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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 (無比) 큰스님 妙 法 蓮 華 經 문수원 강의 |
무비 (無比) 큰스님 법화경 (95) 本門 · 正宗分 · 卷 第五 · 從地涌出品 第十五 (제15 종지용출품후반) 문수원
二. 正說 1. 正開近顯遠 ⑴ 略開近顯遠動執生疑 ① 略開 가. 長行 ㈎ 雙答(1.答師是誰 2.答何所來) 53. 爾時世尊이 說此偈已하시고 告彌勒菩薩하사 我今於此大衆에 宣告汝等하노라 이시세존 설차게이 고미륵보살 아금어차대중 선고여등 阿逸多야 是諸大菩薩摩訶薩이 無量無數阿僧祗로 從地涌出하니 汝等昔所未見者라 아일다 시제대보살마하살 무량무수 아승지 종지용출 여등 석소미견자 我於是娑婆世界에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以(已)하고는 敎化示導是諸菩薩하야 調伏其心하며 아어시사바세계 득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 교화시도 시제보살 조복기심 令發道意호라 영발도의 54. 此諸菩薩이 皆於是娑婆世界之下의 此界虛空中住니라 차제보살 개어시사바세계지하 차계허공중주 ㈏ 雙釋(1.明師[1.雙修智斷 2.雙證智斷]2.弁處) 於諸經典에 讀誦通利하야 思惟分別正憶念이니라 어제경전 독송통리 사유분별 정억념 55. 阿逸多야 是諸善男子等이 不樂在衆하야 多有所說하고 常樂靜處하야 勤行精進하대 아일다 시제선남자등 불락재중 다유소설 상락정처 근행정진 未曾休息하며 亦不依止人天而住하고 常樂深智하야 無有障礙하며 亦常樂於諸 佛之法하고 미증휴식 역불의지인천이주 상락심지 무유장애 역상락어 제불지법 一心精進하야 求無上慧니라 일심정진 구무상혜 나. 偈頌 56. 爾時世尊이 欲重宣此義하사 而說偈言하니라 이시세존 욕중선차의 이설게언 ㈎ 頌雙答(1.答師弟 2.答處所[1.正答處 2.歎菩薩德]) 57. 阿逸汝當知하라是諸大菩薩이 아일여당지 시제대보살 從無數劫來로修習佛智慧니 종무수겁래 수습불지혜 悉是我所化하야令發大道心이니라 실시아소화 영발대도심 58. 此等是我子라依止是世界하야 차등시아자 의지시세계 常行頭陀事하며志樂於靜處하야 상행두타사 지락어정처 捨大衆憒鬧하고不樂多所說이라 사대중궤료(요) 불락다소설 如是諸子等이學習我道法하며 여시제자등 학습아도법 59. 晝夜常精進하야爲求佛道故로 주야상정진 위구불도고 在娑婆世界의下方空中住니라 재사바세계 하방공중주 60. 志念力堅固하야常勤求智慧하며 지념력견고 상근구지혜 說種種妙法하대其心無所畏니라 설종종묘법 기심무소외 ㈏ 頌雙釋(1.釋師弟 2.釋處所) 61. 我於伽耶城 菩提樹下坐하야 아어가야성 보리수하좌 得成最正覺하고轉無上法輪하고는 득성최정각 전무상법륜 爾乃敎化之하야令初發道心일새 이내교화지 영초발도심 今皆住不退하고悉當得成佛이니라 금개주불퇴 실당득성불 62. 我今說實語하노니 汝等一心信하라 아금설실어 여등일심신 我從久遠來로敎化是等衆호라 아종구원래 교화시등중 |
법화경 본문 내용에 들어가서 서론이 이제 끝이 나고 본론이 시작이 됐습니다. 저 앞에 47번부터 사실은 본론인데 그 부분은 본론 중에서도 어떻게 보면 서두에 속하고 오늘 공부할 차례는 약개근현원(略開近顯遠)이라고 하는 경전 해석상의 용어입니다.
개근현원에도 약개근현원(略開近顯遠)이 있고 광개근현원(廣開近顯遠)이 있고 그렇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간략하게 설명하는 내용이 있고 그리고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는 내용이 있지요. 무엇을 설명하는가 하면 가까운 것을 이야기해서 먼 데 것을 드러내려고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법화경에서는 어떤 자취나 흔적 있는 것을 이야기해서 흔적이 없는, 모양이 없는 것을 드러내는 그런 방법을 취하지요.
그래서 궤적현본이라. 부처님의 자취를 열고나면 무엇이 나타나는가 하면 부처님의 본래의 모습이 나타난다고 보는 거예요. 그걸 다른 말로 표현하면 개근현원(略開近顯遠)이라, 가까운 것을 통해서 먼 데 것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가까운 것이라는 것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거, 우리가 보고 느낄 수 있는 이러한 내용들을 가까운 것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부처님의 역사적인 모습을 말하는 것이지요.
내일 모레가 초파일인데 그날은 ‘부처님 오신 날’이라고 우리가 표현을 하지요. 부처님 오신 날은 다름 아닌 부처님의 흔적, 자취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지난 시간에도 몇 번 말씀을 드렸지만 이해하기가 쉽지요. 일단 역사적인 사실이 분명하고 또 기록이 남아 있고 당시 이 사람들은 또 육안으로 분명히 봤기 때문에 우리가 쉽게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부처님의 참모습이 있지요.
그렇게 두 가지 입장을 바로 이해해야만 부처님에 대해서 올바른 이해가 되지요. 어느 한 가지만 이해하면 한 쪽으로 치우친 것이 되고 그건 잘못된 소견에 떨어진다고 보지요.
