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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 선재적 그리스도
<골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그란(IX), 하늘 천사들도, 세상의 모든 왕들과 사람, 음부의 사단과 그 세력도 IX가 창조
영원 전 ㅎ님의 소원이 하나 있으셨다. 그것을 아들 예수를 위한 나라를 세워 그 아들이 영광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즉 예수를 위한 천국을 계획하시고 거기 오는 자들은 모두 아들의 은혜를 입고 오게 함으로 아들에게 은혜의 빚진 자 되게 하여 아들에게 세세토록 찬송을 돌리도록 하는 것이다. ㅎ님은 아들 예수가 영광 받는 모습을 보면 당신 자신도 그저 기쁨과 만족이 되는 것이다. 즉 아들 예수의 영광이 곧 아버지의 영광이라는 말이다.
이것을 성경 곳곳에서 밝히고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곳이 엡1장과 롬8장이다.
(엡1:3~7)를 보면, 창세전에 우리를 IX안에서 예정하사 IX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ㅎ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심으로 그의 은혜를 세세토록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창조 목적을 밝히심)
<롬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이 맏아들이고 그의 영을 받은 자들은 주님의 형제가 되게 하셨다. 성도는 율법 행함으로 이 복에 참여하는 게 아니라, 오직 십자가 복음을 믿음으로 주어진 신분이다. 누구에게 이러한 복이 주어지는가? 미리 아신 자들이다. 미리 아셨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30절을 보자.
<롬8:30> 또 미리 (예)정하신(=택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영화로움(마귀자식이 ㅎ님 자녀됨)
즉 29절의 미리 아심이란 30절의 예정하신 자들을 말한다. 언제 예정하셨나? 엡1장을 따르면 창세전에 IX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다. 이들에게 역사 속에서 복음이 믿어지게 하는 일을 부르셨다고 한다. 그들을 부르시고, 의롭다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것이다(택하심이 영화로움까지로..동시패션). 다 ㅎ님의 시나리오(언약)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인 것이다.
<히2:11>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주님이 피조물인 성도를 형제라고 부르신다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ㅎ님께로서 난자들이기 때문이란다. ㅎ님께로 난 자란, 아주 의미 있는 말이다. 생명은 낳아지는 것이지 어떤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부여되는 게 아니다. 가족관계도 그렇지 아니한가? 자녀는 부모의 사랑에 의해 낳아지는 것이지, 무엇을 잘해야 자녀로서 인정받아 호적에 올려지는 게 아니다. 그냥 사랑의 관계로서 원초적으로 맺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히2장에서는 예수님이나 우리도 ㅎ님의 사랑으로서 낳아졌다고 증거한다.
예수님은 ㅎ님과 본체시지만 성육신으로 오실 때는 ㅎ님의 본체라는 동등됨을 포기하시고 세상에 오셨다. 이때 성령으로 잉태되는 것을 ㅎ님께로서 낳아졌다고 하는 것이다.
<고전1: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같은 말이다. 우리도 ㅎ님께로서 낫고, 예수도 ㅎ님께로서 나왔다(성육신, 성령 잉태를 말함)
우리의 지혜, 의, 거룩함, 구속이 어떤 방식으로 주어진다? 예수님에 의해서란다. 우리가 무슨 선한 행위를 하거나 경건한 삶을 살아서 주어지는 게 아니라, 오직 ㅎ님의 택하심과 주님의 십자가 공로로 하늘에 속한 영생의 가치를 거저 안겨주신다는 말이다.
여기서 주의해야할 점이 있다. 예수가 ㅎ님께로서 나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창조하셨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이다(성육신을 말함) 잠시 후에 언급하겠지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처음부터 스스로 계신 한 분 ㅎ님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 자신이나 아버지 간의 구분이 없다. 아들은 아버지와 본체시며, 근본부터 영존하시는 아버지다. 아버지란 생명의 근원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삼위일체의 ㅎ님을 온전히 이해하거나 파악할 수가 없다. 다만 성경이 이끄는데 까지만 갈 일이지, 성경이 침묵하는 범주를 넘어 ㅎ님을 분해하려는 생각은 금물이다.
