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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도
고린도전서 1:18-24
오늘은 사순절 둘째 주일입니다.
사순절은 재를 이마에 바르며 죄를 회개하는 성회수요일(올해는 2월 22일)로 시작되며, 부활 주일 전 40일 동안 지켜지는 절기입니다. 총회교육원에서는 해마다 『사순절 묵상집』을 발행하는데 올해 제목은 “주님, 우리 안에 계시옵소서!”라는 제목으로 발행되었습니다. 묵상집 머리말에 저는 이렇게 썼습니다.
“겨우내 침묵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목에서 새순이 돋아납니다. 연록의 새순을 보고서야 그들의 침묵이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사흘간의 침묵은 죽음을 죽이시기 위한 침묵이요, 부활의 침묵이었음을 우리는 압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던 날(2월 29일)은 완연한 봄 햇살이 비추는 날이었습니다.
“아, 따뜻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그런 날, 사무실 뜰을 서성이며 화단을 보니 상사화의 이파리가 삐죽거리며 올라오기 시작하고, 작년에 모종을 얻어 심었던 할미꽃도 솜털이 보송보송한 꽃대가 올라올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겨우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봄이 되니 어김없이 새순을 냅니다. 이 계절에 새순을 내려면 그들은 겨우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침묵 속에서 봄을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어느 시인의 말처럼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꽃이 피니까 봄’입니다. 새순이 올라오고 봄꽃이 피어나는 이 봄, 여러분 마음에도 아름다운 새순과 꽃들이 피어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의 상징인 십자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는 당시 유대인에게는 거리낌의 대상이었고, 타국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음의 상징이었으며, 지식인들에게는 부끄러움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행위를 어리석게 여기고, 크리스천공동체에 소속된 것을 창피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대의 지식인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자신이 전할 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고 선언합니다.
오늘날 고난의 상징이었던 십자가는 액세서리가 되어버렸습니다. 귀걸이 목걸이는 물론이요, 교회의 십자가도 형형색색 상점에서 손님들을 끌어들이려고 휘황찬란한 간판을 만들어 붙인 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몇천만 원 하는 십자가 첨탑은 자꾸만 높아가는데 교회의 위상은 자꾸만 땅에 떨어집니다. 이런 현상은 고난의 십자가는 도외시하고 부활의 영광만을 추구한 결과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죽음 없는 부활도 있을 수 없습니다. 고난 없는 영광도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십자가와 죽음과 고난은 뒤로하고 부활과 영광만 추구합니다. 그 결과, 기복 종교화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을 입었으니 “이렇게 살겠습니다”라는 결단이 있어야 하는데, 끊임없이 “주시옵소서”만 합니다. 그렇게 간청을 해도 자신의 욕심이 채워지지 않으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모르고 하나님이 없다고 돌아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믿는 이들을 어리석다고, 미련하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십자가를 자기의 유익을 위해 이용합니다. 인간의 탐욕을 채워주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십자가는 철저하게 고난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상상할 수 없듯이 오늘 우리가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8-30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는 말씀에 나오는 ‘멍에’는 십자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것도 버거운데 ‘쉬게 하리라’더니만 ‘나의 멍에를 매라’니 언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고난의 종류가 두 가지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첫째로, 인간이면 누구나 지고 가야 하는 십자가입니다.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이 땅에서 살아가려면 의식주를 위해 일해야 하고, 그런 멍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둘째로, 자발적인 십자가로 예수님을 믿고자 결단한 이들이 메고 가는 십자가입니다.
세상 짐 지고 가는 것도 무거운데 거기에 또 멍에를 더하니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마음이 쉼을 얻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내 멍에는 쉽고 가볍다’ 그래서 누구나 지고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잘 알려진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이 어느 날 자신의 삶을 돌아봅니다. 행복했던 시간도 있고, 힘들었던 시간도 있습니다. 그런데 행복했던 시간에는 두 사람이 걸었던 발자국이 선명하고, 힘들었던 순간엔 한 사람이 걸었던 발자국밖에는 없습니다. “주님, 내가 행복할 때에는 늘 곁에 계시더니, 힘들 땐 어디 가셨습니까?” 그러자 주님이 대답하십니다. “그땐 내가 너를 업고 걸어왔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뭔가 일이 잘 풀리면 자신의 능력으로 그리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힘들면 자신은 다 했는데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아서 그렇다고 불평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느 순간이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오히려 고난의 때에, 더 가까이에서 나를 업어주시어 그분의 숨결을 느낄 수 있게 하고, 그분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그분이 계획하신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주님이 업어야만 하는 순간, 그 순간이 고난의 때입니다.
