조선군이나 명군이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트인 지형에서 벌어진 회전(會戰)에선 늘 일본군이 우세했습니다.
사회: 일본은 조선보다 국력이 컸습니다. 그리고 온 사회가 전쟁을 위해 조직되어서, 거대한 자원을 전쟁에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일본군은 조총이라는 위력적 무기와 그 무기에 맞춰 진화한 전술을 썼습니다. 그런 일본군에 맞서기엔 조선군은 너무 약했습니다. 당시상황에서 조선이 마련할 수 있었던 최선의 대책은 무엇이었을까요?
이순신: 불행하게도, 조선은 효과적인 대책을 마련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조선 사회는 역동적이거나 자원이풍부한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15만 명이나 되는 일본군을 물리칠 만한 군비를 마련할 길이 없었습니다. 무신보다 문신을 크게 우대한 전통도 큰 장애였습니다. 당쟁으로 조정이 마비되어, 효과적 정책을 채택하기 어려웠고 그것을 시행하기는 더욱 어려웠습니다. 일본의 상황을 파악하러 간 통신사 일행 안에서조차 의견이 엇갈렸으니, 조정 안에서야 어떠했겠습니까? 그런 제약 조건들이 있었지만, 뛰어난 지도자가 나와서 일본의 침입에 대비하려 했다면, 나름으로 상당히 효과적인 방안을 찾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일본이 조선을 침입하려면, 바다를 건너야 합니다. 큰 군대가 바다를 건너서 적국 해안에 상륙한다는 노릇이 결코 쉬울 리 없습니다. 그것이 일본군의 가장 큰 약점이었습니다. 당연히, 조선군은 그 약점을 이용해야 했습니다.
와키자카: 이 장군 말씀 참으로 탁견입니다.
이순신: 와키자카 장군께선 일본군의 수송을 맡으셨던 분이시니, 15만 명이나 되는 군대를 배로 나른다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위험한 작전인지 누구보다도 잘 아실 것입니다. 수송선 가득하게 탄 보병들은 수군의 공격에 아주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조총으로 반격할 수는 있지만, 제대로 쏠 수도 없고 숨을 곳도 없습니다. 배가 불타거나 깨어지면, 모두 죽습니다. 따라서 조선은 수군을 양성해서 일본군을 부산 앞바다에서 요격해야 했습니다. 다음엔, 그런 공격에서 살아남은 일본군이 상륙할 때, 육지에서 공격해야 했습니다. 군대는 막 배에서 내려 뭍으로 올라올 때, 아주 취약합니다. 그때 온 병력을 동원해서 공격하면, 이길 가능성이 높고, 설령 이기지 못하더라도, 큰 타격을 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전쟁 초기에 공격하는 것이 조선으로선 유일한 대책이었습니다. 큰 함대가 움직이려면, 바람이 좋아야 하는데, 일본에서 조선으로 오기에 좋은 동남풍은 봄에 부니, 봄철에 집중적으로 경계하면, 요격작전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지요.
와키자카: 우리로선 끔찍한 이야기가 될 뻔했습니다. 조선 수군에 관해선, 우리가 너무 무지했습니다. 조선 수군이 우리 작전을 방해할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았고, 조선 수군에게 우리 함대가 패하리라곤 정말로 꿈속에서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무지와 오만에 대해서 큰 대가를 치렀습니다. 만일 부산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공격했다면, ‘정명’ 사업은 거기서 끝났을 것입니다.
이순신: 그런 작전을 제대로 하려면, 먼저 조선의 병제를 바꾸어야 했을 것입니다. 당시 조선의 병제는 일본군의 침입에 대응하는데 가장 나쁜 형태를 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의 진관체제(鎭管體制)는 각 지방이 군대를 갖추어 스스로 지킨다는 개념이었지요. 오위(五衛)라는 중앙 부대까지도 본질적으로 수도와 왕실을 지킨다는 국지적 임무를 지녔어요. 그래서 이 제도는적군의 대대적 침입을 막을 중앙 상비군이 없다는 치명적 결함을 품었지요.
이런 결함을 보정하려는 시도가 제승방략(制勝方略)이었습니다. 적군이 닥치면, 여러 진관들의 병력을 약속한 장소에 모이도록 하고 한성에서 파견된 장수가 지휘해서 적과 싸우는 방안이었습니다. 진관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어려운 상황에서그것의 치명적 결함을 누그러뜨리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이 제도도 현실적으로는 큰 문제들을 안았습니다. 도원수, 순변사, 방어사와 같은 직함을 지니고 한성에서 파견되는 경장(京將)은 처음 만난 진관들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이내 침입한 적군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런 군대가 제대로 움직일 수 있겠어요? 지휘관과 휘하 장수들이 서로 알지도 믿지도 못하니, 작은 패배에도 군대가 흩어져버리지요. 경관이 내려오기 전에 적군이 빠르게 움직이면, 모이던 군대들은 쉽게 격파되어 흩어질 위험도 있지요.
