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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전당집 제12권 / 비명(碑銘)
봉헌대부 여성군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증시 문단 송공 신도비명병서
(奉憲大夫礪城君兼五衛都摠府都摠管贈諡文端宋公神道碑銘 幷序)
여성군(礪城君) 이암(頤菴) 송공(宋公)의 증손인 형조 낭관 희업(熙業)이 선배인 참판 박민헌(朴民獻)이 지은 묘지문(墓誌文)과 여량 송씨(礪良宋氏) 가문의 족보를 가지고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증조부는 작위(爵位)로 보면 예법에 따라 응당 비(碑)를 세워야 합니다.
더구나 그 분의 학문, 문장, 필법이 당세의 모범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잊힌 채 묘비에 새기지 못한 지가 50년이나 되었습니다. 이는 감히 게을러서 선대의 아름다운 덕행을 버려둔 것이 아니라, 실로 상란(喪亂)과 재난 때문이었습니다.
부친께서 뜻을 품으신 채 돌아가셨으니, 그 책임은 후손인 저에게 있는데, 세상에서 선대부(先大父 송인(宋寅))의 명성과 품행을 말할 수 있는 이로는 그대만한 이가 없기에 감히 재배하고 비명을 부탁드립니다.”하였다. 내가 벌떡 일어나 말하기를, “남의 명(銘)을 쓰는 것은 진실로 어려운 일인데, 현인(賢人)의 명을 쓰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더군다나 저는 그 일에 적임자가 아닙니다.”하였다.
형조 낭관이 예는 더욱 공손히 하고 말은 더욱 간절하게 하여 매번 그 선친의 뜻을 일컬으며 대를 이어온 집안의 친분을 들어 면려하였다.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삼가 박공의 묘지(墓誌)에 의거하고 덕망 있는 어른들에게 들은 것을 참고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여량 송씨(礪良宋氏)의 시조는 고려 추밀원 부사 휘 유익(惟翊)이다. 그 후에 마침내 번창하여 정렬공(貞烈公) 송례(松禮), 양의공(良懿公) 분(玢), 정가공(靖嘉公) 서(瑞)가 모두 큰 공훈을 세워 연이어 3대가 정승을 지냈다. 5대를 지나 휘 공손(恭孫)은 훈련 도정으로 영의정에 추증되고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에 봉해졌는데, 바로 공의 증조부이다.
조부 질(軼)은 영의정으로 여원부원군(礪原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숙정공(肅靖公)이다. 부친 지한(之翰)은 호조 판서에 추증되고 여량군(礪良君)에 봉해졌으며, 의령 남씨(宜寧南氏)에게 장가들어 정덕(正德) 정축년(1517, 중종12) 7월 정해일에 공을 낳았다.
공의 휘는 인(寅), 자는 명중(明仲), 자호(自號)는 이암(頤菴)이다. 열 살 때에 중종(中宗)의 셋째 따님인 정순옹주(貞順翁主)에게 장가들어 여성위(礪城尉)에 봉해졌다. 약관에 응제시(應製試)에서 신하들 중 장원을 차지하여 품계가 한 등급 올랐으며,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어 또 품계가 한 등급 올라 정경(正卿)의 반열에 들었다.
사옹원 제조가 되어서는 조사(詔使)를 접대하는 일을 관장하여 잘 처리하자 명종(明宗)이 특별히 품계를 올려주고 총애하였으며, 여원(礪原 송질(宋軼))의 녹훈(錄勳)을 세습하여 군(君)에 봉해졌다. 마침내 의빈부와 충훈부 두 부서의 일을 관장하고 겸하여 상의원을 관장하였다.
도총관으로서 금군(禁軍)을 총괄한 것이 여러 번이었으며, 안주(安州)와 황주(黃州)에서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였는데, 이는 문원(文苑)에 뽑힌 것이었다. 갑신년(1584, 선조 17) 7월 정해일에 병으로 수진방(壽進坊) 사저에서 세상을 떠나니, 춘추가 68세였다.
을유년(1585) 2월 기미일에 양주(楊州) 소라산(蘇羅山) 사향(巳向)의 언덕에 예법대로 장사 지냈다. 옹주는 공과 같은 해에 태어났으며, 공보다 3년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장사 지낼 때 그 오른쪽을 비워두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합장하였다. 옹주는 시부모를 잘 섬긴 것으로 이름났다.