<사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 임이라.
성육신하여 오신 예수가 누구라구? ->전능하신 ㅎ님,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한다.
그러므로 구약의 말씀으로 계시던 ㅎ님이 실제로는 아버지 ㅎ님이라는 말이 아닌가? 성육신하신 예수가 영존 하시는 아버지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구약에서 말씀으로 계시던 아버지 ㅎ님이 육을 입고 오시니까, 세상에서는 아들이라는 위격으로 활동하셨다는 뜻으로 읽혀진다. 좀 더 보자.
<히7:1~3> 1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2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창14장)
3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ㅎ님 자신이 사람으로 현현하여 아브라함에게 보임)
3절에서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다는 말은 영원부터 존재하시는 분이요, 스스로 계신 분이라는 말이다. 즉, 언제 누구에 의해 출생된 적이 없는 자존하시는 분이라는 말이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분, 다른 말로 영존 하시는 분이시다. 누가? 예수님이, 이게 믿어지나요?
지금까지는 예수님은 아버지의 신성에 가려져서, 직접적으로 예수님의 신적 권위에 대해 별로 깊게 생각해 보지를 아니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놀라울 뿐이다. 우리 인간의 지혜로는 판단 불가한 영역이다. 한마디로 ㅎ님에 대해서 모릅니다가 정답이다.
그리고 3절 끝부분에 멜기세덱은 ㅎ님의 아들과 방불하다고 한다. 무슨 말일까요? ㅎ님은 영이시니까 눈에 안 보이는 분인데, 멜기세덱처럼 사람으로 현현하여 나타나게 되면 그를 통해 ㅎ님의 어떠하심이 표출되니까 ㅎ님 아들과 같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은 동격으로 여겨왔다, 아들을 보니 아버지 ㅎ님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이쯤 되면 아버지 ㅎ님과 아들 예수님은 같은 분이라는 느낌이 든다. 따라서 구약에서는 말씀으로 계셨던 ㅎ님 자신이 성육신하여 오신 예수님이라는 말이 된다.
그래서 요1장에서도 빌립이 주님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책망하신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있는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하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하신다. 즉 아버지와 나는 동격이라는 의미보다 한발 더 나아가, 같은 분이라는 의미로 읽혀진다.
지금 예수님이 아버지와 자신과의 관계 설명은 아예 아버지가 곧 예수님 자신이라는 느낌이 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한 순간도 분리되지 않고 24시간 결탁하여 동행하는 것으로 말씀하시고 계신다. 그건 무엇을 말하는가? 두 분이 아니라 한 분이라는 말입니다. 아버지가 곧 육신을 입은 예수님이구나..하고 여겨진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아바타라고 해도 되나?(정도로)
그러나 성경의 다른 많은 부분에서는 성부와 성자는 다른 분으로 나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구하신다.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지나가게 해주세요’(십자가를 피하고 싶다는 기도를 하심).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세요로 마친다. 또한 십자가상에서도, ‘나의 하나님 나의 ㅎ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아버지와 다름을 보이신다. 주님이 쇼하신 건 아닐테고..(분명 구분이 되는 대목임)
저는 지금 상위일체를 논하자는 게 아니라, 이렇게 놀라운 창조주 ㅎ님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당신의 형제로 여겨주시는 놀라운 구원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단순히 구원해서 천국에서 살게 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ㅎ님 신분과 동격으로 여기시는 놀랍고 고귀한 구원이라는 말이다.
삼위일체는 내로라하는 신학자들도 정확히 정의를 내지지 못하는 영역인데 우리가 굳이 끝없는 설에 빠져들 필요가 없다. 우리는 다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사역적으로 성경에서 분리시켜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같은 흐름으로 보조를 맞추면 된다. 삼위일체를 잘 알아야 구원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구원 문제로 들어가 보자.
골1:16절에서 언급하신대로 성도의 구원은 IX께서 다 하셨다. 이것을 밝히시는 책이 성경이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다면 신약은 물론이거니와 구약도 IX께서 일하셨다는 말이다. 오늘 제목이 선재적 그리스도라고 했는데,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구약에 일하셨던 ㅎ님도 바로 그리스도이신데, 성육신하기 전에 묵시 상태에서 영으로 일하셨기에 선재적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선재적’이란 구약에서도 그리스도가 이미 존재하셔서 사역하셨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신약의 예수님만 알고 있으면 소경이다. 이제부터 구약에 일하셨던 그리스도를 찾아가 보자.