부처님을 이해하는 것도 보이는 면을 이해해야 하는가 하면 보이는 면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우리가 분명히 이해해야 되지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개개인을 두고 이야기를 하더라도 보이는 면이 있지요. 언행 쪽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그 사람의 사회적 신분이 어떻고 이름은 누구이고 몇 년도 출생이고 하는 이런 사실들은 보이는 면이지요. 그건 자취이고 흔적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라는 것이 그 기록상으로 나타난 것, 또는 눈에 보이는 그런 면만 가지고 그 사람의 전부라고 판단해서는 사실은 반쪽도 제대로 못 보는 거지요.
그 사람의 속마음에 어떤 재주가 있고 어떤 능력이 있는지, 또 좋지 않은 성격이라면 어떤 성격이 있는지, 좋은 면이라면 어떤 좋은 면이 있는 지 이걸 잘 모릅니다.
김씨라고 하는 것만 가지고도 알 수가 없고 생년월일만 가지고도 모르고, 얼굴 생긴 것만 가지고도 모르지요. 외부 상에 나타난 것 같지만 사실 나타나지 아니한 것을 제대로 알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미루어서 짐작은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지요. 그러나 우리가 미루어서 짐작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다 보니 오류도 많이 범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관상을 보고 사람을 안다 하지만 그게 어디 제대로 압니까? 그것이 제대로 아는 겁니까? 제대로 모르거든요.
사주를 보고 그 사람을 안다고 하지만 제대로 압니까? 사주를 보고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에요.
부처님의 모습을 가지고, 역사적인 사실만을 가지고 부처님을 안다고 하지만 그건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그래서 부처님이 고구한 설명을 늘어놓는 것입니다.
이 법화경에서도 누차 설명을 하고 별별 비유를 다 들어서 이야기를 꾸며서 어떻게 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해해야 된다는 거지요. 부처님이 그렇고 우리 개인들이 그렇고 또 모든 사물 하나하나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내용을 우리는 최소한도 알아야 되고 거기에 눈을 뜰 줄 알아야 그래도 뭔가 세상과 인생에 대해서 다른 안목을 가지고 대하려고 하는 그런 다른 차원의 사람이다, 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경향이니 상황이니 이런 사회적인 표현을 합니다만 법화경에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용어만 가지고도 안돼요.
그래서 전문 본문 근원, 멀다 가깝다, 자취다 아니면 본래의 모습이다, 아니면 개권현실(開權顯實), 방편을 열어 가지고 실다운 모습을 보여준다는 이런 등등의 표현들을 자주 씁니다.
여기 종지용출품 중에서 간략히 가까운 이야기를 들어서 장구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거예요. 가까운 이야기가 뭐냐 하면 부처님의 일생입니다.
기껏해야 부처님 성도하시고 사십년 남짓한 그 역사를 가까움이라 하고, 그 이야기를 통해서 그 이면에 있는 영원성, 영원한 어떤 참생명의 존재를 이해시키려고 하고 뭔가 설명하려고 하고, 그것을 드러내 보이려고 하는 이것이 이제 현원이라 해서 멀리 것을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건 사실 멀거든요.
또 방편을 열어서 실법을 보인다고도 이야기 하지요. 방편이라는 것은 흔적이고 가까운 것이지요. 방편도 사실은 다 진실이에요. 방편을 통해서 실다운 것을 이제 드러내 보이는 것이지요.
실다운 것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영원한 생명, 우리의 영원한 생명, 불생불멸의 참생명이지요.
가까운 것, 방편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예를 들어서 70년 이면 70년, 80년이면 80년, 90년이면 90년, 어떤 한정된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그런 어떤 한계, 이것을 우리는 가까운 것, 방편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아무리 마음의 세계가 어떻다 하더라도 또 그 사람의 역사적인 사실, 그 사람의 모습을 가지고 이야기 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 그것을 제외하고 영원한 것을 이야기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을 가지고 이름을 하나 지어서 이 사람은 어떻다, 어떻다 하고 설명할 수가 있습니까? 그런 설명은 세상에 없다고요. 소설가들의 소설 속에서나 가능하지 실질적으로 그런 이야기는 안 쓰거든요. 그래도 사람이 그나마 있어야 그것을 가지고 그 사람의 마음의 세계를 이야기 할 수 있듯이 부처님도 역사적인 부처님을 이야기 하면서 역사 이면의 장구한 생명, 영원한 생명을 어떻게든 이해시키려고 하는 그런 내용으로 흐르고 있지요.
그래서 땅 속에서 무한한 보살들, 수행도 아주 많이 쌓은 보살들이 솟아났다는 것은 큰 문제를 하나 만들어 놓은 거예요.
큰 문제를 하나 터뜨려 놓고 이 문제를 풀어가는 내용들입니다.
오늘 [종지용출품]을 끝내면서 이것을 간단하게 설명을 하고 그 다음 시간부터는 [여래수량품]이라고 해서 여래의 수명, 생명이야기가 나오거든요.
여래가 80년을 살았는데 여래의 수명이 그것뿐이냐? 아니면 그 외 다른 생명이 있느냐는 이 문제를 가지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여래수량품]이 됩니다.
거기에서 이제 광개근현원(廣開近顯遠), 널리 또는 자세하게 가까운 데 것을 들어서 먼데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여기서부터 종지용출품이 끝나는 대목까지가 약개근현원(略開近顯遠)이라, 가까운 것을 이야기 하면서 장구한 시간, 장구한 생명의 시간을 이해시키려고 하는 그런 내용이 됩니다.
