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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全斗煥, 1931년 1월 18일 ~ 2021년 11월 23일은 대한민국의 제11·12대 대통령이다. 1979년 국군보안사령관으로서 김재규의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을 주도 조사하였다. 1년후에는 광주에서 발발한 5·18을 진압한 후 간접 선거를 통해 대통령직에 취임하였다. 본관은 완산(完山)이고,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출생이다.
▲전두환대통령 생가 모습
전두환은 일제강점기인 1931년 경상남도 합천에서 전상우씨의 6남 4녀중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5세에 대구로 이주하였다. 전두환의 아버지는 가난한 농부였지만 마을 구장도 지낼 정도로 한문공부도 했고 전두환의 어머니는 많은 자녀들 중 전두환에 대한 기대가 가장 강해서 앞니가 아들의 운세를 막고있다는 미신을 듣고서는 즉시 쇠집게로 생니 3개를 뽑을 정도였다
전두환이 8살이 되던 시기 일본인 순사를 벼랑으로 밀어버리고 만주로 달아난 아버지를 쫓아 전두환은 만주로 건너갔다.
9살때 전두환은 아버지와 함께 대구로 돌아와 허름한 집에서 셋방살이를 했다. 전두환 일가는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수준이었다.
10살의 전두환은 일본인 식품공장에서 낫토(일본 청국장) 배달 ,약배달 등을 하며 학교에 다니지 못하다가 뒤늦게 희도소학교(초등학교) 에 진학했다. 만주행때문에 또래보다 늦게 1944년 3월 25일에 졸업하였다. 그의 나이 14세였다.
그해 전두환은 6년제(중학교+고등학교) 과정이었던 대구공립공업중학교(대구공업고등학교) 기계과에 입학했다.
그는 50리나 되는 먼 길을 걸어서 통학했다. 전두환은 중학교 권투부 부원이 되었다.
그는 학교에 갈 때마다 어깨에 권투장갑이 매달려 있었다. 키가 작았던 그는 중학생 당시 별명이 몽땅이었다.
전두환은 대구공고를 다닐때에도 신문배달 등 아르바이트를 했다. 전두환은 대구공고시절부터 대구 지역에서 알아주는 싸움꾼이었다.
그는 1950년 2월 10일에 이 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졌다. 1951년 일자리를 구하던 중, 형편이 곤궁하였던 전두환은 대학 진학의 꿈을 접고 학비가 들지 않는 육군종합학교의 갑종장교 모집에 응시한다. 그는 합격을 했지만 형 기환의 군 입대로 인해 부모가 반대하자 입학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대구 중앙로의 병사구 사령부에 붙은 육군사관학교 생도 모집 공고를 보고 이에 응시하였다.
공부실력이 부족한 전두환은 228명 선발에 2,400명이 응시한 시험에서 떨어졌다. 불합격 한달 후 사령부에게 연락이 왔다.
결원이 생겨서 입학을 허락한다는 것이었다. 전두환은 육사에 228명 중 꼴찌에서 두번째인 227등으로 합격하게 된다.
이리하여 1951년 진해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한국군 최초의 육군사관학교 정규 4년제 과정이었다.
운동에 능하던 전두환은 축구부원이 되었고 포지션은 골기퍼였다. 나중에 육사 축구부 주장으로서 리더쉽을 발휘해 육사를 전국대학 축구대회 준결승에 진출시키는데 일조했다.
▲육군사관학교 생도 시절 모습
육사에서 동기인 노태우, 정호용등과 만나 인맥관계를 형성했는데 특히 노태우와는 친구 및 동지로 군생활과 정계진출 내내 그 관계가 유지되었다. 1955년 3월에 전두환은 육사를 11기로 졸업하고 졸업과 동시에 육군 소위에 임관하였다. 임관 성적은 156명 중 126등으로 81% 수준이었는데 이는 공부를 매우 못한 것에 속한다.
한편, 전두환은 육사 2학년 생도시절 이규동 육사 참모장(대령)의 관사를 방문한다. 거기서 그의 차녀인 이순자를 만났다.