아들 한명을 낳았는데, 이름이 유의(惟毅)이며, 돈녕부 봉사를 지냈다. 좌찬성 정대년(鄭大年)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기(圻)는 문과에 급제하여 첨지를 지내고,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해(垓)는 현감을 지냈다. 판서는 2남 4녀를 두었는데, 장남이 바로 형부군(刑部君 송희업(宋熙業))이며, 차남은 영업(榮業)으로 찰방이다.
장녀는 첨정 이유청(李幼淸)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참판 정광성(鄭廣成)에게 출가하였으며, 삼녀는 첨정 유일(柳𦨙)에게 출가하였으며, 사녀는 사인(士人) 윤선언(尹善言)에게 출가하였다. 찰방은 후사(後嗣)가 없다. 공은 서출 아들 두 명이 있는데, 유순(惟純)은 호군이고, 유량(惟良)은 봉사이다. 내외 적서(嫡庶)의 손자와 증손 약간인(若干人)이 있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명민하고 의표(儀表)가 단정하였으며,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음식과 물을 찾듯이 학문을 좋아하여 경전을 공부하고 예의를 익혀 훌륭한 고인(古人)처럼 되기로 기약하였다. 집안에 있을 때는 말소리와 용모가 온화하고 부드러워 마치 어린아이 같았으나 상례(喪禮)를 치를 때에는 법도에 넘치도록 행하여 거의 목숨을 잃을 지경에 이르렀다. 계모를 섬길 때 지극히 효성스러웠는데, 계모 역시 공을 자기가 낳은 자식처럼 대했다.
제사에는 반드시 그 엄숙함을 다하여 마치 귀신이 앞에 와있는 것처럼 하였고, 이를 미루어 가족과 우애 있고 화목하게 지냈다. 위급하고 곤란에 처한 이를 도와주는 것은 지성스러운 마음에서 우러나와 궁벽한 마을이라도 반드시 직접 왕림하여 방문하였다.
몸소 겸손과 공손함을 견지하였고, 어진 이와 선비를 좋아하였으며, 남과 사귈 때에는 귀천을 따지지 않고 신의로써 관계를 맺어 한 가지라도 선한 점이나 장점이 있으면 격려하여 칭찬하고 장려하니, 이로 인해 선비들 중에 공을 따르는 이들이 많았다.
평소 몸가짐이 편안하고 중후하며, 행동거지가 법도에 맞아 비록 의복의 미세한 부분이라 할지라도 평소 중화(中華)의 제도를 사모하여 관디(冠帶)를 갖추고 문 밖을 나서면 마을 사람들이 우러러보며 존경하였다. 성품이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이리저리 유람하며 나라 안 사방의 명승지를 다 둘러보았다.
한강 가에 정자를 지어 거문고와 노래로 이름난 이들을 모아 놓고는 시인과 묵객을 초청하여 술 마시며 시를 읊거나 낚시를 하면서 초연히 세속을 벗어난 듯한 뜻이 있었다. 당세의 큰 유학자인 퇴도(退陶: 이황(李滉), 남명(南溟: 조식(曺植), 동주(東洲: 이민구(李敏求), 북창(北窓: 정렴(鄭𥖝), 율곡(栗谷 이이(李珥), 우계(牛溪 성혼(成渾) 등 여러 선생들이 모두 공을 존경하여 경전의 의문점을 질정하고 예(禮)의 뜻을 물었는데, 발명한 것이 많았다.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이 이조 판서와 대제학의 중책을 공에게 맡기고자 하였으나, 결국에는 의빈(儀賓)의 예에 구애되어 그만두었다. 선조(宣祖)께서 깊이 존경하는 예를 더하여 자문하는 일이 많았다. 하사한 집에 화재가 나서 임금이 유사(有司)에게 다시 지어주려고 했는데, 공이 극구 사양하자 임금이 공의 뜻을 가상히 여겨 그 비용만 하사하였다.