이렇게 이제 줄거리의 흐름을 이해하고 들으면 쉽게 풀리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시세존(爾時世尊)이 설차게이(說此偈已)하시고, 이시에 세존이 이 게송을 설해 마치고
고미륵보살(告彌勒菩薩)하사, 미륵보살에게 고하시되
아금어차대중(我今於此大衆)에 선고여등(宣告汝等)하노라, 내가 지금 이 대중 가운데서 너희들 여러 대중들에게 선고한다, 베풀어서 알려주겠다.
아일다(阿逸多)야 시제대보살마하살(是諸大菩薩摩訶薩)이, 아일다야, 이 제대보살마하살이,
아일다는 미륵보살이지요. 여기서 여러 큰 보살마하살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를 말하지요? 땅에서 솟아 올라온 보살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량무수아승지(無量無數阿僧祗)로, 한량없는 숫자, 수로써 헤아릴 수 없는 숫자,
그리고 아승지, 이게 전부 인도에서 쓰는 숫자의 단위입니다. 무량도 무한이고 무수도 무한이고 아승지도 역시 그래요. 이런 많은 숫자가
종지용출(從地涌出)하니, 땅으로부터 솟아오르니
여등석소미견자(汝等昔所未見者)라, 너희들이 옛날에 보지 못하던 사람들이니라.
너희들, 미륵보살 네가 아무리 실력이 있다고 해도 이런 사람은 못 보았을 것이야. 문수 보현도 이런 사람을 못 봤다 이거지요.
이게 이제 큰 사건을 하나 터뜨려 놓은 거지요. 그래 놓고 이제 사건을 풀어나가는 이야기입니다.
아어시사바세계(我於是娑婆世界)에, 내가 이 사바세계에서,
이 사람들에 대해서 설명을 하려고 하는 거예요.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以(已))하고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는
교화시도시제보살(敎化示導是諸菩薩)하야, 이 모든 보살들을 교화하고 시도(示導)하여,
시도(示導)했다는 말은 지도했다는 말입니다.
조복기심(調伏其心)하며 영발도의(令發道意)호라, 그들의 마음을 조복하고 인생의 바른 길에 대한 생각을 내도록 했노라.
조복은 마음을 잘 다스렸다는 말입니다. 마음을 잘 다스려서, 그 사람이 말하자면 자기 고집대로 하지 않고 또 편협하지 않고 아무리 수준 높은 법문이라도 잘 알아들을 수 있는 그런 마음 자세가 된 것을 마음이 조복되었다고 하지요.
마음을 조복하게 했으며 그리고 영발도의(令發道意)호라, 도에 대한 인생의 바른 길에 대한 생각을 내도록 했다. 그 사람들이 정말 바른 길을 살아가도록 그런 생각을 하게 했다, 그게 발심이에요.
불교에서 발심(發心) 발심이라는 말을 잘 쓰는데 결국 뭔고 하니, 삶에 대한 어떤 바른 길, 또 삶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좀 누리면서 삶의 의미를 좀 알면서 살고자 하는 그런 마음이지요.
이 세상에 생명을 받아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다 인생을 살지요. 다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삶을 살아가는 것까지는 동일한데, 삶이라고 하는 그 문제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사실 흔치를 않아요.
‘아, 이 삶이 뭔가.’ 삶 자체만치 신기한 일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사는 문제 같이 신기하고 또 위대하고 근본적인 문제, 큰 문제는 따로 없습니다. 다시 말해 인생 문제보다 더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큰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또 사실은 그렇게 많지 않다고요. 우선 우리가 생활하는 데 필요한 것, 의식주가 필요하다면 의식주를 해결하고자 하는 거기에 그저 관심이 있지요. 거기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이제는 습관이 되어 가지고 의식주가 어느 정도 충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습관대로 거기에 관심을 쓴다고요.
그러니까 우리가 업을 잘 익혀야 된다는 것이 참 중요한 이야기인데 설사 의식주가 중요하고 다급하다손 치더라도 거기에 매여 너무 허우적대면 의식주 문제가 해결된 뒤에도 다른 생각을 안 합니다.
내내 의식주 문제만 생각해요. 해결되어도 다 됐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좀 더 나아지려고 하지요.
예를 들어서 옷도 좀 더 나은 옷, 먹는 것도 좀 더 나은 것, 거주 문제도 좀 더 넓고 좀 더 고급스럽고 좀 더 나은 것을 찾지요. 자꾸 좀 더 나은 것, 좀 더 나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고요.
그것은 생각이 습관이 되어서 그래요.
그러니까 없는 사람이 보면 ‘저 정도 사는데 무엇이 더 필요해서 또 더 추구하는가?’ 이런 생각을 해요.
있는 사람도 옛날에 없을 때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어느 정도 재산이 되면 더 이상은 의식주 걱정을 안 하고 정말 공부도 좀 하고 다른 좀 더 수준 있는 쪽, 종교가 아니어도 적어도 문화면에 마음을 쓰면서 살거다.’는 생각을 했지만은 그게 아니에요.
자기가 설정한 그 선에 도달하면 그것을 좀 더 높이려고만 하지 다른 생각을 않습니다. 그전에 본인이 계획했던 그 생각을 안 합니다.
보통 월급타서 먹고 산다든지 그냥 한 달 한 달 사는데 크게 불편 없이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의 경제수준으로는 큰 그룹, 예를 들어서 재산이 수천억, 심지어 수조원이 되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 되지요.
한보그룹은 빚이 수조원이라고 하잖아요. 어째서 저런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가 안 되거든요. 그렇게 하지 않아도 잘 사는데 왜 욕 먹어가면서 골치 아픈 일을 부정 저질러 가면서 저렇게 큰일을 벌려 저러는가. 그렇다고 밥을 더 먹는 것도 아니고, 옷을 겹겹이 한 열 벌씩 입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옷에다가 다이아몬드를 누벼 입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요.
