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화
이십여 년이나 지난 오래된 일이다. 환경교과연구회 회원들과 우도 답사를 가게 되었다. 민박집에서 1박을 하게 되었는데 민박집 울타리에 해당화가 무리를 지어 예쁘게 피어 있었다. 그 예쁨에 홀려서 민박집 주인에게 해당화 줄기를 캐어다가 집에서 키워보겠다고 부탁을 드렸다. 흔쾌히 줄기를 캐 주시며 삽목하는 방법에서 키우는 요령까지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다.
우도 민박집 뜰에 핀 해당화
너무 고운 빛에 홀려
아파트 베란다 화분에 옮겨 심었다
싹은 트는데 꽃은 피지 않고
애간장만 녹이다가 시들어 버렸다
내 사랑이 부족했나.
그대에게 다 주지 못한 마음도
후회하며 말라 버리겠지요
내 아픈 사랑의 생채기
해당화!
우도에서 우리집까지 옮겨온 해당화는 일 년여간 싹도 틔우고 잘 자라는가 싶더니 어느 날부터 점점 시들어갔다. 햇볕이 잘 드는 베란다에서 물도 잘 주고 정성을 다해 보살폈는데 점점 말라가는 해당화를 끝내 살려내지 못했다. 나의 관심과 사랑이 부족했던가 보다.
피터톰킨스와 크리스토퍼 버드는 저서 ‘The Secret Life of Plants’에서 ‘식물도 인간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기뻐하고, 슬퍼한다. 예쁘다는 말을 들은 난초는 더욱 아름답게 자라고, 볼품없다는 말을 들은 장미는 자학 끝에 시들어 버린다. 떡갈나무는 나무꾼이 다가가면 부들부들 떨고, 홍당무는 토끼가 나타나면 사색이 된다. 제비꽃은 바흐와 모차르트, 재즈를 좋아하고 록 음악을 싫어한다. 장바구니 속의 야채들은 곧 뜨거운 물에 익혀지거나 불에 구워질 자신의 운명을 생각하며 비명을 지른다. 식물은 자신을 보살펴주는 인간에게 관심과 애정을 보일 뿐 아니라 그의 마음을 읽어내고, 민감하게 반응한다. 식물은 예지와 영성을 지닌 녹색의 현자(賢者)들이다.’라고 식물의 지각 능력을 역설하고 있다.
고향집 울타리 모퉁이에는 증조부님이 살아 계실 때부터 야생으로 자라온 수령이 100년쯤 된 키가 크고 굵은 댕유자 나무가 있다. 댕유자 속살은 시큼한 맛이 너무 강해서 그냥 먹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댕유자를 잘게 썰어 설탕을 넣고 우려내 댕유자차로 마시곤 했다. 몇 년 전부터 울타리에서만 자라던 이름 모를 넝쿨이 댕유자나무를 타고 올라가 목피에 뿌리를 내리며 나무 전체를 뒤덮었다. 외형만 보면 댕유자 나무인지 넝쿨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다. 힘에 겨운 댕유자 나무 이파리는 진 녹색에서 노란색으로 변해갔다. 그냥 놔두면 고사할 판이어서 나선모양으로 칭칭 감으며 올라간 넝쿨의 굵은 밑동을 잘라내 버렸다. 며칠 지나서 살펴보니 넝쿨이 말라 죽어가고 있었다. 댕유자 나무는 진녹색 새순이 돋아나고 하얀 댕유자 꽃도 피워 향기도 내뿜고 있었다. 두 달여 지났을까. 넝쿨은 바싹 말라 죽어있고 댕유자가 많이 달렸다. 잘 익으면 댕유자차 재료로 쓰려고, 크고 튼실한 댕유자는 놔두고 작고 볼품이 작은 댕유자는 솎아냈다.
댕유자 나무를 살리려고 잘라낸 넝쿨이 생각난다. 저항 한번 못해보고 줄기가 잘려 나가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을까. 넝쿨이 인간의 마음을 알아채는 지각 능력이 있다면 살려달라고 발버둥 치며 이파리를 떨었을 것이다.
댕유자 나무는 넝쿨을 잘라낸 나의 행동이 너무나 고마웠을 것이다. 목피에 뿌리를 내려 모든 영양분을 훔쳐 섭취하며 살아가는 넝쿨이야말로 자신의 목숨마저 위태롭게 하는 적일 뿐일 테니, 싸움도 안 해보고 적을 제거한 셈이니 말이다.
댕유자 나무를 살리느냐. 넝쿨을 살리느냐는 오직 나의 결단으로 결정되어 버렸다. 댕유자 나무나 넝쿨의 생각을 물어볼 수도 없었다. 내가 그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어 댕유자 나무와 넝쿨의 생각을 알아냈을지라도, 나에게 유익한 댕유자 나무를 선택했을 것은 뻔했다. 이기적인 인간의 모습이다. 이제 서야 넝쿨의 아픔을 공감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덧없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은 넝쿨의 목숨을 빼앗아 버린 행동에 대한 일말의 양심이 남아서일까.
요즘은 매일 산책하는 수목원 둘레길에서 만나는 이름 모를 들꽃들도 예사롭게 않게 대한다. 그들도 초감각적 지각을 지닌 하나의 고귀한 생명체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루가 다르게 단장하며 변하는 모습을 보면, ‘오늘도 나의 눈길을 기다렸구나.’라는 착각에 빠져 들꽃들과 눈맞춤을 하며 천천히 걷는다. 발걸음도 한결 가볍다.
문득 시들어 죽어버린 해당화가 떠오른다. 애초부터 베란다에 놓인 화분은 야생으로 자라던 해당화가 자라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뿌리를 마음껏 내릴 수 있고, 비바람에 흔들리며, 따스한 햇볕과 지나치는 사람의 눈길도 받으면서, 자유롭게 살아갔어야 했다. 곁에 두고 싶은 나의 욕심 때문에 답답한 화분에서 생을 마감해버린 해당화! 정말 미안하다고, 나의 사랑이 부족했었다고 고백하고 싶다. (2023.8.3. 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