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월 9일 오전 7시. 풍류마당에 모여 승합차 2대에 모두 17명이 나누어 타고 5박 6일의 국토순례 도보여행에 나섰다. 태풍 할롱 소식이 있고 어제 저녁부터 비바람이 불어 걱정을 하였으나 영천을 지나면서 비는 그치고 바람도 잦아들었다. 경산휴게소에서 아침을 먹지 못하고 나온 학생들을 위하여 잠시 쉬면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이어 단숨에 금강휴게소까지 달렸다.
금강은 이번 도보여행의 주요한 공부꺼리가 된다. 부여를 거쳐 서천, 군산에 이르는 길은 결국은 금강을 따라 가는 여행이기 때문이다. 금강은 백제의 중요한 물길이 되어 그 주변에 많은 도시와 촌락이 건설된다. 이 금강을 중심으로 백제의 문화가 발달하였다. 그런만큼 금강을 알지 못하면 이번 여행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결과가 된다.
↑ 금강휴게소에 내려 간단히 금강에 대하여 설명을 한다. 금강은 전북 장수군 뜬봉샘에서 발원하여 장장 400여 km를 흘러 서해에 도달한다. 대전을 휘돌아 감아 대청호를 이루고 북으로 청주까지 거슬러 올라 다시 남으로 내려와 공주와 부여를 거쳐 강경에서 서쪽으로 물길을 바꾸어 서천 군산의 하구둑에 이르는 길은 그야말로 절경이다. 이름하여 금강 즉 비단같이 아름다운 강이다. 실제로 공주지방에서는 금강을 비단강이라고 부른다.
↑금강은 남한에서 낙동강 한강에 이어 세 번째로 긴 강이다. 그러나 그 풍광으로 말할 것 같으면 다른 강들이 따를 수 없다. 금강의 유래에 대하여서는 여러 가지 의견들이 있으나 곰강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고 있다. 금강 중심에 있는 웅진(지금의 공주)의 우리말 지명이 곰나루이었다는 점이 더욱 설득력을 가진다. 곰은 검다는 의미도 있지만 신성하다는 뜻이 있다. 사람들은 이 금강을 신성한 강으로 여겼다. 특히 백제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강이었다.
↑12시가 다 되어 부여에 도착하였다. 바로 국립부여박물관을 찾는다.
↑많지는 않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유물이 단정하고 깔끔하게 전시되어 있다. 경주국립박물관을 보면 전시 유물이 넘쳐서 좀 어지럽다는 느낌을 주는데 부여박물관은 많지 않은 유물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어 간결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 몇 번의 견학과 답사 덕택인지 이외로 아이들은 관심을 진지하게 관찰하고 기록을 한다.
↑ 부여국립박물관에 전시된 유물 중에 단연 시선을 끄는 것은 능산리 고분에서 출토된 백제금동대향로이다. 부여 능산리 고분은 사비시대(백제가 부여에 도읍한 시대)의 백제왕과 왕비, 왕족들의 무덤일 것이라 짐작한다.
↑ 금동대향로의 맨 위에는 봉황이 날개를 펼치고 있고 맨 아래 받침대에는 용이 조각되어 있다. 봉황 아래에는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에 5명의 악사의 각각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조각이 섬세하고 아름다울 뿐 아니라 하나하나에 도교와 불교적인 사상과 세계관을 담고 있어 백제 최고의 예술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국보 287호로 지정되어 있다.
↑귀면연화문와당. 악귀를 쫓는 귀신 형상의 얼굴과 연꽃무늬가 결합된 막새기와이다. 백제의 유물 가운데 기와가 많은데 기와 무늬가 아주 섬세하고 화려하여 백제 건축문화가 발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박물관 전시동 옆 어린이 박물관에는 금동대향로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여러 가지 자료들을 전시하여 놓았다.
↑여기는 금동대향로를 분해하여 직접 만져 볼 수 있도록 만든 코너이다. 물론 이 향로는 복제품이다. 백제금동대향로는 두껑과 몸체 그리고 받침대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세 부분을 서로 따로 주물 제작하여 합체한 것이다.
↑백제사람 되어 보기 코너에서 아이들이 자신의 사진을 찍어 이메일로 전송하고 있다.
↑이런 코너에서 진욱이가 빠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호기심이 많아 꼭 해 보아야 직성이 풀린다.
↑소원을 적어 붙이는 곳. 소원종이는 한 사람당 한 장씩 제한한다는 안내가 붙어 있다. 아이들이 모여 소원도 적고 다른 사람들의 소원지를 보기도 한다.
↑금동향로의 용을 소재로 한 게임. 아이들이 게임에 열중하고 있다. 부여국립박물관 어린이박물관에는 아이들이 쉽게 유물을 이해할 수 있도록 다양한 코너를 만들어 놓아 아이들에게 인기가 높다.
