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가 성장할수록 양극화가 심해지는 나라
20~21세기에 걸쳐서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은 지속적으로 경제성장을 해왔다. 그러나 경제성장의 열매가 온 국민에게 골고루 돌아가지 않아 국민들의 실제 삶이 별로 나아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지 많은 학자들이 연구를 지속해왔다. 최근의 결론은 소수의 부유층이 그 과실을 독식하는 방식으로 경제가 구조화된 탓이라는 것이다.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300년에 걸친 통계자료를 근거로 19세기 말~20세기 초의 극심한 양극화가 20세기 말~21세기 초에 재현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쉽게 설명하면, 이런 식이다. 통계 수치로 보면 경제가 성장하고 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부동산 임대료의 상승 등 소비자 물가가 임금소득 이상으로 오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수익이 줄어들고 있으며, 경제성장률 통계의 한 축을 담당하는 자본소득은 일부 부유층이 독식하고 있기 때문에 전체 경제성장률이 아무리 커져도 서민들은 그 효과를 체감할 수 없다. 자본을 통해서 얻는 수익률이 경제성장률을 앞지른다는 것은 겉으로는 경제가 성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착시현상일 뿐이다. 실제로 임금노동자들은 실질성장률이 하락하는 것을 체감한다는 것이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 이런 현상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통계가 발표되었다. 이자/배당 소득을 누가 가져가는지가 최초로 공개된 것이다. 배당소득은 기업의 주식을 보유한 사람이 기업 이익의 일부를 배분받아 발생하는 소득으로, 주식 투자자나 펀드 소유자가 얻을 수 있는 소득이다. 우리나라에서 배당소득을 받은 사람은 882만 5,442명인데, 그중에서 상위 1%인 8만 명이 전체 배당소득 11조 3,287억 원의 72.1%인 8조 1,720억 원을 가져갔다. 범위를 넓히면, 소득 상위 10%가 배당소득의 93.5%를 가져갔다. 이자소득도 비슷한 구조를 보여준다. 이자소득 상위 1%(47만 8,584명)가 전체 이자소득 24조 8,970억 원의 44.8%인 11조 1,418억 원을 가져갔고, 상위 10%가 90.6%를 독식했다. 이자소득자가 4,785만여 명에 이를 정도로 예금/적금 등은 보편적인 금융자산이지만, 대부분은 적은 액수의 이자만 얻었을 뿐이고 거액의 이자는 일부 부유층에게로 집중되었다. 이번 통계에서 제외된 부동산 임대소득 자료까지 더하면 쏠림현상은 더 심각할 것이다.
임금노동자들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불로소득에 가까운 배당/이자/임대 소득을 독식하는 사람들을 따라갈 수 없고, 그 격차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이런 통계 수치들은 경제가 성장해도 그 과실은 소수 상층부가 독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사회의 양극화가 극심해진다는 것이다.
1%는 어떻게 99%를 지배하는가
이렇게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지만, 사회의 상층부를 구성하는 1%나 10%들은 이런 사회가 안정적으로 지속되기 원한다. 그래서 온갖 방법을 동원한다.
먼저, 이들은 99%가 1%를 욕망하게 한다. 99%에 속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부러워하게 하고, 어떻게든 1%가 되려고 애쓰게 만든다. 드라마에서 재벌이 주요 소재가 되는 것, 해외 왕족들의 이야기가 세계 토픽의 주요 주제가 되는 것, 명품의 세계를 보여주면서 욕망을 자극하는 것 등이 비근한 예다. 1%가 소유하고 누리는 것들(대부분이 물질적인 것이지만)을 지속적으로 욕망하게 만들면서 그것을 얻지 못하면 루저인양 여기게끔 분위기를 조장한다.