또 그래봐야 불편하기만 하지 더 좋을 것도 없는데 왜 그러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습관이 그리 돼서 그래요. 자꾸 벌면 버는 습관이 몸에 배여가지고 그때는 이미 업이 되어서 이제는 안 돼요. 업이 되어 버렸다고요.
업이 되어서 도저히 다른 업, 무슨 문화적, 종교적인 쪽으로 마음을 돌릴 수가 전혀 없어요. 돈도 여유가 있고 시간도 여유가 있어도 마음이 습관이 안 들여놔서 업을 익혀놓지 않아서 그게 안 된다고요.
책 읽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책이 읽혀질 줄 압니까? 책이 없을 때, 가난할 때 한 권 두 권 읽던 그 습관을 그대로 지속해 가면 모를까, 안 그러고 ‘내가 살기 바쁜데 나중에 어느 정도 벌어놓고 읽지’ 하는 그 사람은 다시는 못 읽어요. 왜냐하면 업이 그렇게 되어 버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건 누구 잘못도 아닙니다. 급하게 쫓기면서 살다보니까 의식주 해결하는 문제에 젖어버려서 업이 딱 되어가지고는, 어느 정도 의식주가 해결되어도 다른 것을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니 이해해 줘야 됩니다. 보살님들은 그런 의미에서 보면 참 복이 많아요. 잘 사는지 못사는지는 내가 모르지만 어쨌든 부처님의 경전을 공부하는 이런 시간을 가지잖아요.
나가면서 다 잊어버리고, 여기서 나가는 순간 의식주 문제를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일주일에 한 시간을 이런 시간을 위해 비워놓았다고 하는 거, 이것은 인생에 대해서 큰 다행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더 가지려고 하는 그런 행동이 업이 되어 버리면 자기도 어쩌지를 못해요. 버는 것이 업이 되어 버리고, 사업 확장이 업이 되어 버리면 그 외의 다른 것은 못해요. 그러니까 우리는 업을 평소에 잘 익혀야 할 필요가 있다는 그런 생각입니다.
불교에서 도(道)라고 하는 말을 잘 쓰는데 인생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을 할 줄 아는 그런 마음이 도(道)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이것도 ‘아, 나는 나중에 돈 좀 벌고 나서 인생에 대해 생각 좀 해 봐야지’하지만 그것이 업이 안 되어 놓으면 아무리 충족이 되었다고 해도 그때는 인생에 대해서 생각해 볼 겨를이 없어져 버립니다.
업이 안 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삶의 어떤 길, 사는 문제, 인생 그 자체에 대해서 생각하는 그런 마음가짐을 소위 발심(發心)이라고 할 수 있지요. 여기에 영발도의(令發道意)라고 했지요. 발심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에요.
조복기심(調伏其心)이란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자꾸 세속적으로 의식주만을 생각하는, 그런 곳으로 흐르는 마음을 좀 잡두리 해서 훈련을 좀 받았다고 볼 수 있어요.
여기에서 이런 이야기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여기 전체의 흐름은 이 이야기가 사실은 아니지만, 부수적으로 이런 내용도 곁들여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뜻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주된 말씀은 땅에서 솟아난 많은 보살들이 있는데 내가 이 사람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마음을 항복 받았다.
말을 듣겠다고 항복받은 것이 아니라, 너무 의식주로 흐르는 그 마음을 항복 받아 가지고 어느 정도 말하자면, 영발도의(令發道意), 인생문제에 대해서 생각하도록 내가 가르쳤다는 이런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차제보살(此諸菩薩)이 개어시사바세계지하(皆於是娑婆世界之下)의, 이 모든 보살은 우리가 사는 이 사바세계에 와서 저 밑에,
밑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근본을 말해요. 본연이라는 뜻이 됩니다. 밑이라고 하는 것은 근본이거든요. 본래적이고 본원적인 것입니다.
차계허공중주(此界虛空中住)니라, 이 세계 허공 가운데 머물면서,
이 허공은 지난 시간에 얼핏 말씀드렸지요. 말하자면 공을 바탕으로 하는 연기의 도리, 평등사상, 또 모든 사람들이 똑 같이 평등하게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그런 입장을 허공이란 말로써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보이는 모든 것은 전부 인연의 도리에 의해서 얽히고설키고 잎이 피고 잎이 지고, 또 잎이 피고 지고, 또 피고 지고 하는 그런 변화를 반복하는데 그 바탕에는 공(空)이 있거든요. 공(空)이기 때문에 그런 변화가 가능한 것입니다.
만약 공이 아니고 어떤 고정된 형상으로 딱 굳어져 있다면 그런 변화가 안 되지요.
그럼 부처는 영원히 부처이고, 중생은 영원히 중생이지요.
푸른 잎은 계속 푸르게 있고 붉은 잎은 계속 붉게 있어야지요. 낙엽지고 하는 그런 현상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것의 바탕이 텅 빈 공(空)이기 때문에 새 잎이 자라고 그게 푸르렀다가 단풍이 들고, 단풍이 들었다가 지고, 그 다음에 내년 봄에는 또 새잎이 자라고 그러는 거예요.
이게 사실 아주 잘 된 거예요. 텅빈 바탕이 공(空)이라고 하는 게.