아시다시피, 창1장의 7날의 창조 사역은 물질적 창조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건 논리에서 벗어나는 것이기에 맞지를 않는다. 만일 4째 날에 해달별이 창조되는 거라면, 어떻게 첫째 날부터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라’는 표현을 할 수 있는가? 저녁과 아침은 해를 중심으로 지구의 자전에 의해 만들어지는 밤낮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또한 해달별이 아직 없는 3째 날에 나무와 풀을 왜 만드시는가? 이치에 맞지를 않는다. 따라서 물질 창조를 말하는 게 아님을 의도하고 있다.
그러므로 창 1장의 7날의 창조는 사람의 구원에 대한 여정을 의미하는 것이 맞다. 6일 창조를 압축하여 말하자면, 1째 날부터 3째 날은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각각 말하고 있다. 신약의 4복음서가 여기에 해당된다. 그리고 4째 날부터 6째 날은 오순절 성령 강림과 사도들의 전도와 교회의 탄생을 각각 4~6째 날로 비유하고 있다. 사도행전과 서신서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래서 십자가 사건을 의미하는 둘째 날은 ‘ㅎ님이 보시기에 좋더라’가 없다. 2째 날 만드신 궁창이 무엇을 말하는가? 공중에 높이 십자가에 달리신 IX를 말한다. 인간들아 너희들의 저주를 대신 받고자 하늘 궁창에 달린 이 예수를 보라는 것이다. 아들의 죽음이 어찌 좋으시겠는가? 그래서 이날에만 ‘좋더라’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6째 날은 성령을 받은 자들이 거듭나서 주와 한 영이 되는 것을 의미하기에 ‘ㅎ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더라’ 라고 한다. ‘심히 좋더라’는 말은 영원전 ㅎ님이 계획하셨던 그 일이 완성되었다는 의미이다. 6째 날에 창조되는 사람인 남자와 여자는, 원전에서 한 사람이라는 단수로 표기된다. 정확한 의미는 남자를 품은 여자인 사람을 계시한다. 남자를 품은 여자란 그리스도와 연합한 교회를 말한다. 엡5장에서 언급하듯이 성경에서 남자와 여자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비유이다. 여자인 교회는 ㅎ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품은 자이다.
그래서 6째 날의 사람은 ㅎ님의 형상을 지닌 자이다. 성령을 받아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남이고 구원을 말한다. 완성이다. 더 이상의 어둠이 없다. 이 구원된 사람은 자람과 충만(생육하고 번성함)으로 안식에 들어간다. 자람과 충만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지식으로 채워짐을 말하는 것이지 무슨 종교적 열심이나 공로를 말하는 게 아니다.
이 6째 날은 어둠이 없기에 7째 날로 넘어가는 대목에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7째 날이다’가 없다. 6째 날의 사람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의와 희락과 평강이 흘러넘친다(예,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 자신 안에 ㅎ님 나라가 세워진 것이다. (ㅎ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하리니 너희 안에 있느니라./ ㅎ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게 아니라 의, 희락, 평강이니라)
따라서 6째 날의 사람은 ㅎ님이 만드신 첫 아담이 아니다. 성령을 받아 ㅎ님의 형상을 가진 구원된 자를 말한다. 많은 신학자들이 이것을 모른다.
ㅎ님은 처음부터 사람을 ㅎ님 형상을 가진 완전자로 만드시지 않았다. 창2:7절을 보면, 그냥 흙에 생기를 불어 넣어 산혼이 되게 하셨다. 개역 성경은 생령이라고 했지만 오역이다. 산혼이다. 산혼(네페쉬 하야)..더 세밀하게 원전을 보면 ‘네페쉬’ 앞에 ‘레’가 붙는다. 레의 의미는 ‘~을 하기 원하는’이라는 접두어다. 이어지는 ‘하야’는 ‘산, 살다’라는 형용사이다. 이것을 조합하면 ‘레네페쉬 하야’란 ‘살고 싶어 하는 혼적’인(산혼) 존재를 창조하신 것이다.