사회: 도순변사 신입 장군이 방어 작전에 좋은 조령을 마다하고 탄금대에 배수진을 친 것도 충청도에서 가까스로 모은 병력의 능력과 의지를 믿지 못한 데서 나왔습니다.
이순신: 그렇습니다. 조령에 방어선을 치지 않은 것은 중대한 실책이지만, 탄금대에 배수진을 친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진관체제에 바탕을 둔 제승방략으로는 너무 부족했어요.
일본군의 상륙 지점이 경상도 부산포이리라는 것은 분명했고 상륙 시기도일기가 좋고 남동풍이 부는 봄철일 가능성이 높으니, 경상도에 병력을 집중하고 봄철엔 특히 경계를 강화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예컨대, 어왜도원수(禦倭都元帥)를 두어 일본군을 막아내는 일을 총지휘하도록 하고, 그 밑에 육군 원수와 수군 원수를 두어 각기 육전과 해전을 맡도록 하고, 팔도에서 정병들을 뽑아 조련하고 바닷가에 성을 쌓아 상륙이 어렵게 했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먼저 수군 함대로 바다를 건너는 일본 함대를 치고, 다음엔 해안에서 상륙하지 못하게 막고, 이어 상륙한 일본군을 공격했다면, 승산이 있었지요. 그러나 당시의 조정에서 그런 혁신을 결정하기는 어려웠고 실행하기는 더욱 어려웠겠지요.
와키자카: 이 장군 말씀이 탁견입니다. 만일 조선이 그리 했다면, 일본군은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실은 바로 그것이 우리 일본이 13세기에 원과 고려의 연합군이 침공했을 때 한 일입니다. 원 세조가 침공하겠다고 위협하자, 당시 실권을 쥐었던 가마쿠라(鎌倉) 바쿠후의 호오조오 도키무네(北條時宗) 싯켄(執權)은 군사들을 예상 상륙 지점인 규슈에 집결하고 성벽을 쌓아 상륙을 막도록 했습니다. 두 차례의 ‘겐코오(元寇)’에서승패를 결정한 요인은 태풍이었지만, 제2차 겐코오에서 일본군의 방비 때문에 침공군이 상륙하지도 못했다는 사실은 상륙 작전이 얼마나 힘들고 위험한가 말해줍니다.
사회: 조선 조정에선 뒤늦게나마 충무공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습니다. 분산된 군대의 결함을 깨달은 것이지요. 개전 이후 육지에선 일본군이 압도적 우위를 보였습니다. 벽제관 싸움에서 드러났듯이, 회전(會戰)에선 명군과조선군은 일본군을 이기기 어려웠습니다. 반면에, 해전에선 조선 수군이 압도적 우위를 보였습니다. 와키자카 장군께선 조선 수군의 강점이 무엇이었다고 보시는지요?
와키자카: 조선 수군의 강점은 단 하나, 위대한 지휘관을 가졌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장군께서 조선 수군을 지휘하실 때, 일본 수군은 단 한 차례도 이겨보지 못했습니다. 오죽했으면, 타이고오께서 조선수군하고는 싸우지 말라고 명령하셨겠습니까? 이 장군께서 물러나신 뒤, 우리는 단 한 차례도 지지 않았습니다. 한산도 해전에서 나는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났습니다. 명량 해전에선 도저히 질 수 없는 싸움에서 참패했습니다.
사회: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병력이 아니라 단 한 사람(In war it is not men but one man that counts)”이라는 얘기를 어디서 읽었는데, 충무공께서 바로 그런 경우인 것 같습니다. 결국 일본군은 정유재란을 일으키기 전에 반간계로 충무공을 제거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허황된 얘기에 조선군과 조선 조정이 놀아난 것이지요.
와키자카: 지휘관이 뛰어날수록 반간계가 잘 먹힙니다. 이 장군이 워낙 뛰어난 지휘관이었기 때문에, 도저히 먹힐 것 같지 않은 반간계가 쉽게 먹혔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 장군과 가토 기요마사 장군 사이가 나쁜 것은 널리 알려졌지만, 그렇다고 고니시 장군이 적군의 힘을 빌려서 가토 장군을 제거하려 한다는 것을 제 정신인 사람이라면 선뜻 믿겠어요? 그렇게 어리석고 위험한 계략을 꾸밀 사람이라면, 과연 타이코오께서 가장 신임해서 침공 작전의 최선봉을 맡기셨을까요? 이 장군께선 그런 사정을 이내 간파하시고, 함대를 움직이기를 거부하신 것이죠.
사회: 지휘관이 뛰어날수록 반간계가 잘 먹히는 까닭은 무엇인가요?
