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한번은 로마의 지하에 건립되어 있는 카타콤을 방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퀴퀴한 냄새와 함께 계단을 따라 점점 더 깊이 내려 가면서 저는 그 장관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디로 인도하는지 모를 정도로 갈래 갈래로 흩어져 있는 통로들, 그리고 벽마다에 안치되어 있는 수많은 시체를 담은 관들, 정말 놀라운 광경이었습니다. 그 곳 벽들에 새겨져 있는 그림들과 글씨들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의 아침을 얼마나 사모하고 있었는지를 역력하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저희를 인도하던 안내자가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카타콤에 숨어있던 자들이 핍박을 피하여 숨은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 당시에 핍박은 없었습니다!"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그러한 말을 할 수가 있을까요? 그렇게 분명하고도 엄청난 증거들을 보여주는 안내의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런 말을 하다니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었습니다. 하기야 2차 세계대전 당시에 독일이 유태인들을 핍박한 일이 없었다는 엉뚱한 이론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칼하게도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과거 기독교 역사에서 핍박이 전혀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핍박이 있었다는 것은 진리를 위한 투쟁이 있었다는 뜻이겠지요. 그렇다면 언제, 왜, 무엇 때문에 투쟁이 있었는지를 알 필요가 생기게 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과거의 역사를 올바로 알지 못하고서는 밝은 미래를 계획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역사를 올바로 알고 나서야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의 사명을 드디어 이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번 호는 여러분들이 과거 기독교회의 역사를 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 변천사를 통하여 우리가 현재 어디에 와 있는지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한 사명감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 드릴 것입니다.
왜 종교 개혁이 필요한가? (현대 종교 개혁 -서론)
진화론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 지구는 작은 미생물에서부터 차차 진화되어 왔으며, 그 변화하는 힘이 그 물체 자체에 있다고.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창조론은 그 정반대이다. 성경은 이 지구가 하나님의 계획적인 디자인에 의하여 창조되었으며 변화의 힘이 피조물인 그 물체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신 하나님께만 있다고 말하고 있다.
종교의 흐름도 마찬가지이다. 종교는 인간들의 구미나 변화에 맞추어 진화되어 나가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시작도 하나님의 능력이요, 그 흐름도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보호되어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기초는 성경이요,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것이다. 이 신앙의 기초는 흔들릴 수도 없고 변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교회 안에서, 신앙의 기초가 되는 성경의 가르침들이 흔들리고 변조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교리들이나 신앙의 행습들을 인간의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는 식의 종교적 진화론들이 교회 속으로 스며들어 왔다. 이렇게 교회의 가르침들이 성경의 원래 가르침으로부터 떠나가는 일이 너무나 오랜 세월을 두고 조금씩 진행되어 왔기 때문에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사실조차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그럴 때마다 교회 안에서는 원래의 신앙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는 종교개혁의 목소리들이 있어 왔다. 물론 그럴 때마다 반대와 핍박을 받아 왔고 많은 경우에 극단으로 몰려 외면당했다.
진리는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편이다.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여 구원 얻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진리를 외면하고 편리한 다른 길로 갈 수는 없는 것이다. 십자가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리를 사랑하며 그 분의 뜻대로 살도록 붙들어 매어 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다.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살후 2:10).
현대 교회는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원래의 진리들과 그 신앙 사상에서 멀리 떠나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그 가르침은, 현대 교회들의 성장 과정들과 또한 인간의 구미에 맞게 탈바꿈한 가르침들과 너무나 달라서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도대체 우리의 선구자들이 우리에게 그 진리들을 전수하여 주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과 핍박들을 감수해 왔는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진리의 전사들 중세기의 종교 암흑 시대 동안, 이 세상은 캄캄한 어두움으로 뒤덮여 있었지만 진리의 빛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어느 시대든지 하나님의 증인들, 곧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의 중보자이심을 확실히 믿고, 성경을 인생의 유일한 지침으로 삼고, 하나님의 진리를 구별하여 지키는 증인들이 있었다. 세상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는지에 대하여 후세의 사람들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이단자로 낙인이 찍히고, 그들의 동기는 비난을 받고, 그들의 품성은 중상을 받고, 그들의 저서들은 압수당하고 오전되고 삭제당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핍박에 굴하지 않고 굳게 서서 다음 세대에게 그들리 피로써 지킨 순결한 진리와 믿음을 물려 주었다.
불란서의 동남쪽, 이태리의 북서쪽에 자리잡은 알프스 산맥의 한 줄기에 피드몬트라는 골짜기가 있다. 그곳은 중세기 동안 극심했던 핍박들을 피하여 도망해 살았던 왈덴스인들의 본거지로 유명하다. 서부 유럽에 위치한 로마 교회의 권위가 득세하자 성경대로 살려고 하던 사람들에게 핍박이 시작되었다. 교회는 하나님 대신 인간을 교회의 머리로 삼고 정치와 타협하여 교회의 가르침은 물론 그 신앙의 행습들을 바꾸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에 반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소아시아 지방인 알미니아, 영국 쪽의 스코트랜드와 아일랜드, 또는 아프리카의 이다오피아나 인도 남부등으로 피신하여 살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에 알프스 산맥 피드몬트 골짜기에 모여 살게 된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우리는 왈덴스인들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중세기의 종교 핍박 당시에 성경의 가르침을 고수하여온 자들 중에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필자가 그곳을 직접 찾아 방문하였을 때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 그들이 운영하던 작은 신학교 건물이 지금도 잔재해 있는데, 돌들로 지어진 작은 방 중앙에 큰 돌로 고여진 한 책상이 있고 그 돌 책상 위에는 하나의 성경만이 쓸쓸하게 놓여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성경의 가르침만이 그들의 신앙과 행실의 기초가 되었다. 그들은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하는 그 당시의 교회의 명령에 불복하며 몰래 성경들을 복사하여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들을 과감하게 행하였다. 목사들과 청년들은 복사한 쪽 성경들을 품 속에 감추어 마치 행상들인 것처럼 가장하여 여행하면서 진리를 나누어 주었다. 책자들을 감추어 다니느라고 그들은 항상 품이 넓은 옷만 골라 입을 수 밖에 없었다. 그 시대의 유행하는 옷들을 절대로 입을 수가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 당시 사람들은 교회가 명령하는 구원의 조건들을 따라 행하느라고 마음의 평화를 잊은 채 살아 가고 있었다. 로마 교회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교회의 권한에 두셨다고 가르쳤고 교회는 그 구원을 나누어 주기 위한 방편들을 제공한다고 설득하였다. 그래서 교인들은 먼 성지들을 순례하는 일이나 오랫동안 기도하는 로자리 기도들, 신부들에게 죄를 고하는 고해성사, 그리고 자기를 학대하는 고행들, 많은 금식들과 금욕의 생활들로 지쳐있었다. 그러한 자들에게 왈덴스인들이 전해주는 성경의 복음들은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십자가의 은혜의 복음을 듣고, 고해와 행함으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소식에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였다. 이렇게 나누어진 진리들과 쪽 성경들은 유럽 전역에 퍼져 나가게 되었으며 바로 이러한 숨은 활동들이 드디어 종교 개혁을 낳게 된 것이다. 왈덴스인들이 뿌린 씨앗이 종교개혁으로 열매를 맺게 된 것이었다.
왈덴스인들이 당한 핍박은 끔찍한 것들이었다. 필자가 그곳 피드몬트 골짜기를 오를 때에 한 큰 바위 밑에 있는 적은 입구를 보게 되었다. 그것은 그 바위 속에 있는 교회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그 입구를 거의 엎드리다시피 하여 기어 들어가 보니 그 속에 꽤 넓은 방이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 숨어 예배를 드렸다. 한번은 로마 교회가 보낸 십자군들이 와서 그 입구에 불을 놓았다. 연기 때문에 견디지 못한 왈덴스인들이 어린아이들과 여자, 노약자들과 함께 바위로부터 기어 나올 때에 십자군들은 몽둥이로 그들의 머리를 내리쳐 무수한 피를 흘렸다는 것이다. 겨울철이라 그 주위에 내린 눈이 그 피로 붉게 물들었었다는 사실이 역사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어린아이들은 침묵을 지키는 철저한 훈련들을 받았다. 그들이 입을 열면 온 가족 아니 온 동네가 몰살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군대에게 잡혔던 한 왈덴스인 아이가 매를 맞아 죽어가면서도 그 입을 열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그들은 사고 파는 권리를 빼앗긴 채 살아가야만 하였다. 그들의 별명은 유리하는 자들이었다. 진리 때문에 집과 재산들을 다 몰수 당하고 유리할 수 밖에 없었다. 진리를 고수하기 위하여 그들은 이 세상의 평안을 포기한 것이다.
이와 같이 왈덴스인들은 마틴 루터가 나타나기 수세기 전에 하나님을 위하여 증거하였다. 여러 나라로 흩어진 그들은 위클립 시대에 시작된 종교 개혁의 씨를 뿌렸는데, 그 운동은 루터 시대에 이르러 한층 더 깊고 넓게 자라났으며,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계 1:9) 모든 고난을 즐거움으로 받고자 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마지막 시대까지 계속하여 진행될 것이다.
순교자들의 외침 중세기의 종교 암흑시대 동안에만 무려 5천만내지 1억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순교의 길을 걸었다고 역사는 증거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진리들을 위하여 우리의 선조들이 얼마나 많은 고통과 시련들을 감수하여 왔는지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수많은 순교자들, 고문실과 감옥 속에서 죽어 간 많은 종교 개혁자들이 무덤 속에서 우리를 향하여 외치고 있다. 당신은 성경의 진리를 보전하기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현대 교회는 엄청난 타협의 물결 속에 살아가고 있다. 어떤 때에는 무엇이 진리이며 무엇이 오류인지조차 구분하기가 힘든 어두운 상황들이 전개된다. 요즘처럼 이렇게 교회가 발전했던 시대는 과거에 없었다. 그러나 그 기반이 진리의 반석이 아니라 타협의 모래 위라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다.
진리는 구원의 방법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방주를 통하여 홍수에서 구원하셨다. 성경 진리는 이 세상의 죄악의 물결과 마귀의 속임수에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 방주와 같은 것이다. 이 성경 진리를 타협시켜 교회를 타락시키는 것이 사단의 계획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끊임없이 보호되고 보존되어야 한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을 부르셔서 종교 개혁을 시도해 오셨다. 그 사업은 모든 시대마다 점진되어 왔다. 이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확실하고 분명한 종교 개혁이 필요한 시기이다. 종교개혁 사업은 아직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이번 호는 여러분들에게 기독교회 역사의 흐름을 보여드림으로 우리가 현재 어디까지 흘러 떠내려와 있는지 그 좌표를 볼 수 있도록 도와 드리기 위하여 편집되었다. 독자들의 마음 속에 빛 되신 성령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기도하는 바이다.
영적 암흑이 칠흙같던 12세기, 참다운 구원의 길을 제시해야 할 교회의 가르침이 중세기 로마 교회의 배도로 심각하게 오염되어, 더 이상 구원의 신앙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여기저기서 생명의 빵과 물을 구하는 애타는 영혼의 절규가 울려 퍼졌으며, 진리를 갈급하는 영혼들이 개혁의 선봉에 서기 시작하였다.
