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그랬지 / 능소화가 웃는 이유
김성한
널따란 운동장에 푸르스름한 저녁 이내가 깔리기 시작한다.
조금 전까지 느티나무 밑에서 고무줄놀이를 하던 계집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 이천 봉….”
단발머리 팔랑거리며 부르던 노랫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교실 창가에 앉아 바깥을 내다보고 있는 빡빡머리 소년의 얼굴에도 보얀 이내가 내려앉았다. 초조한지 애먼 몽당연필만 뱅글뱅글 돌린다. 때 전 책상 위에는 앞표지가 반쯤 뜯긴 동아 수련장(문제집)이 놓였다. 언제쯤 수업을 마칠까? 선생님 눈빛을 보니 오늘도 일찍 끝나기는 글렀다. 지난해 가을까지만 해도 이 시간쯤이면 끝이 났던 과외공부였다. 그러던 것이 올봄, 학교에 전깃불이 들어온 뒤로는 밤늦은 시각까지 공부하는 날이 많았다. 거기에다 지난봄인가, 교장 선생님이 육 학년 담임선생님 두 분을 교장실로 부르더니 “올해는 대도시 일류 중학교에 서너 명은 합격시켜야 합니다.”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날이 갈수록 집으로 가는 시간이 늦어진다. 그나저나 소년은 걱정이다. 이렇게 늦은 날 밤이면 귀신울음 소리 나는 외딴 김 씨 아저씨 집 앞을 지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김 씨 아저씨는 6·25 난리통에 함흥인가 어디에서 내려온 이북 사람이다. 어찌하여 앞 뒷산이 등을 맞대고 있는 이곳 산골 마을에 들어와 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소년의 할아버지 댁에서 머슴살이했던 분이다. 중지와 검지가 반쯤 잘려나간 오른손에는 총 맞은 자국이 선명하였다.
“내래 백마고지 전투에서 이렇게 되었수다레.”라며 그 뭉툭한 손으로 소년의 가냘픈 손을 덥석 잡을 때에는 기겁하여 내빼기도 했다. 그러나 참으로 자상한 분이었다. 두벌 논매기가 끝나는 여름철이면, 반두를 들고 동네 앞 냇가에 피라미 잡으러 가자며 툇마루에서 낮잠 자는 소년을 불러내곤 했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한겨울 밤에는 쇠죽 끓이는 아궁이에 묻어둔 고구마를 몰래 손에 쥐여 줄 때도 있었다. 얼굴에는 늘 웃음이 떠나지 않았던 분이었다. 얼마나 알뜰한지 해마다 받은 새경은 허투루 쓰지 않았다. 차곡차곡 모아서 다랑논도 사고 아저씨 손가락처럼 끝자락이 뭉툭한 밭떼기를 사모았다. 이런 아저씨를 본 동네 어른들은 “오갈 때 없는 참한 색시라도 있으면 짝을 맞춰줘야 하는데….”며 늘 걱정을 하였다.
그런 아저씨가 변해 버렸다. 본(本)이 같다며 일가처럼 대해주던 아래뜸 김 씨가 이북 아저씨 돈을 떼어먹고 야반도주를 한 것이다. 피붙이 하나 없는 이곳에 일가라고 믿고 맡긴 것이 화근이었다. 그 선하던 눈빛부터 달라졌다. 농사일은 하지도 않고 주막에 살다시피 했다. 이를 보다 못한 할아버지가 조용히 불러 타일러도 보았지만 쇠귀에 경 읽기였다.
어느 날 아저씨가 마을에서 사라졌다. 이른 새벽이면 남 먼저 일어나던 아저씨가 해가 중천에 떠올랐어도 기척이 없기에 문을 열어보니 빈방이었다. 보따리 몇 개만 챙기고 떠나갔다. 스무 남은 집 되는 온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쯧쯧 그 착실하던 김 씨가 사람을 잘못 만나서….”라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눈에 안 보이면 정도 멀어진다고 했던가.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김 씨에 대한 기억도 세월 속으로 묻혀버렸다. 몇 마지기 안 되는 아저씨 논밭에는 개망초가 지천으로 피었다. 잡초 한 포기 없이 말갛던 밭이 묵정밭으로 변해 버렸다. 가끔은 우시장 터 색시 집에서 봤다는 소문도 들려 왔지만, 동네에는 얼굴 한 번 내밀지 않고 몇 년이 흘렀다.
