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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涅槃)과 해탈(解脫)의 차이>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열반(nibbāna)이며,
열반은 탐ㆍ진ㆍ치가 소멸된 상태이다.
일반적으로 열반과 해탈을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근본경전에 의하면 차이가 있다.
우선 열반과 해탈은 말뜻이 다르다.
열반은 불이 꺼진 상태를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를 번역한 말이고,
해탈은 벗어났다는 의미의
산스크리트어 비목사(vimoksa)를 번역한 말이다.
열반은 불교의 독특한 용어이고, 해탈은 외도들도 쓰는 말이었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은 탐(貪)ㆍ진(瞋)ㆍ치(癡) 삼독의
불길에 휩싸여 있다고 하셨다. 열반은 세상을 불태우는
삼독의 불길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의미한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이러한 열반의 성취에 있다.
해탈은 벗어난다는 의미이고,
어떤 구속이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을 해탈이라고 한다.
따라서 해탈은 구속이나 속박의 수만큼 많지만
크게는 욕망에서 비롯된 번뇌로부터 해탈과
진리에 대한 무지, 즉 무명으로부터의 해탈이 있다.
전자는 심해탈(心解脫)이라 하고, 후자를 혜해탈(慧解脫)이라 한다.
그리고 오분법신(五分法身) 가운데
계ㆍ정ㆍ혜 삼학을 수행해 성취하는 해탈신(解脫身)은 심해탈을 의미하고,
해탈지견신(解脫知見身)은 혜해탈을 의미한다.
이들을 다 갖춘 해탈을 구해탈(俱解脫)이라고 하며,
이들을 삼해탈(三解脫)이라 부른다.
간단히 말하면, 열반은 불교수행의 궁극적 목적으로서
구해탈을 성취힌 것을 말하고, 해탈은 수행을 통해
번뇌가 완전히 소멸될 때 번뇌에서 벗어난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열반은 완전한 행복을 의미하고, 해탈은 완전한 자유를 말한다.
열반(涅槃)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aana)는
nir(없어진)+√vaa(불다)의 과거분사로 ‘불어서 없어진’,
‘불어서 꺼진 상태’란 뜻이다.
예를 들면, 바람이 불어서 촛불이 꺼진 상태를 생각하면 된다.
마치 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서 꺼버리듯이,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의 바람으로 불어 꺼서
일체의 번뇌가 소멸된 상태를 가리킨다.
즉, 갈애가 꺼진, 소멸한 것이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그래서 열반을 적멸(寂滅), 안락(安樂), 무위(無爲) 등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열반의 특징을 santi(고요함, 평온함, 寂靜)라고
<청정도론>과 같은 경전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이를 중국에서는 열반적정(涅槃寂靜)으로 번역했다.
따라서 열반은 불교에 있어서 궁극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탐ㆍ진ㆍ치가 소멸된 아라한은 수행의 결실이자 완성이다.
수행을 통해 도달하는 궁극적 경지이다.
그런데 열반이 부처님 당시에도 외도에게는 없는 말이어서
니르바나(열반)라고 하는 개념에 대해 상당히 어려워했고,
심지어 비구들도 열반이라는 개념이 이해가 안 돼서,
사리불(舍利佛)한테 묻고, 사리불이 답했다.
“사리불이여! 열반, 열반하고 말하는데 열반이란 대체 무엇인가?”
“벗이여! 무릇 탐욕의 소멸, 분노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
이것을 일컬어 열반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벗이여! 그 열반을 실현할 방법이 있는가?
거기로 갈 길은 있는가?”
“벗이여! 성스러운 팔정도(八正道)야말로
그 열반을 실현하는 방법이다.”라고 답했다(S38:1).
그리고 불교에 있어서 궁극(窮極)은 몇 가지 측면이 있는데,
• 지적인 면에서는 깨달음,
• 정서적인 면에서는 열반,
• 모든 괴로움의 짐을 내려놓는다는 면에서는 해탈이라 하겠다.
따라서 열반은 불자가 ‘지금’ 구현해야 할 이상적인 경지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리고 열반은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욕애(慾愛)]와
존재에 대한 갈애[깊은 선정체험의 경지―유애(有愛)]와
존재하지 않으려는 갈애[무유애(無有愛)]로 설명되는
모든 종류의 갈애가 다 사라진 경지이며,
탐(貪)ㆍ진(嗔)ㆍ치(癡)로 표현되는
모든 해로운 심리현상[不善法]들이 모두 사라진 상태이다.