1. 개혁의 선두주자, 왈덴스인들 (종교 개혁의 밑거름)
언제나 먼저 목마르고 굶주린 것은 평신도였다. "교황권의 대낮은 세계의 한 밤중이었다" 는 역사가 윌리의 표현처럼 로마 천주교회의 전성기였던 12세기는 참으로 영적인 한 밤중이었다. 마침내 1170년경 프랑스 남부로부터 그들의 지도자의 이름을 따라 왈덴스인으로 불리는 일단의 평신도들이 일어나, (1) 로마 교회의 전통을 거부하고 순수한 성서신앙을 제창했으며, (2) 연옥교리를 부정하고 죽은 사람을 위한 기도를 반대했으며, (3) 성만찬의 빵과 포도즙이 사제의 기도로 실제적인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형한다는 화체설을 부인했다. (4) 로마 천주 교회는 결코 잘못할 수가 없다는 무류설을 반대하고 평신도의 전도할 권리를 요청했다. (5) 이들 가운데 성서적 안식일인 제칠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무리도 일어났음이 역사가들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험준한 알프스 골짜기를 피난처로 삼고 행상을 하며 전도한 이들은 로마 천주교회의 혹독한 핍박으로 수없는 희생자를 내며 유럽의 22개국으로 번져나갔다. 왈덴스인 교회는 아직도 이태리에 남아있는 최초의 개신교이다.
2. 종교 개혁의 새벽별, 영국의 위클립 (사데 교회 - 종교 개혁 시대의 시작) 왈덴스인들이 외롭게 이어 온 진리의 빛은 위클립에게 옮겨졌다. 왈덴스인의 개혁이 영국에까지 이른 무렵, 14세기 유럽의 최고 명문인 옥스포드 대학의 가장 유능한 학자요 국왕의 궁중 사제였던 위클립이 일어나 왈덴스인의 가르침을 신학적으로 정립하여 선포했다. 그는 (1) 교회의 유일한 머리는 그리스도시며, 교황은 "적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선언했다. (2) 연옥을 부정하고 성자 예배와 유물 숭배를 반대했으며, (3) 화체설을 공박했으며, (4) 고해성사와 교회의 무류를 부정하고, (5) 구원은 인간 공덕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받는다고 가르쳤다. (6) 1382년, 금서였던 성경을 라틴어에서 영어로 번역하여 백성들의 영적 안목을 회복시켰으며, (7) 왈덴스인의 본을 따라 롤라드로 알려진 평신도들을 훈련시켜 전국을 순회하며 전도하게 했다.
3. 종교 개혁의 큰 별, 마틴 루터와 루터교
성경에는 전혀 근거가 없는 연옥 교리를 소개하여 속죄의 필요를 역설한 중세 천주 교회는 고해성사와 함께 고행을 강조하며 면죄부로 자신의 죄의 형벌을 감면할 뿐 아니라, 연옥에 있는 다른 사람의 영혼을 신속히 천국에 보낼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로마 천주교회의 배도와 잘못된 가르침은 이미 요한 허스가 일으킨 개혁에 자극을 받아, 행함이 아닌 믿음에 의한 구원을 체험한 젊은 신부요 신학 교수였던 마틴 루터로 하여금 진리의 횃불을 높이 들게 만들었다. 루터는 그 동안 자신의 신앙적 양심을 괴롭혀 온 로마 천주 교회의 문제점을 폭로하는 95개조 논제를 1517년 10월 31일 정오에 위턴베르그 성당문에 게시하였는데, 이로써 세계 역사를 바꾼 대 종교 개혁의 막이 올랐다.
마틴 루터는 즉시 교황권에 의해서 이단으로 고발되었으며, 신성 로마제국의 국회로 소환되어 1521년 4월 18일 심문을 받고 그의 주장을 포기하도록 요청받았으나 이를 담대히 거부함으로써 종교개혁의 분수령을 넘었다. 로마 가톨릭교회와 신성 로마제국에 잡히면 화형에 처해지는 이단의 선고를 받은 루터의 대표적 가르침은, (1) 신앙의 최종 권위는 로마 교회의 전통이나 권위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성경"에 있으며, (2)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사람의 선행이나 로마교회의 사제가 나누어주는 공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속죄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의 의며, (3) 구원은 그러한 믿음을 통해 누리는 "오직 은혜"로 주신 선물이며, (4) 또한 신자들은 신부나 사제를 통하지 않고도 직접 하나님께 나갈 수 있다는 만인 사제직을 제창했고, (5) 연옥 교리와 함께 그것을 뒷받침하는 영혼 불멸의 가르침을 부정하고 조건적 불멸을 가르쳐 부활신앙을 강조했다. "영혼이 불멸한다는 신조는 터무니없는 다른 견해들과 함께 로마 교황권의 교리집 쓰레기 더미에서 발견되어 진다." The problem of immortality, p256 , 1520년 11월 29일에 발표한 41개 신조. 루터의 개혁은 개신교 신앙의 기초를 놓으며 후에 장로 교회의 주춧돌을 놓은 요한 칼빈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4. 재침례파가 비춘 보다 밝은 빛
독일에서 루터가 개혁을 시도하는 동안 스위스에서는 독일보다 더 철저한 개혁이 별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경건한 로마 가톨릭의 사제요, 학자며 애국자였던 쯔윙글리는 성경을 연구한 결과로 얻은 확신에 따라, 로마 가톨릭의 이교적인 예배의식과 면죄부 제도를 전면 부정하고, 극도에 달한 성직자들의 도덕적 퇴폐를 공박하는 대담한 개혁을 부르짖었다. 그리고 화체설을 반대하고, 성만찬의 빵과 포도즙은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기념이라고 가르쳤다.
루터나 쯔윙글리보다 더 철저한 개혁을 원하는 일단의 개혁자들이 스위스의 쮜리히에서 일어났다. 재침례파, 혹은 "형제들"로도 알려진 이들은, (1) 신앙의 유일한 근거로 깊은 성경연구를 강조하고, (2) 국가와 교회의 철저한 분리를 주장했으며, (3) 죄를 깨닫지 못하고 회개할 수도 없는 어린 아이들에게 베푸는 로마가톨릭의 의식인 유아세례가 비성경적인 것이므로 무효라고 선언하고, 성인 신자에게 이를 다시 베풀었때문에 재침례파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4)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죽음을 수면과 같은 무의식 상태라고 가르치고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속한 재림을 강조하는 신앙을 받아 들였다. (5) 교회로부터 각종 성상들과 이교적 의식들을 일체 제거할 것을 주장하고, (6)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존중하고 맹서를 금했으며, (7) 전쟁을 반대하고 무기 사용을 금했으며, 핍박을 받을지라도 대항하거나 원수를 갚지 않았으며, (8) 모든 교회는 신자들이 자율적으로 믿고 다스려나가는 회중제도를 택했다.
5. 메노나이트가 발전시킨 진리의 등대 빛
핍박을 받은 많은 재침례파 신자들은 홀랜드로 도피했는데, 로마가톨릭 사제였던 메노 시몬스가 카톨릭의 교리 중 하나인 화체설에 의문을 품고 성경을 연구하던 중 가톨릭 신앙의 오류를 깨닫고 1536년 재침례파로 개종하여 그들의 유능한 지도자가 되었다. 재침례파의 모든 가르침과 함께 요한복음 13장의 교훈에 따라 성만찬 전에 서로 발을 씻기는 세족예식도 시작했다. 지도자의 이름을 따라 불리는 메노나이트 재침례파 신자들은 당시에 알려진 가장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었으나 가톨릭 뿐만 아니라 그 당시 미처 그들을 신앙을이해치 못한 개신교도들로부터 혹독한 핍박을 받아 많은 순교자를 냈으나 때마침 열린 신대륙으로 건너가 1683년 이후부터 신앙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메노나이트와 같은 계통인 퀘이커 교도들과 함께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옹호하고, 비무장 평화주의, 의료봉사를 통해 미국의 인권옹호와 민주사회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6. 종교 개혁의 총아, 요한 칼빈과 개혁(장로) 교회
철저한 가톨릭 신봉 국가였던 프랑스는 루터의 개혁 신앙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대대적인 핍박을 시작하였다. 루터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던 20세의 젊은 청년 요한 칼빈은 핍박을 피하기 위해서 스위스로 피난하여 제네바를 중심으로 신정정치까지 베풀며 루터의 개혁과 양대 주류를 이루는 개혁을 추진시켰다. 칼빈이 강조했던 점은, (1) 신앙은 성서에 기초해야 하고 그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는 성서신앙을 강조하고, (2) 창조와 구속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하나님의 영광을 강조했다. (3) 예배 의식에서 중세 로마교회의 우상적이고 이교적인 요소를 일체 배제하여 개신교 예배의 기초를 놓았다. (4) 은총만을 치우치게 강조한 루터와는 달리 의와 성화의 표준으로 율법의 기능을 적절히 강조했다. (5) 교회행정에 있어서는 감독제도와 회중제도의 중간인 장로제도를 채택했으며, (6) 루터와 쯔윙글리보다 성만찬의 영적 의미를 한층 깊게 했다. (7) 교육을 강조하고 직업을 소명으로 가르치는 등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된다.
기본적으로 칼빈의 개혁 신앙은 루터의 사상을 계승하여 이를 체계적으로 조직하고 철저하게 규명하여 발전시킨 것으로써 종교개혁의 진전에 있어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칼빈의 개혁신앙을 따르는 교회는 유럽에서는 "개혁 교회"로 알려졌고, 영국 등 영어를 쓰는 지역에서는 "장로 교회"로 불리워지고 있다.
7. 영국 국교회의 태동
16세기 종교개혁이 유럽 대륙에서, 독일의 루터파, 스위스의 재침례파, 칼빈의 개혁교회와 같은 세 주류를 이루며 진전되고 있는 동안, 섬나라인 영국에서는 별도의 이유로 별도의 개혁이 전개되고 있었다. 14세기 옥스포드의 학자인 위클립이 일으킨 개혁의 파문은 보헤미아의 개혁자 허스를 통하여 루터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으나 막상 영국에서는 가톨릭 교회가 주도한 정치적 여건으로 개혁이 진전되지 못하였다. 독일에서 일어난 루터의 개혁사상이 영국에서 문서로 소개되자 헨리 8세는 이를 글과 힘으로 분쇄하여 천주 교회의 교황으로부터 "믿음의 옹호자"라는 칭호까지 얻었다. 그러나 헨리 8세는 교황이 자신과 스페인의 왕녀요 죽은 형의 미망인인 왕후 캐더린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자, 1534년 영국 교회를 로마카톨릭으로부터 독립시켰다. 이리하여 성공회의 모체인 영국 국교회가 탄생했으나, 머리가 바뀐 것 외에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루터파 개혁자인 대주교 크랜머는 헨리 8세와 그의 아들 에드워드 4세를 도와 칼빈의 개혁 신앙을 흡수하여 국교회를 크게 개혁해 나갔다. 그러나 헨리 8세의 가톨릭 왕후 캐더린이 낳은 딸 메리가 왕위에 오르면서 개혁은 역전되어 개혁신앙을 가진 3백명의 학자와 성직자가 화형에 처해졌고 8백여명은 대륙으로 피난했으며 1,200명의 성직자들은 직분을 빼앗겼다. 경건한 학자요 감독이었던 리들리와 라티머는 가톨릭 화체설과 이교의 제사 방식인 미사 예배 형식을 끝까지 반대한 죄로 1555년 10월 16일 화형에 처해졌다. 집행 전 두 사람이 나눈 대화는 오래 기억되고 있다. "리들리 선생, 용기를 가지고 사내답게 처신합시다. 오늘 우리는 확신하는 바 하나님의 은혜로 결코 꺼지지 않는 불을 영국에 붙이게 될 것이요."
화형이 두려워 개혁 신앙을 취소했던 크랜머 대주교도 다음 해 자신의 개혁 신앙을 재천명한 뒤 화형주에 올라, "교황은 그리스도의 적이요, 그의 거짓 교리와 함께 적 그리스도로서 그를 거절한다"고 선언한 다음, 지난 날 개혁신앙 포기를 자술했던 오른 손을 먼저 불 속에 넣어 태우면서, "이 손이 범죄하였도다"라고 부르짖으며 불꽃에 사루어졌다.