와키자카: 시기를 많이 받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닌가요? 이 장군의 경우, 경상우수사 원균 장군이 극도로 시기하고 모함했다는 것은 잘 알려졌지요.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 장군의 상관인 도원수 권율이 이 장군을 감싸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지요. 이 장군의 견해를 조정에 설명해서 오해를 풀려 하지 않고 그저 이 장군에게 함대를 이끌고 멀리 나가라고 재촉하기만 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국왕이 이 장군을 시기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나는 국왕이 이 장군을 시기한 정도가 아니라 증오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왜 그랬을까요? 나라와 임금을 구한 충신인데요?
와키자카: 이 장군과 비교하면,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을 것 아니겠습니까? 자신은 임금이면서도, 일본군이 가까이 오면, 도성도 버리고 도망쳤고, 정 급하면, 나라와 백성들을 버리고 명으로 도망칠 생각을 했는데, 이 장군이 자기 소관을 넘어 경상도 해역으로 네 차례나 출정해서 일본군을 격파했어요. 아무리 임금이라도 낯이 뜨거워졌을 것 아니겠습니까?
사회: 그 말씀을 들으니, 당시조정에서 있었던 일이 새로운 뜻을 지니는 것 같습니다. 실록을 보면, 당시 선조대왕께서 충무공에 대해 극도의 반감을 품으신 것이 느껴집니다. “이순신은 조금도 용서할 수 없다. 무신이 조정을 가볍게 여기는 습성은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일본수군을 거듭 깨트려서 제해권을 확보한 공을 아예 잊은 듯한 말씀이지요. 영의정 유성룡은 충무공을 추천한 죄로 임금께 이순신을 변호할 생각도 못합니다. 이정형(李廷馨)만이 임금께 아룁니다, “이순신이 ‘거제도에 들어가 지키면 좋은 줄은 알지만, 한산도는 배를 감출 수 있는 데다 적들이 바다의 얕고 깊음을 알 수 없고, 거제도는 그 만이 비록 넓지만 배를 감출 곳이 없을 뿐 아니라 건너편 안골포(安骨浦)의 적과 마주하고 있어서 들어가 지키기 어렵다’고 하였으니, 그 말이 합당한 듯하옵니다.” 나머지 조신들은 모두 충무공을 비난합니다. 결국 충무공께선 해임되고 혹독하게 문초받고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가까스로 사형만은 면하셨습니다. 지휘관이 뛰어날수록 반간계가 잘 먹힌다는 말씀은 깊이 새길 만합니다.
이순신: 내 불찰도 있었습니다. 적의 간계가 너무 뻔히 보이는지라, 사람들의 얘기에 일일이 대꾸하지 않았는데, 그 점이 좀 아쉽습니다. 함대를 이끌고 모항을 떠나 먼 바다로 나가는 일은 육지에서 작은 부대를 이끌고 가볍게 정찰 나가는 것과는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 전함들은 양식과 물을 다 싣고 다녀야 합니다. 그래서 작전 범위에 엄격한 제약이 있습니다.
그리고 전함을 부리는 것은 아주 힘든 일입니다. 날씨가 궂거나 바람이세차면, 난파할 위험이 큽니다. 바람이 자면, 노를 저어야 하니, 군사들이 무척 지칩니다. 한번작전을 하고 나면, 바로 배를 수리해야 합니다. 부서진 것들을 고치고, 배를 불에 그을려서 썩지 않게 하고 달라붙은 따개비들을 제거해서 배가 제 속도를 내도록 해야 합니다. 당연히, 함대를 이끌고 먼 바다로 작전에 나서는 일은 꼭 필요한 경우에만 결행해야 하고, 결행할 경우에도 여러 가지 요소들을 고려해서고심 끝에 출항 시기를 결정하게 됩니다.
게다가 조정에서 내려온 명령은 왜성들이 있는 경상도 동해안의 서생포와 기장으로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함대는 대피할 곳이 있어야 하는데, 적들이 육지를 다 장악한 터라, 대피할 항구도 없는 작전에 나서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 명령을 따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권율 도원수께선 모르셨을 것입니다. 내가 자세히 말씀을 드렸지만, 그 분은 본래 문관이셨고 전함을 타 본 적이 없으시니, 한산도를 떠나 일본 수군들이 지키는 부산포를 지나 서생포까지 가서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가 오기를 바다에서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허황된 노릇인지 잘 모르셨을 것입니다. 가토의 움직임에 관한 정보가 의심스러운 곳에서 나왔다는 점도 있었지만, 우리 함대를 서생포와 기장으로 유도하려는 적군의 의도가 뻔히 보여서, 나는 처음부터 명령을 따를 마음이 없었습니다. 아쉬운 것은 더 열심히 설명을 드리지 않은 것입니다. 도원수의 처지도 무척 어려웠을 터입니다.
