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욥은 자신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잘못 판단하실 것 같은가? 전능자께서 실수라도 하실 것 같은가? (죄는 그 모양이라도 없도록 반드시 심판하실 분이시네.)”(욥8:3)라고 정죄하는 빌닷에게 “내가 (아무리) 의롭다 해도 대답은커녕 그저 (나를 심판하실 하나님께) 긍휼을 빌 수 있을 뿐인 것을.”(욥9:15)이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공의를 행하시는 전능자라고 고백했습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인일 수밖에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아무리 의로운 인간이라 할지라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만큼은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할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절대 공의에 따라 선악을 심판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긍휼을 구할 수밖에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도 역시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각 사람은 몸을 입고 사는 동안, 행한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이나 자기가 행한 행위대로 거기에 알 맞는 보응을 받게 될 것입니다.”(고후5:10),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일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습니다.”(히9:27)라고 외쳤습니다. 죽음과 심판은 필연적으로 주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외쳤습니다. 모든 인류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교부 제롬Jerome은 “너 죽은 자여! 일어나 심판을 받으러 오라.”라는 마지막 나팔 소리가 자신의 귀에 들려오는 것 같다고 입버릇처럼 고백했습니다. 시인 역시 “주님이 오실 것이니, 주님께서 땅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니, 주님은 정의로 세상을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뭇 백성을 다스리실 것이다.”(시96:13)라고 외쳤습니다. 특히 예수께서는 “그러나 이 나라의 아들들은 바깥 어두운 곳에 던져져 그 곳에서 슬피 울며 고통스럽게 이를 갈 것이다.”(마8:12)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여기서 “바깥 어두운데”는 영원한 멸망과 죽음이 예비 된 장소입니다.
인류의 유일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위하여 마련해 놓으신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부터 떨어진 장소입니다. “그들이 갈 곳은 캄캄하고 어두운 구덩이뿐입니다.”(벧후2:17b)라는 말씀에 따르면, 캄캄하고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어두운 구덩이입니다. 존재적 절대 소외입니다. 종말론적 죽음입니다. 형벌입니다. 영원한 영적 절망입니다. 한 마디로 영원한 불 못 지옥입니다. 또 “울며”는 불가항력적인 고통을 의미합니다. “이를 간다.”는 우리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도무지 빠져 나올 수 없는 깊고도 깊은 절망을 의미합니다.
존재하는 그 누구도, 무엇을 통해서도 위로할 수 없고 제거할 수도 없는 영원한 눈물과 고통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심판이 예비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신구약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정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두렵고 떨리는 이 심판에 대해서 거의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 왕이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쾌활한 성격의 동생은 형을 깊은 슬픔에 빠뜨리는 원인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고 싶어졌습니다.
왕은 동생에게 “나는 하나님께 큰 죄인이네. 그런데 어떻게 죽어야 할지도 모르겠고, 최후의 심판 때에 어떻게 공의의 하나님 앞에 나타나야 할지도 모르겠네.”라고 말했습니다. 동생은 왕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그런 것은 단지 우울한 생각에 불과할 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왕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는 어떤 사람이든 사형집행관이 자신의 집 앞에서 나팔을 불면, 곧 형장으로 끌려가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이 깊었습니다. 왕은 사형집행관을 동생의 집으로 보냈습니다. 나팔을 최대한 크게 울려 불라고 명령했습니다.
동생은 나팔 소리를 듣자마자 혼비백산했습니다. 예고도 없이 나타난 죽음의 사자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사시나무 떨 듯 떨었습니다.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황에서도 무조건 왕에게 달려갔습니다. 자신이 도대체 어떤 죽을죄를 저질렀는지 알려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때 왕은 다시 “자네는 결코 나에게 죄를 범한 적이 없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낸 사형집행관을 보는 것이 그렇게도 두렵고 떨리던가? 그렇다면 큰 죄를 범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으로 끌려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아무 죄도 없는 상태에서 사형집행관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두려워서 사시나무 떨 듯 떨 수밖에 없는 연약한 사람이, 어찌 큰 죄를 가지고 영원한 심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밥을 먹을 때도 죄를 짓습니다. 옷을 입을 때도 죄를 짓습니다. 공부할 때도 죄를 짓습니다. 친구를 만날 때도 죄를 짓습니다. 웃을 때도 죄를 짓고, 울 때도 죄를 짓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도 죄를 짓습니다. 기도할 때도 죄를 짓습니다. 찬양할 때도 죄를 짓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죄를 짓습니다. 교회 바깥에서도 죄를 짓습니다.
