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회와 연결된다. 거센 바람이 먼지를 일으키며 두한과 구마적 사이를 휘몰아치고 있다. 군중들도 숨을 죽인 채, 그 오랜 침묵 속에 빠져 있다. 평양박치기가 구마적의 어깨에 걸쳐 있는 양복 상의를 받아든다.
구마적 그럼 시작해볼까?
구마적과 두한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진 채, 작은 원을 그리며 돌기 시작한다. 빈틈을 찾듯 눈빛을 날카롭게 빛내던 구마적이 무섭게도 빠른 속도로 발차기 공격을 퍼붓는다. 두한도 그것을 막아내며 동시에 역공을 펼친다. 그 찰라의 순간 동안 몇 번의 공격을 주고 받던 두한과 구마적은 서로의 자리를 바꾸며 떨어져 나간다. 너무도 빠른 두 사람의 동작에 군중들 사이에서 가벼운 탄성이 터진다.
구마적 제법이구나.
그러나 두한은 고통스러운 듯 부상을 당했던 가슴 부위를 움켜쥔다. 구마적은 그런 두한이 안됐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고는 여유있게 거리를 좁히며 다가온다. 움찔 물러서려던 두한은 생각을 바꾼 듯 오히려 한 발작 앞으로 나간다.
김영태 안돼. 두한이! 떨어져... 떨어져서 상대하라구.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한 번 야수와도 같은 구마적의 공격이 들어온다. 두한도 지지않고 맞받아치면서 결과를 점칠 수 없는 일대 접전이 펼쳐진다. 그러나 두한은 서서히 뒤로 밀리고 영태의 얼굴에는 불안한 기색이 드리워진다. 순간, 구마적의 돌려차기가 두한의 가슴에 적중된다. 시간이 정지 되어버린 듯 경악하는 군중들의 모습. 두한의 몸둥아리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둔탁하게 쓰러진다. 찬물을 끼얹은 듯 한 정적이 계속되고 두한은 마치 죽은 듯 일어서지 않는다. 무옥과 영철이 두한을 부축하려 달려나가려는데 영태가 아직은 아니라는 듯 손을 들어 만류한다. 두한이 안간힘으로 일어서려다 다시 엎어진다. 두한의 얼굴에도 절망적인 패색의 빛이 어리는데.......
김좌진 (소리) 두한아.... 두한아....
그 환청에 두한은 고개를 든다.
김좌진 (소리) 두한아.... 두한아.... 어서 일어나거라, 어서.....
안타까운 군중들의 얼굴들 사이에서 아버지 김좌진이 인자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꺼져가던 두한의 두 눈이 다시 강렬하게 빛을 발한다.
두한 아버지.....
구마적은 이미 승부가 끝났다는 듯 몸을 돌리는데 갑자기 엄청난 함성이 터지며 군중들이 환호한다. 구마적이 고개를 돌리면 어느새 두한이 일어나 대결 자세를 갖추고 있다. 믿을 수 없는 듯 구마적의 눈빛이 흔들린다. 두한이 입가로 흐르는 피를 아무렇게나 소매에 훔친다. 구마적은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는 듯 다시 무섭게 달려들고 두한도 투혼을 불사르며 다시 한 번 접전을 펼친다. 구마적이 온몸을 던져 박치기를 들어간다. 두한은 덤블링을 하듯 뒤로 공중돌기하며 양발로 구마적의 턱을 강타한다. 두 사람 모두 쓰러져 일어설 줄을 모른다. 군중들이 손에 땀을 쥐고 양쪽을 번갈아 쳐다본다. 두한이 먼저 몸을 일으키도 곧 구마적도 힘겹게 일어난다. 구마적이 몸이 말을 듣지 않는 듯 비틀거리며 두한을 향해 다가오다가 그대로 무릎을 꺾으며 주저 앉는다.
❀구마적 내.... 내가 졌다.
군중들 사이로 열화와 같은 환호가 물결친다. 김무옥과 문영철이 달려와 두한을 높이 받쳐든다. 뭉치, 상하이들은 그런 두한들을 노려보며 구마적을 부축한다. 환호는 그칠 줄을 모르고 계속되고 있다. 미와가 못마땅한 헛기침을 하며 군중들 사이를 빠져나가고 혼마찌 패거리들 속에 있는 나미꼬는 묘한 미소를 짓는다. 두한은 여전히 영태들과 함께 군중들에 둘러 싸여 있다. 그 한쪽에서김이수와 함께 지켜보던 최동열도 가만히 그곳을 빠져나간다.
씬 2 혼마찌깡 마당
하야시가 정성스럽게 난을 손질하고 있다. 비서인 미우라가 조용히 하야시의 뒤로 와 선다. 그러나 하야시는 그렇게 난에만 빠져 있다.
하야시 꽃이 피면 아주 볼 만 할텐데 말이야.
미우라 ...........?
하야시 이 난 말이다. 꽃이 만개할 때가 되었는데.... 아직은 아닌가? (사이) 우미관 에서의 승부는 어떻게 되었나?
미우라 그게... (머뭇거린다)
하야시 (손을 멈추며) 김두한이 이긴 것이로군.
미우라 예.
하야시 ...........알았다.
미우라 김두한의 실력이 예상보다도 훨씬 대단한 듯 싶습니다.
하야시 ...........
미우라 어쩌면 앞으로의 사업에 큰 차질이 생길지도....
하야시 조금 늦어질 뿐이다. 김두한이라도 대세를 거스리지는 못해.
미우라 ...........
하야시 혼자 있겠다. 내가 부를 때까진 전화도 연결하지 마라.
미우라 예. 오야붕.
하야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 난을 손질한다.
씬 2-1 종로 거리 (첨가)
최동열은 깊은 생각에 잠긴 채 걷고 있다. 옆으로 신이 난 듯 김이수가 떠들어댄다.
김이수 원더풀, 원더풀! 그 어린 아이가 구마적을 물리치다니.. 구마적이 누군가? 10년이 넘게 조선 최고의 싸움꾼으로 군림했던 주먹중의 주먹이 아닌가? 정말 대단한 명승부였네.. 그리고 짜릿한 역전극이 었어. 두한이가 쓰러졌을때 얼마나 가슴을 졸엿던지.. 하지만 그 아이는 다시 일어섰네. 기적처럼 말일세.
최동열 ...........
김이수 이보게 동열이 너무 그러지 말게.. 두한인 무사히 돌아왔고, 또 보기 좋게 구마적을 눌렀네..