‘살고 싶다’라는 말은 구원을 지향하는 본성을 뜻한다. 모든 인간은 내세에 대한 소망과 추구성이 있다. 그래서 죽음 이후에 대한 희망과 두려움을 동시에 가진다. 죽으면 어디로 가나? 이것이 종교성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사람들은 많은 종교를 만들어 신을 숭배하거나 미신을 신봉한다. 종교가 없다고 해도 최소한은 조상신을 섬기거나, 본성적으로 죽은 후에 좋은 곳에 가고자 착한 일을 하기도 한다. 모두가 신을 찾도록 설계가 되어졌기 때문인데, 이것을 성경 창2:7절에서 최초의 인간의 실체를 ‘레네페쉬 하야’라고 밝히고 있다. 즉 ‘나는 살고 싶다’는 ‘나는 구원 받고 싶다’라는 본성적 존재라는 의미이다.
이처럼 구원을 소망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이게 짐승과 다른 점이다. 짐승이 아무리 지능이 높다고 해도 신을 찾는 짐승이 있던가? 성황당 같은 괴목이나 커다란 돌을 보면 위압감을 느껴 절하거나, 태양이나 달을 숭배하는 짐승이 있을까? 없다. ‘레네페쉬 하야’가 아니기 때문이다. 짐승(네페쉬 하야)은 죽음 이후의 내세를 추구하는 본성이 아예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도 짐승처럼 내세를 외면하고 눈에 보이는 현세에만 집착하여 사는 자들이 부지기수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내세에 대한 본성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시시때때로 자신의 내면에서 속삭이는 본성을 억누르고 사는 것뿐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혹은 과학적 지식을 앞세워 신을 부정하려는 마음을 강하게 작동시키는 것뿐이다. 아무리 신을 부정하고 싶어도 막다른 골목에 처하면 본성이 작동된다. 가령 불치병에 걸리거나 어떤 커다란 위기가 닥치면 반드시 신을 찾게 되어 있다(예, 이어령 교수의 회심)
처음 창조된 ‘레네페쉬 하야’라는 ‘나는 살고 싶다’를 외치는 자는 어떤 자인가? 미래적으로 ‘살기를 소망’하는 인간은 지금 ‘불완전한 존재’라는 말이다. 무엇이 참인지 무엇이 거짓인지 모르고, 무엇이 생명이고 무엇이 죽음인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혼돈과 공허와 깊은 흑암의 상태에 있는 미완성의 존재다. 이러한 상태를 창1:1~2절에서 말씀하고 있다.
(창1:1~2) ㅎ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 (그런데) 땅이 혼돈, 공허 깊은 흑암 위에 있고, ㅎ님의 신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더라..
개역 성경은 (그런데)가 누락되었다. ‘그런데’는 아주 중요한 단서를 준다. ㅎ님이 천지를 창조 하셨다는데, 그런데 왜 완벽하다고 하지 않고, 땅이 혼돈 공허 흑암이라고 불완전을 내세울까? 그런데는 생각 좀 해보라는 접속사이다. 혼돈 공허라는 용어는 인격에 사용되는 말이다. 즉 땅이 그러하다는 말은 사람이 그러하다는 말이다. 2절은 의인화하여 표현한 기법이다.
ㅎ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물 속에 갇혀 있기에 혼돈 공허..물은 사단의 영(거기서 빼내는 게 구원이다) 이 구원의 여정이 7날로 전개되는 것이다.