집안에서도 죄를 짓습니다. 집 바깥에서도 죄를 짓습니다. 결혼해서도 죄를 짓습니다. 혼자 살아도 죄를 짓습니다. 영화를 볼 때도 죄를 짓습니다. TV를 볼 때도 죄를 짓습니다. 책을 볼 때도 죄를 짓습니다. 놀 때도 죄를 짓습니다. 휴가 가서도 죄를 짓습니다. 직장에서도 죄를 짓습니다. 누워서도 죄를 짓습니다. 앉아서도 죄를 짓습니다. 화장실가서도 죄를 짓습니다. 주방에서도 죄를 짓습니다. 길에서도 죄를 짓습니다. 어디에 있든 죄를 짓습니다. 죄를 짓는 것이 우리의 본질입니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영웅도, 위인도, 천재도, 부자도, 왕도 다 같습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인간은 다 오십 보 백보입니다. 도토리 키 재기입니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하나님의 종이라고 큰소리치는 목사들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죄에 물든 삶을 사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거기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라고 선포합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상태는 죄인이며, 결말은 사망이라고 선포합니다. 인간은 죄를 지으며 살다, 죽어서는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존재라고 선포합니다.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포합니다.
한편, “너희가 다 이것을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주 허탄한 사람이 되었는고? 악인이 하나님께 얻을 분깃, 강포자가 전능자에게 받을 산업은 이것이라. 그 자손이 번성하여도 칼을 위함이요 그 후예는 식물에 배부르지 못할 것이며 그 남은 자는 염병으로 묻히리니 그의 과부들이 울지 못할 것이며”(욥27:12-15)라는 욥의 지적대로, 하나님의 심판은 악인은 물론 그의 가족과 후손들에게 임합니다. 악인의 후손이 번성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비 해 놓으신 재앙을 위해서입니다. 이 재앙에서 살아남은 후손들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음식도 구할 수 없습니다. 결코 배부를 수 없습니다. 힘겨운 기근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재앙과 기근에서 살아남은 악인의 후손은 악한 질병으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연거푸 악인과 자식을 잃은 여인들은 제대로 된 장례도 치를 수 없습니다.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갑자기, 순식간에, 한꺼번에, 연달아 죽어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비극 중에 비극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렇게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그 정도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불의한 방법으로 모은 재산에도 임합니다. 그래서 욥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을 통해서 “그가 비록 은을 티끌 같이 쌓고 의복을 진흙 같이 예비 할지라도”(욥27:16)라고 외칩니다.
여기서 “예비 할지라도”는 “수직으로 서 있다, 세우다, 확실하게하다, 번영하다, 견고하다, 안정되다” 등의 뜻입니다. “창고에 끝없이 높이 쌓아 올려서 저장했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탐욕과 약탈 등의 부정한 방법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음을 암시합니다. 또 “두로는 요새를 지었고 은을 흙먼지처럼 쌓아올렸으며 길거리의 진흙같이 많은 금을 가졌다.”(슥9:3)라는 지적대로, 귀한 은금 같은 보물조차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정도로 굉장한 부를 쌓아 놓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엘리바스는 “하물며 진흙 집에서 사는 자들, 먼지로 돌아갈 자들, 나방보다 쉽게 죽는 자들이야 오죽하겠는가?”(욥4:19)라고 외쳤습니다.
욥은 “주님, 기억해 주십시오. 진흙으로 나를 만드시더니 이제는 다시 흙으로 되돌려 보내시렵니까?, 그분이 나를 진흙탕에 던지시니 먼지와 재처럼 되었구나.”(욥10:9, 30:19)라고 탄식했습니다. 티끌과 진흙은 우리 인간의 덧없고 연약한 모습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악인의 허무하고 비참한 결말을 가리킵니다. 또 귀금속이 아니라 의복을 재물과 부를 대표하는 것으로 언급한 이유 역시 마찬가지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아무리 화려하고 비싼 의복이라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좀과 곰팡이 등에 의해 상하거나 썩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욥의 외침은 “그 예비한 것을 의인이 입을 것이요 그 은은 무죄자가 나눌 것이며”(욥27:17)라고 이어집니다. 산같이 쌓여 있어서 도무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은 곧 재물이 악인의 영원한 소유로 확정되지 않았다고 외쳤습니다. 악인이 준비한 옷은 의인이 입게 될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쌓아둔 재물은 죄 없는 의인들의 차지가 될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복은 악인이 아니라 의인이 받아 누리게 될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의인의 장래는 완벽하게 회복될 수밖에 없다고 외쳤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교회라고 한다면 반드시 죄를 경고할 수 있어야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저주와 심판의 화살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의 죄를 명확하게 용서받지 못한 사람들의 심장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겨냥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때가 이르게 되면 전혀 지체하지 않고 발사될 것이라고 경고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 심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죄인은 단 한 명도 있을 수 없다고 경고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전에 하나님 앞으로 나오지 않는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로 모셔 들이지 않는다면 죄인으로 죽어서 영원한 불 못인 지옥에 던져질 수밖에 없다고 강력하게 경고할 수 있어야합니다.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지금, 오늘” 선택해야만 한다고 경고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의인입니까? 악인입니까? 자신이 얼마나 흉악한 죄인인지 깨달아 알고는 있습니까? 죄의 결과는 영원한 심판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는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기는 합니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날을 준비하고는 있습니까? 놀랍게도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마음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감정 곧 정서情緖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① 첫 번째 정서는 소망입니다. 