↑박물관을 나와 정자 휴게소에서 잠시 쉬고 있다. 경주를 출발할 때 비가 왔는데 여기는 햇빛이 아주 맑다. 바람이 불어 더위의 기세가 꺾여 상쾌한 느낌을 준다.
↑구드래조각공원 근처에서 점심을 먹는다. 구드래는 '굿들개'에서 온 말이라 한다. '굿들'은 굿을 하는 들 즉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들'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개는 '포구' 혹은 '나루터'을 의미하니 구드래는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들판의 나루터'인 셈이다. 구드래는 금강을 거슬러 온 배들이 정박한 포구로 지금은 내륙 도로의 발달로 그 기능을 잃었지만 과거에는 많은 물량을 수송하였다. 특히 백제 사비시대에는 이곳 도성으로 물건을 싣고 오르내리는 배들로 아주 분주하였을 것이다.
↑점심을 먹고 부소산성으로 향한다. 도보여행 중 처음으로 걷는 코스이다. 부소산문으로 들어가 삼충사를 거쳐 사자루, 낙화암, 고란사를 둘러 나오는 약 5km 거리의 걷기 코스이다.
↑부소산성 들어가는 입구의 부소산문. 부소산성의 정문인 셈이다. 과거에는 이 문은 사비문이라고 했다. 사비문은 부여의 옛이름인 사비에서 따 온 것이다. 백제는 성왕 16년 서기 538년에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긴다. 이 사비에서 백제는 멸망한 서기660년 까지 123년간 금강을 중심으로 찬란한 문화를 건설하였다.
↑부소산문을 들어서면 돌을 깐 넓은 길이 나타난다. 좌우로 늘어선 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걷는데 기운이 상쾌하다.
↑삼충사 경내로 들어선다. 푸른 소나무 가운데 유독이 붉은 배롱나무꽃이 눈에 띈다. 백제가 멸망할 당시 모든 백성들이 신명을 바쳐 침략군에게 저항을 하였겠지만 유독 이 세 사람이 두드러져 보인다. 저 붉은 배롱나무꽃잎처럼.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끝가지 나라와 운명을 같이하며 목숨을 바친 세 충신들을 추모하는 사당이다. 삼충사(三忠祀) 세 충신을 모신 사당이라는 뜻이다. 서기 660년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 왕위에 오른지 20년만에 백제는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하여 역사에서 사라진다. 온조가 한강 유역의 위례성에 백제를 건국한지 678년만이다.
↑왼쪽부터 성충, 흥수, 계백의 영정이다.
↑부소산길은 이처럼 넓은 도로로 걷기 좋게 정상 사자루가지 길이 잘 조성되어 있다. 중간 중간에 백제시대 사비나성의 일부 구간인 테뫼식 산성을 볼 수 있다.
↑영일루 앞에서 아이들이 갑자기 비명을 지른다. 석문이 등에 사슴벌레가 붙었다. 한바탕 소동을 벌인 끝에 사슴벌레를 체포하였다. 이 사건으로 석문이는 목덜미 주위에 가벼운 부상(?)을 입었으나 더 이상의 불상사는 없었다.
↑영일루. 해를 맞이하는 누각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보면 멀리 계룡산에서 해가 솟아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군창지. 지금은 건물이 없지만 백제시대와 조선시대 군량을 비축하던 창고 자리이다. 백제시대에 군창지였던 곳을 조선시대에 다시 창고를 지어 군량을 보관하였다.
↑부소산 정상에 있는 사자루. 흔히 사비루라고도 불리지만 한자를 자세히 보면 사비(泗沘)가 아니라 사자(泗泚)로 표기되어 있다.
↑이 사자루라는 현판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의 작품이다. 의친왕은 일제에 협력하지 않고 창씨개명을 거부한 유일한 왕족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상해로 건너가려다가 발각이 되어 철저한 감시 속에서 불우한 생을 보낸 왕족이었으나 끝까지 자존심을 지키려 애쓴 조선인이었다.
↑사자루 반대편에는 백마장강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이 글씨를 쓴 사람은 해강 김규진이다. 청나라에 유학하여 글씨를 배웠고 귀국하여서는 영친왕의 서화 선생으로 활동하였다. 나중에는 민황후의 요청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사진기술을 배워 우리나라 최초로 사진관 '천연당'을 열기도 한 사람이다. 백마강은 이 부소산을 감돌아 흐르는 강으로 금강을 부여에서 이르는 말이다.
↑사자루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뒤어 오는 사람들을 기다린다. 그런데 여기서 뜻밖의 사고(?)가 일어났다. 뒤에 오던 일행이 길을 잘못들어 그만 하산길로 접어 들었다. 할 수 없이 먼저 올라온 아이들과 낙화암과 고란사를 둘러보기로 한다.