최동열 .............(여전히 말이 없다)
김이수 두한이가 주먹패가 된 게 그리도 못마땅한가? 내가 알고 있는 자네는 주먹패에 대해서 호의적인 사람이었어. 그런데...?
최동열 두한인 그들과는 다르네.
김이수 백야 장군의 아들이라서? 그런 이중적인 잣대가 어디 있는가? 그리고 백야는 백야고 두한인 두한이일세. 그 아이도 뭔가 생각이 있을 걸세. 이젠 아이라 하기도 뭐하지.. 오늘 보니까 참으로 어였한 성인 이었네.. 하하하.. 가세.. 우리 가게에 가서 술이나 한 잔 하세.
최동열 ...............
씬 2-2 전차역
오씨와 조모가 전차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우미관 쪽에서 계속 몰려오는 사람들은 저 마다 한 마디씩 한다.
행인1 그렇게 새파란 친구가 구마적을 이기다니.... 내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가 않는구먼.. 허허허..
행인2 이 사람아... 그 총각이 바로 쌍칼의 후계자야. 쌍칼이 종로를 뜨기 전에 그 자리를 물려줬다네.. 웬만해서 그랬겠는가?
행인1 그랬구만...
전차가 와서 서고 조모가 먼저 오른다. 그리고 오씨가 오르려는데..
행인2 종로2정목 시장통에서 김두한 하면 무르는 사람이 없어. 뭘 모르면 가만히나 있으라고.
순간 오씨가 멍해져서 두 행인을 쳐다본다.
조모 뭐하고 있는 게냐? 어서 오르지 않고.. (대답이 없자) 에미야?
오씨 예?
조모 왜 그러느냐? 무슨 일이 있는 게냐?
오씨 아... 아닙니다.
그렇게 전차에 오르다가 다시 돌아보는 오씨의 모습에서..
씬 3 종로 회관 외경
신명나는 밴드의 연주 소리가 요란하게 흘러나오고 있다.
씬 4 종로 회관
테이블마다 두한의 승리를 자축하는 사람들로 떠들썩하다. 곧 밴드의 연주가 끝나자 사방에서 건배를 외치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 두한은 특별히 마련된 테이블에 김영태들과 앉아 있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다가와 축하의 말을 건네고 돌아간다. 술을 들이키는 김무옥과 문영철의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문영철 제 잔 받으십쇼, 영태 형님. 저희가 없는 동안 형님께서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김영태 너희들도 고생이 많았어. 자, 두한이... 자네도 한 잔 하지.
두한 아닙니다. 전 별로 생각이 없습니다. 신경 쓰지 마시고 드십시오, 형님.
김무옥 인자는 우미관으로 입성할 일만 남아 부렀네. 그야말로 두한이가 종로... 아니 조선 최고의 오야붕이 되어 부렀어.
두한 ...........
김무옥 영태 성님, 우리도 건배 한 번 해야 하지 않겄습니까?
김영태 그래. 자 모두들 잔을 들어라.
김무옥 김두한 오야붕을 위하여.......
모두들 위하여!
모두들 그렇게 승리의 기쁨에 들떠 있지만 두한은 그저 좋지 만은 않은 표정이다.
김영태 안색이 좋지 않군. 병원에 가보지 않아도 되겠나?
두한 전 괜찮습니다. 그보다..... 구마적 형님은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김영태 어떻게 되다니....? 자네도 이 세계의 법칙을 알고 있지 않나. 쌍칼 형님이나 신마적 처럼 종로를 떠나 어디론가 가겠지.
두한 ...............
김영태 스스로 정리하고 떠날 수 있도록, 그저 지켜보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예우일세. 그렇게 하게.
두한은 조금은 허탈한 듯 그렇게 말이 없다.
두한 좀 피곤하군요. 쉬고 싶습니다.
김영태 알겠네. 일어나지.
두한 그러실 것 없습니다.
김영태 나도 술이 내키지가 않아. 함께 가세.
두한, 일어나 몇 걸음을 걷다가 갑자기 탁자를 잡고 비틀거린다.
김영태 (부축하려) 두한이.........
두한 아... 아닙니다. 걸을 수 있습니다.
다시 걸음을 옮기려다가 결국 쓰러지고 마는 두한.
김영태 두한이.. (무옥과 영철들에게) 뭣들 하고 있어! 어서 오야붕을 모시지 않구.
부하들이 일제히 일어나 두한에게 달려온다. 양코와 정진영도 걱정스러운 듯 본다. 두한은 김무옥의 부축을 받으며 나간다.
정진영 양코... 너도 따라가봐.
양코 알았어. 근데 넌.....?
정진영 나 아니라도 이제 사람들이 많잖아..
양코 하긴 넌 시험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정진영 혹시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알려주고....
양코 그래.
양코도 급히 따라 나간다. 못내 걱정스러운 듯 그 자리에 서있던 정진영도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씬 5 관철여관 마당 (밤)
양코, 번개, 무옥, 영철, 삼수들이 두한의 방을 보며 서성이고 있다. 잠시 후, 임동호와 김영태가 방문을 열고 나온다. 모두들 그 앞으로 다가간다.
임동호 며칠 푹 쉬면 괜찮아질 거요. 하지만 당분간을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하오.
김영태 예, 알겠습니다.
임동호가 영태들의 인사를 받으며 밖으로 나간다.
김영태 다들 의사 선생님 말씀 잘 들었지? 가능한 잡소리 내지 말고 조용히 지켜. 오야붕께서 편히 쉴 수 있게 말이야.
모두들 예.
김영태 그리고 영철이하고 무옥이.........
두 사람 예, 형님.
김영태 적당할 때 애들 데리고가서 우미관을 정리해라. 그 쪽 아이들하구 쓸데없는 마찰은 피하고. 잡음 들리지 않게...
문영철 염려 놓으십쇼, 형님.
김영태 (양코를 향해) 잠깐 이리로 오지.
양코 저.... 말입니까?
김영태 그래......... 우리 식구 들과 인사는 나누었나?
양코 (다가오며) 헤헤헤. 아직은........
김영태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정식으로 소개하겠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양코라고 한다. 오야붕의 오랜 친구로 너희들이 자리를 비운동안, 우리 일을 많이 도왔다. 정식으로 우리 식구가 되었으니 잘 지내도록 해.
모두들 예.
양코 (꾸벅 고개를 숙이며) 잘 부탁드립니다, 형님들.
모두들 ..........?
김무옥 형님들이라니...? 오야붕하고 친구라고 안 혔나?