아까 창1장의 1째날~3째 날은 신약의 4복음서이고, 4째~6째 날은 사도행전부터 서신서라고 언급했다. 그렇다면 구약은 어디일까? 바로 창1:2절이다. 예수 만나기 전의 영적인 상태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인 것이다. 구약과 신약은 인간의 역사를 말하는 게 아니다. 예수 만나기 전이냐 만난 후냐를 가름하는 기준이다. 그러므로 BC와 AD는 실제 역사이지만, 본질은 물리적 역사를 빗댄 개개인의 영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성령 받기 전이라면 수십 년 교회생활 했어도 여전히 구약 상태로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사람인 BC이다(ㅎ님도, 자신도 모름)
이렇게 미완성의 사람을 향해 ㅎ님은 선악과를 먹지 말고 생명과를 먹으라고 하신다. 이것은 완전과 완성을 향한 지향점을 제시하시는 말씀이다. 생명과를 먹는 것은 바로 IX를 영접하여 믿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이 요6장에서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야 영생한다’고..
미완성의 사람이 생명과를 먹어야 완전한 자가 된다. 이게 구원이다. 이 구원을 창1장에서 6날의 창조로 말씀하셨고, 과정을 거쳐 6째 날에 ㅎ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남자와 여자, 즉 남자를 품은 여자), 즉 그리스도와 연합된 교회(성도)를 창조하신다. 이처럼 창1장은 성경책의 목차와 같다. 어떤 책이든지 표지를 열면 맨 앞에 목차가 있다. 목차를 보면 책 전체의 내용에 대한 윤곽을 알 수가 있다. 어떤 순서에 따라 어떤 내용이 전개되는지를 기술한 창1장의 6일 창조와 7째 안식은 성경의 목차에 해당된다. 여기에 성경 전체가 계시되어 있다.
그리고 2장은 성경의 서언과 같다. 서언에서 저자는 그 책을 쓴 동기나 목적 등을 밝힌다. 그러므로 서언은 책의 전체적 윤곽을 압축적으로 나타내는 내용이다. 건물로 보면 조감도와 같다. 성경 전체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압축해주고 있다. 창2장이 그러하다. 주요 내용이 다음과 같다. 아담이 배필이 없음으로 독처하는 게 좋지 아니하니 돕는 배필을 지으신다고 한다. 아담은 누구이고 배필은 누구를 말하는 걸까?
롬5:14절에서 비밀을 밝히고 있다. ‘첫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니라.’ 즉 아담은 IX의 모형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IX의 배필인 교회를 창조하시는 것이 ㅎ님의 창조 사역 목적이라는 말이다. ㅎ님은 사랑이시다. 당신의 나라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함께 누릴 사랑의 동반자를 얻기를 소망하셨다. 이것을 아들 예수의 신부인 교회로 표현한 것이다. 그 신부를 얻는 내용이 성경 전체의 흐름이다.
그렇다면 아담의 배필을 어떻게 지으시나? ㅎ님은 아담으로 하여금 먼저 짐승들의 이름을 지으라고 명하신다. 사자, 호랑이 코끼리, 곰, 여우, 사슴, 염소, 양, 토끼..등등.. 이름은 인격적 속성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름을 짓는다는 말은 아담의 배필로서 어울리는 속성을 가진 자를 찾아보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없다. 짐승이 아담의 배필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ㅎ님을 모르는 인간은 어떨까? 짐승과 똑 같다. 먹고 마시고 싸고 자고를 반복하는.. 생존을 위해 사는 존재이다. ㅎ님을 모르는 인간은 단지 글을 쓰고 말을 하는 지능 높은 짐승일 뿐이다.
ㅎ님의 배필은 ㅎ님께로서 나온 자이어야 가능하다. 왜냐하면 생명은 낳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ㅎ님은 ㅎ님을 낳고 짐승은 짐승을 낳는다. ㅎ님이 ㅎ님을 낳는 방식은 ㅎ님의 목숨을 담보로 낳아진다. 마치 엄마가 죽음 같은 산고를 통해 아기를 낳듯이 말이다. ㅎ님의 산통의 현장은 십자가이다. 이것을 빗댄 내용이 아담이 잠들 새 옆구리에서 갈비대를 빼내어 하와를 만드셨다고 문학적 기법으로 말씀하신다(요16:21~자신의 십자가 고난을 여자의 해산으로 표현)
잠든 아담에게서 빼낸 갈비대가 하와다. 즉 주님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고 죽음으로 출산한 새로운 존재가 교회라는 말이다. 성도인 교회는 IX의 십자가 피로 낳아진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자이다. 그리스도는 ㅎ님의 형상이니까. 성도 역시 ㅎ님의 형상을 가진 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신부가 탄생했다.