↑궁녀사 입구. 백제 멸망 당시에 낙화암에서 투신한 궁녀들을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궁녀사에서 약 600여 미터를 가면 태자샘이 있다. 백제의 왕자들이 이 부소산에서 무예와 기마술을 연마하면서 여기서 물을 마셨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낙화암 입구에 서 있는 시비. 멸망하는 나라에 대한 충절의 표현으로 낙화암에서 백마강으로 뛰어내린 궁녀들의 의로운 행동을 찬양하고 그들의 죽음을 추모하는 내용이다. 나라의 녹을 먹는 사람들이 사리사욕을 채우면서 국가의 안위를 돌보지 않는 한심한 작태를 다시금 되돌아보게 한다.
↑낙화암 위에 세워진 백화정. 낙화암은 삼국유사에 타사암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몇몇 후궁이들이 이곳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붙은 이름이다. 삼천궁녀는 애초에 없었다. 백제 의자왕의 무절제한 생활을 부각시키려고 지어낸 이야기라는 것이 역사학계의 통설이다. 이와 같이 역사는 항상 승자의 편에서 왜곡되기 십상이다.
↑백화정은 육모지붕의 정자로 1929년 궁녀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하여 낙화암 위에 지은 정자이다. 일제에 대한 적개감과 망국의 한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백화정에 오르면 아래 백마강이 잘 보일 것 같지만 실지로는 나무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는다.
↑여기가 낙화암 즉 타사암(墮死巖)이다. 이 바위 앞 난간에서 보면 아래 절벽 아래 금강(백마강)이 아찔하게 보인다.
↑낙화암에서 본 백마강. 그런데 왜 금강이 여기서는 백마강이 되었을까? 백마강의 원래 이름은 백강(白江)이다. 백(白)은 우리말로 하면 '삷'이다. 즉 백강은 '삽강' 혹은 '사비강'의 한자식 표기이다. 사비강은 더 옛 표현으로 하자면 '소부리강'이다.
부여의 원이름이 '소부리'였고 나중에 한자로 표기하면서 '사비'가 되는데 소부리는 지금 식으로 하면 '서울'이 된다. 즉 부여의 옛이름 사비는 서울이라는 뜻이다. 백강은 소부리강의 한자식 표현인데 이것이 나당연합군의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이곳 사비성을 함락시킬 때 물결이 너무 거칠어 백마를 미끼로 하여 용을 낚아 물결을 잠재웠다는 전설과 연관이 되어 백마강이 되었다. 백마강이라는 이름에는 백제의 슬픈 역사가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낙화암을 내려서면 고란사가 나온다. 고란사는 고란초라는 희귀야생초가 나는 곳에 세운 절이라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백제시대에는 절이 아니라 왕이나 후궁들이 사용하던 정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란사는 백제 멸망 후 고려시대에 세워졌다. 부소산은 사비성의 북쪽 성벽이 있던 곳으로 방어의 요충지였지만 사비궁의 후원이기도 하였다.
↑노란 바탕색에 붉은 글씨로 쓴 곳이 사비(부여)이고 사비 왼쪽을 감싸 흐르는 강이 백마강이다. 그 백마강과 사비 사이가 부소산이다. 그리고 사비를 오른쪽을 둘러싼 것이 사비나성이다. 부여의 궁성은 부소산을 등지고 남쪽을 향하여 건설되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부소산은 북쪽 방어 진지가 되는 동시에 궁성의 후원 역할을 한다.(위 사진은 교육방송 '사비성-사라진 미래도시'에서 캡쳐한 것임)
↑고란사에서 인증 사진. 기록에 의하면 고란사는 고려 현종 때(1028년) 백제 멸망 당시의 궁녀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지었다고 한다.
↑고란사 법당 벽화에는 일반 절과 달리 심우도가 아닌 고란사의 내역을 말해주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위의 그림은 궁녀가 백제왕에게 약수를 바치는 그림이다. 백제왕들은 이곳 부소산의 절벽에서 솟아나는 약수를 즐겨 마셨는데 이 약수터 바위에 고란초가 자라서 이 샘을 고란정이라고 불렀다 한다. 궁녀들이 고란정에서 떠온 약수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약수 위에다 고란초 몇 잎을 띄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벽화의 그림은 이를 소재로 하였다.