양코 네. 맞습니다, 형님. 두한이하고는 불알 친구나 다름 없습니다.
김무옥 두한이하고 친구면 우리하고도 친구나 마찬가지여. 말 낮추드라고....
김영태 그래, 양코. 서로 격의 없이 지내.
양코 알겠습니다, 형님. (보며) 저기요.... 다들 잘 지내보자구.
김무옥 우린 구면이제. 반갑구먼 나 김무옥이여.
문영철 (악수 청하며) 환영한다. 문영철이야.
양코 (손바닥을 옷에 슥슥 문지르며) 잘 부탁해.
삼수, 병수하고도 인사를 나누는데 번개는 딴청을 부린다.
김무옥 아 뭣허냐... 형님한테 인사안하고?
번개 혀.... 형님이요?
문영철 그럼 두한이 친군데 맞먹으려구....?
김무옥 언능 혀라.. 싸게싸게...
번개 에이씨.. (못마땅하지만) 반갑수, 양코... 형님. 나 번개요.
양코 어흠 그래.. 인제 이 형님이 누군 줄 알았지? (번개의 뺨을 툭툭 치며) 짜식, 되게 귀엽게 생겼네
번개 .......(아니꼽지만)
김영태 인사는 그쯤 하기로 하고..... 모두들 들어. 조금씩은 기분이 들떠 있으리라는 건 안다. 하지만 이후로도 달라지는 건 없어. 각별히 행동 조심하고 각자가 맡은 일에 충실해라. 무슨 말인지 잘 알겠지?
모두들 예.
삼수 저, 형님..... 혹시라도 구마적의 떨거지들하고 마주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시비를 걸기라도 하면......
김영태 우미관 패거리의 대부분이 이제는 우리 식구나 마찬가지다. 그 점을 잊지 않으면 될 거야.
모두들 ...........
씬 6 선술집
평양박치기, 상하이, 뭉치 등 중간급 오야붕들이 처참한 기분으로 구마적을 처다보고 있다. 구마적은 그저 술잔을 채워말없이 비울 뿐이다.
평양박 큰형님.... 술은 이제 그만 드십시오.
구마적 ......
평양박 아직은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구마적 (웃으며) 이봐 평양박치기, 잊었나? 나는 구마적이야. 한 번 지긴 했지만 나는 여전히 구마적이라구. 구마적이라는 이름이 사라진 건 아니야.
뭉치 큰형님.............
구마적 다들 내 술을 받아. 한 잔씩들 하라구.
상하이 (벌떡 일어나) 두한이 놈을 그냥 두지 않겠습니다. 제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 당장 요절을 내놓고 말겠습니다.
구마적 앉아라, 상하이. 앉으란 말이다.
상하이 .....(앉으면)
구마적 너는 두한이의 상대가 되지 못해. 아니... 두한이는 나 역시 만나지 말았어야 할 강자였다. 정말 대단했어. 그런 완전치 못한 몸으로 이 구마적에게 도전장을 냈어.
평양박 ..............
구마적 언젠간 후배들에게 이 자리를 물려줬어야 했었지. 하지만 나는 명예롭지가 못했다. 일본패와 손을 잡은 것이 실수였어. 그 때문에 싸움 뿐 아니라 명분에서도 지고 말았지.
상하이 큰형님... 오늘 일은 잊어버리십시오. 큰형님의 뒤에는 저희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형님...
구마적 아니다. 나는 내일 떠난다.
모두들 .............
구마적 너희들은 이제부터 두한이를 새 오야붕으로 모셔라. 그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두한이 또한 너희들에게 선배 대우는 해줄 것이다.
평양박 ..............(괴롭다)
상하이 그럴 수 없습니다. 하늘이 두쪽나도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제비 큰형님... 제발 저희를 내치지 말아 주십시오, 큰형님.
뭉치 저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큰형님을 따를 겁니다.
구마적 (단호하게) 난 혼자 간다. 이건 나의 마지막 명령이야. 절대 나를 따라와서는 안돼. 절대로......
뭉치 큰형님..........
구마적 두한이에게 고개를 숙이지 못하겠다면 각자의 길을 가거라. 나는 종로의 오야붕으로서 마지막을 깨끗하게 끝내고 싶다.
모두들 ................
구마적 오늘부터 두한이가 종로의 오야붕이다. 구마적은 끝났다. 이제부터는 김두한의 시대다. 김두한 말이다.
씬 6-1 권번 외경 (아침) (첨가)
권번 선생이 산책을 하고 있다. 수건으로 얼굴을 움치며 안으로 들어가던 아이란은 조심스레 고개를 숙인다.
씬 6-2 동 설향의 방
곱게 단장을 마친 설향이 작은 보자기를 들고 일어서는데, 유행가를 흥얼거리며 아이란이 들어온다.
아이란 꼭두새벽부터 어딜 가려구?
설향 그냥 좀 갈 데가 있어.
아이란 그게 어디냐구? (보자기를 보며) 그건 또 뭐야?
설향 응..... 약이야...
아이란 약...? (사이) 너 두한 오라버니한테 가려는 거구나?
설향 서방님이 몸이 많이 상한 것 샅아서.....
아이란 아이구... 물어본 내가 바보지. 네가 거기 말고 갈 데가 어딨다구.
설향 다녀올게.
아이란 (붙잡아 끌며) 조금 있다가 나가.
설향 왜....?
아이란 어머니 나와 계신단 말이야. 괜히 들켜서 좋을 거 없잖아. 금방 들어가실 거니까 잠깐 앉아 있어.
설향 그래....? (안절부절 못하는데).....
아이란 그 사이에 약이 썩기라도 하니.... 아이구 하여간 열녀가 따로 없다니까..
설향은 방밖을 기웃대며 기다리는데, 아이란은 단장을 하며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계속 흥얼흥얼 거린다.
설향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아이란 나같은 년한테 그런 일이 있을 턱이 있겠니? 참 (돌아 앉으며) 너 기억나지? 엊그제 온 그 손님말이야..
설향 누구? 밑도 끝도 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아이란 왜 있잖아... 동격제대 나왔다는 그 젊고 멋있는 사장님 말이야. 하여간 보는 눈들은 있어 가지고 이 앙큼한 것들이 세수하면서도 그 손님 얘기 뿐이다라구.
설향 .............
아이란 엄청난 부자에다가 우리같은 것들한테 예의도 깍듯한 걸 보면... 다른 놈팽이들하고는 애초부터 근본이 다른 사람인 것 같아.