우리가 어떤 슬픔을 당했을 때는 정말 죽을 것 같지요. 며칠 못살고 죽을 것 같은 정도로 절망감에 빠지지만 아니지요, 며칠이 지나면 또 좀 살만해 지거든요. 그렇듯이 우리가 또 새로 깨어나서 새 삶을 살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것이 만일 공(空)이 아니고 실제로 그 상태로 계속 굳어져 있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건 정말 못 살 일이지요. 정말 공이기 때문에 세월이 가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또 세월이 좀 더 가면 웃을 수도 있고요. 농담도 할 수가 있고 좀 더 세월이 가면 언제 내가 그랬던가 싶게 전혀 딴 사람이 되어 있을 수도 있는 거예요.
그런 어떤 변화무쌍한 것이 바탕이 공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옛날의 훌륭한 도인 스님들이 모두 근본이 공이라고 하지요.
저 사바세계의 허공 가운데서 머물렀다고 하는 말은, 이 보살들은 근본적으로 본연의 모습, 공(空)을 바탕으로 한 연기의 도리를 잘 아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뜻에서 이 보살들이 그렇게 살았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사는 곳, 지역이 문제가 아니고 무슨 동네다, 금정구다, 서울이다 하는 문제가 아니고 그런 정신세계에서 살았다 이거예요. 공을 바탕으로 하는 연기의 도리를 환히 꿰뚫어 아는 그런 정신세계에서 살았다는 거지요.
이 보살들은 그런 사람들이지요. 그런 곳에 살면서,
어제경전(於諸經典)에 독송통리(讀誦通利)하야, 그리고 모든 경전에 독송통리야.
천수경도 잘 외고 금강경도 잘 외고 경이란 경은 잘 외워요. 통(通)이라는 말은 통달(通達)이라고 봐도 좋습니다. 그 뜻을 잘 통달했어요.
사유분별정억념(思惟分別正憶念)이니라, 그리고 경전에 대해서 잘 사유하고 바로 기억하니라.
이 사유(思惟)라는 것이 중요해요. 우리가 그냥 듣기만 듣고 스스로 생각하지 아니하면 제 것이 되기가 힘이 듭니다. 스스로 자꾸 생각을 해봐야 돼요. 차 타고 가면서 멍청하게 있지 말고 어떤 한 구절을 가지고 자꾸 곱씹어 보는 거예요.
그게 사유분별이지요. 이렇게도 생각해 보고, 저렇게도 생각해 보는 거지요. 그리고 내 생활과 연관을 시켜서
‘아, 부처님의 이 말씀이 내 생활 속에서 이것 이구나’
아니면 금방 말씀드린 어떤 슬픔과 기쁨의 문제, 본래 모든 것은 있을 때는 사람을 짓누르는 바위 같이 슬픔도 기쁨도 있었지만 그것이 변해 가는 것을 보면 정말 공이로구나, 본래 없던 것이구나 하는 것, 이런 이야기도 그냥 듣고 흘릴 것이 아니라 차를 타고 가면서도 곰곰이 생각해 보고, 또 자기 경험에도 한 번 이렇게 비추어 보고, 그리고 혼자 한 번 씨익 웃어도 보고, 이게 바로 사유분별이예요.
독송통리(讀誦通利), 모든 경전에 대해서 독송통리하고 사유분별하고 그리고 정억념(正憶念)이라, 바로 기억하라.
바르게 기억하라는 거지요. 경전은 가능하면 바르게 기억해야 해요. 부처님 말씀은 바르게 기억해야 합니다. 대충 기억해 가지고 뭐 그런 거 같더라,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다른 사람이 듣고는 분명치 않으므로 뭔지 몰라서 다시 한 번 이야기 해 보라고 하면 그만 모르는 거예요. 가만 생각해 보니까 바르게 기억을 못해서 소신 있는 대답을 못하는 거예요. 그리 되면 안 되는 거지요. 그래서 정억념(正憶念)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사람들, 허공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그런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아일다(阿逸多)야 시제선남자등(是諸善男子等)이, 아일다야, 이 모든 선남자들이
불락재중(不樂在衆)하야, 대중들 속, 여러 사람이 있는 곳을 즐겨하지 아니하여
다유소설(多有所說)하고, 말이 많은 것도 좋아하지 아니하며,
불락이라는 것이 여러 대중들 속에 있으면서 말이 많은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는 것이지요. 그럼 뭘 좋아하느냐?
상락정처(常樂靜處)하야, 항상 고요한데 있기를 즐겨하여
여럿이 어울려서 놀면 떠들고 놀 때는 즐겁지만 집에 돌아오면 가슴이 텅 비고 남는 것이 하나도 없잖아요?
그 뜻입니다.
불락재중(不樂在衆)다유소설(多有所說), 많이 모이면 말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도 즐거운 이야기만 하다오면 괜찮지요. 그런데 말을 많이 하다 보면 남의 이야기 하고, 남의 이야기를 하다보면 마음 상하는 이야기가 오고 가고 결국 그렇게 된다고요.
그럼 좀 현명한 사람들은 어떤 모임에 만부득이 나간다고 해도 즐거운 방향으로만 이야기를 하고 또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싶으면 그 자리를 뜨는 그 사람이 현명한 사람입니다.
그 자리에서 자기가 똑똑한 척 아니라고 해 봐야 분위기가 더 거북해지고 더 어색해지고 그렇지요.
불락재중(不樂在衆) 다유소설(多有所說)
상락정처(常樂靜處)근행정진(勤行精進)하대, 항상 고요한 곳을 즐겨 해서 부지런히 정진을 하되
미증휴식(未曾休息)하며, 일찍이 쉬지를 아니하며
쉬면 뭐할거에요. 피곤해서 잠깐 쉬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은 여기서 미증휴식(未曾休息)이라는 것은 하다가 치워버리는 거지요.
공부를 하겠다고 며칠은 친구에게 끌려서 다녀 봐도 아무 소득이 없고 이해도 안 되고, 재미도 없고 그러면 마는 거예요.
