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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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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스크랩 퇴계 이황 선생은 가문의 자존심 <대구경북씨족사> (9)진성이씨(眞城李氏)
이장희 추천 0 조회 258 14.05.10 14:2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퇴계 이황 선생은 가문의 자존심 <대구경북씨족사> (9)진성이씨(眞城李氏)

진성(진보)이씨(眞城李氏)는 동방의 대학자를 배출한 명문가이다. 대부분 가문이 득성시조의 연원을 신라나
그 이전으로 잡고 있어 시조의 행적이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다. 비록 시조 행적이 전해진다 하더라도 이어지는
계보는 단맥으로 중시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각 가문별로 제대로 된 가계가 이어진다.

진보이씨 득성시조인 이석(李碩) 또한 고려 말 인물이다. 그가 사마시에 합격해 신분 상승을 이루고 그의 후대에
이르러 가문이 번창했다. 진보이씨는 고려 말에 득성한 까닭에 대수가 짧고 시조와 이어지는 후손의 행적이
확실하기 때문에 가문에 견주어 세계(世系)도 단촐하고 가계도 비교적 알기 쉽다.

시조인 이석으로부터 이황까지는 7세대이다. 이황의 웃대는 형제이고 조부대는 삼형제다.
이우양은 와룡면 주하리 일명 두루에 세거해 ‘두루종가’라 불린다.
이흥양은 망천리에 세거해 ‘마래종가’라 부르며
셋째 이계양은 처음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 자리를 잡아 ‘노송종 종가’라 부르며
여기에서 해동의 주자, 퇴계 이황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진보이씨의 시조인 이석의 묘소는 청송군 파천면 신기리에 있다. 청송 방향 31번 국도쪽으로 5㎞정도 지점에
오른쪽으로는 지동 ,왼쪽으로는 옹점 가는 길을 알리는 도로 표지판이 서 있다.
그곳에서 바로 송강교로 이어 지는데 송강교를 지나자마자 도로 왼쪽에 ‘진성 이씨 시조 묘소 입구’라 새긴 큰 표지석이 있다.
표지석이 있는 길로 좌회전해서 들어가보면 시조묘를 수호하는 기곡재사가 나온다.
그 재사 언덕에 있는 시조의 산소를 감람묘(甘藍墓)라고 부른다.

진보이씨가 안동에 세거지를 정하면서 가장 먼저 명문의 기틀을 닦은 인물은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진 이자수이다.
시조인 이석의 아들인 그는 충목왕 때 급제한 뒤 공민왕 10년(1361)에 홍건적이 고려를 침략시 개경 수복에 큰 공을 세워
공신에 책록되고 송안군에 봉해졌다. 벼슬이 통헌대부 판전의시사 에 이르렀으나 왜구의 침탈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거처를 정하지 못하다가 고향에 가까운 안동에 오게 되었다. 그가 바로 진보이씨 안동입향시조인 것이다.
처음 자리 잡은 곳은 풍산읍 마애(마래)이다. 이자수는 말년에 마래를 떠나 와룡면 주하리 두루로 자리를 옮긴다.
이자수의 산소는 서후면 명리 속칭 진골(두솔원)이라 하는 곳에 있다.

? 진보이씨 온혜 입향조
온혜는 청정한 산골 마을이다. 온혜를 중심으로 서편은 안동, 동편은 청량산 방향이다.
이 곳에 처음 자리 잡은 인물은 퇴계 이황 선생의 조부인 이계양이다.

공은 처음 예안현 동쪽인 부라원(부포)에 살았는데 봉화현 교도가 되어 봉화로 가던 도중 온계를 지나
신라 고개에 쉴 때 한 중을 만났는데 그도 온계에서 오는 길이라 함께 쉬다가 온계 풍수의 아름다움을 말하게 되었다.
공이 중의 생각과 자기의 생각이 같음을 기뻐해 중과 함께 다시 온계로 돌아와 주위를 오르내리면서 두루 살피다가
어느 한 집터를 공이 가리키니 중이 “이곳에 자리를 잡으면 마땅히 귀한 자손을 볼 것 입니다”라고 하니 공이 마침내
옮겨 살 것을 결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단종 즉위년인 계유년(1450)에 사마시에 합격해 봉화현 훈도가 됐다.

2년뒤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선양하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부라원(부포)에서 온혜로 돌아와 집 앞에
소나무 한 그루를 심고 자신의 집을 노송정(老松亭)이라 이름한 것이 도산 온혜의 입향 시조이다.
그 뒤 한번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온혜의 서쪽에 국망봉(國望峰)에 단을 쌓고 매년 10월 24일이면 단에 나아가
북쪽을 바라보고 절하기를 30여년, 단종의 절의를 지킨 생육신에 비견되는 삶을 살았다.

? 노송정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의 노송정(老松亭)은 퇴계의 조부 이계양이 1454년에 지었다.
이계양이 봉화 훈도로 있을 때 굶주려 쑤러져 있는 스님을 구해 준 적이 있었는데
그 스님이 “이 곳에 집을 지으면 자손이 귀하게 된다”며 터를 잡아 준 곳이라 전한다.
사랑채 건물에 노송정이라는 당호를 붙이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온혜초등학교 옆길을 따라 400여m 가면 노송정 고택에 이른다.
퇴계의 수제자 학봉 김성일이 ‘성인이 든 문’이라는 뜻의 ‘성림문(聖臨門)’이라고 지어 붙인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노송정이 있고 그 왼쪽에 퇴계태실과 함께 안채가 자리잡고 있다.