사회: 권율 도원수가 한산도까지 와서 함대의 출동을 명령한 것이 1957년 1월 21일인데, 뒤에 밝혀진 바로는, 가토 기요마사 장군은 이미 1월 14일에 서생포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뒤에 원균 통제사가 이원익(李元翼) 도체찰사(都體察使)와 권율 도원수의 독촉에 못 견뎌 부산포 앞바다까지 진출해서싸움을 피하는 일본 전함들을 쫓다가 스스로 지쳐서 회항했습니다. 밤에 일본군이 장악한 가덕도(加德島)에 들렀는데, 갈증이 심한 군사들이 내려서 물을 마시다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4백 명이나 죽었습니다. 방금 충무공께서 적군이 육지를 장악한 상황에서 함대를 움직이는 것이 위험하다고 말씀하셨는데, 바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불의의 패배는 결국 칠천량 해전에서의 대패로 이어졌습니다.
와키자카: 이 장군과 비슷한 경우로는 명의 명장 원숭환(袁崇煥)이 있습니다. 1626년 누르하치가 이끈 후금(後金) 군대가 요하를 건너 영원(寧遠)을 공격했을 때, 원숭환은 성을 잘 지켰습니다. 누르하치는 그 싸움에서 부상해서 포위를 풀고 물러났습니다. 그 해에 누르하치가 죽고 황태극(皇太極)이 즉위했는데, 그 때 명은 후금의 침입을 막는 임무를 원숭환에게 맡겼습니다. 그는 후금군이 기병 위주여서 기동력은 뛰어나지만 장기적 공성전을 수행할 능력은 부족하다는 점을 간파했습니다. 그래서 후금군과 벌판에서 맞서 싸우지 않고 요충들을 지키는 데 전념했습니다.
1627년 1월에 황태극은 조선을 정벌했습니다. 이른바 정묘호란이지요. 그 작전이 쉽게 끝나자, 황태극은 바로 요서(遼西)를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원숭환은 금주(錦州)와 영원을 잘 지켜, 황태극은 아무런 전과 없이 물러났습니다. 당시 중국 사람들은 이 싸움을 ‘영금대첩(寧錦大捷)’이라 불렀습니다. 황태극은 할 수 없어, 반간계를 써서, 원숭환이 후금과 밀약을 맺었다는 얘기를 퍼뜨렸습니다. 원래 원숭환은 권력을 쥔 환관들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아서 그들의 미움을 샀습니다. 그래서 환관들이 그를 무고했고, 명황제는 그 말을 믿고 그를 불러들여 감옥에 가두었다가 능지처참했습니다. 그렇게 나라를 지킨 충신을 죽인 지 채20년도 못 되어 명은 멸망했습니다.
사회: 명은 ‘영금대첩’의 영웅을 죽였습니다. 조선은 ‘한산대첩’의 영웅을 결국 백의종군을 시켰습니다. 그 차이가 두 나라의 운명을 갈랐다고 할 수 있을까요?
와키자카: 좀 극적인 표현이지만, 진실의 알맹이가 든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이 장군께서 그 때 형을 받으셨다면, 조선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장군의 공적으로 ‘한산대첩’을 먼저 꼽습니다만, 나는 ‘명량해전’에서의 승리가 훨씬 큰 공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실은 나는 그 해전이 ‘분로쿠. 게이쪼의 역’에서 가장 중요한 싸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두 해전에 다 참여했던 터라, 이 일에서만은 내가 권위 있는 전문가라 할 수 있습니다. [웃음]
일본군의 기본 작전 개념은 수륙병진(水陸竝進)이었습니다. 육군이 한성을 향해 진격하면, 수군이 서해로 올라가서 보급로를 확보하고 수륙작전도 수행하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우리 수군이 조선 수군에 완전히 제압되자, 이 작전 개념이 뿌리째 흔들렸습니다. 일본군이 겪은 어려움들은 본질적으로 이런 좌절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게이쪼의 역’이 시작되기 직전에 이 장군이 반간계에 걸려 물러나자, 일본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전멸시켰습니다. 이어 전라도 남해안을 돌아서 서해로 향했습니다. 당시 이 장군이 거느린 수군은 겨우 배 12척이어서, 수군이라 하기도 뭣한 상태였지요. 그 작은 함대를 이끌고서 일본 수군을 격파한 것은, 내가 거기서 패배했지만, 지금도 찬탄이 나오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싸움으로 일본군이 세웠던 수륙병진의 계획도 끝났습니다. 만일 명량해전에서 일본 수군이 이겼다면, 그 전쟁의 역사는 전혀 달랐을 것입니다. 일본 수군이 서해를 장악했다면, 일본군이 조선에서 완전히 물러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이 조선 전체를 장악하기는 어려웠겠지만, 적어도 한강 이남 지역은 장악해서 통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회: 와키자카 장군께선 결정적 요인이 충무공의 활약이었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엔 모두 동의할 것 같습니다.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의 상대적 전력은 어떠했습니까?