사람 인연이라는 건 그래요. 우리가 살면서 한 번 딱 보는 인연도 많아요. 두 번 보는 인연도 있어요. 세 번 보는 인연, 일 년 보는 인연, 이 년 보는 인연, 인연도 물론 우리가 짓는 대로 가기도 하지만 아무리 지으려고 해도 안 되는 그런 인연도 있지요.
참 각양각색입니다. 한 마디로 이렇다, 라고 선을 그어서 말할 수는 없는 거지요.
역불의지인천이주(亦不依止人天而住)하고, 그리고 이 사람들은 사람과 천상 이런데 의지하지 않고
그러니까 이 사람들에게는 천상에 사느냐, 인간세계에 사느냐 이것이 문제가 아니지요.
상락심지(常樂深智)하야, 깊은 지혜를 항상 좋아하여, 아주 깊은 지혜를 좋아해서
무유장애(無有障礙)하며, 장애가 없으며
역상락어제불지법(亦常樂於諸佛之法)하고, 항상 부처님의 법을 좋아하고,
절에 많이 다니시는 분들은 그런 일이 있지요.
친구들과 모여서 노는 것도 좋지만 그래도 혼자 조용히 법당에 와서 기도를 하고 간다든지, 절을 함으로써 얻게 되는 통쾌감, 거기서 없는 어떤 법락, 그것은 누구에게 보여줄 수 없지만 혼자서 누리는 즐거움이거든요.
그리고 또 경전의 어떤 구절 중, 부처님의 깊은 지혜에서 나온 말씀이 한 번씩 가슴에 와 닿는다고 하면 그 즐거움 또한 보통이 아니거든요. 여기 땅에서 솟아올라온 이 보살들은 부처님의 법, 가르침을 늘 좋아하지요.
일심정진(一心精進)하야 구무상혜(求無上慧)니라, 그래서 보다 더 높은 지혜를 위해서 정진하는 거지요.
무상혜라고 하는 것은 보다 더 높은 지혜이지요.
보다 더 좋은 집, 많은 돈, 사업이 문제가 아니고 이 사람들에게는 부처님의 지혜를 따라가려면 멀었으니까 보다 더 높은 지혜를 구하려고 하는 그런 마음뿐인 보살들이라는 이런 말입니다.
이 내용은 땅에서 솟아 올라온 보살들에 대해서 부처님이 대중들에게 설명을 한 것입니다.
이시세존(爾時世尊)이 욕중선차의(欲重宣此義)하사 이설게언(而說偈言)하니라, 부처님께서 게송으로써 거듭 말씀을 하시지요.
이 시에 세존이 이 뜻을 거듭 펼치려고 게송을 설해 말하되
아일여당지(阿逸汝當知)하라 시제대보살(是諸大菩薩)이 종무수겁래(從無數劫來)로, 아일다여, 너는 마땅히 알아라. 이 대 보살들은 무수겁으로부터 오므로
수습불지혜(修習佛智慧)니, 부처님의 지혜를 수습하니,
여기 보십시오. 무수겁(無數劫)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 생명의 영원성을 이해한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듭니다.
우리 생명은 영원하고 이 몸을 버리고 또 새 몸을 받고 계속 윤회를 하고, 윤회의 주체인 우리의 참생명은 영원하다는 것은 대승불교의 유시(諭示)나 마찬가지에요. 그거 모르는 불자들은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사십구재도 지내고 하지요.
또 절에 다니다 보면 어떤 스님은 전생에 누가 죽어서 태어났다고 하더라, 그런 이야기를 얼마나 듣습니까?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듣기는 듣지만 그래도 정말 냉정하게 나의 참생명은 이 육신하고 관계없는가, 여기에 대해 확신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야기는 많이 들어왔지만 확신은 잘 안서요. 확신을 갖기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에요.
한 예로, 우리가 좋은 옷을 입고 나가다가 무슨 흙탕물이 튀어 가지고 옷을 버렸다면 기분은 상하지만 내 몸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냥 쫓아 들어가서 옷은 확 벗어던지고 새 옷을 갈아입고 나가면 돼요. 우리 생명에 대해서 그 정도의 확신이 서야 그게 진짜이거든요. 그래야 생명의 영원성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산다 할 만하지요.
그럼 그 사람에게는 죽음이 없어요. 죽음이 두렵지가 않습니다. 옷 찢어진 거 하고 하나도 다르지 않은데 뭐 두려울 게 있습니까? 옷이 한 두 벌도 아닌데 찢어지면 새 옷 갈아입으면 되지요. 보다 더 좋은 새 옷이 얼마든지 기다리고 있지요.
내가 지은대로 훨씬 더 멋지고 건강하고 튼튼한 옷이 얼마든지 앞으로 기다리고 있는데 염려될 바가 없지요.
그러나 죽음을 앞두고 옷 갈아입는 다는 그 정도 홀가분한 마음으로 죽기란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 정도 되면 거의 도인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그러니까 부처님이 그걸 이해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그걸 이해시키려고 하다 보니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러니까 어째서 무수겁(無數劫)이냐,
우리는 기껏해야 팔십년, 구십년 살면 잘 살았다고 오래 살았다고 야단인데 무수겁(無數劫)이라니 과연 이런 무수겁이란 세계가 있느냐 이 말이에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여기서 자꾸 보살들을 이야기 하고 있어요. 그리고 여래수량품에 가서는 부처님을 이야기해요. 앞에서는 간략하게 하고, 여래수량품에서는 자세하게 설명하게 되지요.
실시아소화(悉是我所化)하야 영발대도심(令發大道心)이니라, 내가 다 교화해서 큰 도의 마음을 발하게 했다.