‘정(亭)’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으나 정자라기보다는 널찍한 대청을 갖춘 사랑채다.
그러나 성주의 한주정사(寒州精舍)처럼 안채와 별도의 담장을 두른 특별한 공간으로 꾸며진 것으로 보아
정자의 기능도 겸했던 것 같다.주변에 연못을 만들거나, 괴석을 가져다 두는 등의 별다른 조경을 하지 않았다.
퇴계 가문의 정결하고 단아한 성향을 엿볼 수 있는 건물이다.

정면4칸, 측면2칸의 이 건물은 6칸의 널찍한 대청과 2칸의 방으로 꾸며져 있다. 방 앞에는 별도로 한칸짜리 마루를 덧붙였다.
정자나 양반집의 대청 기둥은 대부분 두리기둥인데 비해 이 건물은 사각기둥이다. 앞쪽을 틔우고 뒷부분과 옆은 판문을 달았다.
판문의 모서리와 가운데는 곳곳에 국화무늬의 작은 철판을 달아 정갈하면서도 정겨운 느낌을 준다.

이 건물의 안채에서 태어난 퇴계가 이곳에서 할아버지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것을 기리기 위해 건물 곳곳에는
퇴계와 관련된 현판이 걸려 있다. ‘노(鄒)나라 사람인 공자와 추(鄒)나라 사람인 맹자처럼 해동에서 태어난 성인’이라는 뜻의
‘해동추로(海東鄒魯)’라는 큰 현판과 ‘낙양사람인 程子와 민중사람인 朱子처럼 영남(산남)에서 태어난 성인’이라는 뜻의
‘산남낙민’이라는 큰 현판이 서로 대구(對句)를 이뤄 걸려 있다.

단종이 폐위되자 출사를 단념한 이계양은 산(국망봉)에 올라 곡을 하면서
“늦은 오후 눈앞에 연기구름 아득하니/ 용문산도 덮였는데 초나라 성문이야 물어 무엇할꼬/
대궐 깊은 곳 알려거든/ 하늘가 가물대는 흔적 하나 살펴보소”라며 단종을 그리며 시를 짓기도 했다.

한편 이황은 어릴 적 이곳에서의 추억을 잊지 못해 뒷날 이 곳에 내려와 “반반한 큰 돌 하나 비스듬히 기울어 있는데/
한줄기 시내가 아름다이 감고 도누나/ 산꽃 다시 피었기를 바랐는데/ 지금 내가 너무 일찍 왔는가”라고 읊었다.

산중에서는 드물게 제법 넓은 벌판을 내려다보고 시원스레 서 있는 노송정에서 우리는 퇴계의 숨결을 다시 한번 느껴본다.
최근 기와를 새로 얹어 고풍이 넘치는 목재와 아직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 조금 아쉽다.

?퇴계 이황
동방 유학의 성현으로 꼽히는 퇴계 이황(1501~1570)은 우리나라의 자랑이기도 하지만
안동의 명문 거족인 진성 이씨 가문의 자존심 그 자체이다.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일대에 진성 이씨가 처음 터를 잡은 것은 퇴계의 조부인 노송정 이계양(1424~1502)때부터.
노송정은 이식(1463~1502)과 이우(1469~1517)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식의 일곱째 아들이 바로 퇴계이다.

어릴 때 이름이 서홍(瑞鴻)이었던 퇴계는 태어난지 7개월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중종반정 공신으로 이조좌랑, 경상도 관찰사 등을 지낸 숙부 이우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그는 성품이 엄격하여
자식을 칭찬하는 일이 없었으나 퇴계에 대해서만은 늘 집안을 빛낼 아이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퇴계는 세 번이나 과거에 떨어진 뒤 27세때 진사가 되었고, 33세때 문과에 급제했다.
호조좌랑, 형조좌랑, 충청도 암행어사 등을 거쳐 43세때 성균관 대사성을 맡았다.
을사사화때 연루돼 삭탈관직 당했으나 이듬해 복직돼 대사성, 우찬성, 대제학을 마타 69세때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같은 관직생활 가운데서도 학문에 뜻을 둔 퇴계는 20여차례나 사직서를 제출,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불려오기를 반복했다.

퇴계는 주자가 제시했으나 그 근원적인 문제를 다루지 못한 이기이원론을 이(理)와 기(氣)의 상호작용으로 해석,
조선의 성리학을 집대성하고 중국의 성리학보다 그 학문의 깊이를 한 단계 높였다.
퇴계의 위대한 점은 이 같은 학문적 성취보다 그의 학문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26세 연하의 고봉 기대승과 가진 8년간의 서신 논쟁은 유명하다. 학문에 대한 그의 진지하면서도 개방적인 자세는
이미 대유학자로 칭송받던 퇴계가 고봉의 지적을 받아들여 자신의 학설을 스스럼없이 수정하기도 했던 것이다.

최근 사학의 원로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학설에 반하는 이론을 내놓아 화제가 된 일이 있을 정도로
아직까지 스승의 학문에 대드는 것을 금기사항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퇴계의 학문에 대한 열린 마음은 오늘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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