이러한 뼈저린 희생을 치루며 지켜온 한가닥 한가닥 개혁 신앙의 귀중함을 망각하고, 성서적으로 명백한 오류임을 깨닫고도 개혁의 의지를 상실한 채, 신앙적 양심에 아무 부담도 느끼지 않고, 개혁을 위한 어떠한 희생도 원치 않는 오늘날 대부분의 개신교인들은 진정한 종교개혁의 후예들인가? 오늘날 누가 과연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진리의 맥을 이어 가기 위해 일어설 것인가?
8. 칼빈주의 개혁 신앙의 진수, 청교도
1558년에 즉위한 메리 여왕의 이복 동생 엘리자벳 여왕은, 자신을 합법적인 후사로 인정치 않는 교황권에 맞서 살아남기 위하여 정치적 이유로 개혁 신앙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정치적 분위기 하에서 지난 날 대륙으로 피신했던 개혁자들이 대부분 칼빈주의 개혁신앙을 가지고 속속 영국으로 귀국하였다. 카톨릭 신앙에 칼빈과 루터의 개혁신앙을 혼합한 국교회 신앙에 만족하지 않고, 이를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철저히 개혁하여 순결하게 하려는 칼빈주의 청교도들이 이들로부터 일어났다. 1648년 칼빈주의 개혁신앙의 헌장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구성을 주도한 것도 청교도들이었다. 영국에서 진리의 맥은 청교도들이 이어갔다.
그들은 이교적인 예배의식, 사제들의 복장,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각종 제일들, 사제와 신부의 면죄 행위, 십자가 사용, 대부모 제도의 폐지와 함께 성일로 간주된 일요일의 철저한 준수 등을 요구했다. 그들은 교황 대신 교회의 머리가 된 국왕이 감독들을 앞세워 교회를 다스리는 성공회의 감독제도를 반대했다.
9. 청교도 신앙의 진수, 회중교회
영국의 국왕이 머리로 남아있는 영국 국교회가 완전한 개혁을 받아들일 전망이 어두워지자, 영국 국교회를 떠나 완전한 분리를 원하는 보다 철저한 청교도들이 1581년 캠브리지 출신의 지도자 브라운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영국 국교회로부터 "분리주의자들"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는데, 이들 청교도들은 국왕이 머리가 된 국교회를 부정하고, 여러가지 속박을 가져오는 칼빈의 장로제도도 배제하고,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 언약으로 연합된 회중이 자율적으로 목사 등 지도자들을 선출하고, 성경에 의하여 계발된 신앙양심의 판단에 따라 믿음을 행사하도록 촉구했다. 이리하여 칼빈주의 청교도 신앙의 진수에서 최초의 회중 교회가 탄생한 것이다.
10. 회중 교회의 장자, 침례 교회
엘리자벳 여왕 이후의 영국 왕들도 국교주의를 고집하며 분리주의 회중파 청교도들[회중교]에 대한 핍박이 계속되자, 대부분의 신자들은 고국을 떠나 보다 나은 신앙의 자유가 있는 홀랜드로 피난했다. 당시 영국의 게인스보로에 있던 일단의 회중파 청교도들은 국교회의 목사에서 개종한 스미스 목사의 지도 아래 1608년 홀랜드의 암스텔담에 정착했다. 그들은 거기서 홀랜드의 재침례파인 메노나이트 신자들과 교제하면서 그들의 경건한 생활에 감명을 받았으며, 동시에 가톨릭의 의식인 유아세례가 비성서적임을 깨닫게 되었는데, 1609년 스미스 목사는 자신을 비롯하여 동료 헬위스 등 36명에게 침례를 줌으로써, 침례를 베풀고 회중이 교회를 다스리는 최초의 침례교회가 홀랜드에 세워졌다. 그들은 1611년 영국으로 돌아와, 1612년 영국에서는 최초로 런던에 침례교회를 세웠다. 이처럼 최초의 침례교회는 분리주의자로 불리우던 청교도들의 모임이었던 회중교회에서 시작되었다.
침례교회는 17세기 영국의 신앙 부흥과 신대륙에서의 신앙과 양심의 자유 등 개신교 신앙 정착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복음을 설교한 죄로 12년간 옥살이를 하며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 흑암과 빈곤의 대륙 인도 선교를 위해 몸을 사룬 윌리암 캐리, 신대륙 미국에 신앙과 양심의 자유의 원칙을 심어준 로저 윌리암스, 구속사적인 재림운동을 일으켜 세상을 각성시킨 윌리암 밀러 등이 모두 자랑스런 침례교인들이다.
오늘날 미국에만도 2,900만의 신자를 가진 최대의 교파인 침례교는 다른 개혁 교회들처럼 고정된 신앙고백이 없이 신자들이 계발된 신앙양심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고 확신한 바대로 살도록 권장하고 있어 새로운 진리에 대해 개방적이다. 침례교의 기본적인 교리는 일반 개신교와 같지만, 그 밖에도 (1) 유아세례와 물을 뿌리는 세례를 비성서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물에 잠기는 침례만을 인정하며, (2) 회중제도의 교회조직과 (3) 국가와 교회의 완전 분리, (4) 개인의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극도로 존중히 여기는 점들은 루터나 칼빈 등이 추진한 개혁을 더욱 진전시켰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 근원에 재침례파의 신앙이 포함되어 있음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러한 침례교의 근원으로부터 후에 종교개혁의 절정인 안식일 진리를 발견한 제칠일 침례교회가 탄생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11. 회중 교회의 장녀,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
영국 국교회 목사였다가 개종한 경건한 지도자 로빈슨 목사의 지도를 받던 일단의 회중파 청교도[회중교]들은 1609년 핍박을 피하여 홀랜드로 건너가 레이든에 정착했다. 그러나 거기서도 생활의 안정이 어려워지자 신앙의 자유를 찾아 국왕도 없고 교황도 없는 땅인 신대륙 미국으로 건너갈 결심을 하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1620년 9월 평신도 지도자 브루스터의 인도 아래 102명의 신자가 돛배인 메이플라워 호를 세내어 위험한 항로인 대서양을 건너 11월 21일 마사추세츠주의 플리머스 항에 도착했다. 그들 중 절반은 추위와 질병으로 첫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갔는데 이들이 바로 미국의 건국 조상이 된 "필그림 파아더즈"들이다. 회중교회가 신대륙에 출가시킨 위대한 맏딸이었다.
12. 청교도 운동에서 시작된 십계명의 회복
16세기 후반에 출현한 청교도들이 창조한 새 역사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들은 회중교와 침례교의 산모가 되었으며, 신대륙에 이룩한 신앙과 양심의 요람인 미국을 건설한 조상을 낳았다. 그뿐만 아니라 청교도들은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우며, "역대의 파괴된 기초"인 안식일을 다시 "수축"하는(사 58:12, 13) 역꾼이 되었다.
청교도들은 진지한 성경 연구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언약을 중시하게 되었으며, 율법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임을 이해하게 되었다(출 19:5,6). 그리고 그 언약의 내용인 십계명에 순종하는 것은 언약 유지의 수단으로서, 선택이 아니라 의무임을 깨달았다. 또한 인간의 죗된 본성은 율법(계명)을 기뻐하지 않지만(롬 7:19, 20) 성령으로 거듭난 마음은 율법(계명)에 순종함으로 속박이 아니라 참다운 자유를 누릴 수 있음도 깨달았다(약 2:12). 왜냐하면 십계명은, "애굽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출 20:2) 후에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십계명을 언약의 내용으로 이해하게 되자, 언약을 보증하는 인 곧, "표징"이 되는 안식일의 의미와 중요성을 비로소 올바르게 깨닫게 되었다(출 31:13,16,17). 청교도들은 진지한 성경연구를 통하여 마침내 칼빈의 가르침처럼, 주일 중 하루가 특별히 거룩해서가 아니라 "교회 중에서 질서를 보존함에 필요한 방도로서 그 날을 지킨다"는 해석이 성경에 어긋남을 깨달았다. 그들의 조상보다 더 밝은 빛을 가진 자손이 태어난 것이다. 이러한 확신은 청교도 지도자 바운드의 저술과 가르침에 나타나 있다. 그는 사람이 범죄하기 전인 창조시에,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주사 거룩하게 하셨"(창 2:3)다는 말씀과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출 20:10)이라고 선언된 십계명의 내용을 상기시켰다. 그는 또한, "주님과 그의 사도들이 스스로 실천함으로 그 날을 일으켜 세웠"음을 상기시키고,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도 안식일이 필요했을진대, 죄로 인하여 잃어버린 바된 세상은 더욱 더 안식일이 필요하다"고 설파했다. 그리하여 청교도들은 일요일을 칼빈의 가르침처럼 단순히 예배하는데 편리한 하루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거룩한 날로 믿고, 주일에는 각종 오락을 금하고 속된 일을 삼가는 등 성수 규정까지 마련했다. 그들의 안식일 준수는 오늘날 한국의 보수적이고 경건한 고신 계통의 장로교 신자들의 주일 성수와 흡사하다.
자신들이 깨달은 만큼의 진리를 옹호하고 실천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 청교도들은, 개신교라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계 3:1)였던 종교개혁 시대를 나타내는 "사데[교회]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몇 명"(계 3:4)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의 역사와 진리의 맥은 언제나 이 몇 명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계승된다는 사실을 다시 보게 된다. 지금 받은 빛과 진리에 충성하는 사람에게만 더 크고 온전한 빛과 진리가 주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여 16세기의 청교도들은 칼빈의 한계를 벗어나, 회중교회를 통하여 그들의 가문을 잇는 또 다른 자손인 침례교에서 17세기에 참된 제칠일 안식일을 쉽사리 싹티울 수 있도록 터전을 마련하였다.
13. 침례교회의 상속자, 제칠일 침례교회
마침내 아침이 밝아왔다. 일요일을 제칠일 안식일로 믿고 성수하는 등 받은 바 빛에 충실하며 최선껏 살아온 청교도들에게 보다 밝은 참 빛이 이르러 온 것이다. 영국 국교회를 떠나 회중파 청교도 목사로 활약하던 트래스크는 1616년 런던의 밀 야드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던 중 그를 따르던 회중 가운데 한 사람인 잭슨에게서 제칠일 안식일을 소개받고 상당수의 회중과 함께 안식일을 준수하게 되었다. 결과로 1617년 밀 야드 교회는 회중제도를 유지하며 유아세례를 부인하고 제칠일 안식일을 준수하는 최초의 제칠일 침례교가 된 것이다.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극히 존중하고, 각 사람이 성령의 인도로 계발된 양심을 따라 자유롭게 성경을 연구하고 스스로의 믿음을 지켜 나가며, 신자에게 물에 잠기는 침례를 베푸는 등 정통 침례교의 모든 신조에 충실하면서, 성경상의 제칠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제칠일 침례교야말로 침례교가 낳은 훌륭한 맏아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단으로 고발된 트래스크 목사는 혹독한 고문과 해상 감옥에서의 고통을 견딜 수 없어 신념을 굽혔으나 그의 회중은 흩어지지 않았다. 그의 아내 도로시는 16년간의 옥고를 치르면서 참으로 고결한 신앙을 지키다가 옥사하고 말았다.
역사의 기록에 남은 밀 야드 제칠일 침례교의 두번째 목사는, 영국의 세 국왕,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와 2세의 궁중 의사였던 챔블린이었다. 제3대 목사는 제임스였는데, 그는 1661년 10월 19일 안식일 설교 중에 체포되어 다음 달 26일 교수형에 처해진 뒤, 목을 잘라 장대에 꽂은 뒤, 시무하던 밀 야드 교회 뜰에 전시하여 안식일 준수의 댓가로 위협했다.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선(계 12:17) 사단의 분노가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표현된 것이다.