차등시아자(此等是我子)라 의지시세계(依止是世界)하야, 이 사람들은 모두 나의 제자들이라, 이 세계에 의지해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가진다 해도 어디 다른 데 가서 사는 게 아니에요. 바로 이 땅 여기서 영원을 사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계를 의지해서
상행두타사(常行頭陀事)하며, 항상 두타사를 행했다.
두타사(頭陀事)라는 것은 수행하는 것을 말해요. 자꾸 털어버리고 두타라고 하는 말은 두수, 털 두자 털 수자, 두수라고 번역을 해요. 두타라는 말은 인도 말이지요.
번뇌를 털어버리고, 물질을 털어버리고, 명예를 털어버리고, 온갖 거치적거리는 그런 것들을 전부 털어버리는 그런 일들, 그게 두타이지요.
가섭존자는 두타제일이지요? 두타제일 가섭존자라고 이렇게 표현을 하지요.
지락어정처(志樂於靜處)하야, 뜻에 고요한 곳을 즐겨해서
사대중궤요(捨大衆憒鬧)하고, 시끄러울 궤(憒) 시끄러울 요(鬧)자입니다. 대중들이 모여서 그냥 쓰잘데 없는 소리 떠들어대는 그런 것을 다 버려 버리고
불락다소설(不樂多所說)이라, 또 자기도 말을 많이 하지 않겠지요? 자기가 말을 많이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여시제자등(如是諸子等)이 학습아도법(學習我道法)하며, 제자들이 나의 도법을 학습했다.
주야상정진(晝夜常精進)하야 위구불도고(爲求佛道故)로, 밤낮으로 항상 정진해서 불도를 구하기 위한 까닭에
재사바세계(在娑婆世界)의 하방공중주(下方空中住)니라, 이 사바세계를 떠나서 온 사람이 아니에요. 또 사바세계를 떠나서 살아서도 안 되고요. 그러니 이 사바세계, 하방, 본래인 근본 도리, 공을 바탕으로 한 연기의 도리를 아는 그런 정신세계에 머무는 사람들이다.
하방공중주(下方空中住)라는 말은 아까도 잠깐 설명 드렸지만 그런 말이에요.
하방의 공중에 머물렀다. 사람이 공중에 머물 수 있습니까? 공(空)이라고 하는 말은 분명히 공을 바탕으로 한 연기의 도리를 말합니다.
이 세상을 그대로 우리가 살아요. 그대로 남이 사는 대로 살지요.
아침이면 일어나고 식사 시간 때면 식사하고 일 할 때는 일을 하고 밤이 되면 잠이 들고, 남들이 사는 이 사바세계의 생활을 그대로 다 하지만 자기가 머물고 있는 이 모든 것은 전부 공을 바탕으로 해서 인연의 도리로 흘러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꿰뚫어 아는 사람들이라 이거지요.
그게 보살들이에요. 그게 중요한 거예요.
그것만 말해도 대단한 거지요.
남의 이야기는 다 잘하지요. “그거 다 인연의 도리야, 인연의 소치니까 그리 알아.” 다 우리가 지은대로 받고 자업자득(自業自得)이고 자작자수(自作自受)라고 그렇게 말하지만 자기 앞에 닥치면 남에게 이야기 했듯이 그렇게 안 받아들여지지요.
친구에게는 위로하느라고 그런 소리를 잘 하지만 자기 일일 때에는 그게 잘 안 받아들여진다고요. 아직도 그만치 연기의 도리, 인연의 도리에 대해서 확신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지념력견고(志念力堅固)하야, 이 사람들의 생각과 뜻의 힘은 견고하여,
그러니까 나에게 이야기 해 주었듯이 자기 자신에게도 그렇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거지요. 그러니 지념력견고(志念力堅固)라, 뜻과 생각의 힘이 견고하다는 거지요. 우리는 견고하지 못하니까 남은 잘 달래면서 자기 일에는 상처를 크게 받지 않습니까.
상근구지혜(常勤求智慧)하며, 항상 부지런히 지혜를 구하며,
그러니까 우리가 어느 정도 편안하게 일 없이 경전을 공부할 때는 거의 도인이 다 된 거 같지요. 그 정도면 내게 일이 생겨도 그렇게 생각할 것 같지만 아니에요, 그게.
상근구지혜(常勤求智慧), 항상 부지런히 해야 되요. 이런 이치가 업(業)이 되어 버려야 된다니까요.
돈 버는 게 업이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이치가 업이 되어 버리면 그때는 어떤 문제가 닥치더라도 지혜가 있기 때문에 해결이 가능하지요.
설종종묘법(說種種妙法)하대 기심무소외(其心無所畏)니라, 가지가지 법을 설하되 그 마음은 두려운 바가 없느니라. 당당하다 이 말이지요. 부처님이 어떤 이치를 설명해도 당당하다는 거지요.
아어가야성(我於伽耶城) 보리수하좌(菩提樹下坐)하야, 여기 이제 얼핏 흘리는 말 같이 되어 있어요.
내가 가야성, 부다가야이지요. 보리수 나무 밑에 앉아서,
몇 대 손자라던가? 지금도 보리수가 그대로 남아 있어요. 부처님이 처음에 성도하셨을 때, 남방불기로 2600년 쯤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나무의 수명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증손자라던가 고손자라고 하는 그 나무가 아직 그 자리에 서 있어요. 본래 나무는 아니고 죽고 새 순이 나서 자라고 자라고 했다는 그 나무입니다. 바로 그 자리이지요.