와키자카: 객관적 전력은 일본 수군이 훨씬 나았다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일본 전함들은 조선 전함보다 훨씬 빠른데, 그런 장점이 당시 해전에선 전혀 발휘되지 못했습니다. 너른 바다가 아니라 다도해에서 기동하다보니, 우리 전함의 장점이 조선 함대와의 싸움에서 별 효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사회: 일본 수군은 전함의 속도를 중시했습니까?
와키자카: 일본 배들은 처음부터 왜구들이 발전시켜 왔습니다. 왜구들은 먹이를 따라잡아야 하고 정부군의 추격을 따돌려야 하니까, 당연히 빠른 배를 만들어서 탔지요. 해적들은 어디서나 빠른 배를 고릅니다. 그러다 보니, 일본 수군도 빠른 전함을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이순신: 일본 전함들과 조선 전함들은 모두 평저선(平底船)이었습니다. 이런 배를 건조하려면, 먼저 각재들로 직사각형의 바닥 판을 조립합니다. 그래서 평저선이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바닥 판 양 옆으로 목재를 이어 올려 외판을 만들고, 바닥 판 앞쪽에 곡면을 이룬 재목들을 이어 올려서 선수룰 만들고, 바닥 판 뒤쪽엔 평면 재목들을 이어 올려 선미를 만듭니다. 서양에선 배 밑이 용골을 중심으로 둥글게 만들어진 돌저선(突底船)을 썼습니다. 평저선은 바닥이 밋밋하니 돌저선보다 느립니다. 그래서 속도를 중시하는 일본 전함들은 바닥 판을 좁게 만들고 상부가 차츰 넓어지는 형태를 했습니다. 용골이 없는 평저선이지만, 모양은 돌저선에 가깝지요. 그렇게 바닥이 상당히 뾰족하니, 배가 빠르지요.
문제는 그런 전함들은 구조적으로 약하다는 점입니다. 바닥 판을 직사각형으로 짜고서 그대로 외판을 올린 조선의 판옥선은 느리지만, 튼튼합니다. 그래서 우리 판옥선과 일본의 대형 전함인 세키부네(關船)가 서로 부딪치면, 으레 세키부네가 깨졌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배를 몰고서 적선에 부딪치는 당파(撞破)를 시도했지요. 다도해의 좁은 바다에서 몇 백 척 전함들이 부딪치는 해전에서 튼튼한 전함들로 당파 전술을 쓰면, 상대하기 어렵지요. 게다가 우리 판옥선은 상장(上裝)이 높아서, 일본군이 올라타고 공격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단병접전(短兵接戰)에 월등한 일본군의 강점이 발휘될 여지가 없었습니다.
사회: 거북선은 어떠했습니까?
이순신: 평저선은 용골이 없어서 늑골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외판을 쌓아 올릴 때, 못을 써서 판재들을 연결합니다. 우리는 참나무 못을 썼고 일본은 쇠못을 썼습니다. 자연히, 가로로 버티는 힘이 약했어요. 그래서 횡강도(橫强度)를 유지하기 위해서 가(駕)라고 불리는 들보를 세우고 그 아래에 장쇠(長釗)라고 불리는 가룡목(加龍木)을 질렀습니다. 그 위에 갑판을 덮으면, 그런대로 횡강도가 유지되었지요. 거북선은 위를 덮었으니, 당연히 튼튼했지요. 그래서 앞장서서 일본 전함들을 당파했습니다.
사회: 전쟁 말기에 중국 수군이 합세했는데, 중국 전함은 어떠했습니까?
이순신: 중국 전함은 무척 튼튼했습니다. 특히 물이 새지 않는 격벽(隔壁)들을 설치해서, 가룡목을 쓴 조선 배보다 훨씬 튼튼했고, 한 칸에 물이 새더라도 다른 칸들이 버텨서, 배가 바로 침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격벽은 중국에서 처음 발명된 것인데, 현대의 배들은 모두 격벽을 설치하니, 선구적 기술이었지요. 배 만드는 일에선 중국이 조선이나 일본보다 앞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 임진왜란은 7년 동안 이어졌고 세 당사국들 모두 엄청난 해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세 나라의 영토나 관계가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큰 국제적 전쟁은 나름으로 긍정적 영향을 끼치는 것이 상례인데, 임진왜란은 그런 면이 없었습니다. 자연히, 전쟁을 일으킨 일본에 대해선 매서운 역사적 평가가 내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4백 년 넘게 지나고 나니, 그런 평가의 매서움도 많이 사그라졌습니다.