다음 해인 1662년 개혁 신앙 때문에 투옥되었던 영국 국교회 목사 뱀필드는 개인적인 성경연구 끝에 제칠일이 성서적인 안식일임을 깨닫고, 9년 간의 복형기간 동안 계속 전도하여, "제칠일 침례교 도르체스터 감옥교회"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출감 후 또 다시 안식일을 가르친 죄목으로 1684년 70세의 고령으로 춥고 습한 뉴게이트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14. 미국으로 이민 간 네째 계명의 빛
순교자의 죽음은 언제나 진리의 씨앗이 되어 더욱 불어나게 마련이다. 영국의 뱀필드 목사가 목회하던 교회로부터 나온 열성있는 신자인 멈포드가 일어나 안식일 기별을 가지고 1664년 미국의 로드 아일랜드로 건너갔다. 그는 그 곳에 있는 침례교에 나가며, 십계명의 불변성과 제칠일 안식일 준수를 열심히 가르친 결과 몇 명의 청교도 신자들을 이끌었다. 그러나 이 곳의 침례교회마저 그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핍박하자 1671년 12월 23일 멈포드 내외를 비롯한 7명의 신자들이 거기서 나와 신앙 공동체의 언약을 맺고 신대륙에서 첫번째가 되는 제칠일 침례교를 로드 아일랜드의 뉴포트에 세웠다. 마침내 신대륙에 안식일의 진리가 뿌리를 내린 것이다. 제칠일 침례교는 1840년대 중반에 일어난 초교파적인 재림운동의 결과로 형성된 일단의 재림신자들에게 그들이 목숨을 바쳐 수호한 안식일 진리를 전달함으로써, 안식일 계명의 빛은 계속해서 전수될 수 있었다. 이러한 등대지기들의 충성과 희생을 통하여 16세기에 일어난 미완성의 종교개혁을 마무리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마지막 시대에 이루어 질수 있게 되었다.
16세기 각국에서 일제히 일어난 종교개혁은 초반에 힘있게 전진하는 듯 했지만, 개혁자들 사이에 예배의식, 성만찬, 예정론 등과 같은 교리 문제에 이견이 나타나고, 재침례파에 대한 개신교 안에서의 자체 핍박이 가해지면서 분파주의에 기울어져 중심을 잃게 되었다. 반면 개혁의 초기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던 로마 교황권은 잠시 자성과 자책의 빛을 보였으나, 재빨리 태도를 바꾸어 반종교개혁운동의 전열을 가다듬었다. 1545년에서 1563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열린 역사적인 트렌트 종교회의에서 종교개혁의 원인이 되었던 면죄제도, 연옥, 화체설, 성자 및 유물 숭배 등 모든 교리들은 재확인되었고, 전통은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진다는 결의와 함께 상당수의 외경이 인가되었다. 그리고 이 회의에서 루터, 쯔윙글리, 칼빈 등과 같은 개혁자들은 박멸되어야 할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이러한 종교회의의 결의를 실천하도록 선택된 단체가 바로 스페인의 로욜라가 1534년 8월 15일 6명의 다른 회원과 함께 창립한 예수회(제수잇)였다. 교황과 로마 카톨릭교회를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불사하겠다는 서약으로 활동을 시작한 이들에 의하여 각처에 고등교육기관이 설립되었고 각급 지도자가 양성되었으며, 외국 선교가 펼쳐졌다. 이들에 의해서 악명 높은 종교 재판소가 다시 운영되었으며, 종교개혁으로 잃었던 지역들이 회복되었고, 개신교보다 한발 앞서 아시아, 남미, 카나다 등지에 가톨릭 신앙이 성공적으로 전파되었다. 이들은 또한 적그리스도에 대한 가짜 가르침을 조작하여 개신교회 속에 은밀히 밀어 넣는데 성공하였다. 마틴 루터를 위시한 대부분의 종교 개혁자들은 다니엘서 7장과 요한계시록 13장을 근거로 교황을 역사 속에 존재해 온 적그리스도로 지목하였다. 그러나 예수회의 두 젊은 신학자들은 적그리스도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며 미래의 어느 시점에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미래주의"를 만들어서 교황권을 적그리스도로 주목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눈을 말세에 나타나는 어떤 초인간적인 존재에게 돌리게 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개신교회가, 교황권의 반개혁운동의 일환이었던 "미래주의"에 기초한 비밀 휴거론를 받아들이고 따르고 있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비밀 휴거 문제는 월간지, 살아남는 이들 제24호를 참조하기 바람).
로마 가톨릭교회의 반종교개혁이 유럽과 신대륙, 아시아를 휩쓰는 동안 개신교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루터교의 쇠퇴와 경건운동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지 백 년이 채 못되어, 루터교는 "오직 성경"이라는 본래의 대의명분을 망각하고 새로운 빛을 거절한 채 교단이라는 담을 높이 쌓아 놓고 냉담한 형식주의에 빠져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이에 경각심을 가지고 일어난 것이 루터교 목사였던 스페너와 프랑케 교수가 독일의 할레 대학교를 중심으로 일으킨 경건주의 부흥운동이었다. 평신자 중심의 소그룹 성경연구와 기도회를 통하여 실생활의 경건을 강조하여, 각종 쾌락을 금하고 절제를 강조하며 당시의 편만한 악을 견책했다. 단순한 예배의식과 속죄의 필요를 강조하는 복음이 중심이 된 설교로 이하여 죽은 듯 했던 교회에 새 생명이 넘쳐 들어왔다. 경건주의의 중심지였던 할레대학에서 교육받고 부흥을 체험한 독일 색슨 출신의 루터교 신자 진젠돌프 백작이 이 부흥 운동의 영향을 받아서 모라비아 교회를 탄생시켰다(1727년).
루터교의 양자 - 모라비아 교회 진젠돌프 백작은 자신의 넓은 땅을 로마 가톨릭의 핍박으로 내어 쫓긴 보헤미아인들과 모라비아인들, 그리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나선 개신교도들에게 피난처로 제공했다. 1727년, 서로 주장이 다른 각 파의 신자들을 성령으로 하나가 되게 하여 형제의 연합이라 부르는 모라비아 교회를 조직했다. 처음에는 6백 명으로 시작한 이 작은 교회는 평신도 선교사를 양성하며, 그 후 150년간 2,170명의 선교사를 신대륙을 비롯하여 서인도 제도, 그린랜드 등으로 파견하여 개신교로서는 최초의 세계 선교를 시작했다. 루터교의 진수인 경건주의와 허스파 신앙의 진수인 보헤미아, 그리고 모라비아 형제회의 신앙이 진젠돌프 감독에게서 결집되어, 루터교의 양자격인 모라비아 교회가 탄생한 것이다.
모라비아 교회의 아우 - 감리교 진젠돌프 백작이 이끌어간 경건하고 능력이 넘치는 모라비아 교회가 개신교에 끼친 영적 감화는 헤아릴 수가 없다. 그 가운데 하나가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의 회심이다. 당시 옥스포드 출신의 영국 국교회 신부였던 웨슬리가 미국의 인디안을 위한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아 동생 찰스 웨슬리와 함께 대서양을 항해하던 중, 심한 풍랑을 만나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배에 함께 탔던 모라비아 평신도 선교사들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에 깊은 감명을 받았었다.
인디안 전도에 실패하고 돌아온 웨슬리는 자신의 진정한 회심을 위해 고민하던 중, 1738년 5월 24일 저녁, 런던의 올더스게이트 거리에 있는 모라비아 교회의 집회에 참석하여 마침내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마음으로 뜨겁게 체험하고 회심을 경험했다. 이리하여 성령으로 충만해진 웨슬리 형제와 친구 휫필드의 지칠 줄 모르는 헌신으로 영국은 일대 부흥을 경험했고 웨슬리 형제에 의해서 교회 역사를 바꾼 감리회(Methodist)가 조직되었다. 처음에는 모라비아 교회에 부속되었다가 1740년 최초의 자립 감리회가 런던에 형성되었다.
웨슬리가 감리회 운동을 일으켰던 18세기 초의 영국은 영적인 일대 위기를 겪고 있었다. 종교개혁의 진수였던 청교도 정신은 신대륙으로 자리를 옮기고, 영국 국교회는 생명이 없는 형식주의로 퇴화한데다가 성직자들의 퇴폐는 극에 달했다. 남아있던 장로교와 침례교는 개혁의 의지를 상실한 채 있었고,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유니테리안 신학에 잠식당하고 있었으며, 때마침 영국에서 일어나고 있던 자연신론, 곧 하나님을 인간과 역사에서 분리시켜 불필요한 존재로 만든 파멸적인 철학 사조에 휩싸여 있었다. 이것이 유럽 대륙에서는 무신론적인 계몽주의로 나타났고, 인간위주의 합리주의로 발전하여, 마침내 프랑스에서 현대 무신론이 탄생한 혁명으로 나타났는데, 이것은 후에 공산주의 혁명의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18세기의 영국을 프랑스와 같은 무신론적 혁명의 파도로 부터 구한 것은 웨슬리의 감리회 운동에 힘입은 바 크다.
웨슬리 형제가 이룩한 감리회는 대부분의 신조를 일반 기독교와 함께 하지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와 함께, (1) 성령의 역사에 의한 중생, 곧 성화와 성결(거룩한 삶)을 특히 강조한다. (2) 웨슬리의 경험과 가르침에 따라 칼빈의 절대적인 예정론을 거부하고 아르미니우스의 예지예정을 따르며 (3) 신자의 세례와 함께 유아세례도 인정하고, (4) 감독제도의 교회행정을 가진다. (5) 칼빈주의 교회들처럼 다른 신조를 가진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하는 일이 거의 없다.
● 19세기 종교개혁 ●
종교개혁의 열등아 - 프랑스 종교개혁으로 치명상을 입었던 중세 가톨릭 교회가 예수회가 주도한 반종교개혁으로 세계 각처에서 승승장구하는 동안, 개혁자들이 일으켰던 개혁신앙은 그 후손들의 나태하고 형식적 신앙 때문에 거의 죽어갔지만, 18세기 독일에서는 경건주의 부흥운동이 일어났으며 결과로 1727년 세계 선교의 문을 연 모라비아 교회가 탄생되었다. 그리고 심각한 영적 침체에 빠졌던 18세기의 영국에서 웨슬리 형제들이 일으킨 부흥운동은 1740년 감리회를 탄생시켰으며, 동 시대에 신대륙 미국에서는 대각성운동이 일어나 개신교의 일대 확장과 부흥을 초래했다.
그러나 같은 18세기에 무신론적인 합리주의에 노출된 프랑스는 영적 부흥 대신 1789년 공포와 유혈의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오히려 19세기를 휩쓴 무신론과 회의론의 요람이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와 연관하여 프랑스의 가톨릭 세력이 남 프랑스 지방의 왈덴스인들 4천여 명을 집단 학살하였으며(1545년), 1572년 8월 24일 성 바돌로메 제사의 밤에는, 화해를 모색하던 프랑스의 개신교도들인 위그노들을 속임수로 모은 뒤 빠리에서 2천명, 지방에서 2만명을 무참히 학살하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혁명 직전까지 계속된 핍박으로 인하여 대부분의 위그노들은 국외로 도피 내지 추방됨으로써, 프랑스는 깊은 영적 밤을 지나가게 되었다.