보리수 나무 밑에 앉아서
득성최정각(得成最正覺)하고 전무상법륜(轉無上法輪)하고는, 가장 바른 깨달음을 이루고 가장 높은 법의 바퀴를 굴리고는
이내교화지(爾乃敎化之)하야 영초발도심(令初發道心)일새, 이에 교화하여서 도의 마음을 발하도록 했다.
여기에 보면 얼핏 부처님이 이 세상에서 성도를 해 가지고 이 사람들을 가르친 것처럼 그렇게 이야기가 되어 있어요. 현재의 그 어떤 삶과 영원의 삶이 둘이 아니고 맥을 같이 하여 연결이 되어 있다고 하는 뜻입니다.
아까도 내가 이야기를 했지만 부처님의 형상을 보고, 형상 이면의 진정한 영원의 생명을 이해해야 한다고 한 것처럼 그것이 이렇게 전부 연결이 되어 있어서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얼핏 보면 모순된 이야기 같지요. 여기 보면 부처님이 가야성의 보리수 아래 앉아서 성도하고 나서 이 사람들을 가르치고 나서 교화를 했다는 이런 말이, 말하자면 가능한 거예요.
지금 우리가 아무리 마음, 마음 하지만 육신이 없는 사람을 두고 ‘아, 그 사람 마음이 어떻다’라고 하는 이야기는 없거든요. 육신이 있는 사람을 보고 그 사람 마음이 어떻다고 하지요. 이치가 그렇게 되어 있다고요.
육신의 생명은 얼마 안 되는데 영원한 마음을 이야기 하자니 그래도 몇 년 안 되는 육신을 보고 영원의 마음을 이야기 할 수밖에 없도록 되어있어요.
이야기 자체가 그런 거예요. 아주 오묘한 그런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여기에서 고심을 많이 한 대목이지요. 그래서
금개주불퇴(皆住不退)하고, 지금 이들이 모두 다 물러서지 아니한 그런 위치에 머물고,
말하자면 본래 보살, 본래 부처, 본래 생명, 우리가 본래생명이라고 하는데 조금도 손색이 없습니다. 그래서 불퇴, 영원히 불퇴입니다. 그 사람들은요.
우리도 현 상황은 나아가기도 하고, 물러가기도 하고, 잘 할 때도 있고 못 할 때도 있고 그렇지요. 그러나 우리의 본래의 성, 불성 자리에는 잘 하는 것도 없고 못하는 것도 없고, 나아가는 것도 없고 물러서는 것도 없고 그래요. 그게 불퇴의 자리에요.
그곳에 머물러 있다. 그러니까 그 이면의 보이지 않는 영원한 생명의 세계, 불생불멸의 참생명의 세계를 어떻게 하더라도 이해시키려고 하는 그런 입장으로 보면 이런 말들을 이해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실당득성불(悉當得成佛)이니라, 다 마땅히 앞으로 이 사람들은 성불한다.
앞으로 성불한다고 하지만 이미 성불되어 있는 자리에요.
아금설실어(我今說實語)하노니 여등일심신(汝等一心信)하라, 내가 지금 실다운 말로써 설명하니 너희들은 일심으로 믿어라.
아종구원래(我從久遠來)로 교화시등중(敎化是等衆)호라, 나는 옛날부터 이들의 무리를 교화했노라,
구원이라는 말이 저 앞부분, ‘나는 가야성에서 보리수나무 아래 앉아 정각을 이루고’ 한 말하고 반대이지요. 이 육신의 입장은 가야성 보리수 아래서 정각을 이루었지요. 이룬지 40여년 밖에 안 돼. 그런데 지금 여기에 나오는 말은 내가 지금 아주 진실한 말로 설명하겠으니 네가 일심으로 꼭 믿어야 된다고 했으니, 못 믿을 확률이 거의 99%라. 못 믿을 확률이 너무 높지요.
그래서 여등일심신(汝等一心信)하라, 너희들은 일심으로 믿도록 하라고 했지요.
저 뒤에 여래수량품에 가면요, 세 번을 당부합니다.
나는 참으로 진실하게 이야기 하니 너희들은 꼭 믿어야 돼. 나는 진실하게 말하노라, 너희들은 꼭 믿어야 돼. 이것을 세 번이나 반복합니다. 안 보이는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까 그럴 수밖에 없지요. 일심으로 믿으라고 해 놓고는
아종구원래(我從久遠來)로, 구원이라는 말은 영구한 수억만 년 이전부터라는 말이지요.
수억만 년 이전부터 교화시등중(敎化是等衆)호라, 이들의 무리를 교화했노라. 이들의 무리란 누구이지요? 땅으로부터 솟아 올라온 보살들이지요.
수억만 년 전부터 나는 이 사람들을 교화했노라.
첫댓글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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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近顯遠 開權顯實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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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우님, 복습 잘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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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과 친한 업을 자꾸 익혀서.... 은우님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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思惟分別하고 正憶念하라...은우 님! 수고하셨습니다..고맙습니다.._()()()_
상근구지혜(常勤求智慧)하며, 항상 부지런히 지혜를 구하며~~~~은우님 감사드립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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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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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우리의 본래의 성, 불성 자리에는 잘 하는 것도 없고 못하는 것도 없고, 나아가는 것도 없고 물러서는 것도 없다..........
내가 땅속에서 솟아 오른 보살들을 교화한 것은 아주 오래 옛적부터( 久遠來)였다는 것을 너희들은 일심으로 믿어라
一心信
下方空中住;남과 같이 살면서 자기가 머물고 있는 세상이 인연도리에 의한 공한 것이라는 것을 꿰뚫어 알고 있는 것
志念力堅固
--남의 일에는 인연도리,연기라고 잘 생각하면서 자신의 일은 그렇게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 보통 사람인데 땅에서 솟아 오른 보살들은 그렇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