다만 제 마음에 얹혀서 묵직한 아픔을 주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일본군의 잔악한 행태입니다. 다른 나라에 침입한 군대는 난폭하게 마련입니다. 중세의 군대는 지금보다 훨씬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에서 일본군이 보인 행태는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지나치게 잔악했습니다. 민간인들을, 부녀들과 아이들까지도, 마구 죽였습니다. 진주성이나 남원성처럼 치열한 싸움 끝에 성을 점령하면, ‘섬멸전’이란 이름 아래 모든 사람들을 죽이곤 했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의 코를 베어 전공의 증거로 삼고 증명서를 발부하고 일본으로 수송하기까지 했습니다. 일본군 일부의 소행이 아니라, 일본군 모든 부대들이 그리 했습니다. 자연히, 무고한 민간인들까지 해를 입었는데도, 일본 장수들이 이런 참상에 마음을 쓴 흔적이 없습니다.
와키자카: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당시엔 부끄러운 일인 줄 몰랐습니다. 모두 섬멸전은 나름의 효과를 지녔다고 믿었습니다. 특히 ‘게이쪼의 역’에서 나온 진주성 섬멸전은 타이코오께서 직접 명령하신 일이라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일본 군사들의 잔악한 행태는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당시엔 그런 행태에 마음을 쓴 장수가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사회: 바로 그 점입니다. 일본은 그런 잔악한 행태에 대해서 성찰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을 점령해서 영유하고 통치하겠다고 나섰으면서도, 군사들이 조선 인민들에게 잔악한 짓들을 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습니다. 그런 모순을 인식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현대에 일본이 다시 대륙으로 진출했을 때, 일본군이 무고한 민간인들에게 잔악하게 해를 입혔습니다. 일본이 일으킨 ‘중일전쟁’에서 저지른 ‘난징(南京) 대학살’은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정규군이 그렇게 잔악하게 행동한 경우는 역사상 없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한 독일도 정규군은 비교적 만행을 적게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왜 일본군이 그리도 잔악하게 행동했는가?’라는 물음이 나옵니다. 일본 사람들의 인성이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더 잔악한가, 아니면, 일본 사회의 문화가 병적인 특질을 품었는가, 하는 물음이지요. 그런데 인성은 빨리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진화의 속도가 아주 느리므로, 몇 천 년 전에 일본에 정착한 사람들이 인성이 달라졌을 리는 없지요. 따지고 보면, 고대 일본의 지배층 가운데 3분의 1 가량은 백제나 고구려 출신이었거든요. 지금도 천황 가계의 뿌리는 한반도였다는 얘기가 상당한 지지를 받지 않습니까? 따라서, 일본 문화에 어떤 병적 특질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물음이 남지요.
와키자카: 그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자신 있는 답변은 드릴 수 없고, 이 자리에서 떠오른 것을 얘기하자면, 일본 문화가 왜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해적은 강도를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발적으로 또는 곤궁해서 남의 재물을 강탈하는 것이 아니라 생업으로 그 짓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런 사람들은 마음이 모질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의 배를 빼앗고 재물을 탈취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거나 노예로 삼는 사람들은 자신의 사람다운 성품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왜구는 몇 백 명 수준의 해적들이 아니었습니다. 쯔시마, 잇기, 규슈, 그리고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의 일본 서부 사람들이 몇 백 척의 선단을 이루어 조직적으로 조선과 중국을 약탈했습니다. 상선들이나 조운선들을 약탈 대상으로 삼기도 했지만, 흔히 조선과 중국의 연안 지방을 점령하고 약탈했습니다. 그렇게 해적으로 나선 사람들은 일본 사회의 모든 계층을 포함했습니다. 실은 지배층인 전직 관리들과 무사들이 왜구를 이끌었습니다. 그렇게 사회의 모든 계층들이 해적을 생업으로 삼으면서, 해적 노릇에 따르는 비인간성이 사회 전체로 스며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 와키자카 장군 말씀은 많은 사람들이 이내 수긍할 통찰입니다. 왜구는 해적 치고도 아주 잔악하고 파괴적인 해적이었다는 얘기가 있는데, 실제로 그러했나요?
와키자카: 불행하게도, 실제로 그러했습니다. 왜구는 가는 곳마다 사회를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북로남왜(北虜南倭)’라는 말이 가리키듯, 왜구의 창궐은 명의 쇠퇴에 한몫 단단히 했습니다. 조선의 경우, 고려 말기에 왜구가 전국을 침략해서, 고려 왕조가 무너지는 데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조선 왕조를 세운 이성계 장군이 왜구와의 싸움에서 공을 세워 세력을 길렀다는 사실이 그 점을 잘 보여줍니다. 왜구처럼 오랫동안 파괴적으로 활동한 해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순신: 와키자카 장군 말씀이 맞습니다.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해적은 바이킹과 바바리 해적인데, 그들도 왜구만큼 오래 파괴적으로 활동하지 않았습니다. 왜구는 조선의 삼국시대부터 있었으니, 천 년 넘게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긴 세월에 약탈과 살육을 일삼았고 보이는 것들은 모두 파괴했습니다. 점령한 지역에서 주민들과 교역한 것도 아니고 생산적인 일을 한 적도 없고, 좋은 제도나 관행을 남긴 것도 아닙니다.
