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 임 사
정 군 수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 격정을 인내한 /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 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이형기 시인님의 ‘낙화’라는 시입니다. 수업시간에 수도 없이 이 시를 가르쳤지만, 오늘 이 퇴임식장에서 제가 이 시를 낭송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정년의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굳이 정년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지금도 제 손에는 분필가루의 흔적이 남아있고, 제 옷에는 분필가루의 먼지가 남아 있고, 우리 학생들의 웃음소리와 숨소리가 제 몸에 배어있습니다. 그러나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처럼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떠나가겠습니다.
오늘 과분한 이 식전을 베풀어주신 교장선생님을 비롯한 우리 선생님들, 그리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저 미안하고 송구할 따름입니다. 교직 35년 중 이 사대부고에서 7년 6개월을 근무하였습니다. 그동안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여러 가지 면에서 마음을 써 염려해주신 교장선생님. 교감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가 해야 할 일을 나누어서 아무 말씀 없이 도와주신 여러 선생님들, 정말 고마웠습니다. 이러한 은혜를 갚지 못하고 떠나게 되어 더욱 미안할 따름입니다. 제 거처는 항상 전주에 있습니다. 살아가는 동안 집안의 대소사 모두 소식 주시어 이러한 은혜에 보답할 기회를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제자들, 여러분들이 있어 나는 자랑스러웠고 행복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있어 나는 선생님으로 남을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추운 겨울에도, 찌는 무더위에도 학교를 믿고 선생님의 말씀을 따르며 야간자율학습을 하며 자신의 길을 개척해왔습니다. 여러분들은 부모의 희망이고 학교의 영광입니다. 그리고 이 나라의 소망의 빛이 될 것입니다. 이의 성취를 위하여 여러분들이 지니고 있는 힘을 다 쏟아주기를 당부합니다.
내가 수업시간이면 여러분들과 함께 낭송했던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끝으로 오늘 나의 퇴임식을 기념하기 위하여 참석하신 모든 분들과 여러 선생님들, 그리고 이곳에는 나오시지는 않으셨지만 나의 퇴임의 소식을 듣고 계시시는 모든 분들과, 우리 학생들과의 귀중한 만남과 헤어짐을 위하여, 이 시를 낭송하며 저의 퇴임인사를 마치고자 합니다. 제가 이 시를 낭송할 때 우리 학생들도 함께 따라서 낭송해주면 고맙겠습니다.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시를 사랑하고 시를 아는 모든 이에게, 선생님의 가르치심을 받은 모든 제자들에게 꽃이 되신 스승 님! 님은 영원한 선생님이시고 시인이십니다. 퇴임이라는 덫이 님의 길을 가로 막아도, 님의 가르치심은 덫을 넘어 온 누리에 잔잔하게 울려 퍼집니다. 님은 고운 마음의 시인이십니다. 항상 얼굴에 홍조를 띠시고 웃으시는 님은 내 마음의 시인이셨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많은 사람을 만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기억에 남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님은 저와 짧은 기간을 만났으니 제 기억에 깊게 조각된 스승으로 남습니다. 단지 시만으로의 스승이 아닙니다. 인간을 읽혀주는 가르침이 제 기억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영원합니다. 인간이 비록 한계의 생을 가지고 사나, 시인은 영원을 호흡하며 우주를 안고 살고 있지요. 이건 아마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인듯 합니다. 제가 늦으막에 시를 골부하는 것은, 어떤 설교보다고 아름다운 시가 긴 세월을 존재하면서 중생들을 가르치기에 감히 이 대열에 끼고 싶은 것입니다. 저는 스승님에게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언제까지나 시를 배우고 인간을 배우고 삶을 배우고 싶습니다. 거침없이 이 제자를 가르쳐 주십시오. 어떤 질책도 흠쾌히 받으면서 시를 배우고 인간을 베우고 싶습니다. 내내 건강하시고 위대한 시인으로 영원히 남으소서. 스승님의 평안과 건승을 기도합니다.
짜임새가 있으면서도 멋있고 다정한 퇴임사를 봅니다. 앞으로도 과제와 일이 많으리라 믿습니다.. 발전과 건승을 축원합니다!!!!!!!!!!!!!!!
슬픔이 고여와 끝까지 읽기가 힘이 듭니다.
김춘수님의 꽃을 학생들과 소리를 모아 낭송하실 땐 가슴이 뭉클 했습니다. 강당 안이 온통 꽃물결로 그 물결이 또 하나의 큰 꽃으로 보였습니다. 처음 교수님을 만나 첫 시간에 그 시를 패러디했던 저로서는 또 남다른 감회로 다가왔던 잊지못할 시간이었습니다.
35년간 교직에서 청렴하게 지내신 님께 경의와 존경을 보냅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 이형기 님의 낙화를 교수님의 퇴임사에서 만나는군요. 가슴 뭉클한 교수님의 퇴임사를 읽으며 많은 생각속에 잠기다 만남과 이별의 의미를 잠시 생각해보고 갑니다. 제자들의 가슴에 존경의 스승님으로 길이 남으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