그러면서 창2장의 결론을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합하여 한 몸이 될 지니라’고 마무리 하신다. 그리스도와 영으로 한 몸된 교회, 이것이 ㅎ님의 창조의 전체적 윤곽의 큰 그림이다. 이처럼 창2장은 ㅎ님의 창조(구원)을 압축한 조감도이다. (다시 말) 창1장의 7날은 구원의 여정(순서)을 밝히는 성경의 목차에 해당되고, 2장은 ㅎ님 창조의 전체를 보여주는 조감도 이다. 그리고 3장부터 비로소 아담과 하와의 삶이 시작됨으로 역사의 출발이 전개되는 것이다.
여기서 성부 성자 성령으로 일하시는 ㅎ님과 선재적 그리스도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창1장에 나오는 ㅎ님(엘로힘)은 복수이다. 히브리어 원전에 품사가 복수로 표기된다. 복수의 ㅎ님이라? 그런데 주어인 ㅎ님은 복수인데 동사는 단수이다. 문법적으로 맞지를 않는다. 여기에 숙제가 있다.
가령 1절을 보면, ‘ㅎ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에서 ㅎ님은 복수인데, 동사 ‘창조하셨다’는 단수이다. 주어가 복수이면 동사도 복수가 되어야하는데, 단수이니 이것을 신학자들이 해석을 못한다. 그래서 억지로 붙이기를 ‘장엄한’ 복수라는 신종어를 만들었다. ㅎ님을 복수라고 하면 세분이 된다. 그러면 이단으로 몰린다. 그래서 장엄한 복수라는 말로 피해가는 것이다. 장엄한 복수는 왜 단수인가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나눌 말은 이단이니 삼단이니에 구애받지 않고 그냥 성경이 말하는데 까지 말하고자 한다. 사실 설교를 하다보면 설교자들은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삼신론(성부 성자 성령의 다른 인격 인정)이나 양태론(성부 성자 성령은 한 ㅎ님인데 사역으로 나뉘었다는 것/ 마치 물, 수증기, 얼음으로 비유-지방교회)으로 설교할 때가 많다. 둘 다 이단으로 여긴다. 그러니 교리에 잡히면 설교가 안된다. 아니 성경 해석에 큰 걸림돌이 교리이기도 하다.
어쨓든 창1장에 언급되는 ㅎ님은 전부 복수로 나온다. 그런데 왜 단수일까? 저는 단순하게 보고 싶다. 가령 가족(패밀리)라는 단어는 의미는 복수 개념이지만 단수로 쓰인다(집합명사).
‘내 가족은 행복하다’라고 한다면 My family is happy와 같이 단수다. ㅎ님도 같은 개념으로 보면 무엇이 문제인가? 교리가 사람을 잡을 뿐이다. 성부 성자 성령의 ㅎ님은 모두가 한 뜻으로 모아져 일하심시기에 단수가 아닐까? 그리고 삼위일체의 한 분 ㅎ님이시니까, 단수이기도 하다. 굳이 장엄한 복수라서 단수라고 사족을 붙이며 변병 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이어지는 2장 4절부터 언급되는 여호와 ㅎ님은 단수이다. 여호와는 성부 성자 성령 중에 어느 분을 말하는 걸까? 정답은 성자 예수그리스도이시다. 아까 골1:16절에서 말씀하듯이 예수에 의해 우주만물은 창조되고 운행되어진다. 그리고 요8:25절을 보면 주님이 바리새인들 보고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라고 하신다. 처음이란 성경 처음인 구약을 말씀하는 것이다. 구약의 창세기부터 말씀으로 역사하셨던 ㅎ님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이다.