▲전두환 장인 이규동
이순자는 경기여중-경기여고를 졸업한 후 1958년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이순자가 이화여대 의과대학에 입학할 당시 전두환은 육사졸업 후 전방부대에서 근무를 했는데 이순자 가족들의 성원에 힘입어 1959년 1월 24일 두 사람은 대구제일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노태우 중위가 축사를 했다. 이순자는 이화여대의 금혼규정에 따라 학교를 자퇴했다. 가난했던 초급장교였던 전두환은 이후 중령이 될때까지 8년간 처가살이를 한다.
▲1959년 1월 24일
5.16 군사 쿠데타 직후
1961년에 박정희가 주도한 5·16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자 당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의 ROTC교관으로 근무중이던 그는 육군사관학교로 가서 육사 생도들의 5·16 군사 쿠데타 지지 시위를 주도했다. 이 공로로 그는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 박정희의 주목을 받게 된다. 그후 전두환은 국가재건최고위의 비서관이 되었다. 계급은 대위, 나이는 고작 30세였다.
5·16 군사 쿠데타 과정에서 박정희의 부하 장교들은 육군사관학교를 장악하기 위해 3명의 장교들의 인솔 하에 무장병력들을 육군사관학교에 파견했는데 그 지휘관은 오치성 대령(육사 8기), 박창암 대령(육사 8기) 그리고 훗날 박정희의 총애를 받게 될 차지철 대위였다.
그런데 이들이 막상 육사생도들에게 쿠데타 세력을 지지하기 위한 시가행진을 하라고 요구했으나 생도들은 거절했다.[23]
이 과정에서 전두환은 당시 육군사관학교 교장인 강영훈의 지시로 생도들이 쿠데타를 지지하는 퍼레이드를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뒤 상부에 밀고했다. 이후 김종필 등의 지원하에 전두환은 육사를 장악할 수 있었고 육사 교장 강영훈은 구금되었다.[23] 이후 전두환은 출세가도의 기반을 마련한다.
월남전 참전
1970년에는 육군 대령으로 진급 육군참모총장 수석부관이 되어 1년간 근무했다.
1970년 11월 22일 백마부대 29연대 연대장이 되어 베트남 전쟁의 지휘관에 파병·참전했다.
월남전에 연대장으로 참전하였다. 상관들의 그의 근무평은 좋지 못했다.
대령계급으로 공수 제1 특전여단장이 된다. 준장 진급후 1976년 청와대 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로 임명된다.
1979년 3월 5일 소장계급으로 요직인 국군 보안사령부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0 26사태 발발
1979년 10월 26일에 대통령 박정희가 궁정동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저격당하는 10·26 사건이 발생했다.
국무총리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직으로 일시 권력을 승계했다.
이 날 전두환은 부하들에게 막강한 권한을 가진 합동수사본부의 설치 기안을 명령했다.[31]
10월 27일 새벽 비상국무회의에서 박정희 대통령 유고안이 내려졌고, 계엄사령부가 설치되자 전두환 소장은 곧 계엄사령부 예하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에 임명돼 박정희 대통령 피살사건의 수사 지시 명령을 받았다.
10월 27일 전두환은 중앙정보부 해외담당차장 윤일균, 국내담당차장 전재덕, 검찰청 총장 오탁근, 치안본부장 손달용 등을 보안사 2층 사령관 접견실로 불렀다.[31] 전두환은 이들을 입구에서 삼엄한 몸수색을 했으며, 상석에 앉아 박정희의 서거를 알린 뒤 범인은 중앙정보부라고 지목하고 박준광 육군 소령을 통해서 각 기관의 업무지침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31]
곧 전두환은 중앙정보부에는 '앞으로 일체의 예산을 집행해서는 안 된다. 다만 합수본부의 허가를 받으면 집행할 수 있다'라며 행동에 제한을 두었다. 그 뒤 "앞으로 모든 정보 보고는 오후 5시, 오전 8시에 합수부에 제출하라"라고 지시했다. "정보부는 전재덕 차장이 당분간 장악하라" 라고 지시했다가 선임자가 해외담당차장임을 알고는 수정했다.[31]
김재규 체포와 수사결과 발표
전두환은 체포된 김재규를 면담하고 그대는 역적이고 배신자이니 어쩔수 없이 죽어야 된다고 했다.
11월 6일 계엄사 합수부장으로 박정희 대한민국 대통령 피살사건의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계엄군법회의에서 공개재판할 것을 언론사에 발표했다. 이날 그는 10.26 사건은 김재규 단독계획범행이고 정승화는 무혐의라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1979년 11월 중순부터, 전두환은 하나회 동기와 후배들을 규합하여 군사 반란을 일으킬 모의를 했다.