설향 사내들이라면 영철씨 빼고는 지긋지긋하다더니.....
아이란 사람도 사람 나름이지. (바짝 다가 앉으며) 실은 그 사람이 널 쳐다보는 게 예사롭지 않았어. 너도 느꼈지?
설향 무슨 소리야?
아이란 시치미 떼긴.. 분명히 너한테 관심이 많아보였어. 정말이라구.
설향 지금 나 놀리는 거지?
아이란 다음에 또 오면 잘 모셔라. 혹시 아니? 그런 손님 눈에 들어 팔자 고치게 될지..
설향 뭐야?
아이란 뭐 어떠니.. 우리야 정조 지키는 대가집 마나님도 아닌데........
설향 그만 해.. 듣기 싫어.
아이란 호호호. 하여간 이렇다니까.. 뭐 그런 것 같구 토라지니?
설향 농이라도 다시는 그런 말 하지마.
아이란 알았다. 알았어. 두한 오라버니한테 콩깍지가 씌인 너한테 내가 무슨 말을 하겠니?
아이란이 다시 단장을 하는데 설향이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아이란 설향아.. 얘.. 어머머 재 좀 봐.. 단단히 토라졌나 보네.. 어이구, 나 같으면 얼싸 좋다하고 당장 물어버리겠구만..
씬 7 관철 여관 마당
양코와 무옥, 영철들이 몸을 풀며 아침 운동에 나서려는데 품안에 작은 보자기를 들고 설향이 안으로 들어온다. 설향은 양코들을 보고 잠시 문 앞에서 머뭇거린다.
양코 저기.... 권번에 설향이 아니야? 두한이 색시 말이야.
김무옥 맞는디..... 이렇게 이른 새벽부터 뭔 바람이 불었당가?
문영철 어서 와요, 설향씨.
설향 (다가와 인사하며) 안녕들 하셨어요.
양코 헤헤헤. 저 아시죠, 제수씨. 두한이 친구 양코예요.
설향 .........예.
문영철 그런데 아침부터 무슨 일로.........?
설향 (약을 건네며) 이거...........
문영철 (받아들며) 이게 뭡니까?
설향 두한씨 약 몇 첩 지었어요. 좀 전해 주세요.
양코 제수씨가..... 두한일 끔찍이도 생각해주네요. 두한인 이런 거 안 먹어두 끄덕없는데..........
설향 두한씬.... 좀 어떤가요?
문영철 의사 선생님 말씀이 너무 몸을 혹사시켜서 그렇답니다. 며칠 쉬면 괜찮아 질 거랍니다.
역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벤치에 외롭게 앉아 있는 구마적의 모습. 얼굴을 가리려는 듯 중절모를 깊이 눌러쓴 구마적은 물고 있던 시가에 불을 붙인다. 멀리 역사에서 김영태가 이쪽을 향해 걸어온다. 구마적은 아직 김영태를 보지 못한 듯 허공으로 연기를 내뿜을 뿐이다. 김영태는 바로 옆으로 다가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다.
구마적 (그제서야) 김영태.. 자네가 어떻게...?
김영태 떠나시기 전에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형님.
구마적 허허허. 공연한 발걸음을 했군.
김영태 ..............
구마적 홀가분하게 떠나고 싶어서 우리 아이들도 나오지 못하게 했어. 헌데 자네가 올 줄이야.
김영태 형님의 뜻에 어긋났다면 죄송합니다.
구마적 그런데 어떻게 알고 왔나?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는데.....
김영태 첫차로 떠나실 것 같아 와보았습니다. 쌍칼 형님께서도 그러셨지요.
구마적 (미소)...... 두한이는 주먹뿐만 아니라 인복도 타고 났군. 하긴 종로의 오야붕이 아무나 되는 것은 아니지. 두한이한테 마지막 인사 고맙다구 전하게.
김영태 예, 형님.
그 때 기차가 기적을 울리며 다가온다.
구마적 열차가 왔구만.. 그만 가보게..
구마적은 열차가 멈추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계단을 오른다. 창안으로 막 자리에 앉던 구마적은 무심코 김영태에게 시선을 주며 고개를 끄덕인다. 김영태, 깊숙하게 허리를 굽혀 마지막 인사를 한다.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기차가 출발한다. 기차의 마지막 칸이 역을 빠져나가서야 김영태는 고개를 든다. 기차는 점점 멀어져간다.
씬 10 시장통
두한들이 시장통으로 들어서며 상인들과 가볍게 인사를 주고 받는다. 가게 안에서 고기를 썰던 주인이 두한을 보고 달려나온다.
주인 두한이.....
두한 (보고)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주인 어이구 장사는 장사일세. 나는 자네가 어제 싸움으로 며칠은 못 일어날 줄 알았어. 헌데 하룻밤 자고 이렇게 멀쩡해지다니 말이야.
두한 아저씨께서 보내주신 생간을 먹어서 그런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주인 하하하.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만... 고마워... 나한테 말만 하게 언제든 싱싱한 놈으로 골라 보내 줄테니..... 그런데 말이야 앞으로 이 야시장은 어떻게 되는 건가? 자네가 우미관으로 가게 되면 우리들은 누가 보호해 주냐구?
두한 ..........그랬군요. 어쨌든 잘 하셨습니다. 구마적 형님이 이렇게 빨리 떠나리라고는 짐작도 못했습니다.
김영태 구마적은 주먹계에서도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이네. 누구보다 자신이 있어야할 자리를 잘 알고 있었어. 그래서 말없이 떠난 거야. 그 누구의 배웅도 거부하며 말일세..
두한 .............
김영태 이제는 자네가 그 자리를 대신해야만 해. 구마적은 사라졌고 자네가 우미관의 새 주인이 된 거지.
두한 야시장도 오늘이 마지막인가요?
김영태 그렇게 되겠지. 하지만 우리가 우미관으로 옮겨가는 것은 또 다른 시작에 불과하네. 우미관을 장악했다는 것은 전 조선 최고 오야붕으로 등극했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잇을 뿐이야.
두한 ..............
김영태 하지만 시구문을 비롯해서, 영등포, 동대문, 마포의 패거리들은 자네를 자신들의 오야붕으로 쉽게 인정하지 않을 걸세. 자넨 그들을 복종하게 만들어야만 해. 말을 듣지 않는다면 힘으로라도...
두한 꼭 그렇게 할 것까지 있겠습니까?
김영태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주먹계는 일대 혼란을 겪을 걸세. 그 사이에서 죽어나는 것은 상인들 뿐이야. 또한 구마적의 부하들 중에서도 자네를 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자들이 있을 걸세.