인간의 이성을 위주로 한 무신론적인 프랑스 혁명 정신을 바탕으로 한 근세의 시작인 19세기가 펼쳐지면서 1848년 칼 마르크스는 이념적 무신론인 공산주의 선언을 했고, 1859년에는 다윈이 과학적 무신론인 진화론을 발표했다. 그리고 각각 1844년 태어난 벨하우센은 성경의 영감을 부정하는 신학적 무신론인 고등비평을 내놓았으며, 니체는 철학적인 무신론인 초인주의를 소개하였다. 이들 모두는 성서 신앙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조들이었다. 바야흐로 면면이 이어온 성서 신앙은 세상과 교회 안팎으로부터 그 근본을 위협받는 일대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제가 한번은 로마의 지하에 건립되어 있는 카타콤을 방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퀴퀴한 냄새와 함께 계단을 따라 점점 더 깊이 내려 가면서 저는 그 장관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디로 인도하는지 모를 정도로 갈래 갈래로 흩어져 있는 통로들, 그리고 벽마다에 안치되어 있는 수많은 시체를 담은 관들, 정말 놀라운 광경이었습니다. 그 곳 벽들에 새겨져 있는 그림들과 글씨들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의 아침을 얼마나 사모하고 있었는지를 역력하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저희를 인도하던 안내자가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카타콤에 숨어있던 자들이 핍박을 피하여 숨은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 당시에 핍박은 없었습니다!"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그러한 말을 할 수가 있을까요? 그렇게 분명하고도 엄청난 증거들을 보여주는 안내의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런 말을 하다니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었습니다. 하기야 2차 세계대전 당시에 독일이 유태인들을 핍박한 일이 없었다는 엉뚱한 이론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칼하게도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과거 기독교 역사에서 핍박이 전혀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핍박이 있었다는 것은 진리를 위한 투쟁이 있었다는 뜻이겠지요. 그렇다면 언제, 왜, 무엇 때문에 투쟁이 있었는지를 알 필요가 생기게 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과거의 역사를 올바로 알지 못하고서는 밝은 미래를 계획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역사를 올바로 알고 나서야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의 사명을 드디어 이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번 호는 여러분들이 과거 기독교회의 역사를 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 변천사를 통하여 우리가 현재 어디에 와 있는지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한 사명감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 드릴 것입니다.
왜 종교 개혁이 필요한가? (현대 종교 개혁 -서론)
진화론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 지구는 작은 미생물에서부터 차차 진화되어 왔으며, 그 변화하는 힘이 그 물체 자체에 있다고.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창조론은 그 정반대이다. 성경은 이 지구가 하나님의 계획적인 디자인에 의하여 창조되었으며 변화의 힘이 피조물인 그 물체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신 하나님께만 있다고 말하고 있다.
종교의 흐름도 마찬가지이다. 종교는 인간들의 구미나 변화에 맞추어 진화되어 나가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시작도 하나님의 능력이요, 그 흐름도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보호되어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기초는 성경이요,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것이다. 이 신앙의 기초는 흔들릴 수도 없고 변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교회 안에서, 신앙의 기초가 되는 성경의 가르침들이 흔들리고 변조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교리들이나 신앙의 행습들을 인간의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는 식의 종교적 진화론들이 교회 속으로 스며들어 왔다. 이렇게 교회의 가르침들이 성경의 원래 가르침으로부터 떠나가는 일이 너무나 오랜 세월을 두고 조금씩 진행되어 왔기 때문에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사실조차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그럴 때마다 교회 안에서는 원래의 신앙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는 종교개혁의 목소리들이 있어 왔다. 물론 그럴 때마다 반대와 핍박을 받아 왔고 많은 경우에 극단으로 몰려 외면당했다.
진리는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편이다.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여 구원 얻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진리를 외면하고 편리한 다른 길로 갈 수는 없는 것이다. 십자가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리를 사랑하며 그 분의 뜻대로 살도록 붙들어 매어 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다.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살후 2:10).
현대 교회는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원래의 진리들과 그 신앙 사상에서 멀리 떠나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그 가르침은, 현대 교회들의 성장 과정들과 또한 인간의 구미에 맞게 탈바꿈한 가르침들과 너무나 달라서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도대체 우리의 선구자들이 우리에게 그 진리들을 전수하여 주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과 핍박들을 감수해 왔는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진리의 전사들 중세기의 종교 암흑 시대 동안, 이 세상은 캄캄한 어두움으로 뒤덮여 있었지만 진리의 빛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어느 시대든지 하나님의 증인들, 곧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의 중보자이심을 확실히 믿고, 성경을 인생의 유일한 지침으로 삼고, 하나님의 진리를 구별하여 지키는 증인들이 있었다. 세상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는지에 대하여 후세의 사람들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이단자로 낙인이 찍히고, 그들의 동기는 비난을 받고, 그들의 품성은 중상을 받고, 그들의 저서들은 압수당하고 오전되고 삭제당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핍박에 굴하지 않고 굳게 서서 다음 세대에게 그들리 피로써 지킨 순결한 진리와 믿음을 물려 주었다.
불란서의 동남쪽, 이태리의 북서쪽에 자리잡은 알프스 산맥의 한 줄기에 피드몬트라는 골짜기가 있다. 그곳은 중세기 동안 극심했던 핍박들을 피하여 도망해 살았던 왈덴스인들의 본거지로 유명하다. 서부 유럽에 위치한 로마 교회의 권위가 득세하자 성경대로 살려고 하던 사람들에게 핍박이 시작되었다. 교회는 하나님 대신 인간을 교회의 머리로 삼고 정치와 타협하여 교회의 가르침은 물론 그 신앙의 행습들을 바꾸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에 반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소아시아 지방인 알미니아, 영국 쪽의 스코트랜드와 아일랜드, 또는 아프리카의 이다오피아나 인도 남부등으로 피신하여 살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에 알프스 산맥 피드몬트 골짜기에 모여 살게 된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우리는 왈덴스인들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중세기의 종교 핍박 당시에 성경의 가르침을 고수하여온 자들 중에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필자가 그곳을 직접 찾아 방문하였을 때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 그들이 운영하던 작은 신학교 건물이 지금도 잔재해 있는데, 돌들로 지어진 작은 방 중앙에 큰 돌로 고여진 한 책상이 있고 그 돌 책상 위에는 하나의 성경만이 쓸쓸하게 놓여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성경의 가르침만이 그들의 신앙과 행실의 기초가 되었다. 그들은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하는 그 당시의 교회의 명령에 불복하며 몰래 성경들을 복사하여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들을 과감하게 행하였다. 목사들과 청년들은 복사한 쪽 성경들을 품 속에 감추어 마치 행상들인 것처럼 가장하여 여행하면서 진리를 나누어 주었다. 책자들을 감추어 다니느라고 그들은 항상 품이 넓은 옷만 골라 입을 수 밖에 없었다. 그 시대의 유행하는 옷들을 절대로 입을 수가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 당시 사람들은 교회가 명령하는 구원의 조건들을 따라 행하느라고 마음의 평화를 잊은 채 살아 가고 있었다. 로마 교회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교회의 권한에 두셨다고 가르쳤고 교회는 그 구원을 나누어 주기 위한 방편들을 제공한다고 설득하였다. 그래서 교인들은 먼 성지들을 순례하는 일이나 오랫동안 기도하는 로자리 기도들, 신부들에게 죄를 고하는 고해성사, 그리고 자기를 학대하는 고행들, 많은 금식들과 금욕의 생활들로 지쳐있었다. 그러한 자들에게 왈덴스인들이 전해주는 성경의 복음들은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십자가의 은혜의 복음을 듣고, 고해와 행함으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소식에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였다. 이렇게 나누어진 진리들과 쪽 성경들은 유럽 전역에 퍼져 나가게 되었으며 바로 이러한 숨은 활동들이 드디어 종교 개혁을 낳게 된 것이다. 왈덴스인들이 뿌린 씨앗이 종교개혁으로 열매를 맺게 된 것이었다.
왈덴스인들이 당한 핍박은 끔찍한 것들이었다. 필자가 그곳 피드몬트 골짜기를 오를 때에 한 큰 바위 밑에 있는 적은 입구를 보게 되었다. 그것은 그 바위 속에 있는 교회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그 입구를 거의 엎드리다시피 하여 기어 들어가 보니 그 속에 꽤 넓은 방이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 숨어 예배를 드렸다. 한번은 로마 교회가 보낸 십자군들이 와서 그 입구에 불을 놓았다. 연기 때문에 견디지 못한 왈덴스인들이 어린아이들과 여자, 노약자들과 함께 바위로부터 기어 나올 때에 십자군들은 몽둥이로 그들의 머리를 내리쳐 무수한 피를 흘렸다는 것이다. 겨울철이라 그 주위에 내린 눈이 그 피로 붉게 물들었었다는 사실이 역사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어린아이들은 침묵을 지키는 철저한 훈련들을 받았다. 그들이 입을 열면 온 가족 아니 온 동네가 몰살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군대에게 잡혔던 한 왈덴스인 아이가 매를 맞아 죽어가면서도 그 입을 열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그들은 사고 파는 권리를 빼앗긴 채 살아가야만 하였다. 그들의 별명은 유리하는 자들이었다. 진리 때문에 집과 재산들을 다 몰수 당하고 유리할 수 밖에 없었다. 진리를 고수하기 위하여 그들은 이 세상의 평안을 포기한 것이다.
이와 같이 왈덴스인들은 마틴 루터가 나타나기 수세기 전에 하나님을 위하여 증거하였다. 여러 나라로 흩어진 그들은 위클립 시대에 시작된 종교 개혁의 씨를 뿌렸는데, 그 운동은 루터 시대에 이르러 한층 더 깊고 넓게 자라났으며,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계 1:9) 모든 고난을 즐거움으로 받고자 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마지막 시대까지 계속하여 진행될 것이다.
순교자들의 외침 중세기의 종교 암흑시대 동안에만 무려 5천만내지 1억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순교의 길을 걸었다고 역사는 증거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진리들을 위하여 우리의 선조들이 얼마나 많은 고통과 시련들을 감수하여 왔는지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수많은 순교자들, 고문실과 감옥 속에서 죽어 간 많은 종교 개혁자들이 무덤 속에서 우리를 향하여 외치고 있다. 당신은 성경의 진리를 보전하기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현대 교회는 엄청난 타협의 물결 속에 살아가고 있다. 어떤 때에는 무엇이 진리이며 무엇이 오류인지조차 구분하기가 힘든 어두운 상황들이 전개된다. 요즘처럼 이렇게 교회가 발전했던 시대는 과거에 없었다. 그러나 그 기반이 진리의 반석이 아니라 타협의 모래 위라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다.
진리는 구원의 방법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방주를 통하여 홍수에서 구원하셨다. 성경 진리는 이 세상의 죄악의 물결과 마귀의 속임수에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 방주와 같은 것이다. 이 성경 진리를 타협시켜 교회를 타락시키는 것이 사단의 계획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끊임없이 보호되고 보존되어야 한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을 부르셔서 종교 개혁을 시도해 오셨다. 그 사업은 모든 시대마다 점진되어 왔다. 이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확실하고 분명한 종교 개혁이 필요한 시기이다. 종교개혁 사업은 아직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이번 호는 여러분들에게 기독교회 역사의 흐름을 보여드림으로 우리가 현재 어디까지 흘러 떠내려와 있는지 그 좌표를 볼 수 있도록 도와 드리기 위하여 편집되었다. 독자들의 마음 속에 빛 되신 성령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기도하는 바이다.
영적 암흑이 칠흙같던 12세기, 참다운 구원의 길을 제시해야 할 교회의 가르침이 중세기 로마 교회의 배도로 심각하게 오염되어, 더 이상 구원의 신앙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여기저기서 생명의 빵과 물을 구하는 애타는 영혼의 절규가 울려 퍼졌으며, 진리를 갈급하는 영혼들이 개혁의 선봉에 서기 시작하였다.