구약을 보면 구원의 완성을 요단강 도하로 시사하고 있다. 요단강은 여호수아의 인도로 건넌다. 즉 구원은 여호수아에 의해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여호수아는 무슨 의미일까? 여호수아의 이름은 합성어(여호와+야샤)로 ‘여호와가 구원 하신다’이다. 이 여호와를 헬라식으로 발음하면 ‘이에수스’이다. 줄이면 ‘예수스’이다. 바로 우리가 발음하는 예수이시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곧 예수이다. 즉 예수란 ‘여호와가 구원 하신다’이다. (여호와=자존자)
그러므로 요8장에서 주님이 바리새인보고, ‘내가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다‘ 내가 그인 줄 알지 못하면 너희가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말씀하신 이유이다. 유대인과 바리새인은 ㅎ님에 대해 크게 오해하고 살았다. 율법을 안 지키면 다 망하는 줄로 알고 율법지킴에 목숨을 걸고 살았다. 그래서 항상 율법의 고소에 무서워서 안식이 없는 고달픈 삶을 살아온 것이다. 그야말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 왔다.
그러나 ㅎ님은 애당초부터 용서와 긍휼의 ㅎ님임을 그들을 몰랐던 것이다. 출34:5절 이하를 보면 여호와의 이름을 반포하신다. 즉 여호와 ㅎ님은 이런 분이라는 선언을 하시는 내용이다.
-나는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나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ㅎ님이로다,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삼사대까지 보응하리라(하심)
인자를 천대가지 베푸신다(천대..영원히라는 의미, 인자란 긍휼이다. 엄마의 자궁이라는 의미를 갖는 용어다. 엄마는 자식을 자기 목숨보다 더 아끼고 사랑한다. ㅎ님의 마음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설사 어떤 잘못을 해도 다 용서하신단다. 그게 십자가 사랑이 아닌가? 우리의 죄와 허물로 저주와 심판을 받고 지옥가야 마땅한데, 우리 대신 예수가 저주와 심판을 받고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죄사함과 영생을 선물하셨다. 이런 분이 여호와이시다. 그야말로 ㅎ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다. 당신을 희생하여 우리는 살리신 사랑의 대명사이다.
다시 성부 성자 성령의 사역을 분리해서 언급해 보자. 사역으로 ㅎ님을 조망하는 게 가장 성경적인 접근이다. ‘세분이다 아니다’로 싸울 일이 아니다. 논쟁은 무익할 뿐이다.
성부 ㅎ님은 사람 구원을 계획하신 분이다. 그래서 창세전에 당신의 자녀들을 미리 택정하시고, 그들을 IX의 십자가 피로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다. 이게 예정의 핵심 빼대이다. 그리고 아들 예수는 이러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다.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이다. 이 순종으로 ㅎ님께서는 이미 영광을 받으셨다.
그리고 성령은 아들의 영이다. 예수의 영이라고도 한다. 영어로는 그 영(The Spirit)으로 표기하는데 번역에서는 성령이라고 한다. 그 영이란 바로 예수님의 영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이후의 성령은 아들의 영이며, 그리스도의 영이며, 예수의 영이며, 양자의 영이시다(롬8:9/롬8:15/행16:7/갈4:6)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사함이 이루어지면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이 죄사함을 받은 자들의 속에 임하여 거듭나게 하여 온전하고 영원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쩌면 주님의 십자가의 본래 목적은 죄사함보다는 이 성령을 얻기를 고대하셨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ㅎ님의 구원의 핵심이 성령의 임재에 있다는 말이다. 사람의 구원은 ㅎ님이 사람의 밖에서는 아무리 도와주어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ㅎ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 실패의 역사가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가 아닌가? ㅎ님이 남편이 되어 옆에서 조력하였지만 반복되는 거역과 배신과 우상숭배로 이스라엘은 망하고 말았다. 죄로 태어난 인간은 죽었다 깨나도 ㅎ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없다는 명백한 증거가 구약의 흑역사이다.
그래서 이 모든 정황을 미리 다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ㅎ님은 아들 예수께서 이루어 내신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키는 방법을 창세전부터 계획하셨고 이것을 주님이 역사 속에서 성육신과 십자가로 이루어 내신 것이다. 이게 새언약이다. 새언약이 곧 십자가 복음이다. ‘죄로 죽은 무능한 인간은 빠져라, ㅎ님이 성취하셔서 그저 선물로 구원을 줄께’가 새언약이고 복음이다. 우리 인간이 할 일이 없기에 복음이다. 그래서 감사와 감격만 있을 뿐이다.