두한 .............
김영태 이 모든 것을 놓고 볼 때 지금 주먹계는 사실상의 전국시대라고 할 수 있지. 자네가 명실상부한 오야붕으로 우뚝 서려면 그들 모두를 반드시 제압해야해. 그리고 혼마찌깡의 하야시와도 어떤 식으로든 부딪칠 수밖에는 없을 거야. 물론 협상을 할 수도 있겠지만.......
두한 그들과 협상같은 건 생각하지 않습니다. 혼마찌패가 종로에 발을 들여놓는다는 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종로에 있다는 그 술집도 쫓아 낼 겁니다.
김영태 정면대결이로군.
두한 예. 일단은 애들을 통해 경고장을 보내주십시오. 그들 스스로 종로에서 손을 떼도록 말입니다.
김영태 지시대로 하겠네. 하지만 너무 서두르지는 말게. 하나하나 순서대로 일을 처리하는것이 좋아.
두한 ..........
씬 12 혼마찌깡 외경
하야시 (소리) 그예 구마적이 떠났군.
씬 13 동 사무실
가미소리, 미우라, 시바루가가 서있다.
하야시 결국 그렇게 되었어. 가장 좋지 않은 상황이 되고 말았어.
모두들 ................
가미소리 아무래도 더 이상의 종로 진출은 힘들 것 같습니다.
하야시 ..............
가미소리 문제는 지금 종로에 있는 우리의 영업장입니다. 김두한이 그곳을 그대로 나둘 리가 없습니다.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할 듯 싶습니다.
나미꼬 그 일은 제게 맡겨 두세요.
하야시 .........맡겨 달라?
나미꼬 예, 형부. 제가 김두한을 직접 만나보겠어요.
모두들 .............?
가미소리 그건 안됩니다, 나미꼬양. 아직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김두한을 만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예전에 쌍칼이라는 자가 구마적과 싸운 건 우리가 구마적과 손을 잡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김두한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나미꼬 그렇지만 지금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상황이 더 어려워 질 거에요. 그렇지 않은가요?
가미소리 물론 그렇긴 합니다. 어쨌든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나미꼬양께 피해가 가지 않도록 제가 잘 처리하겠습니다.
나미꼬 제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시는군요.
가미소리 예..........?
나미꼬 사쿠라의 사장은 바로 이 나미꼬에요. 제 영업장에서 일어나는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어요. 형부께서는 이미 그곳에 관한 모든 전권을 저에게 주셨어요.
모두들 ....................
나미꼬 그저 앉아서 들어오는 수입이나 계산하는 일 따위나 하려고 했다면 사쿠라를 맡지는 않았을 거예요.
하야시 처제의 말이 틀린 건 아니야. 하지만 사내들의 세계는 거칠고 사납지. 항상 조심하지 않으면 안돼.
나미꼬 명심하겠습니다, 형부.
하야시 앞으로 어떤 상화이 될지 알 수 없다. 만일에 경우를 대비해서 종로서와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어놓는 것이 좋겠지. 가미소리... 자네가 그 일을 맡는다. 내가 총독부에 연락을 취해 놓을 테니 서장과 만나라.
가미소리 예.
하야시 모든 일에 만전을 기해라. 빈틈이 없게 말이다.
모두들 예, 오야붕.
씬 14 종로서
김태서, 문달영, 오무라와 함께 앉아 있다. 미와는 깊은 생각에 잠겨있다.
김태서 경부님..... 무슨 고민 이라도 있으십니까?
미와 좋지가 않아..........
김태서 무슨 말씀이신지....?
미와 긴또깡이 오야붕이 된 것 말이다. 그 아이가 우미관을 차지하지 않았는가 말이야. 예감이 아주 좋지 않아.
김태서 아, 예........
미와 처음엔 부랑아가 되었다고 해서 좋아 했는데..... 점점 내 예상을 빗나가고 있단 말이다.
문달영 그래봤자 주먹패의 오야지에 불과합니다.
미와 긴또깡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놈이다. 긴쪼깡의 태생을 생각해보란 말이다. 범의 새끼중에는 고양이는 없지 않는가. 혹 불량배들을 선돟애 폭동이라도 일으키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어쩔 것인가?
모두들 .............
미와 오무라 형사, 요즘 김좌진의 본가에 수상한 점은 없겠지?
오무라 아직은 그런 점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미와 음.... 그곳 또한 감시를 절대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김형사... 앞으로 긴또깡에 대한 감시를 더욱 철저히 해라.
김태서 예.
미와 모두들 정신 바짝 차려라. 알겠나.
무두들 예, 미와 경부님.
씬 14-1 삼청동 (첨가)
오씨와 조모가 툇마루에 앉아 나물을 다듬고 있다. 오씨의 얼굴 위로.....
행인2 종로2정목 시장통에서 김두한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어. 뭘 모르면 가만이나 있으라구.
오씨는 자구 마음에 걸리는 듯 석연치 않은 표정이다.
조모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 게냐? ........에미야?
오씨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어머님?
조모 이상하구나...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게냐?
오씨 아닙니다, 어머님.
조모 무슨 일인지 말해보거라. 시장에 다녀 오면서부터 계속 그러지 않았느냐?
오씨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저 제가 뭘 좀 잘못들은 것 같습니다.
조모 무엇을 말이냐?
오씨 (웃으며) 아닙니다. 제가 좀 과민했던 듯 싶습니다.
조모 .............?
오씨 ............
씬 15 거리
멀리 우미관의 간판이 보인다. 두한과 김영태들이 우미관을 향해 당당하게 걷는다.
씬 16 우미관 로비
그곳에는 구마적의 부하들이 일제히 도열해 있다. 두한이 안으로 들어와 그들과 마주선다. 그들의 대표로 보이는 자가 나와 깎듯하게 고개를 숙인다.
대표 어서 오십시오, 큰형님.
모두들 (일제히 허리를 굽히며) 어서 오십시오, 큰형님.
두한은 한 번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그 뒤를 따라 김영태들과 구마적의 부하들이 계속 줄을 지어 그 뒤를 따른다.
씬 17 동 사무실
오십여명의 건장한 어깨들이 사무실 안을 가득 가득 메우고 있다. 두한이 그들을 한 번 흝어본다. 그러나 평양박치기등 중간급 오야붕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두한 반갑다. 나 김두한이다. 여러분과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이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한다. 어제 두리는 서로 등을 돌리고 싸웠지만 오늘은 한 식구가 된 것이다. 이제까지의 모든 원한은 잊어버려라. 그리고 새롭게 출발해보자. 잘해 보자. 정말로 잘해보자.
