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선 제124권 / 묘지(墓誌)
광정대부 첨의참리 상호군 나공 묘지명(匡靖大夫僉議參理上護軍羅公墓誌銘)
이제현(李齊賢) 撰
지정(至正) 4년 갑신(1344, 충혜왕 복위 5년) 8월 기축일에 광정대부 첨의 참리(匡靖大夫僉議參理) 나공(羅公)이 죽으니, 왕이 유사에게 명하여 조상하고, 양절(良節)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그해 11월 경인일에 예로써 송림현(松林縣) 약사원(藥師院) 북쪽 둔덕에 장사 지냈다.
공의 휘는 익희(益禧)요, 본관은 나주(羅州)인데 삼한공신 대광(三韓功臣大匡) 휘 총례(聰禮)의 11대 손이다. 증조의 휘는 효전(孝全)인데 원나라에서 증직(贈職)한 태중대부 예부상서 지도성사(太中大夫禮部尙書知都省事)이며, 조부의 휘는 득황(得璜)이며, 원나라 벼슬로 금자 광록대부 수사공상서 좌복야 판호부사(金紫光祿大夫守司空尙書左僕射判戶部事)로 치사(致仕)하였다.
원나라 벼슬로 회원대장군 관군상만호 봉익대부 지밀직사사 군부판서 상장군 세자원빈(懷遠大將軍管軍上萬戶奉翊大夫知密直司事軍簿判書上將軍世子元賓) 휘 유(裕)는 공의 아버지가 되고, 원나라 벼슬로 은청광록대부 동지추밀원사 병부상서 상장군(銀靑光祿大夫同知樞密院事兵部尙書上將軍)을 지낸 조씨(趙氏) 휘 문주(文柱)의 딸 □□군부인(郡夫人)은 공의 어머니가 된다.
한림직학사 조열대부 삼중대광 판도첨의사사(翰林直學士朝列大夫三重大匡判都僉議司事)를 지낸 묵헌 선생(黙軒先生) 민지(閔漬)의 딸에게 장가들어 남녀 2명을 낳았다. 딸은 봉익대부 동지 밀직사사 상호군(奉翊大夫同知密直司事上護軍) 최문도(崔文度)에게 출가하였고, 아들은 영걸하여 지금 봉익대부 밀직부사 상호군(奉翊大夫密直副使上護軍)이다.
공은 본래 장수집 아들로서 어려서부터 무예를 익혔고 독서는 하지 않았으나, 천성이 개결하고 절의를 사모하며 남들과 다투는 일을 부끄러워하였다. 모부인(母夫人)이 가산을 나눌 적에 40명이나 되는 노비를 특별히 물려주니, 공이 사양한다면서 말하기를, “외아들로서 다섯 딸 가운데 거하여 어찌 차마 구차스럽게 많이 얻어 자식 많이 두신 부모님이 어지신 데에 누가 되게 하겠습니까.” 하니, 부인이 옳게 여겨 허락하였다.
나이 17세에 황조(皇朝)의 선명(宣命)을 받아 금부(金符)를 차고 상천호 회원(上千戶懷遠)이 되었다. 나중에 작위를 이어받아 관군 상만호(管軍上萬戶)가 되었는데, 계품은 호덕장군(虎德將軍)으로 삼주호부(三珠虎符)를 찼다. 충렬왕(忠烈王) 말년에 신호위 호군(神虎衛護軍)으로 삼아 금자어 첨의중사(金紫魚僉議中事)를 내려주었다.
덕릉이 구폐(舊弊)를 혁신하면서 조정의 신하들을 모두 파직시켜 쫓아내면서도 홀로 낭관 지위에 있는 공만은 머물러 있도록 하였다. 그때는 임금의 명이 한번 내리면 백관이 시키는 대로 거행하고 혹시라도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는데, 공은 법을 지켜 위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봉박(封駮)하는 일이 많으니, 높은 지위에서 권세 있는 자들이 곁눈질로 밉게 여기고 혹 위태로운 말로 흔들었으나 요동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낙직된 지 10년만에 바야흐로 검교 상호군(檢校上護軍)이 되고, 7년만에 감문위 상호군(監門衛上護軍)으로 옮겼다가 천우위 겸중문사(千牛衛兼中門使)로 전직하고, 또 좌상시(左常侍)로 바뀌었으며, 세 번 전직하여 광정대부 상의평리(匡靖大夫商議評理)가 되었고, 금성군(錦城君)에 봉하였다.
나이 57세에 아들에게 작위를 물려주고, 한가히 집에 있은 지 또한 17년이 되었다. 항상 민생의 고락과 인재를 쓰고 버리는 일을 생각하면서, 뒷짐을 지고 찡그린 얼굴로 혼자서 정원을 다니었는데 남모르는 근심이 있는 듯하였다. 일찍이 계림(鷄林) 부윤을 한 번 지냈고, 합포진장(合浦鎭將)을 세 번 하였는데, 청렴하고 부지런하며 사랑하고 은혜로워 남쪽 지방의 사람들은 지금까지 공의 공덕을 칭찬하고 있다.