병이 나자 의원과 문병하는 이들이 계속 길에 이어졌으며, 세상을 떠나자 임금이 부의(賻儀)를 보내고 장례를 치르게 하였는데, 모두 일상적인 예에 지나칠 정도였다. 숭정(崇禎) 임신년(1632, 인조 10)에 이르러 문단(文端)이란 시호를 내렸는데, 군자들이 모두 아름다우면서도 지나치지 않다고 칭송하였다.
공의 시와 문은 번거롭게 수정하지 않아도 저절로 법도에 부합하였으며, 그윽한 지취(志趣)와 은근한 빛이 있었다. 서법은 오흥(吳興 조맹부(趙孟頫))을 모방하였는데, 단정한 해서(楷書)에 더욱 뛰어나 산릉(山陵)의 지문(誌文)과 궁전(宮殿)의 편액으로부터 사대부들의 비갈(碑碣)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에게 의뢰하였다. 저술한 글은 병란에 망실되어 겨우 《이암집(頤庵集)》 1권만이 세상에 전해질 뿐이다.
아! 공이 과장(科場)에 나아가 한 가지 기예를 팔아 진출하였더라면, 중용되었음은 물론이고, 그 베풀어진 은택이 어디인들 미치지 않았겠는가마는 왕실 외척의 반열에 얽매여 지업(志業)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창성하고 태평스러운 때를 만나 부귀를 누렸고, 죽고 나서도 공의 의로움을 칭송하는 일이 줄어들지 않았으며, 지난날 여러 선생과 더불어 세상에서 일컬어졌으니, 어찌 현달과 은택의 시행에 대해 논할 것이 있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정릉이 중흥시켜 어지러운 풍속 진작시키자 / 靖陵中興挽俗厖
선비의 법도 좋아져 나라의 모범 되었네 / 士程以吉式是邦
의빈으로 간택하여 옹주 시집보내니 / 而遴而儀俾釐降
알맞게 겸손으로 처신하여 성명 더욱 드러났네 / 折衷卑牧問彌章
시서와 예양을 정밀하게 실천하여 / 詩書禮讓履以詳
성대한 일 이루어 깊은 경지를 열었네 / 厥有盛事闢奧堂
마멸되지 않는 금석처럼 궁구함에 힘썼고 / 金石不泐鉤索强
모으고 허비하지 않아 뜻은 강건하였네 / 聚而罔費志卽康
오직 이치를 상고하는 것이 어찌 그리 아득한가 / 惟稽於理胡茫茫
물가 언덕 마르지 않아 물이 방향을 이룬 듯하네 / 猶岸不枯水成方
셋 중에 둘을 얻었으니 절로 빛이 나네 / 于三得二亦自煌
오래도록 징험하더라도 명성 유구하리니 / 而久以徵聲流長
철인이 품은 뜻 말하는 것이 부끄럽구나 / 而怍于辭哲人藏
<끝>
[註解]
[주01] 봉헌대부 …… 신도비명 : 이 글은 송인(宋寅, 1517~1584)에 대한 신도비명이다.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명중(明仲), 호는 이
암(頤菴)이다. 중종의 셋째 서녀인 정순옹주(貞順翁主)와 결혼하여 여성위(礪城尉)가 되었으며, 명종 때 여성군(礪城君)에 봉해
졌다.