모두들 예, 큰형님..
두한이 김영태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다. 김영태는 고개를 숙이고 한 발 앞으로 나온다.
김영태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주기 바란다. 앞으로 우리는 김두한 오야붕의 뜻에 따라 일치 단결할 것이며 만약 이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시에는 어떠한 처벌도 감수할 것이다. 알겠나.
일동 예.
김영태 첫째, 오늘부터 우리는 종로에 있는 모든 상인들을 보호한다. 뿐만 아니라 지금의세금을 반으로 낮출 것이고 정기적으로 걷어들이는 것 이외에 사적으로 세금을 걷어서도 안될 것이다.
일동 ....(불만 가득한)....
김영태 둘째, 너희들 모두는 생계를 위해 직업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셋째, 지금까지 있었던 일본패와의 관계는 모두 중단될 것이다. 넷째.........
두한이 엄숙하게 취임일성을 대신하는 김영태의 말을 듣고 있다. 그런 두한의 얼굴에서...........
씬 18 어느 술집
평양박을 비롯해, 상하이, 뭉치, 제비 등 구마적의 중간 오야붕들이 모여 있다.
상하이 놈이 우미관에 들어갔단 말이지?
제비 예, 형님. 오는 길에 밑에 있던 애들을 만났는데 그러더군요.
상하이 두한이놈.... 지금은 보이는 게 없겠지.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있다는 걸 곧 뼈저리게 느끼게 될 거다. 꼭 그렇게 해주고야 말겠어.
평양박 상하이... 너무 흥분할 거 없어. 구마적 형님께서 떠난 마당에 우미관이 다 무슨 소용인가?
뭉치 그러게. 빌어먹을... 이놈에 술도 예전에 마시던 그 술맛이 아니구.... 정말로 살맛이 나질 않는구만.
평양박 (둘러보며) 그런데 다들 어떻게 할 거야? 언제까지 이렇게 종로바닥에 남아 있을 순 없잖아. 형님의 말씀대로 두한이 밑으로 들어가던지 여길 떠야 하지 않겠어.
제비 평양박 형님 말이 맞습니다. (눈치를 살피며) 저.... 뭉치 형님, 어떻게 하실 작정이슈?
뭉치 (술을 들이키고) 나는 벌써 결정했어. 구마적 형님의 뒤를 쫓아서 만주로 가기로.......
상하이 너.. 형님 성질 몰라서 그래? 절대로 따라 오지 말라는 형님 말씀 잊었냐구.
뭉치 까짓.... 맞아 죽기 밖에 더 하겠어. 내가 언제 형님 말 듣는 거 봤냐구? 내 걱정일랑 말구 너희들 앞가림이나 잘해.
평양박 제비 너는........?
제비 나야 뭉치 형님하고 한몸이 아니유. 같이 따라 가죠, 뭐. 평양박치기 형님도 같이 안 가실래요? 만주에서 다시 뭉쳐서 한 살림 차려보자구요.
평양박 아니... 난 이번 기회에 손을 씻겠고 고향으로 돌아갈 거야.
제비 평양으로 말이에요?
평양박 그래... 혹 구마적 형님 만나뵈면 안부나 전해라.
제비 예. 상하이 형님은 어떡하실 겁니까?
상하이 난 여기 남는다. 남아서 할 일이 있어.
모두들 ...........?
상하이 두한이 목을 따버리기 전에는 절대로 안 떠나.
평양박 상하이, 그쯤 해두고 이젠 포기해. 우리한텐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아.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다.
상하이 아니.... 벌써 마포 용식이와 이야기를 끝냈어. 날 도와주기로 말이야. 난 그쪽으로 옮겨간다.
평양박 마포 정도로 우미관을 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 정도론 어림도 없어.
상하이 내가 노리는 건 두하니놈 하나야. 수단과 방법들 가리지 않겠어. 그래도 안된다면 하야시에게 도움을 요청해서라도 꼭 두한이놈을 절단내고야 말겠어. 반드시....
모두들 ...........
씬 19 종로 거리
활기찬 거리. 나미꼬와 사야꼬 자매가 다정하게 걷고 있다.
사야꼬 갑자기 무슨 영화를 보자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나미꼬 다 언니를 위해서 이러는 거야. 오랜만에 외출했는데 그냥 들어가기에 섭섭하잖아 아주 재미있는 여화래.
사야꼬 제목이 뭔데.........?
나미꼬 제목....? 그게.....
사야꼬 제목도 모르면서 재미있는 영화인지는 어떻게 알어?
나미꼬 아무려면 어때. 그냥 보면 돼지.
사야꼬 너 혹시... 다른 속셈이 있는 거 아니니?
나미꼬 어서 가기나 해 언니.
사야꼬 알았다. 알았으니까 밀지 좀 마.
두 사람 그렇게 간다.
씬 20 우미관 사무실
김영태가 무옥과 영철과 함께 안으로 들어온다.
김영태 두한이 일어나지. 시간이 됐어.
두한 (벽시계를 보며) 아직 좀 이르지 않습니까?
김영태 종로에선 한다하는 유지들과의 회합이 아닌가? 일찍 가는게 좋아. 벌써 다 모였을 거야.
두한 준비하겠습니다.
김영태 (영철과 무옥에게) 그리고 너희들은 사쿠라에 가서 실수 없도록 해. 경고만 하는 거야. 싸움은 안돼. 경고만 하라구.
영철 예, 알겠습니다.
두한 (나가며) 가시죠.
그들 그렇게 나온다.
씬 21 우미관 앞 거리
나미꼬와 그의 언니 사야꼬가 신식정장에 양산을 쓰고 도도한 모습으로 오고 있다. 나미꼬가 표를 사고 들어가려는데 두한들이 밖으로 나서고 있다. 극장 기도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인다. 나미꼬, 걸음을 멈추고 김두한의 얼굴을 계속 쳐다본다.
사야꼬 뭘 하니, 어서 들어가지 않구?
두한들이 곁을 스쳐 지나가면 나미꼬 천천히 돌아보며 미소 짓는다.
김무옥 (슬쩍 돌아보며) 뉘집 색시인지는 몰라도 겁나게 이뻐부리네.
김두한 .................
김무옥 어라... 저 여자가 우릴 보면서 웃는디........
김영태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들 사쿠라에나 다녀와.
김무옥 (머리를 긁적이며) 예.