1. 개혁의 선두주자, 왈덴스인들 (종교 개혁의 밑거름)
언제나 먼저 목마르고 굶주린 것은 평신도였다. "교황권의 대낮은 세계의 한 밤중이었다" 는 역사가 윌리의 표현처럼 로마 천주교회의 전성기였던 12세기는 참으로 영적인 한 밤중이었다. 마침내 1170년경 프랑스 남부로부터 그들의 지도자의 이름을 따라 왈덴스인으로 불리는 일단의 평신도들이 일어나, (1) 로마 교회의 전통을 거부하고 순수한 성서신앙을 제창했으며, (2) 연옥교리를 부정하고 죽은 사람을 위한 기도를 반대했으며, (3) 성만찬의 빵과 포도즙이 사제의 기도로 실제적인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형한다는 화체설을 부인했다. (4) 로마 천주 교회는 결코 잘못할 수가 없다는 무류설을 반대하고 평신도의 전도할 권리를 요청했다. (5) 이들 가운데 성서적 안식일인 제칠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무리도 일어났음이 역사가들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험준한 알프스 골짜기를 피난처로 삼고 행상을 하며 전도한 이들은 로마 천주교회의 혹독한 핍박으로 수없는 희생자를 내며 유럽의 22개국으로 번져나갔다. 왈덴스인 교회는 아직도 이태리에 남아있는 최초의 개신교이다.
2. 종교 개혁의 새벽별, 영국의 위클립 (사데 교회 - 종교 개혁 시대의 시작) 왈덴스인들이 외롭게 이어 온 진리의 빛은 위클립에게 옮겨졌다. 왈덴스인의 개혁이 영국에까지 이른 무렵, 14세기 유럽의 최고 명문인 옥스포드 대학의 가장 유능한 학자요 국왕의 궁중 사제였던 위클립이 일어나 왈덴스인의 가르침을 신학적으로 정립하여 선포했다. 그는 (1) 교회의 유일한 머리는 그리스도시며, 교황은 "적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선언했다. (2) 연옥을 부정하고 성자 예배와 유물 숭배를 반대했으며, (3) 화체설을 공박했으며, (4) 고해성사와 교회의 무류를 부정하고, (5) 구원은 인간 공덕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받는다고 가르쳤다. (6) 1382년, 금서였던 성경을 라틴어에서 영어로 번역하여 백성들의 영적 안목을 회복시켰으며, (7) 왈덴스인의 본을 따라 롤라드로 알려진 평신도들을 훈련시켜 전국을 순회하며 전도하게 했다.
3. 종교 개혁의 큰 별, 마틴 루터와 루터교
성경에는 전혀 근거가 없는 연옥 교리를 소개하여 속죄의 필요를 역설한 중세 천주 교회는 고해성사와 함께 고행을 강조하며 면죄부로 자신의 죄의 형벌을 감면할 뿐 아니라, 연옥에 있는 다른 사람의 영혼을 신속히 천국에 보낼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로마 천주교회의 배도와 잘못된 가르침은 이미 요한 허스가 일으킨 개혁에 자극을 받아, 행함이 아닌 믿음에 의한 구원을 체험한 젊은 신부요 신학 교수였던 마틴 루터로 하여금 진리의 횃불을 높이 들게 만들었다. 루터는 그 동안 자신의 신앙적 양심을 괴롭혀 온 로마 천주 교회의 문제점을 폭로하는 95개조 논제를 1517년 10월 31일 정오에 위턴베르그 성당문에 게시하였는데, 이로써 세계 역사를 바꾼 대 종교 개혁의 막이 올랐다.
마틴 루터는 즉시 교황권에 의해서 이단으로 고발되었으며, 신성 로마제국의 국회로 소환되어 1521년 4월 18일 심문을 받고 그의 주장을 포기하도록 요청받았으나 이를 담대히 거부함으로써 종교개혁의 분수령을 넘었다. 로마 가톨릭교회와 신성 로마제국에 잡히면 화형에 처해지는 이단의 선고를 받은 루터의 대표적 가르침은, (1) 신앙의 최종 권위는 로마 교회의 전통이나 권위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성경"에 있으며, (2)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사람의 선행이나 로마교회의 사제가 나누어주는 공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속죄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의 의며, (3) 구원은 그러한 믿음을 통해 누리는 "오직 은혜"로 주신 선물이며, (4) 또한 신자들은 신부나 사제를 통하지 않고도 직접 하나님께 나갈 수 있다는 만인 사제직을 제창했고, (5) 연옥 교리와 함께 그것을 뒷받침하는 영혼 불멸의 가르침을 부정하고 조건적 불멸을 가르쳐 부활신앙을 강조했다. "영혼이 불멸한다는 신조는 터무니없는 다른 견해들과 함께 로마 교황권의 교리집 쓰레기 더미에서 발견되어 진다." The problem of immortality, p256 , 1520년 11월 29일에 발표한 41개 신조. 루터의 개혁은 개신교 신앙의 기초를 놓으며 후에 장로 교회의 주춧돌을 놓은 요한 칼빈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4. 재침례파가 비춘 보다 밝은 빛
독일에서 루터가 개혁을 시도하는 동안 스위스에서는 독일보다 더 철저한 개혁이 별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경건한 로마 가톨릭의 사제요, 학자며 애국자였던 쯔윙글리는 성경을 연구한 결과로 얻은 확신에 따라, 로마 가톨릭의 이교적인 예배의식과 면죄부 제도를 전면 부정하고, 극도에 달한 성직자들의 도덕적 퇴폐를 공박하는 대담한 개혁을 부르짖었다. 그리고 화체설을 반대하고, 성만찬의 빵과 포도즙은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기념이라고 가르쳤다.
루터나 쯔윙글리보다 더 철저한 개혁을 원하는 일단의 개혁자들이 스위스의 쮜리히에서 일어났다. 재침례파, 혹은 "형제들"로도 알려진 이들은, (1) 신앙의 유일한 근거로 깊은 성경연구를 강조하고, (2) 국가와 교회의 철저한 분리를 주장했으며, (3) 죄를 깨닫지 못하고 회개할 수도 없는 어린 아이들에게 베푸는 로마가톨릭의 의식인 유아세례가 비성경적인 것이므로 무효라고 선언하고, 성인 신자에게 이를 다시 베풀었때문에 재침례파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4)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죽음을 수면과 같은 무의식 상태라고 가르치고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속한 재림을 강조하는 신앙을 받아 들였다. (5) 교회로부터 각종 성상들과 이교적 의식들을 일체 제거할 것을 주장하고, (6)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존중하고 맹서를 금했으며, (7) 전쟁을 반대하고 무기 사용을 금했으며, 핍박을 받을지라도 대항하거나 원수를 갚지 않았으며, (8) 모든 교회는 신자들이 자율적으로 믿고 다스려나가는 회중제도를 택했다.
5. 메노나이트가 발전시킨 진리의 등대 빛
핍박을 받은 많은 재침례파 신자들은 홀랜드로 도피했는데, 로마가톨릭 사제였던 메노 시몬스가 카톨릭의 교리 중 하나인 화체설에 의문을 품고 성경을 연구하던 중 가톨릭 신앙의 오류를 깨닫고 1536년 재침례파로 개종하여 그들의 유능한 지도자가 되었다. 재침례파의 모든 가르침과 함께 요한복음 13장의 교훈에 따라 성만찬 전에 서로 발을 씻기는 세족예식도 시작했다. 지도자의 이름을 따라 불리는 메노나이트 재침례파 신자들은 당시에 알려진 가장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었으나 가톨릭 뿐만 아니라 그 당시 미처 그들을 신앙을이해치 못한 개신교도들로부터 혹독한 핍박을 받아 많은 순교자를 냈으나 때마침 열린 신대륙으로 건너가 1683년 이후부터 신앙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메노나이트와 같은 계통인 퀘이커 교도들과 함께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옹호하고, 비무장 평화주의, 의료봉사를 통해 미국의 인권옹호와 민주사회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6. 종교 개혁의 총아, 요한 칼빈과 개혁(장로) 교회
철저한 가톨릭 신봉 국가였던 프랑스는 루터의 개혁 신앙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대대적인 핍박을 시작하였다. 루터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던 20세의 젊은 청년 요한 칼빈은 핍박을 피하기 위해서 스위스로 피난하여 제네바를 중심으로 신정정치까지 베풀며 루터의 개혁과 양대 주류를 이루는 개혁을 추진시켰다. 칼빈이 강조했던 점은, (1) 신앙은 성서에 기초해야 하고 그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는 성서신앙을 강조하고, (2) 창조와 구속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하나님의 영광을 강조했다. (3) 예배 의식에서 중세 로마교회의 우상적이고 이교적인 요소를 일체 배제하여 개신교 예배의 기초를 놓았다. (4) 은총만을 치우치게 강조한 루터와는 달리 의와 성화의 표준으로 율법의 기능을 적절히 강조했다. (5) 교회행정에 있어서는 감독제도와 회중제도의 중간인 장로제도를 채택했으며, (6) 루터와 쯔윙글리보다 성만찬의 영적 의미를 한층 깊게 했다. (7) 교육을 강조하고 직업을 소명으로 가르치는 등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된다.
기본적으로 칼빈의 개혁 신앙은 루터의 사상을 계승하여 이를 체계적으로 조직하고 철저하게 규명하여 발전시킨 것으로써 종교개혁의 진전에 있어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칼빈의 개혁신앙을 따르는 교회는 유럽에서는 "개혁 교회"로 알려졌고, 영국 등 영어를 쓰는 지역에서는 "장로 교회"로 불리워지고 있다.
7. 영국 국교회의 태동
16세기 종교개혁이 유럽 대륙에서, 독일의 루터파, 스위스의 재침례파, 칼빈의 개혁교회와 같은 세 주류를 이루며 진전되고 있는 동안, 섬나라인 영국에서는 별도의 이유로 별도의 개혁이 전개되고 있었다. 14세기 옥스포드의 학자인 위클립이 일으킨 개혁의 파문은 보헤미아의 개혁자 허스를 통하여 루터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으나 막상 영국에서는 가톨릭 교회가 주도한 정치적 여건으로 개혁이 진전되지 못하였다. 독일에서 일어난 루터의 개혁사상이 영국에서 문서로 소개되자 헨리 8세는 이를 글과 힘으로 분쇄하여 천주 교회의 교황으로부터 "믿음의 옹호자"라는 칭호까지 얻었다. 그러나 헨리 8세는 교황이 자신과 스페인의 왕녀요 죽은 형의 미망인인 왕후 캐더린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자, 1534년 영국 교회를 로마카톨릭으로부터 독립시켰다. 이리하여 성공회의 모체인 영국 국교회가 탄생했으나, 머리가 바뀐 것 외에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루터파 개혁자인 대주교 크랜머는 헨리 8세와 그의 아들 에드워드 4세를 도와 칼빈의 개혁 신앙을 흡수하여 국교회를 크게 개혁해 나갔다. 그러나 헨리 8세의 가톨릭 왕후 캐더린이 낳은 딸 메리가 왕위에 오르면서 개혁은 역전되어 개혁신앙을 가진 3백명의 학자와 성직자가 화형에 처해졌고 8백여명은 대륙으로 피난했으며 1,200명의 성직자들은 직분을 빼앗겼다. 경건한 학자요 감독이었던 리들리와 라티머는 가톨릭 화체설과 이교의 제사 방식인 미사 예배 형식을 끝까지 반대한 죄로 1555년 10월 16일 화형에 처해졌다. 집행 전 두 사람이 나눈 대화는 오래 기억되고 있다. "리들리 선생, 용기를 가지고 사내답게 처신합시다. 오늘 우리는 확신하는 바 하나님의 은혜로 결코 꺼지지 않는 불을 영국에 붙이게 될 것이요."
화형이 두려워 개혁 신앙을 취소했던 크랜머 대주교도 다음 해 자신의 개혁 신앙을 재천명한 뒤 화형주에 올라, "교황은 그리스도의 적이요, 그의 거짓 교리와 함께 적 그리스도로서 그를 거절한다"고 선언한 다음, 지난 날 개혁신앙 포기를 자술했던 오른 손을 먼저 불 속에 넣어 태우면서, "이 손이 범죄하였도다"라고 부르짖으며 불꽃에 사루어졌다.