[주02] 물가 …… 듯하네 : 귀한 재능이나 선행이 있으면 절로 세상에 드러나게 됨을 말한다. 《순자(荀子)》 〈권학(勸學)〉에, “옥이 산에
있으면 초목에도 윤기가 흐르고, 진주가 나오는 연못은 물가가 마르는 법이 없다. 선을 행하고 사악함을 쌓지 않는다면 어찌 명성이
나지 않겠는가?[玉在山而木草潤, 淵生珠而崖不枯. 爲善不積邪, 安有不聞者乎?]”하였다. <끝>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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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奉憲大夫。礪城君兼五衛都摠府都摠管。贈諡文端。宋公神道碑銘。幷序
礪城君頤庵宋公之曾孫刑部郞煕業。持先達朴參判民獻所爲誌文若礪良氏族之譜。謁余曰。先曾大父爵位法應樹碑。況其學問文章筆法。矜式當世。而昧昧蔑顯刻。垂五十年。則非敢惰棄先懿。實坐喪亂菑故。先大夫齎志以歿。責在後死。惟世能言先大父名行。宜無如子者。敢再拜以請。不佞蹶然作曰。銘人固難。銘賢者爲尤難。且非其任也。刑部君禮愈恭而辭愈切。輒稱其先志。勉以世好。辭不獲則謹据朴公之誌。參以聞於長德者而敍之曰。礪良之宋。肇自高麗樞密副使惟翊。其後遂大。貞烈公松禮, 良懿公玢, 靖嘉公瑞。俱著勳烈。仍三世相國。歷五代有諱恭孫。訓鍊都正。贈領議政礪良府院君。卽公曾祖也。祖曰軼。領議政。礪原府院君。諡肅靖公。考曰之翰。贈戶曹判書礪良君。聘宜春南氏。以正德丁丑七月丁亥生公。公諱寅。字明仲。自號頤庵。十歲尙中廟第三女貞順翁主。封礪城尉。弱冠應製魁廷臣。進一階。錄原從功。又進一階。班列正卿。提調司饔院。掌享詔使克辦。明廟特進階以寵之。襲礪原勳封君。遂管儀賓,忠勳兩府事兼管尙方。以都摠管統禁旅者累。迎慰皇華于安州, 黃州。文苑之選也。甲申七月丁亥。病卒于壽進坊第。春秋六十有八。用乙酉二月己未。禮窆于楊州蘇羅山抱巳原。翁主與公同年生。而先公三年捐館舍。葬虛其右。至是同封焉。翁主以善事舅姑聞。有一男惟毅。敦寧府奉事。娶左贊成鄭大年女。生二男。曰圻。文科僉知。贈判書。曰垓。縣監。判書有二男四女。男長卽刑部君。次榮業察訪。女長僉正李幼淸。次參判鄭廣成。次僉正柳𦨙。次士人尹善言。察訪無後。公有庶出子二人。惟純護軍。惟良奉事。內外嫡庶孫曾若干人。公天資明敏。儀表端凝。嗜學如飢渴。明經講禮。以古人自期。在家庭柔聲惋容。便若孺兒。執喪踰制。幾於滅性。事繼母至孝。母亦不知其非己出也。祭祀必致其嚴而如在焉。推以友睦。周急卹難。出於至誠。窮閻僻巷。必枉駕而訪之。自持謙恭。好賢樂士。與人交不問貴賤。結以信義。有一善一長。激賞奬進。士以此多歸之。平居操履安重。動止規矩。雖服用之微。雅慕華制。冠帶出門。里閭瞻敬。性喜山水。杖屨耽討。盡域中四方之勝。搆亭于漢濱。畜名琴歌。引騷人墨客。觴詠漁釣。翛然有出塵之想。當世儒碩如退陶, 南冥, 東洲, 北窓, 栗谷, 牛溪諸先生。咸敬重之。質經疑哀禮意。多所發明。盧蘇齋欲以宗伯文衡委重於公。竟格於例而寢之。宣廟深加尊禮。多所諮訪。賜第遇災。上欲令有司營造。公力辭。嘉公之志。只錫其費。病而醫問交道。輸賵治竁。咸踰常等。至崇禎壬申。易名文端。君子稱其美而不溢云。公爲詩文。不煩繩削。自合法度。有悠然之趣。闇然之光。書放吳興。而尤工端楷。山陵之誌。宮殿之額。以至士夫碑碣之刻。皆歸於公。所著亡於兵。頤庵集僅一卷行於世。噫。公從場屋。售一藝而進。無論顯庸。其澤施何所不及。拘拘於戚畹之列。志業不少槪見。然當昌大煕洽之會。享以貴富。而歿而誦義不衰。與嚮者諸先生。竝稱於世。其奚論乎庸與施也。銘曰。
靖陵中興挽俗厖。士程以吉式是邦。而遴而儀俾釐降。折崇卑牧問彌章。詩書禮讓履以詳。厥有盛事闢奧堂。金石不泐鉤索強。聚而罔費志卽康。惟稽於理胡茫茫。猶岸不枯水成方。于三得二亦自煌。而久以徵聲流長。而怍于辭哲人藏。<끝>
樂全堂集 卷十二 / 碑銘
頤庵先生遺稿卷之十一附錄一 / 實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