둘째, 가끔 99% 중에서 1%에 편입되는 경우를 대대적으로 선전한다. 그래서 대중으로 하여금 1%가 되려는 욕망의 끈을 놓지 않게 한다. 공병호류의 자기계발서나 유명 멘토들의 힐링 서적이 그런 욕망을 부추긴다(본인이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 확실치는 않지만). TV, 신문, 잡지 등에서는 ‘대박 성공’ 스토리를 멋지게 포장해서 우리에게 희망을 심어주면서 계속 1%를 욕망하게 만든다. 물론 자기 노력으로 1%에 진입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결과가 얻어지는 사회가 아니라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학교에서와 마찬가지로 사회에서도 상대평가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으며, ‘A’를 받는 사람의 수는 어차피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현 체제 아래서는 모두 동일한 노력을 한다 해도 성공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 결과 1% 진입의 꿈을 성취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 잘못을 자신에게로 귀결시킨다. 성공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내가 실패한건 무능력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런 과정을 거쳐 99%들은 구조를 문제 삼기보다 서로를 경쟁자로 인식하게 된다. 평민들끼리 서로 박 터지게 싸우고 있고, 귀족들은 위에서 그 싸움을 구경하는 꼴이다. 스스로 싸움을 하게 내버려두면 어차피 그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수는 극소수이기 때문에 1%의 기득권은 아주 잘 유지된다.
셋째, 이렇게 치열한 싸움의 체제를 거부하고 벗어나려는 사람들이 있을 때에는 그들의 시도를 방해하고, 호되게 응징한다. 99%가 다른 삶의 방식을 꿈꾸는 것은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다. 기존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시스템을 부정하고 새로운 대안을 추구하는 것은 불순한 것으로 간주된다. 기존 방송국 체제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방송 생태계를 만들려는 시도는 절대 허용되지 않는다. 기존의 학교 시스템을 극복하는 새로운 대안을 만들려는 시도는 온갖 이유를 대면서 훼방한다. 이런 시도들은 반체제적이고, 반국가적이고, 반사회적이라고 낙인을 찍는다.
넷째, 기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평민들에게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세력들을 동원한다. 어용 지식인이나 종교인이 그들이다. 그들은 1%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떡고물을 받고 1% 지배의 정당성을 선전해준다. 특히 지식인의 권위를 맹목적으로 인정하는 성향이 강한 한국인들에게는 이런 방식이 잘 먹힌다. 우리는 이런 예들을 친일과 독재를 비호하는 교과서를 둘러싼 논쟁, 황우석 사태, 대운하와 4대강 사업, 등에서 충분히 확인했다.
양극화를 바꾸려는 노력
사회의 양극화가 계속 진행되면서 1:99의 구도가 고착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계속해서 1%를 욕망한다면, 이는 스스로 노예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또한 사회의 최약자층이 죽어가는 것에 대한 동조다. 양극화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사회 취약계층에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지난 8월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우리나라 소득 하위 20%는 가구당 월 149만 원을 지출하는데, 수입은 그보다 적은 135만 원에 불과하다. 결국 매달 빚이 14만 원씩 쌓여가는 실정이다.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이들의 삶은 더욱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변화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 최근 최경환 부총리가 주장했듯 노동자의 임금을 올려야 한다. 그것은 경제 활성화를 위해서뿐 아니라 저소득층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정책이다. 또 다른 방향에서 지난 한 달 동안 논란의 중심이 되었던 세금 문제를 바른 방향으로 정립해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 상황에서 증세는 불가피하다.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와 스웨덴의 소득 불평등 지수는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세금 효과는 스웨덴의 경우, 불평등 지수를 거의 절반으로 떨어뜨리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의미 있는 변화를 주지 못하고 있다. 세금을 통한 소득재분배 노력이 없기 때문이다. 담뱃값 등 간접세 인상을 통한 ‘꼼수 재정확보’ 방안은 오히려 양극화를 심화시킨다.