예수께서 이루신 그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키는 역할을 성령이 하신다. ㅎ님이 택하신 자에게 때가 차서 성령이 임하시면 믿음이 주어지고 자신이 죄임임을 알게 된다. 주님이 참 빛이신데,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이 각자에게 임하시면 빛이 임하는 것이 된다. 소경이며 어둠인 자에게 빛이 임하면 자신의 실존에 대해 눈이 열린다. 그래서 죄를 씻기 위하여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을 성령께서 하신다.
ㅎ님은 이 성령을 얻기를 학수고대하셨다. 성령은 ㅎ님의 히든카드이며, 만능키라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서정주의 싯귀가 오버랩 된다.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는 봄부터 그렇게 울었나보다’처럼 어쩌면 ㅎ님은 육신을 체휼한 그리스도의 이 성령을 얻기 위해 창세전부터 계획하시고 오랜 역사를 운용해 오셨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주님의 성령이 구속사의 핵심 주인공이시다.
신약의 그 영으로 표기되는 성령은 구약의 성령과는 다르다. 다시 말하지만 신약의 성령은 그 영이다. 즉 IX의 영을 말한다. 이 성령은 주님이 십자가 사건 후 승천하시고 오신 오순절의 성령이시다. 그러나 구약의 성령은 홀리(Holy) 스피릿(영)이다. 그야말로 거룩한 영이다. 아버지 ㅎ님 자신이시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로 죄사함이 아직 안 이루어진 상태에서는 사람 안에 오실 수가 없다.
이것을 잘 설명하는 곳이 출30장이다. 거룩하신 ㅎ님의 영을 감람유로 비유하고, 여기에다 주님의 십자가 고난이 체휼된 것을 관유라고 비유한다.
<출30:23~25> 너는 상등 향품을 취하되 액체 몰약 오백 세겔과 그 반수의 향기로운 육계 이백 오십 세겔과 향기로운 창포 이백 오십 세겔과 24 계피 오백 세겔을 성소의 세겔대로 하고 감람기름 한 힌을 취하여 25 그것으로 거룩한 관유를 만들되 향을 제조하는 법대로 향기름을 만들찌니 그것이 거룩한 관유가 될찌라.
24절의 감람유는 거룩하신 성령(홀리 스피릿) ㅎ님을 상징한다. 여기에 십자가를 상징하는 약재가 가미된다. 몰약은 죽음을, 육계는 장사됨을, 창포(늪에서 자라나는)는 부활을, 계피(향기가 올라감)는 승천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거룩하신 성령(Holy spirit)으로 잉태하신 그리스도 예수가 십자가를 통해 죽고 장사되고 부활 승천하여 다시 오신 분이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이시다. 이를 관유로 비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관유는 인생을 체휼하신 그리스도의 영(그 영=성령)을 말하는 것이다. 과연 성경은 ㅎ님이 쓰신 것임이 확실하다. 이렇게도 세밀하게 구약에서부터 곳곳에서 복선을 깔아 계시해 놓으셨다. 성령을 받은 지혜로운 자만 알아먹는 것이다.
이 관유를 대제사장 아론과 아론의 네 아들에게 부어서 제사장 위임식을 거행한다. 아론과 네 아들에게 관유를 부어 제사장을 세우는 것은 비유다. 장차 그리스도의 영(성령)을 통해 ㅎ님의 백성을 삼고자 하시는 것에 대한 예표였다. 벧전2장에서는 성도를 일컬어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소유된 백성‘이라고 말씀한다. 이처럼 성도는 관유로 비유된 아들의 영, 성령을 받아 ㅎ님의 자녀가 되었고 천국백성이 되었다.
아무 공로도 없는데, 경건치 못한 자들을 조건 없이 성령을 보내사 ㅎ님 자녀 삼으신 그 망극하신 은혜를 가슴 깊이 새겨서 주님의 십자가만 높이고 자랑하는 게 성도의 본분이고 해야 할 일이다. 이것이 곧 ㅎ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일이다.
우리에게 새생명을 주시기 위해 피 흘리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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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랑과 복음교회 |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