같은해 12월 6일 최규하는 제10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후 혼란한 정국을 틈타 노태우, 정호용, 유학성, 황영시 등이 주도하는 비밀 군내 친목단체 하나회의 육사 11기 출신 장교들을 주축으로 하여 신군부를 형성했고, 일부 선후배 기수들을 끌어들였다. 이를 배경으로 전두환은 신군부가 12·12 군사 반란을 일으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2·12 군사 반란
12월 6일 전두환은 육군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이 제안한 수사계획서에 따라 반란을 실행하기로 결정했다.
12월 12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 부장으로서 현장에 있던 김계원 및 계엄사령부 사령관 육군 대장 정승화 등을 내란방조죄로 체포하고, 이 과정에서 김오랑 육군 소령과 병사 2명이 신군부 병사들이 쏜 총격에 사망하는 등 물리적 교전이 발생했다.
정승화 참모총장 연행을 반대하던 수경사령관 장태완, 특전사령관 정병주 등도 곧 체포됐다. 정승화 참모총장은 보충역 이등병으로 강등당한 뒤 강제 예편당했고, 이 과정에서 반발하던 육군 장군과 장교들은 인사 불이익을 받고 강제 퇴역, 예편당했다.
한때 하나회 회장이었던 윤필용 수경사 사령관이나 그 고문이었던 박종규 대통령 경호실장은 하나회의 리더 격인 전두환에게 풍부한 활동자금을 지원해주었다.[29] 전두환은 이 자금을 혼자 착복하지 않고 다시 회원들에게 통크게 배분했다.(지동욱, <한국대통령열전>, 주코 신서(일본), 2002) 이런 태도가 그의 타고난 친화력과 함께 사람들을 그의 주변에 모여들게 했다.[29]
12월 12일 오후 6시경 전두환 등 신군부는 최규하 권한대행에게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김재규와 내통했으니 체포할 것을 허락해달라고 요구했다. 최규하는 정식 결재 라인을 거쳐서 올라오라며 승인을 거부했다. 전두환은 정승화 연행을 재가받으려 하였다.[34] 그러나 최규하는 이들의 예상 밖으로 완강했다. 한 시간이 넘도록 '국방부 장관의 의견을 들어봐야 겠다'며 버텼다.[35]
전두환은 노태우, 최세창 등 동지들의 부대에 병력출동 준비를 명령했다. 또 총리공관 경비의 무장을 해제시켜 최규하를 완전히 포위했다.
당시 청와대가 내부 수리 중이어서 최규하는 총리공관에 살았다.[35] 이번에는 전두환 뿐만 아니라 유학성 등 여럿이 함께 쳐들어갔다.
드러내놓고 위협했지만, 1시간 30분을 넘기도록 최규하는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12월 13일 전두환은 지시를 내려 정승화, 특전사 사령관 정병주를 체포, 연행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육군참모총장 전속부관 등이 부상을 당하고, 특전사 사령관 정병주의 부관 김오랑 소령(당시 소령, 사후 중령 추서)이 현장에서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12.12 군사 반란 성공과 군부 장악
전두환은 즉시 명령을 내려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여, 국방장관 노재헌을 잡아오라' 하였다.
치밀하게 계획했고 군의 주요 병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보안사령부의 도청으로 모든 움직임을 샅샅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휴전선을 지키는 최전방의 병력마저 서슴없이 동원하는 대범함도 보였다.[35]
12월 13일 새벽 1시 30분께 행주대교를 건넌 1공수특전여단은 새벽 3시 50분께 지하 벙커에 있던 노재헌 국방장관을 연행한다.[35]
12월 13일 새벽 5시 10분 최규하는 드디어 재가한다.[35] 이로서 전두환은 군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었다.[35]
한편 전두환은 영어 실력도 있었으므로 직접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을 설득하려 들었다.
전두환은 글라이스틴을 만난 자리에서 “부패를 일소한 후 병영에 복귀하겠다”고 했다.