↑역시 고란사 벽화의 그림이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패하여 도성이 함락되자 궁녀들이 이곳 낙화암에서 백마강으로 뛰어 들었다는 설화를 바탕으로 하였다. 이 벽화가 제작된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부소산 둘레길을 다 돌아 다시 읍내 정림사지 오층석탑 앞에 섰다. 백제 26대 성왕은 치욕스러운 역사가 서려있는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하기로 한다. 웅진(지금의 공주)은 개로왕이 고구려의 침략으로 위례성(한성:지금의 서울)에서 전사하고 쫓기듯이 내려와 도읍을 정한 곳이다. 웅진을 도읍지로 정한 22대 문주왕과 그의 조카인 24대 동성왕 두 임금이 귀족들에 의하여 살해된다. 25대 무령왕 때 천신만고하여 왕권을 안정시키지만 웅진은 방어에 치중한 도읍지여서 국력이 뻗어나갈 길 역시 마땅치 않았다.
↑대륙이 아닌 해양으로 눈을 돌린 성왕은 북으로 진격하여 위례성을 탈환하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바다를 통하여 중국과 일본 그리고 인도까지 진출하여 교류를 확대하고 무역을 장려하여 국력을 키운다. 그 결과 부여는 명실상부한 국제도시가 된다. 이 때의 중국 사서에 의하면 많은 외국인들이 부여에서 살았다고 한다.
구드래(부여 백마강의 나루터)는 바로 사비성의 관문으로 국제항의 역할을 하였다. 사비 천도로 앞 선 두 임금을 살해한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행정체제를 개편하여 왕권을 강화한다. 이 때 민심을 한 곳에 모으는 구심점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이 정림사이다. 아이들은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틈만 있으면 놀이에 열중한다.
↑멀리서 바라다본 정림사지 오층탑. 정림사 오층탑은 백제시대에 건립된 석탑 중 미륵사지 9층석탑과 함께 남아 있는 2기 중의 하나이다. 처음에는 백제 오층탑으로 불리다가 나중에 발굴 작업을 하면서 정림사라는 글씨가 적힌 기왓장을 발견하면서 정림사지 오층석탑으로 불린다.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조성된 탑으로 국보 9호로 지정되었다. 탑신에는 "大唐平百濟國碑銘"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서 백제의 한스러운 역사를 상기하게 된다. 이는 나당연합군의 소정방이 백제를 침략하여 멸망시킨 것을 기념하여 새긴 글귀로 백제인의 입장에서 보면 치욕스러운 기록이다. 그것도 백제인의 염원을 담은 도성 중심에 위치한 탑의 탑신에 새겼으니...
↑정림사지 박물관. 백제의 건축양식을 되살려 지은 박물관이다. 백제의 건축 기술은 사비성을 축조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원래 사비는 습지여서 건물을 올리거나 농사를 짓는데 적합한 땅이 아니었다. 그러나 백제인의 발달된 건축술로 나성을 축조하고 땅을 다지고 습지에 저수지를 만들어 물을 한 군데 모아서 도시를 건설하였다. 우리역사에 나타나는 최초의 계획 도시가 사비성이다. 발굴 작업 결과 상수도와 하수도 시설까지 구비한 것으로 드러났다.
↑ 사비는 백제의 도읍이 들어서기 전에는 허허벌판이었다. 그것도 습지와 늪지로 이루어진 '죽음의 땅'이었다. 여기서 도읍을 건설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성왕은 백성들의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기 위하여 정림사를 도성 한 가운데 건립한다. 위 사진은 박물관 안에 전시된 정림사 모형도이다.
↑사비성 복원도. 사비성은 질서정연한 계획도시였다. 십 수년에 걸쳐 도성을 건립하였는데 이에 동원된 인원이 약 200만명이라고 한다. 백제 멸망 당시 76만호 380만명이었다고 하니 연인원 200만명이 동원되었다면 나라의 명운을 건 공사였다고 볼 수 있다. 그 동안 백성들도 부역으로 심신이 피폐해 질 수 있었지만 이를 종교적인 신심으로 극복하고 국가적인 대역사를 이루어냈다.
↑여기에도 백제금동대향로가 전시되어 있다. 백제가 멸망 후 삼국의 역사는 모두 신라의 역사로 귀결된다. 그러나 당시의 백성들의 피땀이 만들어 낸 문화들은 아직도 생명이 끊어지지 않았다. 땅 속에 묻혀 있던 이들이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면 우리역사와 문화는 훨씬 더 풍부해지고 아름다워질 것이다.
↑사비성 시절의 백마강 상상도. 지금의 구드래나루터에는 많은 국제선들이 드나들 수 있는 항이 만들어졌다. 그 때의 금강은 지금보다 훨씬 수심이 깊어서 큰 배가 드나들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백제는 발상의 전환 즉 대륙보다 해양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찬란한 문화를 창조하였다. 비록 나라가 멸망하면서 많은 것이들이 파괴되었지만 그래도 백제인들이 혼은 탑에 혹은 향로에 혹은 한 조각 기왓장에도 남아 살아 숨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