바이킹이 창궐한 기간은 8세기 말엽부터 3백 년이 채 못 됩니다. 비록 그들은 해적들이었지만, 교역을 중시해서 번창한 교역 기지들을 곳곳에 세웠고 위대한 문화적 유산을 남겼습니다. 무엇보다도, 정착해서 둘레의 사회와 융합했습니다. 프랑스에 정착한 바이킹들은 노르망디 공국을 세웠고 그곳을 기지로 삼아 영국과 남부 이탈리아 및 시실리에 왕조를 세웠습니다. 잔악한 면도 있었지만, 그저 해를 입힌 것이 아니라 이룬 것들도 많았습니다.
북아프리카 해안을 기지로 삼고 지중해의 무역선들을 노린 바바리 해적들은 17세기부터 19세기 중엽까지 2백년 넘게 이어졌습니다. 바바리 해적들은 그곳을 다스린 이슬람 정권의 보호를 받았고 세금으로 10퍼센트를 냈습니다. 비록 유럽의 큰 근심이었지만, 바바리해적들은 무역선들만 노렸으므로, 왜구처럼 사회를 황폐하게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왜구처럼 오랫동안 잔악하게 해를 끼친 해적은 없었습니다.
자연히, 일본의 문화에 왜구의 행태가 배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고대엔 왜구의 근거인 서부가 일본의 중심이었거든요. 왜구의 해적 문화가 일본 문화에 병적인 특질로 들어왔을 가능성은 크지요.
사회: 안타까운 것은 일본 지식인들이 일본군이 해외에서 보인 잔악성에 대해 깊이 성찰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자기문화의 어떤 부분이 어떻게 뒤틀려서 그렇게 흉포한 야만성을 드러내는지 살핀 일본 지식인이 있었다는 얘기를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 성찰은 일본 문화가 보다 건전하게 진화하는 데 긴요합니다. 물론 이웃 나라들과 건전한 관계를 맺는 데도 필수적이지요.
사회: 충무공께선 후손들에게 당부하고 싶으신 것들이 많으실 줄 압니다.
이순신: 한 가지만 얘기하지요. 명군의 구원이 없었다면, 조선은 결국 일본에게 병탄되었을 것입니다. 잘 훈련되고 무장이 잘 된 15만 명의 일본군을 물리치기엔 조선군은 너무 적고 제대로 무기를 갖추지 못했고 훈련이 너무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외국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받으면, 당연히 여러 가지 형태로 비용이 듭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군량은 대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나라가 가난하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군량의 일부는 대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구원군 병사들이 모두 성인군자가 아닌 바에야,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는 것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명군이 압록강을 넘어 조선으로 들어온 날부터 조선 사람들은 혹독한 비용을 치르기 시작했습니다. 군량을 제 때에 대지 못했다고 조선 대신들이 명의 장수에게 불려가 매를 맞고,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고 조선군 장수들이 명의 장수에게 모욕을 당하고 때로는 매를 맞았습니다. 우리로선 통분한 일이었지만, 입장을 바꿔놓고 보면, 명군 장수들을 탓하기도 어려웠습니다. 남의 나라에 와서 목숨을 걸고 싸운다는 노릇이 신명이 나겠습니까? 군량의 일부라도 대야 하는데, 그것도 못하는 나라의 대신들이 그들에게 어떻게 보였겠습니까? 그렇게 명군의 군량을 대느라, 조선 인민들은 굶주려야 했습니다. 부녀들이 겪은 일들은 형언하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더 지독한 경우들도 많았습니다. 이여송 제독이 평양성을 되찾은 뒤 조정에 보낸 수급들의 절반은 조선 백성들의 목이었습니다. 명의 어사(御使)가 황제에게 올린 상주문에 나온 얘기입니다. 요새 흔히 하는 말에 ‘공짜 점심은 없다’라는 말이 있지요? 다급해서 구원병을 받을 때보다 그 말이 적절한 경우는 없습니다.
사회: 지금 대한민국이 한미동맹에 의지하고 주한미군의 도움으로 나라를 지키고 있는데, 혼자 힘으로 나라를 지킬 수 있도록 국방력을 강화하라는 당부이신가요?
이순신: 스스로 영토를 지키는 것이야 물론 바람직하지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대한민국이 혼자 힘으로 전쟁을 억지할 능력을 갖추는 것은 어렵잖아요? 설령 ‘자주 국방’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한미동맹에 따른 미군 주둔으로 전쟁을 억지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잖아요? 냉정하게 살피면, 주한미군과 협력하는 현재의 체제가 ‘자주 국방’보다 낫다는 것이 명확해지잖아요?