왜 업습니까? 곁에서 부축을 해주어도 안 되니까 업습니다. 그냥 두고 앞서 걸어가시면 영영 따라오지 못하고 죽을 것 같은 고통 속에 있으니까 업습니다.
그런데 왜 고난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잘 믿으면 복을 주신다고 했는데 왜 그렇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복’의 개념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복’의 개념을 물질화시켰습니다. 그러니까 겉으로 보이는 물질적인 것으로 ‘복’의 개념을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다릅니다.
시편 1편 1-2절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복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무슨 소리 듣기 딱 좋습니까? 바보 소리 듣기 딱 좋습니다. 악인, 죄인, 오만한 자들과 함께 하지 않는 것도 모자라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한다는 것은 어리석고 미련스러워 보입니다. 복은 물질적인 개념이 아니라 삶의 방식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갈 때에 물질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물질의 있고 없으므로 행불행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주님과 동행하느냐 아니냐에 행불행의 기준을 삼습니다. 많이 다르지 않습니까?
여전히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자 결단하고 그렇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미련하다고 하고, 어리석다고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해서 비난하고, 이단이라고 합니다. 성경으로 재단합니다.
제주도에는 여러 가지 농산물이 있는데 더덕과 도라지도 있습니다.
육지 것보다 굵고 실한 데 문제는 향이 깊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더덕이나 도라지에 들어 있는 사포닌 성분은 뿌리가 얼어 터질 정도로 추웠다 풀리는 과정이 되풀이되어야 쓴맛 속에 단맛이 들어가게 되는데, 제주의 겨울은 육지보다 밋밋하여서 그 향이 덜합니다.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 더 진해지는 향기, 그것처럼 우리 신앙인들도 그리스도의 향기(고후 2:15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가 되려면 고난의 상징인 십자가를 붙잡아야 합니다. 부활의 영광으로서가 아니라, 고난의 상징인 십자가를 말입니다.
십자가의 도, 그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을 변화시키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는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는 ‘전도’라는 말로 되어 있으니까, 단순히 ‘교회로 사람을 데리고 오는 것’ 정도로 이해하기 쉽지만, 미련하다고 어리석다고 손가락질당하는 상황에서 ‘전도’를 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은 ‘고난받음’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는 동시에 ‘고난’입니다.
자, 그러면 오늘 이 시대에 어떤 고난을 받을까요?
초대교회 당시처럼 혹은 일본강점기나 한국전쟁 당시처럼 좌우의 날 선 대립이 존재하고 있다면 차라리 ‘고난’의 의미가 쉽게 다가오겠는데, 대형교회와 부자교회와 부자 교인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고난’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습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끊임없는 자기 변화, 거듭남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다 보니 세상과 벗하여 지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이기에 그런 것들을 하나 둘 끊어내는 것입니다. 이전에 오로지 내 이익만 보고 달려왔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비춰보니 손해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내 능력과 노력으로 다 된 줄 알았는데 십자가에 비춰보니 하나님의 은혜였기에 이웃과 나눔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세상의 오락을 따라 살던 삶이었는데, 십자가에 비춰보니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는 것을 깨닫고 그 시간을 늘려가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자기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던 것이 물질이었는데, 십자가에 비춰보니 주 예수보다 귀한 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결단하는 것, 이런 것들도 고난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단 한 번에 끊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늘 달려갈 뿐이고, 다 되었다가 아니라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한탄하면서, 그러나 죄의식에 빠져 사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완성을 향해 달려가는 구도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순절에 ‘십자가의 도’를 저는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저의 사순절기의 신앙고백을 통해 여러분의 사순절기 신앙고백에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 이 설교문은 3월 4일 맑은샘교회에서 선포될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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