가을걷이가 얼추 끝이 난 어느 해 늦가을 무렵 김 씨 아저씨가 돌아왔다. 대낮에 오기가 부끄러웠는지 어둠살이 내려앉을 무렵 동네에 나타났다. 얼굴이 살짝 얽은 색시까지 데리고 왔다.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친척집을 전전하던 색시를 우시장 터 국밥집에서 만났다고 했다. 천성이 고운데다 서로 사고무친의 외로운 신세이다 보니 금방 가까워졌을 거라 수군댔다.
김 씨가 돌아오던 날 저녁, 동네 앞 느티나무 밑에는 잔치가 벌어졌다. 평상 위에는 밀주 한 동이가 놓여 있고, 솥뚜껑을 뒤집어 놓은 철판에는 부침개 굽는 냄새가 진동하였다. 막걸리 한 사발을 단숨에 들이켠 아저씨가 울면서 이야기했다.
남한으로 내려와 떠돌아다니다가 첫 정이 들어버린 곳이 이 마을인지라 어디를 가도 잊지 못하겠더란다. 도회지 방직공장에도 기웃거려 보고, 술도가에서 막걸리 배달도 해봤지만 마음 다잡고 살만한 곳은 아닌 모양이었다. 봄이면 뒷산 뻐꾸기 소리가 이명(耳鳴)병 걸린 사람처럼 귀에서 앵앵거리고, 여름이면 논둑에 둘러앉아 자기만 쏙 빼놓고 들밥을 먹는다고 생각하니 못 참겠더라고 했다. 뭐니 뭐니 해도 동네 사람들의 살가운 정이 그리웠다며 눈물까지 흘렸다.
그런 김 씨가 동네 들머리 빈집을 뚝딱뚝딱 고치더니 신혼살림을 차렸다. 대대로 양반 댁이 살았다는 그 집은 오랫동안 비워놓아서인지 음산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꼬맹이들 사이에는 ‘귀신집’으로 불리었다. 능소화 한 송이가 길바닥으로 툭 떨어지던 날 밤, 뒷집 남식이는 귀신 울음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김 씨 내외가 이 집에 들어온 뒤로부터는 저녁마다 귀신 소리가 들린다는 것이다. 그 소름 끼치는 집 앞길을 오늘도 지나가야 한다.
마침 종이 울림과 동시에 반장의 구령 소리에 퍼뜩 정신이 돌아온다.
“차렷, 선생님께 경례”
“선생님 감사합니다.”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던 산수 교과서와 수련장을 검정 책보자기에 싸고는 후다닥 교실 문을 빠져나온다. 배에서는 쪼르륵 소리가 난다. 점심이라고 꽁보리밥 도시락을 먹은 뒤로 입맛 다신 게 없었으니 배고픈 것은 당연하다. 시오리나 되는 길을 타박타박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소년. 한 시간쯤 왔을까. 저 멀리 김 씨 집이 희미하게 보인다. 살금살금 집 앞으로 다가간다.
“아이 구 흐흐흐∼”
매양 들려오던 여자 귀신 울음소리가 오늘은 들리지 않는다. 대신 우윳빛 장지문에는 얼금뱅이 새댁의 목물하는 실루엣이 희미하게 비친다. 그렇지만 언제 또 귀신 울음소리가 날지 모른다. 검정 고무신을 벗어 손에 들고는 ‘귀신아 날 살려라’며 냅다 뛰어간다.
흙담벽을 시나브로 타고 오르던 능소화가 뛰어가는 소년을 향해 웃으며 중얼거린다.
“꼬마야 괜찮아, 귀신이 아니야, 너도 크면 다 알아.”
첫댓글 긴박한 심정...무얼까요 마지막 행에서
선생님 좋은글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