이 같은 멘트 또한 허화평 등이 연구해서 올린 <5·16교본>에 들어 있었던 대사다.[29]
전두환이 돌아간 뒤 글라이스틴은 서류철을 뒤져 1961년 쿠데타 당시 박정희가 보낸 김종필의 대사 기록을 찾아냈는데 전두환의 말과 김종필의 말이 놀랍게 일치했다고 미국의 한 한국학 교수가 지적했다.[29]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과 CIA 한국지부장 로버트 브루스터는 미국 본국에 이를 보고하였다.
한편 미국에서는 신원조회 결과 전두환이 공산주의자는 아닌 것이 확인되자 5.16 때와는 달리 방관하는 입장을 취한다.
1980년 3월부터 그는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국무총리에게 자신을 중앙정보부장 서리 직에 임명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최규하, 신현확은 겸직규정이 없다는 점과 전두환이 현역군인이라는 점을 들어 반대했다.
그러나. 결국 군인사법 위반 논란 속에서 전두환은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였고, 4월 14일에는 제10대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취임해 국내 모든 정보 기관을 장악했다. 동시에 그는 전직 중앙정보부 직원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임명했던 실국장, 단장급 간부들에게 일괄 사직서를 받아 간부들을 대폭 물갈이했다.
보안사령관으로 중앙정보부 차장보를 겸직하던 그는 보안사령관으로 다시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직하게 되었다.
중앙정보부는 5월 10일 대북 특이동향을 경고하는 보고서, '북괴남침설'을 작성했고, 5월 12일 심야에 임시 국무회의에서 관련 내용을 보고했으나 이는 근거없는 것으로 평가된다.같은 해 5월 1일부터 5월 15일까지 서울역 광장에서 전국 대학생 수만 명이 운집해 데모를 했다.
5월 12일에는 계엄 해제안이 국회에 상정이 됐고, 여야 총무는 5월 20일 10시 개헌안과 비상계엄 해제에
대해 논의를 하기 위해 임시국회를 개회하기로 합의했다
5·17 비상계엄 확대와 광주 사태
5월 17일 전두환은 노태우, 정호용 등에게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시국수습방안'에 대한 찬성 의견을 주도하도록 했고, 전군주요지휘관회의의 의견을 내세워 국무총리와 대통령에게 계엄확대, 비상기구 설치 등을 실시하도록 강요했다. 같은날 중앙청과 국회가 군으로 포위되고 외부와의 통신이 차단된 상태에서 비상계엄 전국확대가 실시됐다.
5월 18일 0시에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전두환은 사전연행계획에 따라 김대중, 김종필 등을 영장없이 불법적으로 체포하고, 김영삼 등 다른 야당 인사들도 연금, 국회를 폐쇄하고 기능을 일시 정지시켰다. 계엄 확대와 동시에 신군부는 계엄포고령 제10호를 발표해 정치 활동 금지, 휴교령, 언론 검열 등의 조치를 내렸다.
5월18일, 전남대 앞에서 수백명의 학생의 투석으로 군과의 격돌을 야기시켰다.
이날,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을 죽이러 왔다. ''40명이 죽었다'' 김대중씨가 처형됐다' '군인들에게 밥을 굶기고 마약을 투여했다'는 등의 해괴한 뜬소문을 믿고 사람들이 시위에 동참했다.
5월20일, 폭도들(rioters)이 시청과 방송국에 불을 질렀고 버스와 택시를 강제 징발하여 도로 위를 달렸다.
도청건물 앞에서 이들 차량중 하나가 경찰 저지선으로 돌진하여 4명의 경찰관을 숨지게 했다.
5월21일, 폭도들이 예비군 무기고를 공격, 소총과 실탄 기타 무기들을 탈취했다.
오전 9시경 자동차 공장이 습격을 받아 장갑차를 포함한 수백 대의 차량이 탈취되었다.
인접지역의 군경시설이 습격을 받아 수백정의 총기들이 탈취되고 화약제조 업자들로부터 다량의 TNT도 탈취되었다.
광주교도소를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이 장갑차와 소방차에 분승한 중무장한 폭도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5월21일, 오후 6시 군인들의 후퇴로 광주시는 완전히 반란군중(rebel)에 수중에 들어갔다.
5월22일, 탈취된 무기는 소총 5,008정, 엽총395정, 실탄288,680발, 수류탄526발, 다이너마이트 3,000상자로 집계되었다.
5월 27일, 계엄군은 새벽 1시에 행동을 개시하여 수시간후에 상황이 종료되었다.