이러한 뼈저린 희생을 치루며 지켜온 한가닥 한가닥 개혁 신앙의 귀중함을 망각하고, 성서적으로 명백한 오류임을 깨닫고도 개혁의 의지를 상실한 채, 신앙적 양심에 아무 부담도 느끼지 않고, 개혁을 위한 어떠한 희생도 원치 않는 오늘날 대부분의 개신교인들은 진정한 종교개혁의 후예들인가? 오늘날 누가 과연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진리의 맥을 이어 가기 위해 일어설 것인가?
8. 칼빈주의 개혁 신앙의 진수, 청교도
1558년에 즉위한 메리 여왕의 이복 동생 엘리자벳 여왕은, 자신을 합법적인 후사로 인정치 않는 교황권에 맞서 살아남기 위하여 정치적 이유로 개혁 신앙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정치적 분위기 하에서 지난 날 대륙으로 피신했던 개혁자들이 대부분 칼빈주의 개혁신앙을 가지고 속속 영국으로 귀국하였다. 카톨릭 신앙에 칼빈과 루터의 개혁신앙을 혼합한 국교회 신앙에 만족하지 않고, 이를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철저히 개혁하여 순결하게 하려는 칼빈주의 청교도들이 이들로부터 일어났다. 1648년 칼빈주의 개혁신앙의 헌장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구성을 주도한 것도 청교도들이었다. 영국에서 진리의 맥은 청교도들이 이어갔다.
그들은 이교적인 예배의식, 사제들의 복장,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각종 제일들, 사제와 신부의 면죄 행위, 십자가 사용, 대부모 제도의 폐지와 함께 성일로 간주된 일요일의 철저한 준수 등을 요구했다. 그들은 교황 대신 교회의 머리가 된 국왕이 감독들을 앞세워 교회를 다스리는 성공회의 감독제도를 반대했다.
9. 청교도 신앙의 진수, 회중교회
영국의 국왕이 머리로 남아있는 영국 국교회가 완전한 개혁을 받아들일 전망이 어두워지자, 영국 국교회를 떠나 완전한 분리를 원하는 보다 철저한 청교도들이 1581년 캠브리지 출신의 지도자 브라운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영국 국교회로부터 "분리주의자들"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는데, 이들 청교도들은 국왕이 머리가 된 국교회를 부정하고, 여러가지 속박을 가져오는 칼빈의 장로제도도 배제하고,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 언약으로 연합된 회중이 자율적으로 목사 등 지도자들을 선출하고, 성경에 의하여 계발된 신앙양심의 판단에 따라 믿음을 행사하도록 촉구했다. 이리하여 칼빈주의 청교도 신앙의 진수에서 최초의 회중 교회가 탄생한 것이다.
10. 회중 교회의 장자, 침례 교회
엘리자벳 여왕 이후의 영국 왕들도 국교주의를 고집하며 분리주의 회중파 청교도들[회중교]에 대한 핍박이 계속되자, 대부분의 신자들은 고국을 떠나 보다 나은 신앙의 자유가 있는 홀랜드로 피난했다. 당시 영국의 게인스보로에 있던 일단의 회중파 청교도들은 국교회의 목사에서 개종한 스미스 목사의 지도 아래 1608년 홀랜드의 암스텔담에 정착했다. 그들은 거기서 홀랜드의 재침례파인 메노나이트 신자들과 교제하면서 그들의 경건한 생활에 감명을 받았으며, 동시에 가톨릭의 의식인 유아세례가 비성서적임을 깨닫게 되었는데, 1609년 스미스 목사는 자신을 비롯하여 동료 헬위스 등 36명에게 침례를 줌으로써, 침례를 베풀고 회중이 교회를 다스리는 최초의 침례교회가 홀랜드에 세워졌다. 그들은 1611년 영국으로 돌아와, 1612년 영국에서는 최초로 런던에 침례교회를 세웠다. 이처럼 최초의 침례교회는 분리주의자로 불리우던 청교도들의 모임이었던 회중교회에서 시작되었다.
침례교회는 17세기 영국의 신앙 부흥과 신대륙에서의 신앙과 양심의 자유 등 개신교 신앙 정착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복음을 설교한 죄로 12년간 옥살이를 하며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 흑암과 빈곤의 대륙 인도 선교를 위해 몸을 사룬 윌리암 캐리, 신대륙 미국에 신앙과 양심의 자유의 원칙을 심어준 로저 윌리암스, 구속사적인 재림운동을 일으켜 세상을 각성시킨 윌리암 밀러 등이 모두 자랑스런 침례교인들이다.
오늘날 미국에만도 2,900만의 신자를 가진 최대의 교파인 침례교는 다른 개혁 교회들처럼 고정된 신앙고백이 없이 신자들이 계발된 신앙양심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고 확신한 바대로 살도록 권장하고 있어 새로운 진리에 대해 개방적이다. 침례교의 기본적인 교리는 일반 개신교와 같지만, 그 밖에도 (1) 유아세례와 물을 뿌리는 세례를 비성서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물에 잠기는 침례만을 인정하며, (2) 회중제도의 교회조직과 (3) 국가와 교회의 완전 분리, (4) 개인의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극도로 존중히 여기는 점들은 루터나 칼빈 등이 추진한 개혁을 더욱 진전시켰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 근원에 재침례파의 신앙이 포함되어 있음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러한 침례교의 근원으로부터 후에 종교개혁의 절정인 안식일 진리를 발견한 제칠일 침례교회가 탄생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11. 회중 교회의 장녀,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
영국 국교회 목사였다가 개종한 경건한 지도자 로빈슨 목사의 지도를 받던 일단의 회중파 청교도[회중교]들은 1609년 핍박을 피하여 홀랜드로 건너가 레이든에 정착했다. 그러나 거기서도 생활의 안정이 어려워지자 신앙의 자유를 찾아 국왕도 없고 교황도 없는 땅인 신대륙 미국으로 건너갈 결심을 하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1620년 9월 평신도 지도자 브루스터의 인도 아래 102명의 신자가 돛배인 메이플라워 호를 세내어 위험한 항로인 대서양을 건너 11월 21일 마사추세츠주의 플리머스 항에 도착했다. 그들 중 절반은 추위와 질병으로 첫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갔는데 이들이 바로 미국의 건국 조상이 된 "필그림 파아더즈"들이다. 회중교회가 신대륙에 출가시킨 위대한 맏딸이었다.
12. 청교도 운동에서 시작된 십계명의 회복
16세기 후반에 출현한 청교도들이 창조한 새 역사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들은 회중교와 침례교의 산모가 되었으며, 신대륙에 이룩한 신앙과 양심의 요람인 미국을 건설한 조상을 낳았다. 그뿐만 아니라 청교도들은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우며, "역대의 파괴된 기초"인 안식일을 다시 "수축"하는(사 58:12, 13) 역꾼이 되었다.
청교도들은 진지한 성경 연구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언약을 중시하게 되었으며, 율법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임을 이해하게 되었다(출 19:5,6). 그리고 그 언약의 내용인 십계명에 순종하는 것은 언약 유지의 수단으로서, 선택이 아니라 의무임을 깨달았다. 또한 인간의 죗된 본성은 율법(계명)을 기뻐하지 않지만(롬 7:19, 20) 성령으로 거듭난 마음은 율법(계명)에 순종함으로 속박이 아니라 참다운 자유를 누릴 수 있음도 깨달았다(약 2:12). 왜냐하면 십계명은, "애굽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출 20:2) 후에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십계명을 언약의 내용으로 이해하게 되자, 언약을 보증하는 인 곧, "표징"이 되는 안식일의 의미와 중요성을 비로소 올바르게 깨닫게 되었다(출 31:13,16,17). 청교도들은 진지한 성경연구를 통하여 마침내 칼빈의 가르침처럼, 주일 중 하루가 특별히 거룩해서가 아니라 "교회 중에서 질서를 보존함에 필요한 방도로서 그 날을 지킨다"는 해석이 성경에 어긋남을 깨달았다. 그들의 조상보다 더 밝은 빛을 가진 자손이 태어난 것이다. 이러한 확신은 청교도 지도자 바운드의 저술과 가르침에 나타나 있다. 그는 사람이 범죄하기 전인 창조시에,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주사 거룩하게 하셨"(창 2:3)다는 말씀과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출 20:10)이라고 선언된 십계명의 내용을 상기시켰다. 그는 또한, "주님과 그의 사도들이 스스로 실천함으로 그 날을 일으켜 세웠"음을 상기시키고,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도 안식일이 필요했을진대, 죄로 인하여 잃어버린 바된 세상은 더욱 더 안식일이 필요하다"고 설파했다. 그리하여 청교도들은 일요일을 칼빈의 가르침처럼 단순히 예배하는데 편리한 하루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거룩한 날로 믿고, 주일에는 각종 오락을 금하고 속된 일을 삼가는 등 성수 규정까지 마련했다. 그들의 안식일 준수는 오늘날 한국의 보수적이고 경건한 고신 계통의 장로교 신자들의 주일 성수와 흡사하다.
자신들이 깨달은 만큼의 진리를 옹호하고 실천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 청교도들은, 개신교라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계 3:1)였던 종교개혁 시대를 나타내는 "사데[교회]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몇 명"(계 3:4)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의 역사와 진리의 맥은 언제나 이 몇 명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계승된다는 사실을 다시 보게 된다. 지금 받은 빛과 진리에 충성하는 사람에게만 더 크고 온전한 빛과 진리가 주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여 16세기의 청교도들은 칼빈의 한계를 벗어나, 회중교회를 통하여 그들의 가문을 잇는 또 다른 자손인 침례교에서 17세기에 참된 제칠일 안식일을 쉽사리 싹티울 수 있도록 터전을 마련하였다.
13. 침례교회의 상속자, 제칠일 침례교회
마침내 아침이 밝아왔다. 일요일을 제칠일 안식일로 믿고 성수하는 등 받은 바 빛에 충실하며 최선껏 살아온 청교도들에게 보다 밝은 참 빛이 이르러 온 것이다. 영국 국교회를 떠나 회중파 청교도 목사로 활약하던 트래스크는 1616년 런던의 밀 야드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던 중 그를 따르던 회중 가운데 한 사람인 잭슨에게서 제칠일 안식일을 소개받고 상당수의 회중과 함께 안식일을 준수하게 되었다. 결과로 1617년 밀 야드 교회는 회중제도를 유지하며 유아세례를 부인하고 제칠일 안식일을 준수하는 최초의 제칠일 침례교가 된 것이다.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극히 존중하고, 각 사람이 성령의 인도로 계발된 양심을 따라 자유롭게 성경을 연구하고 스스로의 믿음을 지켜 나가며, 신자에게 물에 잠기는 침례를 베푸는 등 정통 침례교의 모든 신조에 충실하면서, 성경상의 제칠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제칠일 침례교야말로 침례교가 낳은 훌륭한 맏아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단으로 고발된 트래스크 목사는 혹독한 고문과 해상 감옥에서의 고통을 견딜 수 없어 신념을 굽혔으나 그의 회중은 흩어지지 않았다. 그의 아내 도로시는 16년간의 옥고를 치르면서 참으로 고결한 신앙을 지키다가 옥사하고 말았다.
역사의 기록에 남은 밀 야드 제칠일 침례교의 두번째 목사는, 영국의 세 국왕,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와 2세의 궁중 의사였던 챔블린이었다. 제3대 목사는 제임스였는데, 그는 1661년 10월 19일 안식일 설교 중에 체포되어 다음 달 26일 교수형에 처해진 뒤, 목을 잘라 장대에 꽂은 뒤, 시무하던 밀 야드 교회 뜰에 전시하여 안식일 준수의 댓가로 위협했다.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선(계 12:17) 사단의 분노가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표현된 것이다.