장래의 성공과 행복에 대한 소망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러한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소망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롬8:24)라는 사도의 지적대로, 하나님에 대한 소망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는 자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여호와 자기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시146:5)라는 시인의 지적대로, 이 소망을 가진 믿음의 사람들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 의미와 기쁨을 찾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만 구합니다. 하나님에게만 자신의 유일한 소망을 둡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될 날을 소망합니다. 이 소망 때문에 거룩함을 추구합니다. 사모합니다. 갈망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도와주심을 구합니다. ② 두 번째 정서는 미움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다. 나는 교만, 거만, 악한 행실, 거짓된 말을 미워한다.”(잠8:13)는 지혜자의 외침대로, 죄에 대한 미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는 이단에 대한 미움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훼손하는 예배와 지도자와 교회에 대한 미움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수단 정도로 생각하는 이들에 대한 미움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악을 행하는 이들에 대한 미움입니다. ③ 세 번째 정서는 거룩한 소원입니다. 시인은 “내가 여호와께 간절히 구하는 오직 한 가지는 이것입니다. 내 평생에 늘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우심을 보고 성전에서 주님을 뵙는 것입니다.”(시7:4)라고 고백했습니다.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극도로 순결하시고, 완전하시고, 사랑이시고, 자비로우시고, 의로우신 하나님 같이 되기를 갈망합니다. 바로 그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갈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거룩하신 하나님을 주리고 목말라합니다.
하나님처럼 살 수 있는 은혜를 갈망합니다. ④ 네 번째 정서는 거룩한 기쁨입니다. 이는 어떤 모양의 성취를 통해서 누리는 기쁨이 아닙니다. 충분히 기도했기 때문에, 충분히 수고하고 봉사하고 헌신했기 때문에, 무수히 많은 전도의 열매를 맺었기 때문에, 하늘을 찌를 것 같은 높은 첨탑을 가진 건물을 세웠기 때문에, 남들이 가지 않으려는 오지의 선교사로 갔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기쁨이 아닙니다. 이 기쁨은 성취와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지극히 선한 삶도 이 기쁨의 원인은 아닙니다. 이 기쁨의 유일한 원인은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함께 동행 하시며 탄식함으로 기도해 주시는 성령이십니다. 불의로 가득 찬 세상에서 바로 이 기쁨이 충만했던 시인은 다른 무엇도 아닌 “여호와를 생각하면서 기뻐하십시오.”(시37:4a)라고 외쳤습니다. 사도 역시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십시오.”(빌4:4)라고 외쳤습니다. ⑤ 다섯 번째 정서는 슬픔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겸손하고 자기 죄를 (슬퍼하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뉘우치는 사람, 나를 두려워하고 내 말을 따르는 사람, 이런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다.”(사66:2b)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5: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도무지 사라지지 않는 자신의 허물과 죄를 슬퍼합니다. 마음이 상합니다. 경건한 슬픔에 사로잡힙니다. ⑥ 여섯 번째 정서는 감사입니다. 감사는 기도입니다. 찬양입니다. 예배입니다. 유일한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서 반드시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이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오늘 우리 교회는 이 감사를 물질로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타락한 목사들이 만들어낸 극악무도한 죄입니다.
감사를 물질로 연결시키는 것은 이방종교의 두드러진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발적인 마음에서 우러나온 물질이라면 얼마든지 드릴 수 있습니다.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이미 잘못된 가르침에 오염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물질을 드리는 일에 있어서는 대단히 신중해야합니다. 감사와 물질의 고리를 끊을 수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은 물질이 필요하신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합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감사와 기도와 예배와 찬양만으로도 충분히 영광 받아 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합니다.
⑦ 일곱 번째 정서는 긍휼입니다. 지혜자는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저들을 만드신 주를 멸시하는 것이며 궁핍한 자에게 베푸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잠14:31)라고 외쳤습니다. 예수께서는 “자비로운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5: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을 향해서는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뿌리채소의 십일조까지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믿음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부분은 무시한다. 십일조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일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마23:23a)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자비 곧 긍휼도 율법의 중요한 한 부분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반드시 지켜야 할 부분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긍휼은 대단히 크고, 중요하고, 핵심적인 삶의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이 정서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정서의 여부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혹, 이 정서를 찾을 수 없다면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⑧ 여덟 번째 정서는 열심입니다. 선지자는 “예루살렘과 시온 산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나올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열심으로 그 일을 이룰 것이다.”(사37:32)라고 외쳤습니다.