지금 당장 내 주머니에서 세금이 더 나가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증세를 요구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확보된 재정으로 복지정책을 확대해야 한다. 저소득층이 소득 외에 복지 재정의 혜택을 받으면 삶의 질이 훨씬 나아질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정부가 공약대로 복지정책을 확대하고 경제민주화와 동반성장을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진행하도록 압박해야 한다. 동일한 노력이 교육개혁에도 이루어져야 한다. 여러 통계에 의하면 부모의 경제력이 자녀의 성적으로 연결되고 그것은 더 경쟁력 있는 상급학교 진학으로 이어진다. 이런 추세가 멈추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과거의 신분사회로 퇴보한다. 그러므로 돈으로 좌지우지되는 모든 교육정책이나 입시정책을 수정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는 1%가 사회적 자산을 독식하는 사회 구조를 바꾸기 위한 노력이다.
1%를 거슬러 ‘새로운 욕망’을 품어야 할 때
거시적인 차원의 노력과 동시에 개인의 삶에서도 1%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아야 한다. 우선, 희귀한 성공 케이스를 일반화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케이스를 일반화해서 마치 모든 사람들이 그런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것처럼 호도하는 것은 기만이다. 교회에서도 1%에 진입한 ‘성공 간증’이 계속 인기를 얻고 그런 류의 책들이 지속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되는 한, 우리는 1%가 지배하는 맘모니즘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의 지배가 계속 통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 자신이 1%를 욕망하기 때문이다. 우리 속에 여전히 이런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 노예가 되는 것이다. 인간은 욕망하는 것의 노예가 된다.
나아가 욕망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악한 귀신을 몰아냈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 그 빈자리를 새롭고 의미 있는 것으로 채우지 않으면 곧 일곱 배나 더 악한 욕망이 마음에 똬리를 튼다. 새로운 시도로 우리의 삶을 채워야 한다. 그 핵심은, 나와 우리 가족만 행복하게 살면 된다는 개인주의적인 태도를 버리고 공동체를 복원해 함께 사는 세상을 욕망하는 것이다. ‘함께 사는 세상’으로 정의되는 공동체는 물질적 번영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개인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인 세계관에 물들어 살다보니 공동체를 복원하고 공동체적으로 사는 것이 매우 어렵게 느껴진다. 그렇기에 기존 삶의 틀을 과감하게 깨버리고 창의적인 시도를 하지 않는다면 변화는 불가능하다. 가족이 아닌 사람들이 어울려 함께 사는 집을 만들고, 사도행전의 예루살렘 성도들처럼 재물을 필요에 따라 공유하는 공동체를 형성하고, 지역의 공동체성을 복원하기 위해 마을 모임을 기획하고,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자본이 지배하는 주식회사가 아닌) 사람이 주인이 되는 협동조합을 결성하고,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빈곤층 아이와 노인을 위해 모임을 만들어 운영하는 등 경제적 가치를 뛰어넘는 창의적인 시도가 필요하다. 이런 다양한 시도들이 우리 삶을 채운다면 기존 질서를 대체하는 대안적 삶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삶은 세상을 거슬러 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1%가 지배하는 세상의 체제를 거스르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다. 대안적인 삶을 매우 어렵고 힘겹게 만드는 장치들이 도처에 깔렸다. 모험과 도전에 믿음과 불굴의 의지가 필요한 까닭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1%를 욕망하는 것을 거부하고 다른 삶의 길을 열 때, 공고하게 보이던 1:99의 사회구조는 위기를 맞게 되고 점차 균열을 일으킨다. 우리 사회 전체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우리 주변에서부터라도 새로운 세상이 열리게 하자.
새로운 가나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도전자들에게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주셨던 동일한 격려의 말씀을 주신다.
“내가 너에게 굳세고 용감하라고 명하지 않았느냐! 너는 두려워하거나 낙담하지 말아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의 주, 나 하나님이 함께 있겠다.”(수 1:9)
김형원
하.나.의.교회 담임목사로 목회하면서, 복음과상황 발행인,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원장으로 섬기고 있다. 서울대 경영학과, 총신대 신대원에서 공부한 뒤 미국 고든콘웰신학교와 보스턴대학교,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대학원에서 사회윤리와 조직신학을 공부했다. 저서로는 《정치하는 그리스도인》 《행복한 크리스천》 등이 있고, 《탐욕의 복음을 버려라》 《미래를 담는 교회》 등을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