다음 해인 1662년 개혁 신앙 때문에 투옥되었던 영국 국교회 목사 뱀필드는 개인적인 성경연구 끝에 제칠일이 성서적인 안식일임을 깨닫고, 9년 간의 복형기간 동안 계속 전도하여, "제칠일 침례교 도르체스터 감옥교회"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출감 후 또 다시 안식일을 가르친 죄목으로 1684년 70세의 고령으로 춥고 습한 뉴게이트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14. 미국으로 이민 간 네째 계명의 빛
순교자의 죽음은 언제나 진리의 씨앗이 되어 더욱 불어나게 마련이다. 영국의 뱀필드 목사가 목회하던 교회로부터 나온 열성있는 신자인 멈포드가 일어나 안식일 기별을 가지고 1664년 미국의 로드 아일랜드로 건너갔다. 그는 그 곳에 있는 침례교에 나가며, 십계명의 불변성과 제칠일 안식일 준수를 열심히 가르친 결과 몇 명의 청교도 신자들을 이끌었다. 그러나 이 곳의 침례교회마저 그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핍박하자 1671년 12월 23일 멈포드 내외를 비롯한 7명의 신자들이 거기서 나와 신앙 공동체의 언약을 맺고 신대륙에서 첫번째가 되는 제칠일 침례교를 로드 아일랜드의 뉴포트에 세웠다. 마침내 신대륙에 안식일의 진리가 뿌리를 내린 것이다. 제칠일 침례교는 1840년대 중반에 일어난 초교파적인 재림운동의 결과로 형성된 일단의 재림신자들에게 그들이 목숨을 바쳐 수호한 안식일 진리를 전달함으로써, 안식일 계명의 빛은 계속해서 전수될 수 있었다. 이러한 등대지기들의 충성과 희생을 통하여 16세기에 일어난 미완성의 종교개혁을 마무리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마지막 시대에 이루어 질수 있게 되었다.
16세기 각국에서 일제히 일어난 종교개혁은 초반에 힘있게 전진하는 듯 했지만, 개혁자들 사이에 예배의식, 성만찬, 예정론 등과 같은 교리 문제에 이견이 나타나고, 재침례파에 대한 개신교 안에서의 자체 핍박이 가해지면서 분파주의에 기울어져 중심을 잃게 되었다. 반면 개혁의 초기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던 로마 교황권은 잠시 자성과 자책의 빛을 보였으나, 재빨리 태도를 바꾸어 반종교개혁운동의 전열을 가다듬었다. 1545년에서 1563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열린 역사적인 트렌트 종교회의에서 종교개혁의 원인이 되었던 면죄제도, 연옥, 화체설, 성자 및 유물 숭배 등 모든 교리들은 재확인되었고, 전통은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진다는 결의와 함께 상당수의 외경이 인가되었다. 그리고 이 회의에서 루터, 쯔윙글리, 칼빈 등과 같은 개혁자들은 박멸되어야 할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이러한 종교회의의 결의를 실천하도록 선택된 단체가 바로 스페인의 로욜라가 1534년 8월 15일 6명의 다른 회원과 함께 창립한 예수회(제수잇)였다. 교황과 로마 카톨릭교회를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불사하겠다는 서약으로 활동을 시작한 이들에 의하여 각처에 고등교육기관이 설립되었고 각급 지도자가 양성되었으며, 외국 선교가 펼쳐졌다. 이들에 의해서 악명 높은 종교 재판소가 다시 운영되었으며, 종교개혁으로 잃었던 지역들이 회복되었고, 개신교보다 한발 앞서 아시아, 남미, 카나다 등지에 가톨릭 신앙이 성공적으로 전파되었다. 이들은 또한 적그리스도에 대한 가짜 가르침을 조작하여 개신교회 속에 은밀히 밀어 넣는데 성공하였다. 마틴 루터를 위시한 대부분의 종교 개혁자들은 다니엘서 7장과 요한계시록 13장을 근거로 교황을 역사 속에 존재해 온 적그리스도로 지목하였다. 그러나 예수회의 두 젊은 신학자들은 적그리스도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며 미래의 어느 시점에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미래주의"를 만들어서 교황권을 적그리스도로 주목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눈을 말세에 나타나는 어떤 초인간적인 존재에게 돌리게 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개신교회가, 교황권의 반개혁운동의 일환이었던 "미래주의"에 기초한 비밀 휴거론를 받아들이고 따르고 있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비밀 휴거 문제는 월간지, 살아남는 이들 제24호를 참조하기 바람).
로마 가톨릭교회의 반종교개혁이 유럽과 신대륙, 아시아를 휩쓰는 동안 개신교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루터교의 쇠퇴와 경건운동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지 백 년이 채 못되어, 루터교는 "오직 성경"이라는 본래의 대의명분을 망각하고 새로운 빛을 거절한 채 교단이라는 담을 높이 쌓아 놓고 냉담한 형식주의에 빠져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이에 경각심을 가지고 일어난 것이 루터교 목사였던 스페너와 프랑케 교수가 독일의 할레 대학교를 중심으로 일으킨 경건주의 부흥운동이었다. 평신자 중심의 소그룹 성경연구와 기도회를 통하여 실생활의 경건을 강조하여, 각종 쾌락을 금하고 절제를 강조하며 당시의 편만한 악을 견책했다. 단순한 예배의식과 속죄의 필요를 강조하는 복음이 중심이 된 설교로 이하여 죽은 듯 했던 교회에 새 생명이 넘쳐 들어왔다. 경건주의의 중심지였던 할레대학에서 교육받고 부흥을 체험한 독일 색슨 출신의 루터교 신자 진젠돌프 백작이 이 부흥 운동의 영향을 받아서 모라비아 교회를 탄생시켰다(1727년).
루터교의 양자 - 모라비아 교회 진젠돌프 백작은 자신의 넓은 땅을 로마 가톨릭의 핍박으로 내어 쫓긴 보헤미아인들과 모라비아인들, 그리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나선 개신교도들에게 피난처로 제공했다. 1727년, 서로 주장이 다른 각 파의 신자들을 성령으로 하나가 되게 하여 형제의 연합이라 부르는 모라비아 교회를 조직했다. 처음에는 6백 명으로 시작한 이 작은 교회는 평신도 선교사를 양성하며, 그 후 150년간 2,170명의 선교사를 신대륙을 비롯하여 서인도 제도, 그린랜드 등으로 파견하여 개신교로서는 최초의 세계 선교를 시작했다. 루터교의 진수인 경건주의와 허스파 신앙의 진수인 보헤미아, 그리고 모라비아 형제회의 신앙이 진젠돌프 감독에게서 결집되어, 루터교의 양자격인 모라비아 교회가 탄생한 것이다.
모라비아 교회의 아우 - 감리교 진젠돌프 백작이 이끌어간 경건하고 능력이 넘치는 모라비아 교회가 개신교에 끼친 영적 감화는 헤아릴 수가 없다. 그 가운데 하나가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의 회심이다. 당시 옥스포드 출신의 영국 국교회 신부였던 웨슬리가 미국의 인디안을 위한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아 동생 찰스 웨슬리와 함께 대서양을 항해하던 중, 심한 풍랑을 만나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배에 함께 탔던 모라비아 평신도 선교사들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에 깊은 감명을 받았었다.
인디안 전도에 실패하고 돌아온 웨슬리는 자신의 진정한 회심을 위해 고민하던 중, 1738년 5월 24일 저녁, 런던의 올더스게이트 거리에 있는 모라비아 교회의 집회에 참석하여 마침내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마음으로 뜨겁게 체험하고 회심을 경험했다. 이리하여 성령으로 충만해진 웨슬리 형제와 친구 휫필드의 지칠 줄 모르는 헌신으로 영국은 일대 부흥을 경험했고 웨슬리 형제에 의해서 교회 역사를 바꾼 감리회(Methodist)가 조직되었다. 처음에는 모라비아 교회에 부속되었다가 1740년 최초의 자립 감리회가 런던에 형성되었다.
웨슬리가 감리회 운동을 일으켰던 18세기 초의 영국은 영적인 일대 위기를 겪고 있었다. 종교개혁의 진수였던 청교도 정신은 신대륙으로 자리를 옮기고, 영국 국교회는 생명이 없는 형식주의로 퇴화한데다가 성직자들의 퇴폐는 극에 달했다. 남아있던 장로교와 침례교는 개혁의 의지를 상실한 채 있었고,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유니테리안 신학에 잠식당하고 있었으며, 때마침 영국에서 일어나고 있던 자연신론, 곧 하나님을 인간과 역사에서 분리시켜 불필요한 존재로 만든 파멸적인 철학 사조에 휩싸여 있었다. 이것이 유럽 대륙에서는 무신론적인 계몽주의로 나타났고, 인간위주의 합리주의로 발전하여, 마침내 프랑스에서 현대 무신론이 탄생한 혁명으로 나타났는데, 이것은 후에 공산주의 혁명의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18세기의 영국을 프랑스와 같은 무신론적 혁명의 파도로 부터 구한 것은 웨슬리의 감리회 운동에 힘입은 바 크다.
웨슬리 형제가 이룩한 감리회는 대부분의 신조를 일반 기독교와 함께 하지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와 함께, (1) 성령의 역사에 의한 중생, 곧 성화와 성결(거룩한 삶)을 특히 강조한다. (2) 웨슬리의 경험과 가르침에 따라 칼빈의 절대적인 예정론을 거부하고 아르미니우스의 예지예정을 따르며 (3) 신자의 세례와 함께 유아세례도 인정하고, (4) 감독제도의 교회행정을 가진다. (5) 칼빈주의 교회들처럼 다른 신조를 가진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하는 일이 거의 없다.
● 19세기 종교개혁 ●
종교개혁의 열등아 - 프랑스 종교개혁으로 치명상을 입었던 중세 가톨릭 교회가 예수회가 주도한 반종교개혁으로 세계 각처에서 승승장구하는 동안, 개혁자들이 일으켰던 개혁신앙은 그 후손들의 나태하고 형식적 신앙 때문에 거의 죽어갔지만, 18세기 독일에서는 경건주의 부흥운동이 일어났으며 결과로 1727년 세계 선교의 문을 연 모라비아 교회가 탄생되었다. 그리고 심각한 영적 침체에 빠졌던 18세기의 영국에서 웨슬리 형제들이 일으킨 부흥운동은 1740년 감리회를 탄생시켰으며, 동 시대에 신대륙 미국에서는 대각성운동이 일어나 개신교의 일대 확장과 부흥을 초래했다.
그러나 같은 18세기에 무신론적인 합리주의에 노출된 프랑스는 영적 부흥 대신 1789년 공포와 유혈의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오히려 19세기를 휩쓴 무신론과 회의론의 요람이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와 연관하여 프랑스의 가톨릭 세력이 남 프랑스 지방의 왈덴스인들 4천여 명을 집단 학살하였으며(1545년), 1572년 8월 24일 성 바돌로메 제사의 밤에는, 화해를 모색하던 프랑스의 개신교도들인 위그노들을 속임수로 모은 뒤 빠리에서 2천명, 지방에서 2만명을 무참히 학살하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혁명 직전까지 계속된 핍박으로 인하여 대부분의 위그노들은 국외로 도피 내지 추방됨으로써, 프랑스는 깊은 영적 밤을 지나가게 되었다.
인간의 이성을 위주로 한 무신론적인 프랑스 혁명 정신을 바탕으로 한 근세의 시작인 19세기가 펼쳐지면서 1848년 칼 마르크스는 이념적 무신론인 공산주의 선언을 했고, 1859년에는 다윈이 과학적 무신론인 진화론을 발표했다. 그리고 각각 1844년 태어난 벨하우센은 성경의 영감을 부정하는 신학적 무신론인 고등비평을 내놓았으며, 니체는 철학적인 무신론인 초인주의를 소개하였다. 이들 모두는 성서 신앙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조들이었다. 바야흐로 면면이 이어온 성서 신앙은 세상과 교회 안팎으로부터 그 근본을 위협받는 일대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