광주 시민군
무장 광주 시민군
국보위 설치와 정권장악 기도
전두환 등으로서는 선거에 의해 반유신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신군부는 권력 접수 시나리오대로 국가비상기구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설치안을 5월 26일 최규하에게 재가해줄 것을 요구했다.[46]
5월 31일 전두환을 상임위원회 위원장으로 하는 국보위가 발족됐다. 이어 7월 17일 중앙정보부장직을 사퇴하고 국보위만을 관할하다가 8월 5일 육군 대장으로 진급하고, 8월 22일 예비역 육군 대장으로 예편했다.
광주민주항쟁 이후 전두환 등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통해 전권을 장악하고, 최규하 대통령을 위협하여 하야토록 했다.
한편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국가원수로 추대된 전두환은, 박정희의 전례에 따라 육군소장에서 육군대장으로 진급하여 전역한 다음 장충체육관에서 유신체제의 유산인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에 의해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아웅산 묘소 폭탄테러 사건 전후
1983년 10월 제5공화국 내각은 전두환 대통령을 대동하고 동남아 순방을 다녀왔다.
10월 9일, 동남아시아 국가 순방 기간에 순방국 하나인 버마(미얀마)에서 아웅산묘소 참배 도중 북한에서 보낸 공작들에 의한 폭탄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1진으로 도착하여 예행 연습 중이던 이범석, 서석준, 심상우, 함병춘 등 80명의 외교관과 취재진 및 현지 안내인이 피폭으로 즉사했다. 다만 1진으로 도착하여 예행연습 중이던 인원 중 이기백은 당시 현역 군인 신분이였기 때문에 장교 정복을 입고 있었는데 각종 휘장 및 약장이 방탄복 역할을 해서 목숨을 건졌다.
현지 한국인들을 방문하고 뒤늦게 2진으로 방문한 전두환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사건 직후 현장에 도착했다가 다시 발길을 돌려 랑군 시내로 빠져나갔다.
이때 북한이 파견한 특수요원 중 미얀마 경찰에 검거된 조선인민군 상위 신기철은 격투 중 현장에서 사살됐고 체포된 소좌 진모는 사형에 처해졌다. 인민군 대위 강민철은 범행사실을 자백하고 수사에 협조하여 종신형을 선고받고 수감됐다가 2008년 5월 21일 사망했다.[88] 전두환은 동남아시아 국가 순방일정을 전면 취소하고 비행기편으로 비밀리에 귀국했다.
이후 남북관계는 경색되었지만 이산가족 상봉은 계속 추진하였다. 1984년 8월 20일 전두환은 갑자기 남북간 물자교역 및 경제협력 제의, 대북기술·물자 무상제공도 하겠다고 발표한다. 그리고 1985년 1월 9일 전두환은 서울·평양 상주연락대표부 설치를 제의하고 1985년 9월 20일부터 9월 24일 대대적으로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 동시 교환방문(상봉가족 65가족 92명)을 하였다.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1987년 11월 29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출발한 KAL 858기가 인도양 상공에서 북한공작원에 의하여 공중 폭파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1987년 10월 7일 김정일의 명령에 의해 88 서울올림픽대회를 방해하고, 대한민국 내 대정부 불신을 조장을 목적으로 하였다. 여객기 폭파후 두 폭파범은 1987년 12월 1일 바레인 공항에서 조사를 받던 중 김승일은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으며, 김현희는 대한민국으로 압송되었다.
이 사건은 여러가지로 논란을 불러왔다. 뿐만 아니라 곧 치러질 대선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당시 40%대의 지지율을 기록하던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에게는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나 다름 없었고, 결국 김영삼은 대선에서 여당의 노태우에게 패하였다.
노태우에게 민주정의당 총재직 넘김
1987년 7월 10일, 민주정의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노태우에게 넘겼다. 그리고 그 날에 민주정의당 명예총재가 되었다.
퇴임후
그는 이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으나 198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어 제5공화국의 청문회가 진행됐다.
여기서 광주 민주화 운동과 5공 비리 문제로 책임추궁을 당하다가 1988년 11월 19일 약 1만 명의 학생들은 서울시내에서 전두환 구속을 위한 2차 궐기대회를 열었다.[102] 대통령 노태우는 전두환의 형제들을 구속시켰다.[102] 1988년 11월 23일 전두환은 이순자와 함께 강원도에 있는 백담사로 내려간 후 11월 29일에 민주정의당을 탈당했다.
