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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내농악/문화재청 |
"빗내농악은 감문국의 제사, 감천의 범람으로 인한 수해 예방 목적으로 열린 풍년제가 동제로 전승되어 오는 것으로 풍물과 줄다리기가 행해질 때 빗내농악은 시연된다고 한다. 1대 상쇠였던 분이 스님이어서 사찰요소가 많다. 다른 농악에서 볼 수 없는 양북치기가 계속되는데 이는 법고를 대신하는 것으로 해탈을 상징한다.
머리의 고깔도 스님들이 바라춤을 출 때 쓰는 흰 고깔이 등장하는데, 극락세계와 순결을 상징한다. 빗내농악에서는 군사적 성격도 강하게 나타난다.채굿 속에 나오는 수박치기는 맹렬한 싸움을 상징하며, 이는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들의 사기를 돋우려는 의도가 숨어있다."(내고장 의미 찾기...한국통신)
김천으로 이어지는 도로변의 입간판 외에는 개령향교, 계림사,서부동 폐탑을 안내하는 어떤 이정표도 없다. 그러고도 문화관광을 표방하는지 김천시의 오만이 나를 열받게 한다. 김천시민, 개령면 동부, 서부리 사람들 기준으로 본다면 도로변의 입간판이 뭐가 필요할건가?
한심한 작태가 아닐 수 없다.
타지에서 찾아오는 방문객 기준으로 이정표를 설치해야지, 가는 갈림길 농로마다 작지만 이정표를 세워 둔 멀리도 아닌 바로 옆고을 경북 성주의 세종대왕 왕자태실을 벤치마킹 하길 간절히 바란다. 씰데없이 국민의 혈세를 낭비하여 선진문화행정을 배우겠다고 물건너 다니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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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령향교/문화재청 |
그래도 잘도 찾아다니니, 문화재를 찾는데 뛰어난 유전자를 물려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린다. 개령향교는 이전과 중수를 거쳤으며, 홍수의 피해가 심해 1837년 현 위치로 옮겼다 한다. 경사지에 위치한 향교의 전형인 전학후묘구조다.
개령향교/명륜당
사진속에도 기단부에 석탑의 부재가 보인다.문닫힌 향교 얕은 담벼락 너머로 강학 공간인 명륜당을 바라보니 한숨만 나온다.
기단속에 박힌 석탑 부재들이 온갖 상념에 젖게하며, 중정에 널부러진 석조물이 타협과 조화, 다른 가치관의 이해와 수용의 부조화의 결과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차라리 솔직하게 잘못을 뉘우치면 될텐데 안내문에는 '"버려진 사찰 석재로,,,"라고 표기되어 있어 서러움이 더해진다.
향교에서 나와 무조건 산을 향해 방향을 잡고 계림사를 찾았더니 보살님 한 분이 차를 세우신다. 계림사에 계신다면서 스님이 출타중이라며 걱정을 하신다. 단촐한 전각 몇동만 있는 계림사는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지지만 사찰명에 닭 계(鷄)자가 들어가 궁금증이 더했다.
계림사/마애불
어떤 자료에도 나오지 않은 계림사 대웅전 옆 마애불상이다. 스님이 출타중이라 내력을 들을 수 없었지만 민머리 통견을 갖추고 합장인을 한 수인의 선각된 불상이다.
닭 鷄자가 들어간 것은 비보책으로 아포지역의 재난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감문산에 절을 짓고 닭을 길러야한다는 말에 따라 창건한 절이며 그래서 鷄林寺로 하며, 오늘날에도 게림사 뒷산에 무덤이 없는 것이 무덤을 쓰면 마을의 우물물이 변색한다는 믿음 때문이라고 한다.
계림사/향로각(?)
대웅전 옆의 전각이다. 내가 보지 못했는지 아니면 현판이 없는 것인지 모르지만, 왼쪽에 보이는 정지문이 흥미롭지 않은가? 감히 추측컨데 이전각은 분명 예전에 노전스님이 주거했던 향로각이었는데 현재는 용도 폐기된 전각일 것이다.
왜? 정지문에는 빗장이 밖에서 걸게 되어 있다. 이는 불(火)과, 조왕신앙등 우리 민속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익히 알고 있는 상식이다. 대문의 빗장은 안에서 걸게 되어 있고... 하지만 사진속의 정지문에는 빗장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빗장이 안에 있다는 것은 부엌으로 용도를 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령초교 옆 비림
개령현 역대 수령들의 공덕비, 선정비, 불망비 전시장(?)이다. 포악한 사또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과연 현민들이 자발적으로 십시일반 추렴하여 세웠을까? 진정 이땅에 탐관오리는 없었단 말인가?
향교 앞에 자리했을 하마비, 사찰의 수조, 비석의 귀부, 팔각연당형 석등의 간주석이 상흔을 간직한 체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 화해의 무대에 나란히 서있다.
멸실되어 있던 탑을 얼마전에 복원한 듯 하다. 2층기단, 복원된 상하기단의 버팀, 모서리 기둥의 숫자, 5개의 옥개석 받침, 처마곡선의 반전 등을 감안해보면 내눈에는 통일 신라 전성기의 탑으로 보인다.
상륜에는 노반만 남아 있고, 3층옥개석은 마모가 심하며 1층 탑신에 비해 2,3층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텅빈 들판에 외로히 자리한 석탑은 홀로 찾아온 나를 어떻게 생각 할까? 겨울초입 폐사지에서는 누구나 시인이 되고 로맨티스트가 된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