두한과 김영태, 김무옥과 문영철을 보내고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다. 나미꼬는 여전히 두한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사야꼬 (다가와) 아는 사람이니...?
나미꼬 아니... 하지만 앞으로는 그렇게 될 거야.
나미꼬의 의미심장한 얼굴에서....
씬 22 사쿠라
김무옥과 문영철이 안으로 들어온다.
종업원 저 아직 영업 시간이 안됐는데요.
김무옥 (밀치며) 너희 사장 좀 보자구 혀라.
종업원 누구신지.....?
김무옥 그건 네가 알 것 없구. 너희 사장 나오라 그래, 사장!
그때 시바루가 어두운 홀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시바루 사장님은 지금 안 계십니다. 무슨 용건이라도 있으신지요?
문영철 우린 우미관에서 왔소. 지금 당장 사장을 만나야겠는데......
시바루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지금 안 계신다구... 전하실 말씀이 있다면 제게 하시지요.
문영철 그렇다면 한 마디도 빼놓지 말고 전하시오. 하루라도 빨리 이 술집을 정리하고 혼마찌로 돌아가라고...........
시바루 .....................
문영철 그렇지 않으면 우리게게 큰 변을 당할 거라고 말이오. 이건 우리가 모시고 있는 우미관의 김두한 오야붕의 말씀이나 다름이 없소.
시바루 그게 전부입니까? 전해드릴테니 그만 돌아가 주십시오. 곧 예약 손님들이 오실 시간 입니다.
유지3 이번엔 내 잔을 받게. (술을 따르며) 앞으로 할 일이 많아질 걸세. 종로를 책임지려면 말이야.
유지2 이거...... 오늘 같은 날 기생이 빠져서야 되겠소? 안 그렇소이까, 김사장.
유지1 그럴 줄 알고 벌써부터 준비를 시켜두었어요. (밖을 향해) 이보게, 지배인.... 지배인....
김영태 저... 죄송합니다만 오늘은 기생을 부르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실 김두한 오야붕께서 이 자리에 참석하신 것은 여러 유지분들에게 드릴 말씀이 있어서였습니다.
유지2 말해 보게.
김영태 우선... 이제까지 걷어 오던 세금을 절반으로 줄이겠습니다.
유지들 ... (잠시 가벼운 소란)
김영태 그 대신.... 자리가 나는 대로 우리 식구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십시오.
유지1 허허허. 그거야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안 그렇소이까, 여러분
유지들 맞아요. 맞아.
유지2 하지만 두한이.... 우리 또한 우리대로 근심거리가 있어. 건설업을 한다는 혼마찌의 하야시가 조만간에 종로를 집어 심킬거라는 말이 있네. 우리들 영업장을 밀어버리고 그 위에 건물을 세운다는 그 소문말이야.
두한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늘이 두쪽이 나도 하야시 패거리는 종로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이 김두한이가 장담합니다.
유지3 물론 자네를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하야시가 그리 호락 호락 물러서지는 않을텐데.....
두한 저 김두한 다른 건 몰라도 싸움 하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습니다. 이 주먹으로 종로를 지키겠습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행동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유지들, 저마다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나눈다. 두한은 조용히 술잔을 비워 내려놓는다.
씬 23-1 그 밖 마당 (첨가)
양코와 번개, 삼수들이 서성거리고 있다. 양코는 한쪽 다리를 건들거리며 담배 한 대를 꺼내 입에 문다.
양코 야, 번개.... 너 잠깐 이리 와봐.
번개 ...(아니꼽다는 듯) 왜요?
양코 왜라니 임마. 형님이 오라면 오는 거지.
번개가 못마땅하게 다가오면...
양코 담뱃불 좀 붙여봐.
번개 뭐, 담뱃불?
양코 그래 임마.. 어서 붙여봐.
번개 아이 정말...
그러다가 갑자기 표정을 바꾸는 번개. 일부러 양코의 턱 밑에 성냥불을 들이민다.
양코 앗... 뜨거! 이 자식이 미쳤나?
번개 불 달라며....?
양코 너 지금 나한테 반말했냐?
번개 그래 했다. 왜?
양코 허.... 이 자식이 근데...
번개 어이 개코, 우리 이러지 말자고.. 나이로 치자면 물론 내가 아래지만, 주먹패에 몸 담은 순서가 있는 거야... 당신보다는 내가 선배라 이말이야.
양코 뭐, 다, 당신? (기가 막히고)
삼수 야 번개, 너 왜 그래?
번개 넌 가만히 있어. 조심하라고. 어쩌다 소매치기로 돌긴 했지만 이 번개도 종로바닥에서 한가락 하던 놈이니까.
양코 그래서... 이 양코를 형님으로 못모시겠다 이거냐? 응?
번개 솔직히 니가 나라면 너같은 놈한테 형님이라고 부르고 싶겠냐? 한 주먹거리도 안되는 거지새끼한테..
양코 뭐, 뭐야? 너 죽고 싶어 환장했어?
번개 그래, 환장했다. 어디 죽일 수 있으면 죽여봐라.
양코 너 진짜 죽는다.
번개 덤벼봐. 자신 있으면.. 응? 응?
번개가 양코의 코 앞에다가 얼굴을 들이민다.
양코 (열이 뻗쳐) 이 자식이..
주먹을 휘둘러보지만 번개가 잽싸게 숙이며 피한다.
번개 그런 주먹으로 어림도 없어.. (뒤로 물러서며) 여기서 싸우면 형님들 한테 들키니까 어디 조용한 곳으로 가는게 어때?
삼수 야 번개..! 너 어쩌려구 그래?
번개 혹시 형님 나오시면 잘 둘러대라. 저 자식 손 좀 봐주고 올테니까.. 야, 따라와..
양코 좋다.. 오늘이 니 제삿날이 될 거다.
번개는 먼저 사라진다. 양코도 기세도 등등하게 뒤를 따른다.
씬 23-2 그 일각
상의를 벗어던진 번개가 제자리를 뛰며 준비운동을 하고 있다.
번개 자 덤벼봐. 나중에 딴 소리 하기 없기야. 싸움에서 지면 넌 내 아우가 되는 거야. 알았지? 물론 형님들 계실 땐 내가 깍듯이 형님 대접을 해주겠지만...
양코 개자식... 내가 지면 내가 네 아들놈이다.
양코가 무섭게 달려든다. 그러나 번개는 배빠르게 피하며 연거푸 양코의 뺨을 후려갈긴다. 양코는 어떻게 하든 공격을 피해보려 하지만 번개는 너무도 빠르다.