또 사도는 “이 때, 제자들은 성경에 ‘주님의 집에 대한 나의 열심이 불처럼 나를 삼켜 버렸다.’라고 기록된 것을 생각하였습니다.”(요2:17)라고 외쳤습니다. 다른 사도 역시 “열심히 일하고 게으르지 마십시오. 성령으로 달구어진 (뜨거워진)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십시오.”(롬12:11)라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열심”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정서입니다.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반드시 가져야할 정서입니다. ⑨ 아홉 번째 정서는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은 참된 믿음의 특성입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적인 요소인 참된 경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심령은 물론 육체로까지 떱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탁월성 때문입니다. 사실 아버지 하나님의 탁월하심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연약한 우리의 본성 그대로를 취하신 행동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생애 동안의 활동과 다양한 사건들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고난과 함께 당신을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위한 희생 제물로 당신을 십자가에 바치셨을 때 나타났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가장 겸손한 상태에 계셨습니다. 동시에 당신 안에 충만한 신적인 영광까지도 나타내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물론 아버지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를 향한 당신의 놀라운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공의를 가장 크게 나타냈습니다. 당신의 거룩함을 가장 크게 나타내셨습니다. 원수에 대한 승리를 선포하셨습니다. 오늘 아버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심으로 당신의 탁월함을 나타내고 계십니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탁월하심을 최후의 심판을 통해서 정확하게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실을 너무도 잘 아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떨 수밖에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너무나 세속화되어 있습니다. 교회마저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탁월한 심판이 설교되지 않습니다. 세속화되어 있습니다. 철저한 회개를 통한 거룩함의 회복도 없이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외칩니다. 죄는 그 모양이라도 견딜 수 없는 하나님의 속성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왜곡된 복음입니다. 변질된 복음입니다. 구원과는 전혀 상관없는 복음입니다.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보혈로 산 교회인지 세상인지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영향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찾아보기도 어렵습니다.
영적, 도덕적, 윤리적 거룩함도 찾아볼 수도 없습니다. 지극히 세속적이면서도 거룩한 모양을 갖춘 이유는, 숨겨진 다른 동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 죄는 모양이라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얼마나 두려워하십니까? 죄로부터 멀어지기 위해서 얼마나 몸부림치십니까? 얼마나 몸부림치며 회개하십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십니까?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는 준비는 되셨습니까? 하나님 안에서 갖게 되는 소망과 미움과 소원과 기쁨과 슬픔과 감사와 긍휼과 열심과 두려움은 참으로 중요한 정서입니다.
이 정서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갖출 필요가 있는 정서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사랑이 이 모든 정서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형제를 사랑할 수만 있다면 자기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이 정서들이 흘러나오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반드시 가져야할 가장 위대한 정서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 이 정서들을 발견할 수 없다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참된 믿음의 자리로부터 떠나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네 모든 마음과 모든 목숨과 모든 정성을 다해서, 네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우선되는 계명이다. 두 번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 하여라’인데 이것도 첫째 계명과 똑같이 중요하다.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씀이 이 두 계명에서 나온 것이다.”(마22:37b-39)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사도가 제아무리 큰 지식과 은사로 무장하고 있다 할지라도, 가장 위대하고 가장 놀랍고 가장 탁월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다 할지라도...사랑이 없이는 아무 소용도 없으며 아무 쓸모도 없다고 외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형제에게 나타내야할 가장 탁월한 정서는 “넘치는 사랑affectionate love”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애정 어리고, 간절하고, 열렬한 사랑은 필연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정서들을 불러일으킵니다. 하나님에 대한 뜨겁고 간절하고 열렬한 사랑이 죄에 대한 강한 혐오감과 미움을 일으킵니다. 죄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게 만들어줍니다. 하나님께서 불쾌하게 여기시는 것들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게 합니다. 그 사랑은 또 하나님의 은혜롭고도 민감한 임재 안에서 만족과 기쁨을 불러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열심을 갖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형제들을 뜨겁게 사랑할 때, 그들을 향한 가장 바람직한 정서들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허락하신 형제를 하나님처럼 사랑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죄를 혐오할 수 있는 은혜, 저주할 수 있는 은혜, 두려워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철저히 회개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물론 형제를 향한 가장 바람직하고 이상적인 정서들로 무장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두려워 떨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도 마음의 평안과 기쁨과 안식과 만족을 누릴 수 있는 복된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