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트롯(trot)’이 대세다. 전성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미스트롯>,<미스터 트롯>이 코로나 감염이 폭증하던 한 복판에서 TV조선에서 방송되며 시청률 28.6%(분당 최고 시청률 30.2%)로 종합편성채널 10년 역사 이래 지상파를 포함한 전 채널 예능 프로그램 첫 방송 역대 최고 시청률 기록하며 대한민국 트롯오디션의 신기록을 보여주었다.
그동안 ‘트롯’은 명절이면 씨름대회와 함께 텔레비전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TV만 틀면 트롯이 나온다. 뉴스(news) 팔이가 본업인 종편매체가 트롯 쇼 프로그램 하나로 먹고 산다. 1년 전에 뽑은 <미스터 트롯>가수들로 재탕, 3탕, 4탕 계속 찐하게 수익을 짜내고 신상 <미스트롯2>까지 대박이다. 기가 막힌 사업모델이요, 아이템이다. 방송채널마다 앞 다투어 트롯이다.
시청률 고공행진 못지않게 얼마전 열렸던 <미스트롯2> 경선에서는 시청자의 문자 투표가 400만 명을 넘어 섰다니 놀랄 노 자(字)다. 팬심이 나무라면 응원 문자투표는 열매인 셈이다. 국민들이 응원하고 국민들이 우승자를 선택하는 말 그대로 오픈(open)경선(競選)이다. 민심을 읽지 못하는 어느 정당도, 정치도 이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대단하다.
요즘 유행을 창조하는 대세는 레트로(retro)가 아닌 뉴 트로(new-tro)다. 복고(retro)를 새롭게(new) 즐기는 뉴 트로(new-tro)다. 트롯이 그렇다. ‘옛것’의 가치에 ‘요즘’것의 새로움을 더한 뉴트로는 잊혀졌던 옛 것의 재발견이라고 할까. 도대체 <미스트롯>, <미스터 트롯>이 어떤 매력이 있기에 이토록 사람들이 빠져들고 열광할까. 사람들은 트롯에서 무엇을 찾고 있는가. 이 시대 트롯이 주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시청자들이 선택하는 공정한 오디션(audition)이다. 무명가수의 삶에서 오디션을 통해 일약 스타가 되었다. 세상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했던가. 한치 앞을 알 수 없다. 미스 트롯에서 발견한 것은 생계형 행사장 가수의 가슴 아픈 모습이었다. 노래가 생업이지만 오를 무대가 없어 생계가 어려워지고 살아갈 희망마져 포기했던 그들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그런 모습으로 장터, 행사장을 뛰어다니는 트롯 가수들의 아픔을 진솔하게 많은 시청자에게 전달됐고 그들을 다시 보게 되는 그런 의미가 있었다. 치열한 패자의 부활전, 인생 역전에 도전한 그들의 삶이 담겨 있었다. 노래만이 아니라 인생이 그렇다. 마이크 하나들고 전국을 떠돌며 노래 하나로 살아온 그들이 시청자들의 선택에 의해 영웅으로 등장했다. 신선했고 자랑스러웠다. 박수 받아 마땅하다. 그 중심에는 공정한 오디션 프로라는 장<미스트롯>의 송가인, 홍자 이후, <미스터 트롯>의 임영웅이 나왔다. 또 <미스트롯2>의 양지은과 새로운 인물들이 계속 등장하고 있다.
추운 겨울이 가고 봄이 오듯 우리네 인생도 그러하다. ‘트롯’이라는 노래는 얼마나 어떻게 숙성시켰는지에 따라 깊이와 감동이 다르다. 남의 노래를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래를 자신의 이야기로 풀어가는 것이 실력이었다. 아픔을 딛고 저마다 가진 인생스토리를 풀어내고 있다. 우리와 다르지 않다. 그들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꿈을 갖고 성실히 노력하면 언젠가는 눈부시게 아름답게 비상한 날이 온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들은 젊은이들에게 또 다른 꿈을 품게 하였고 세상에 희망이 되었다.
최근 몇 년 동안 ‘금수저’라는 신조어가 논란되었고, 우리 사회에는 ‘공정’과 ‘정의’가 깨어지고 노력한 것이 결과로 나타나지 않는 우울함을 던져 주었다. 부모의 힘과 재력으로 노력 없이 무임승차해서 누리는 삶을 사는 이들을 보며 평범한 젊은이들은 삶의 의욕을 잃고 좌절할 때. 자신의 가진 재능 하나로 다시 재기하는 역전의 드라마는 보는 이들을 황홀케 했다.
얼마전 연세가 있으신 지인께서 요즘 트롯에 심취하여 카세트테이프(cassette tape)를 찾으셔서 예전의 70~80년대의 테이프를 어렵게 구해 드렸다. 트롯에 감동을 받고 영혼과 마음이 위로를 받는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부르는 가수들 역시 스스로가 자신의 노래에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고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감사해 한다. 우리나라 사람만큼 노래를 즐기는 민족도 드물다.