백담사에서 불경을 외우며 은둔생활을 하다가 1989년 12월 31일에 국회 증언대에 섰고 다시 백담사에 돌아간 뒤 1990년 12월 30일 하산하여 연희동 자택으로 돌아왔다. 전두환은 자신의 불경강해실력이 웬만한 승려보다도 뛰어남을 자랑했다.[103] 1990년 3당 합당 이후 민주자유당 명예총재직 제의가 들어왔으나 민자당 내 김영삼과 민주계 인사들의 반발이 있자 그는 명예총재직 제의를 사양했다.
문민정부 이후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수 만명의 국민이 전두환 등 신군부 인사들을 반란죄 및 내란죄로 고발했다.
1995년 11월 16일 노태우의 구속 수감을 계기로 12·12 군사 반란 및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유혈 진압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거세어졌으며,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영삼도 공소시효 정지 규정 등을 둔 5·18 특별법 제정을 지시하고,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을 선언했다.
검찰은 5.18 사건 재수사에 착수하면서 동시에 제5공화국의 비리에 대한 수사도 진행했다.
1995년 12월 2일 전두환은 자신이 1989년 12월 15일에 있었던 노태우와 김영삼·김종필·김대중의 영수회담에서 나온 결정에 따라 그해 12월 31일에 13대 국회의 증언대에 올라 과거 문제의 매듭을 지었고[104] 김영삼 정부는 과거 모든 정권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있고[104] 자신은 검찰의 소환요구에 협조하지 않을 생각이고 12·12를 포함한 모든 사건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으니 여타의 사람들에 대한 정치보복적 행위가 없기를 희망한다고 했다.[104]
12월 15일 헌법재판소는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할 수 있다고 했으며 1996년 1월 24일 검찰은 전두환과 관련자 16명을 내란 및 반란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그는 안양교도소에 수감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다.
구속과 석방
1995년 12.12 5.18 재판과정 중 그는 5.18의 진압당위성을 주장하며 좌파세력의 공세를 주장했다.
공판은 1996년 3월부터 진행이 됐는데, 8월 26일 서울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 후 12월 16일 서울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 원을 각 선고받았으며, 1997년 4월 17일에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당시 그의 수인번호는 3124번이었다. 그러나 수시로 안양교도소에는 면회객이 줄을 이었고 교도관들도 전두환에게는 다른 사람들처럼 수인번호로 호출하지 못했다.
전두환, 노태우의 구속 이후 김영삼에 대한 보수주의 세력의 반발과 반감은 계속됐고, 사회적 갈등을 유발했다.
한편 투옥 직후 전두환은 김영삼의 정치보복, 정치탄압이라며 단식투쟁을 감행했다.
형 확정 이후 수감 생활을 하다가 1997년 12월 22일 지역감정 해소 및 국민 대화합을 명분으로 한 대통령 특별사면에 의해 풀려났다.
5공신당 창당계획
1994년 이후부터 전두환은 5공 신당 결성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12·12 사건과 5·18 관련 재판으로 신당 창당 추진 계획은 무산당했다.
1996년 2월 3일, 전두환은 5공 신당 창당에 여야 정치인 200여명에게 5백억원 이상을 뿌렸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전두환은 백범기념관 설립 때까지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 고문직을 유지했다.
1999년 전국체육대회 때 하키 결승이 열린 성남운동장을 방문, 관계자들을 격려하고 우승 팀에 저녁식사를 대접했다.[131]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남자하키 선수들을 서울 연희동 자택으로 초청, 다과를 베풀기도 하였다.[131]
1999년 7월 그는 김대중에게 자신이 대북 특사로 다녀올 것을 제의하였다.
전두환은 임동원 통일부 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의사를 타진했으나 정부는 시기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양영식(梁榮植)통일부차관을 全전대통령에게 보내 그같은 입장을 설명했다.
2003년 2월 대한민국의 방송사와 신문사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폭동이라고 정의했다.
▲2003년 2월 대한민국 각 언론사들과의 공개 인터뷰에서...
2006년 10월 22일, 10대 대통령 최규하가 사망하자 10월 23일 최규하의 빈소에 조문했다.