번개 언제든 항복은 받아 주겠어.
양코가 마구잡이로 다시 달려 들지만 번개는 그 때마다 요리조리 피한다. 번개의 뺨 후려치기로 양코는 정신이 없다. 그러다 건방을 떨다가 잠시 방심한 순간 번개의 손이 양코에게 잡힌다. 양코는 무지막지하게 그 손을 물어 버린다. 번개는 소리가 들릴까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고통스러워 한다.
씬 23-3 명월관 마당.
김영태와 두한이 지배인의 안내를 받으며 나온다. 삼수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자세를 바로 잡는다.
김영태 가자.
모두들 예.
두한 (둘러보며) 그런데 양코하고 번개는 어디 갔어?
삼수 예, 저 그게...
그 때 그 일각에서 양코와 번개가 나온다. 양코의 얼굴을 시뻘겋게 달아 올라있고 번개는 손목을 부여잡고 있다.
두한 어디들 있다가 나오는 거야? 너희들 무슨 일 잇었어?
양코 아 아니야.. 아무 것도.
번개 (동시에) 아, 아닙니다.
두한 .........?
김영태 양코... 얼굴이 왜 그래? 번개 넌 손 다쳤냐?
양코 괜찮아요.
번개 그.. 그럼요. 별일 없었습니다. 그렇죠 양코 형님?
양코 응 그래..
양코와 번개는 증명이라도 해보이려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는다.
두한 그럼 됐고..... 가자..
그러나 두한들이 앞서 가자 양코와 번개는 잡아먹을 듯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린다.
씬 24 혼마찌깡 외경(밤)
하야시 김두한의 부하들이 사꾸라에 다녀갔다?
씬 25 동 사무실
시바루가 보고를 올리고 있다.
시바루 그렇습니다, 오야붕. 김두한의 부하들이 찾아와 당장 종로를 떠나라는 엄포를 놓고 돌아갔습니다.
하야시 .....(굳어있다)
가미소리 놈들이 드디어 선전 포고를 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야붕?
시바루와 가미소리, 미우라는 한참동안 하야시의 말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침묵을 지키던 하야시가 갑자기 탁자를 내려친다. 모두들 하야시의 난데없는 행동에 적지 않게 놀라는 표정들이다.
하야시 (역정) 이것은 협상의 여지조차 남기지 않겠다는 것이 아닌가? 감히 이 하야시를 상대로 말이야!
밝은 얼굴로 들어오던 나미꼬와 사이꼬도 삭막한 분위기에 조심 스러워진다. 미우라가 다가와 나미꼬에게 귓속말을 건넨다. 그러나 이야기를 들은 나미꼬는 크게 놀라지 않는 눈치다.
나미꼬 앉아도 되겠어요, 형부?
하야시 ... (고개를 끄덕인다)
가미소리 일단을 철수하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지금으로선 종로에 영업장 하나가 있다는 것이 큰 의미가 없습니다.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나미꼬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그건 안됩니다. 사쿠라를 포기 할 수는 없어요.
가미소리 하지만 나미꼬양...
나미꼬 이 일은 저에게 맞겨주시기로 하지 않았던가요? 제가 현명하게 처리하겠어요. 믿어주세요, 형부.
하야시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가?
나미꼬 말씀드렸던 것처럼 김두한을 직접 만나서 담판을 짓겠어요.
모두들 ..........
하야시 처제가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김두한은 이미 우리의 목을 조여오기 시작 했어.
나미꼬 저도 위기임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종로에서 물러서면 다시 발을 들인다는 것은 더욱더 어렵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형부께서도 지금 고민을 거듭하시는 게 아닌가요?
하야시 .................
나미꼬 다른 방도가 없으시다면 이 나미꼬를 한 번만 지켜봐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하야시 음.......(생각한다)
나미꼬 .............
하야시 처제가 위험해지면 손을 떼겠다고 약속할 수 있겠지?
나미꼬 물론이에요. (고개를 숙이며) 감사합니다, 형부.
하야시 시바루.....
시바루 예, 오야붕.
하야시 오늘부터 네가 처제의 경호를 맡아라. 집밖을 나서면 단 한 발작도 떨어져선 안돼.
시바루 알겠습니다.
씬 26 국밥집 (아침)
두한이 아침 식사를 하며 김무옥과 문영철의 말을 듣고 있다.
문영철 경고는 했지만 쉽게 물러설 것 같지는 않았어. 아니 오히려 이런 일을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분위기라고 해야 맞을 거야.
두한 ....................
김무옥 뭐가 걱정이여? 애들 풀어서 며칠만 영업방해 해버리면 저들이 알아서 짐 쌀 것이구먼.
김영태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 사쿠라에 출입하는 고객의 상당수가 일본인 총독부 관리들이라는 얘길 들었네. 함부로 그들을 건드렸다가는 오리려 큰 화를 당할 수도 있어.
두한 그렇다면 더욱 그냥 놔둘 수 없습니다. 종로가 혼마찌처럼 일본인들 소굴이 되는 것만큼은 목숨을 걸고 막을 겁니다.
김영태 자네의 말에 동감일세. 하지만 종로가 자네의 나와바리라는 것쯤은 하야시도 알고 있을 거야. 좀더 기다려 보세. 뭔가 답을 주겠지. 그보다 더 시급한 것은 이번에 있을 오야붕 모임이야.
두한 ..........
김영태 일단 경성 일대의 모든 오야붕들에게 연락을 보내겠네. 일종에 최고 오야붕의 소집 명령이지. 하지만 많은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걸세. 최악의 경우 경성일대를 완력으로 제압해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몰라. 힘으로 말이야.
두한 형님께서 각 오야붕에게 애들을 보내주십시오.
김영태 그렇게 하지.
삼수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삼수 (들어와서) 저... 오야붕께 손님이 찾아오셨는데요.
두한 손님이라니?
삼수 예, 어떤 일본여자분이 오야붕을 만나뵙겠다고 하면서 요앞 은하수(까페)에서 기다리시겠답니다.
두한 .............?
씬 27 까페
두한과 김영태가 주위를 둘러보며 안으로 들어선다. 입구 근처에 서있던 시바루가 그들에게 다가온다.
시바루 김두한씨 되십니까?
두한 그렇소. 내가 김두한이오.
시바루 저희 사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절 따라오십시오.
시바루가 두한과 김영태를 창가 자리로 안내해간다. 창밖을 쳐다보던 나미꼬는 곧 두한들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