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효록 서(忠孝錄序)
기정진(奇正鎭) 찬(撰)
[생졸년] 1798년(정조 22년) 6월 3일 ~ 1879년(고종 16년) 12월 29일
동방에 도학(道學)이 없었으나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이 창도(唱導)하였고, 아조(我朝)에 절의자가 많았으나 육신(六臣)을 으뜸으로 삼는 것은 상론(尙論)하여 이미 정해졌으니 다시 논평할 여지가 없다. 옥천 조씨(玉川趙氏) 사세(四世)의 충효 사실(事實)은 이미 모아 일록(一錄)을 완성하였다.
이에 정진(正鎭)이 읽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대단하도다. 효가 예를 다하는 데에 이르고, 충이 목숨을 버리는 데에 이르러 이중에 한 가지만 있더라도 세속의 모범이 되어 후세에 드리울 만한데, 하물며 사세가 한 마음으로 그러한 것들을 이미 수립했구나. 또 선(善)을 닮도록 했으니 정문(旌門)이 서게 되고 추증되며, 시호가 내려지거나 제사를 받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학사(學士)가 지은 갈문(碣文)과 상국(相國)이 지은 장문(狀文) 역시 마땅히 그 누차 썼지 한번 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진이 가장 특이하게 여기는 것은 농은(農隱)과 부정(副正)이 포은ㆍ야은(冶隱)에 뜻을 합하였고, 죽촌(竹村)과 구천(龜川)이 사육신과 함께 죽은 점이니 하늘이 성명(性命)을 내려 주기를 조씨(趙氏)에게만 왜 유달리 많이 하였는가.
어찌 앞뒤 한 대사(大事)가 있을 때마다 조씨가 간여하지 않은 바가 없단 말인가. 이 또한 특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 도의 흥폐에는 반드시 조짐이 있고, 인사(人事)는 곧, 하늘의 뜻이다. 바야흐로 사공(四公)이 살았던 때에 하늘이 장차 우리의 한 다스림을 보우하사 우리의 민이(民彝)를 크게 도와 포은ㆍ야은이 학문을 창도하고, 사육신이 절의를 다 하였으니 이것을 하늘의 뜻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진실로 하늘의 뜻이 없지 않았으니, 조씨가 대대로 그 미덕을 이루는 것이 또한 무엇이 어렵겠는가. 옛날에 원개(元凱)의 씨족이 누구보다도 먼저 미덕을 이룰 때에 당우(唐虞 요순(堯舜))의 치화(治化)가 필경 이들에게서 힘을 입었으리니, 조씨의 사세가 어찌 고금과 같지 않다하여 다르게 보겠는가.
다만 원개는 평상시에 처하여 몸소 당시의 태평을 누렸고, 조씨는 변고(變故)의 상태에 처하여 이름으로 후세의 명교(名敎)에 도움을 주었으니, 이는 고금 기수(氣數)의 후박(厚薄)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이를 추상(追想)하며 안타까워한다. 드디어 외람됨을 잊고, 그 권두(卷頭)에 써서 돌려준다.”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ㆍ조선대학교 고전연구원 | 박명희 김석태 안동교 (공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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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忠孝錄序
東方無道學。而圃隱爲之倡。我朝多節義。而大臣爲之首。尙論已定。無容改評。玉川趙氏四世忠孝事實。旣萃成一錄。正鎭讀而歎曰。多矣哉。孝至於盡禮。忠至於舍命。有一於此。足以範俗而垂世。况四世一心旣樹立之。又糓似之。綽楔贈貤。節惠俎豆。固其所也。學士之碣。相國之狀。亦宜乎其累書。不一書也。然正鎭之所尤異者。農隱副正。協志圃冶。竹村龜川。同死於六臣。天之降性。偏厚於趙氏耶。何先後一大事。而趙氏無不與聞也。是亦無足異者。道之興廢。必有兆漸。人事卽天意也。方四公之時。天將佑啓我一治。大棐我民彝。圃冶之倡學。六臣之盡節。謂之非天意可乎。苟天非無意。則趙氏之世濟其美。亦何難矣。昔者元凱之族。濟美於先。而唐虞之治。畢竟賴之。趙氏四世。豈可以古今不同而殊觀。但元凱處其常。故以身享當時之煕皞。趙氏處其變。故以名裨後世之名敎。脫不得古今氣數之厚薄。是可追想於邑也。遂忘僭題其卷端而歸之。<끝>
노사집 제17권 / 서(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