2009년 5월 23일 17대 대통령 노무현이 투신 자살했을 때 전두환은 전립선 수술을 이유로 빈소에 불참했다.
전두환은 노무현의 투신 자살에 대해 "꿋꿋하게 버티지, 그렇게 가느냐. 조금만 더 버티지"라고 했다.[161]
2010년 1월 18일 대통령 이명박으로부터 생일축하난을 받았다.[164] 1996년 전두환은 포괄적 뇌물죄로 추징금 2200억원을 선고받고, 600여억원을 납부하여 추징금이 1672여억원 가량 남아있던 중 2010년 10월 14일 300만원만 납부했다이번 미납액 일부 변제로 추징시효는 2013년 10월까지 연장됐다.이후 전두환은 인터뷰에서 자신의 전 재산은 29만원이라고 하여 회자화되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
2013년 2월 25일 전두환 전 대통령은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하였다.
박근혜 당시 대통령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재산을 환수할 수 있도록 이른바 '전두환 추징법'을 추진했고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전두환 추징법은 추징 시효를 3년에서 10년으로 연장하고, 불법 재산을 취득한 당사자뿐만 아니라 불법 재산에서 유래한 재산을 가진 제3자를 상대로 추징을 가능케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165]
검찰에 의하여 일가의 수백여점의 미술품이 압수되었고, 해당 미술품들은 경매에 부쳐졌다. 경매는 2차례에 걸쳐 열렸고, 모든 작품이 100%로 완판되는 이례적인 기록을 세웠다.
▲본인의 서예 작품도 정부 주도 경매에 팔렸다.
2019년 3월 11일, 전두환은 대통령 재직시절 이후 35년만에 조비오 신부의 명예훼손 혐의로 광주로 내려가 재판에 참석했다.
2020년 4월 27일에도 전두환은 또다시 광주로 내려가 재판에 참석했는데 이날 재판에서의 불성실한 태도로 맹비난을 받았다.[172]
삼청교육대 관련
정권 차원에서 삼청교육대를 운영하여 인권을 침해했다. 한편 1989년 12월 삼청교육대 피해자인 이택승 등으로부터 고소를 당한다.
삼청교육대 피해자 이택승 등은 1989년 12월 최규하, 전두환, 이희성, 김만기(당시 국보위 정화분과위원장) 등을 감금, 폭행 및 가혹행위, 살인 및 살인교사죄로 서울지검에 고소했다.[177] 그러나 3년이 지난 뒤인 1992년 서울지검으로부터 공소권 없음 결정을 받았다.
긍정적 평가
1979년 박정희 피살 후 경제회생에 노력을 기울여 일명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헌정 사상 최고의 호황을 맞이했다.
1986년 아시안 게임(1981년 11월 26일),1981년 9월 30일, 88올림픽 유치전에서 성공한 점등이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과외 과열로 인해 계층간 위화감이 심각해진다고 보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7·30교육개혁조치에 따라 대학
졸업정원제와 함께 교육정상화와 과열과외해소라는 이유로 과외금지조치를 실시했다.
학교밖에서의 과외수업은 일체 금지하고 미인가된 교습자와 과외를 한 학부모는 명단을 공개하여 세무조사를 실시하고, 직장인인 경우에는 면직처분을 내렸으며[199], 과외를 받은 학생은 적발된 경우 입시자격을 박탈하고 형사입건하였다.[200]
전두환은 대중의 정치적 관심을 무마하기 위한 수단으로 야구(1982년 창설)와 축구(1983년 창설)의 프로리그를 만들었다.
이를 통해 1988년 하계 올림픽으로만 해당하는 한국 스포츠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가 존재한다.[201]
가족 관계
부인 이순자와의 사이에 세 아들 재국, 재용, 재만과 딸 효선을 두었다.
첫째 재국은 출판 업체 시공사의 대표이다.
둘째 재용은 탤런트 박상아와 결혼했고, 셋째 재만(늦둥이라 사진에 없음)은 이윤혜와 결혼했다.
이윤혜는 한국제분 사장이었던 운산그룹(동아원) 회장 이희상의 장녀이다.
최근 미국 나파밸리의 포도밭에서 출시한 두 종류의 동아원 와인이 G20정상회담의 만찬주로 사용되어서 화제가 됐다.