실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 조선 정부가 비슷한 상황을 맞았습니다. 일본군이 조선에서 물러갔지만, 화의를 맺은 것이 아니라 휴전 상태여서, 일본군이 다시 침입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 사회가 하도 피폐해서,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할 만한 군대를 양성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명으로선 조선에 자기 군대가 머물러야 일본과의 화의 교섭에서 보다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명도 조선도 명군의 일부를 조선에 남겨두고 싶어 했습니다. 문제는 주둔 비용이었습니다. 결국 조선 정부가 주둔 비용을 감당할 만한 명군 병력은 3,000 명이라는 입장을 밝히자, 명은 그런 수준의 병력은 전략적의미가 없다면서 명군을 모두 거두어들였습니다.
사회: 아, 그랬습니까? 그 때도 주둔 비용이 문제였군요.
이순신: 아주 불안한 휴전 상태에서 주한 미군과 함께 전쟁의 발발을 막는 현재 체계는 좋은 방안입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렇게 외국군의 지원을 받는 데는 갖가지 형태로 비용이 든다는 사실입니다. 금전적 비용이나 외교적 비용만이 아니라, 외국 군대가 주둔하는데 따르는 사회적, 심리적 비용도 무척 큽니다. 지금 대한민국 국민들은 그 엄연한 사실을 외면하고 있어요. 그래서 국방의중요한 부분을 외국에 맡긴 상황에서 당연히 치러야 하는 비용을 치를 생각을 않거나 짜증을 내고 있어요.
사회: 짜증 정도가 아닙니다. 반미 감정이 하도 거세어서, 반미감정을 상업적으로 이용한 예술 작품들이 넘쳐나는 상황입니다.
이순신: 반미 감정 얘기가 나왔는데, 외국 군대가 머물면, 어쩔 수 없이 반감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그랬어요. 일본군이 떠나자, 바로 명군도 떠나기를 바라는 기류가 조정에서 일었습니다. 백성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지요. 지금 대한민국에서 반미 감정이 커지면, 방금 얘기한 것처럼, 미군 주둔에 따르는 비용만 커집니다. 한번 미국 입장에서 이 일을 바라보세요. 6.25 전쟁에서 도와준 일은 과거지사라 치더라도, 힘들여 도와주는데,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고마워하기는 커녕 짜증을 내면, 열심히 도와줄 마음이 나겠어요? 그러니 우리가 받는 혜택의 질이 떨어지죠. 그리고 두 나라 가운데 어느 쪽이 처지가 다급합니까? 그러니 한국 정부는 미국 정부의 섭섭한 마음을 달래려고 눈에 잘 뜨이지 않는 방식으로 미국에 양보해야 하지요. 미군의 주둔에서 우리가 치르는 사회적, 심리적 비용도 크게 늘어납니다.
지금 미군들의 범죄가 문제가 되었는데, 객관적으로 보면, 잔류적 수준(residuallevel)을 넘지 않습니다. 혈기왕성한 군인들이 머물고 있습니다. 자기 나라를 지키는 것도 아니고 낯선 땅에서 고생하는데, 반미 감정이 높아서 주민들과 어울리지도 못하고 실질적으로 병영에 갇혀 지내는데, 아무런 말썽도 부리지 말고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조용히 지내라고 요구하는 것이 합리적인가요? 어차피 미군이 여기 머물러야 나라가 온전하고 사회가 안정된다면, 의연하게 이 문제에 대처해야 하지 않을까요?
사회: 잘 알겠습니다. 모두 깊이 성찰해야 할 일입니다.
이순신: 앞으로 중국의 영향력이 더 커질 터이니, 미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더욱 중요해질 것입니다. 조선으로선 미국은 ‘영원한 우방’입니다. 미국은 태평양 건너편에 있어서, 동아시아에 영토적 야심이 없습니다. 자연히, 동아시아의 강대국에 대한 대항력이었습니다. 20세기엔 일본을 견제했고 21세기엔 중국을 견제하고 있습니다. 조선이 중국의 영향을 점점 크게 받는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조금이라도 덜 받아 자주성을 지키려면, 미국과의 우호적 관계가 중요합니다. ‘지리(地理)는 숙명’이란 얘기가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조선보다 더 적절한 경우도 드물 것입니다.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역사인물들의 가상대담이 담겨 있다.
목차
서장 역사의 시작
제1장 기준과 위만
제2장 왕조와 왕준
제3장 당 태종과 연개소문
제4장 계백과 김유신
제5장 장보고와 문성왕
제6장 왕건과 견훤
제7장 소손녕과 서희
제8장 묘청과 김부식
제9장 최충헌과 만적
제10장 김방경과 김통정
제11장 최영과 이성계
제12장 정도전과 이방원
제13장 세종과 최만리
제14장 세조와 김종서
제15장 이산해와 정철
제16장 이순신과 와키사카 야스하루
제17장 김상헌과 최명길
제18장 인현왕후와 장희빈
제19장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제20장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
제21장 존 하지와 이반 치스치아코프
제22장 매슈 리지웨이와 펑더화이
저자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