<미스트롯>이나 <미스터 트롯>의 주인공들이 주는 것은 위로만이 아니다. ‘연예인’이라는 특수성이 아닌 우리와 같다는 친근한 대중성에 있다. 마치 동생같고, 옆집의 아들 딸 같아 친근스럽다. 그들은 요즘 또래의 청년들이 놓치기 쉬운 아름다운 품성과 함께 겸손과 배려가 묻어 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앞이 보이지 않는 오랜 무명시절을 겪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보여준 반듯한 삶의 자세는 그들의 노래와 함께 보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이 된다.
출전자는 모두 경쟁자다. 그러나 경쟁이 의미가 없다, 다들 눈물의 시간을 보내며 밑바닥을 경험하였기에 이미 경쟁자가 아니라 함께 하는 동역자가 된다. <미스터 트롯>의 임영웅과 영탁, 장민호도 세 사람은 경쟁자다. <미스트롯2>의 양지은, 홍지윤, 은가은, 별사랑 등 하지만 그들은 서로 격려하고 칭찬하고 상대의 잠재능력을 끄집어내서 높여 준다. 그들의 끈끈한 우정과 의리는 함께 가야 오래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더불어 우리는 그들을 보며 경쟁 관계에서 잃어버린 건전한 파트너쉽(partnership)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된다. 그들은 무명시절을 겪으며 갈증과 결핍으로 포만감을 느껴 본 순간이 별로 없었을 텐데도 이제 비로소 받은 진수성찬 앞에서 허겁지겁 자신만의 욕심을 채우지 않는다. 상대방의 빈 접시에 음식을 덜어주고 서로서로 맛있게 먹는 걸 지켜보며 미소 짓는 여유와 배려가 있다.
감성의 시대다. 서로 경쟁하고 제압하고 자기편을 만들어야 살아남는 현실에 국민은 피곤하다. ‘트롯’은 코로나로 일상에서 피곤하고 지친세대에 위로를 주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성악이나, 가곡처럼 악을 쓰듯 내지르는 큰소리에 긴장하고 지쳐 있었는데, 비로소 이야기하듯 30초에서 90초 매직(magic)으로 다가와 다정다감한 노래를 만나 위로를 받기 시작했다. 노래를 통해 위로받을 수 있다는 건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그들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마치 누군가가 내 언 손을 잡아주고, 시린 가슴을 덥혀주고 퉁퉁 부은 발이 푹신한 털신 속으로 쏙 들어갈 때의 그런 편안함과 따뜻함이 있다.
하루하루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는 <미스트롯> <미스터 트롯>, 하지만 최근 많은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지나친 팬심이 경쟁이 되어 악성 댓글이 양산되기도 했고, 과거의 일 때문에 하차를 하는 참가자도 등장하고 있다. 사실 음악성보다 지나친 노출의 선정성, 가벼운 노래만으로 흥행성을 돋우려는 진행에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정통 트롯이라면 어린이들의 재롱 잔치를 넘어 세대를 아우르는 노력이 더 필요해 보인다. 정통 트롯을 말하는 시청자, 관객 중 <미스트롯2> 오디션에서 별사랑은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정통 트롯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자신만의 노래를 불렀다. 힘들게 코로나를 견디는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삶을 살아가려는 그런 이들을 보고 싶어 한다. 그래야 지치지 않고 위로받고 힘을 얻을 수 있으니까. 그들이 그런 역할을 착실히 해내고 있다.
코로나의 불안속에서 트롯의 열풍으로 이어지는 대중의 마인드를 읽는 것은 중요하다. 문화현상, 문화 코드를 제대로 읽어야 사회가 발전한다. 보고 읽고 생각하고 글 쓰고 발표하고 몸부림치므로 세상을 읽는 혜안을 가지게 되는 것 아닐까. 트롯 전성시대를 방송을 보며 교회를 다니다 보니 본의 아니게 문뜩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다. 교회도 은혜로운 찬양을 이 시대에 맞게 편곡해서 대중에게 다가가 보면 어떨까. 클래식한 곡만이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인가. 국악찬양은 되고 힙합(hiphop)이나 랩(rap)으로 찬양하면 안되는 걸까. 트롯찬양, 뽕짝찬송은 커트라인(cut line)에 걸리는 것인가. 성령 뽕필 트롯 찬양가수가 찬양 트롯을 들고 <미스트롯>에 과감하게 도전을 한 그 용기에 큰 박수를 보내며 기독교TV 방송들도 천편일률(千篇一律)적인 설교방솜만 할 게 아니라 다양한 콘텐츠(contents)개발의 대안은 없을까. 꼭 교회만이 아니라 한국사회 전반에 굳어진 생각의 변화, 사고의 유연성이 필요하지는 않는가.
우리가 그들에게 열광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동안 편견적 시각에 갇혀 있던 ‘트롯’이라는 그 벽을 깨며 향토성 짙은 트롯의 깊은 맛을 보게 해준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사람냄새 풀풀 나는 젊은이들이 보여준 훈훈한 삶의 소통자세 때문 아닐까. 그래서인지 ‘트롯은 장년층의 레퍼토리’라는 가설은 이제 통하지 않을 것 같다. 어느 덧 세대를 넘어 청소년들까지 열광하며 국민가요로 등장한 것 아닐까?
글쓴이 이효상 원장(시인, 수필가, 칼럼니스트, 다산문화예술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