장녀 효선은 서경대학교 교양과정부 조교수(교양영어 담당)이다.
여담
닮은 연예인(박용식)에 대한 탄압도 간혹 회자되곤 한다.
또한 제5공화국 기간 중에는 대머리, 주걱턱 등은 영화계나 드라마계에서 금칙어가 됐다.
▲탤런트 박용식(朴容植, 1946~2013년/ 향년 66세)
2002년 2월 이주일의 빈소에서는 개인적인 친분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주일 씨가 아들이 사망한 뒤 박종환 감독과 함께 우리 집에 찾아와 함께 술을 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143] 2008년 4월에는 팬클럽인 전사모에 의해 전두환 기념관이 설립되려다가[223] 무산되기도 했다.
1980년 이후 9시 뉴스의 첫 기사로 전두환 대통령의 일정이 보도되어 땡전 뉴스라는 유행어가 파생되기도 했다.
1995년 재판정에서 "왜 나만 갖고 그래!"라고 푸념한 것이 화제가 되어 한동안 유행했다.
2003년 4월 28일 법정 회견에서 "29만 원 밖에 없다."고 하여 이 발언이 한동안 유행했다
전두환의 재판 때 전두환이 같이 재판을 받는 노태우에게 "자네 구치소에서 계란 프라이 주나?"라고 하자, 노태우는 "안 준다."라고 답하였고, 전두환은 "우리도 안 줘."라고 대답했다.
학창시절 공부를 엄청나게 못했다.
그의 육군사관학교 생도 시절 성적을 보면 이게 과연 장교로서 가져야 할 지적수준인가 라는 게 의심될 정도로 공부를 엄청나게 못했다.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한 200명의 생도 중 200등으로 입학 성적은 꼴등이었으며 그가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할 당시인 1951년은 아직 한국전쟁이 끝나지 않았던 시점인 탓에 생도들이 계속 퇴교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120등 안에 들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을 만큼 기가 막히게 공부를 못했다.
그래서 전두환은 항상 퇴교 위기에 몰렸으며 교관들 조차 전두환이 언제 퇴교할 건지 시기를 논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두환은 거의 꼴찌에 가까운 성적이었지만 계속 살아남았고 육사 11기 생도들은 200명 중 156명이 소위로 임관했는데 그 중 126등을 했다.
당시 시중에 '돌머리' 유머가 돌면서 전두환의 '머리 나쁨'은 사실인 것처럼 유포되었지만, 당시 일선에서 뛰었던 한 언론인은 그 풍문을 부인하면서 실제로 "전두환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 특히 직관력이 뛰어나고 기억력이 좋았다"고 증언했다.
대통령 후보 시절 7년 단임제를 주장했는데, 재선 이후 1987년 7년 단임제를 이행하고 퇴진하였다.
취향
그는 술을 좋아했다. 그러나 2007년에 공식적으로 술을 줄였다고 미디어에서 밝혔다. 2007년 1월 5일 인사차 방문한 당시 대통령 후보자 이명박과의 1시간 공개 면담에서 "주량이 3분의 1로 줄었다. 나이 드니까 도리 없어."라며 절주 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245] '운동은 뭘 하시느냐?'고 묻는 이 시장에게 "나이 들면 골프가 가장 좋아, 그런데 주변에 한 사람 두 사람 골프치는 사람이 없어져, 세상 떠나고 아프고."라면서 적적함을 표현하기도 했다.[245] 애연가이기도 했던 전두환은 1987년 자신의 퇴임식 등 공식 석상에서도 흡연을 하기도 했다.
역대 대통령의 식단을 보면 전두환만 유난히 고기가 많다. 축구 골키퍼 출신이라서 운동을 해야 했고 그에 따라 영양섭취를 많이 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망
▲별세 얼마전의 모습
사인은 "다발성 골수종"으로 알려졌으나. 코로나 백신인 화이자 주사를 맞고난 후유증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민정기 전 비서관은 “지난 6~7월쯤 전 전 대통령을 찾아 뵀더니, 얼굴이 굉장히 수척해진 모습으로 건강이 좋아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부인 이순자 여사께 ‘왜 그러시느냐’고 물었더니, ‘코로나 백신을 맞은 후에 식사를 잘 못하셔서, 체중이 10kg 가량 줄었다’고 말했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