지금 임금이 이어 정사하자 다시 기용하여 첨의참리(僉議參理)로 삼으니 세상에서 말하는 5재상이다. □얼굴이 매우 야위고 귀가 자못 어두웠으나, 일에 임하면 강개하여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루는 판삼사사(判三司事) 이제현(李齊賢)에게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어려서 정사를 재상에게 맡겼는데, 저 자격 없는 자들이 지난 날 잘못을 경계하지 못하니, 나는 책임을 지고 물러나서 함께 여러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자가 되지 않으려고 하는데, 공은 어떻게 생각하오?” 하니, 제현은 말하기를, “내가 전에 두세 가지 계책으로 집정하는 자를 효유하였으나, 시행을 보지 못하여 항상 부끄러워하면서도 용단성있게 물러나지 못하였으니, 감히 공의 말에 좇지 않겠소.” 하였다.
그후 10일이 되어 공이 병으로 물러나겠다고 한다는 말을 듣고, 혼자 생각으로는 전일의 계획을 수행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아, 어찌 마침내 일어나지 못할 줄 알았는가. 급히 가서 조곡(弔哭)하고 물러나왔는데, 아들과 사위들이 잇달아 나의 집에 와서 변변치 못한 글을 청하니, 장차 돌에 새겨 광중에 넣으려 하는 것이다.
의리에 사양할 수가 없어서 부탁을 받아들여 명문을 짓고, 명일에 상서하여 관직을 사면하니, 죽고 사는 데에서 공의 말을 저버리지 않으려 함이다. 명문에,
관장되어 은혜롭고 / 爲官惠慈
장수되어 청렴이라 / 爲將廉恥
다만 의리를 구했을 뿐 / 惟義之求
권리에 겁내지 않았도다 / 不怵勢利
타고난 자질 능하여서 / 由稟受能
배우지 않고도 잘 이루었으니 / 匪學以致
활촉 끼고 깃 달았다면 / 鏃而羽之
그 행적 여기에만 그쳤으리 / 入不此止
보잘것 없는 내가 / 顧子何人
늦게 욕되이 지기가 되었으니 / 晚辱知己
감히 언약 저버리고 / 敢負一言
공이 죽었다고 말할 것인가 / 而謂公死
하였다. <끝>
[주01] 봉박(封駁) : 고려 시대의 내사(內史)ㆍ문하(門下) 성(省)은 왕의 조서 칙명을 심의 공포하는 일도 맡았다. 따라서 임금의 조서 칙
명이라도 그 내용이 적당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그대로 공포하지 않고 다시 봉하여 임금에게로 올리는데, 이것을 봉박(封駁)이라고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용국 (역) |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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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匡靖大夫僉議參理上護軍羅公墓誌銘
至正四年甲申八月己丑。匡靖大夫僉議參理羅公卒。王命有司弔誄。贈謚曰良節。其年十一月庚寅。以禮葬于松林縣藥師院之北原。公諱益禧。籍貫羅州。三韓功臣大匡諱聦禮十一世孫。曾祖諱孝全。皇贈太中大夫禮部尙書知都省事。祖諱得璜。皇金紫光祿大夫守司空尙書左僕射判戶部事致仕。皇懷遠大將軍管軍上萬戶奉翊大夫知密直司事軍簿判書上將軍世子元賓諱裕。爲公考。皇銀靑光祿大夫同知樞密院事兵部尙書上將軍趙諱文柱之女。▣▣郡夫人。爲公妣。娶翰林直學士朝列大夫三重大匡判都僉議司事默軒先生閔諱漬之女。生男女二人。女適奉翊大夫同知密直司事上護軍崔文度。男曰英傑。今爲奉翊大夫密直副使上護軍。公自以將家子。幼習虎藝。不暇讀書。而天性耿介。慕節義。恥與人爭訟。母夫人分家産。別遺臧獲爲口四十。公辭焉曰。以一男居五女之中。烏忍苟得其羸。以累鳲鳩之仁。夫人義而許之。年十七。受皇朝宣命。帶金符。爲上千戶。懷遠卒後襲爵爲管軍上萬戶。階虎德將軍。帶三珠虎符。忠烈王季年。爲神虎衛護軍。賜金紫魚僉議中事。德陵痛革舊弊。朝士一切罷黜。於郞官獨留公。時命令一下。百司奉行。若恐不及。公守法。多所封駮。權貴側目。或撼以危言不爲動。落職十年。方爲檢校上護軍。七年遷監門衛上護軍。轉千牛衛兼中門使換左常侍。三遷爲匡靖大夫商議評理封錦城君。年五十七。授其子世爵。閑居又十七年。每念民生休戚,人材用捨。負手慼鼻。獨行園庭。若有隱憂。甞一尹雞林。三鎭合浦。廉勤慈惠。南公至今稱頌之。今王嗣政。復起爲僉議參理。世所謂五宰者。▣貌甚癯。耳頗重聽。然臨事慷慨不小懈。一日語判三司事李齊賢曰。吾君幼。委任宰相。彼負且乘者。不誡覆轍。吾其引避。毋俱爲十手所指。公當云何。齊賢謝曰。僕前以二三策曉執政者。未見施行。常愧不能勇去。敢不惟公言是從。後十許日。聞公告以病。意謂欲遂前計。嗚呼。烏知其竟不起也。亟往弔哭而退。子與壻。繼而踵門。乞鄙文。將鑱石納竁。義不可辭。受而爲銘。明日上書自免。庶幾不負公言於存歿也。其銘曰。
爲官惠慈。爲將廉恥。惟義之求。不怵勢利。由禀受能。匪學以致。鏃而羽之。入不此止。顧子何人。晚辱知己。敢負一言。而謂公死。<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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