그러면 무엇으로 이러한 해로운 심리현상들을 불어서 끌까?
바로 팔정도(八正道)라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열반은 팔정도의 실천을 통해서 구현하게 되는 궁극의 경지이다.
그러므로 열반은 죽어서 실현되는 경지가 결코 아니다.
열반(涅槃)은 타생(他生)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열반과 죽음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엔 큰 스님의 죽음을 열반이라 하기도 한다.
이러한 열반을 죽음과 연결 지어 사용하게 된 것은
일찍부터 부처님이나 아라한이나 깨달은 분들의
죽음을 빠리닙바나(parinibbaana, 반열반/槃涅槃)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중국ㆍ한국 등 동아사이에서는
큰스님들의 입적을 반열반이라 표현하게 됐고,
그냥 줄여서 ‘열반’, 곧 스님들의 임종을 아무 생각 없이
열반에 들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원래 열반은 번뇌의 반대말이다.
따라서 마음을 혼란케 하고 불안하게 하는 번뇌가 모두 없어진 경지를 말한다.
열반은 팔정도를 통해서 지금 여기[現今]에서 실현해야 하는 경지를 말한다.
그래서 경에서는 ‘열반의 실현’이라는 표현을 쓴다.
해탈(解脫)은 빠알리어 위목카(vimokkha0, 위무타(vimutta),
산스크리트어 비목사(vimoksa), 비묵타(vimukta), 목사(moksa) 등을
번역한 말이다.
그래서 한역해서 비목차(毘目叉, 毘木叉),
또는 비목지(毘木底)라 음역하기도 한다.
미혹의 세계를 넘는다는 뜻으로 도탈(度脫)이라고도 하고,
열반과 같이 실천도의 구극 경지를 나타내는 말이면서,
윤회의 종식을 말한다.
그리고 해탈의 경지는 평등하고 차별이 없으므로 일미(一味)라고도 한다.
고대인도의 종교 전통은 윤회라고 하는 사유방식에 근거하며,
윤회를 벗어나 해탈을 추구하는 것을 지상목표로 삼고 있었다.
불교 역시 그러한 토양에서 발생하고 발달한 종교이기에,
해탈을 통해 윤회의 삶을 벗어나고자 하는 특징을 공유하게 됐다.
그러한 의미에서 해탈은
고(苦)와 번뇌, 윤회로부터 해방된 구극의 경지로서
자유의 개념을 나타낸 말이다.
즉, 인간의 속세적인 모든 속박과 장애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되는 상태[무애자재(無碍自在)],
인간의 근본적 아집(我執)으로부터 해방을 의미했다.
‘해탈’에서 해(解)는 푼다는 말이다. 문제를 풀다, 번뇌를 푼다는 말이다.
그리고 탈(脫)은 탈출, 즉 벗어난다는 말이다.
그러니 해탈이란 번뇌를 풀어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즉, 지적인 면에서는 깨달음, 정서적인 면에서는 열반,
모든 괴로움의 짐을 내려놓는다는 면에서는 해탈이다.
중생은 탐 ․ 진 ․ 치 등 번뇌 또는 과거 업(業)에 속박돼 있으며,
이로부터의 해방이 곧 구원(해탈)이라고 봤다.
그래서 불교는 열반의 성취와 더불어 해탈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구원은 타율적으로 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노력, 즉 스스로 수행을 쌓아 밝은 지혜로 반야(般若)를 증득함으로써,
깨달음을 얻어 열반을 이루어 얻어지는 경지이다.
이와 같이 해탈이라고 하는 것은 고(苦)와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속박을 벗어났다는 것은 자유를 얻었다는 뜻과 같다.
해탈이 신비스러운 어떤 영적체험 상태나 경지가 아니다.
바로 삼법인(三法印)을 체득해 깨달으면 그것이 해탈이다.
회자정리(會者定離)를 깨달으면 모든 대상으로부터 애착을 거두게 된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알면 헛된 일에 매달리지 않는다.
제법무아(諸法無我)를 알게 되면 저절로 모든 집착을 버리게 된다.
이게 바로 해탈이다.
그렇다면 해탈이 곧 부처냐 하면, 그건 아니다.
해탈은 부처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삼법인의 절대 진리를 한 점 티끌만한 의혹도 없이
온몸으로 깨달아 납득했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생명체로서
심어진 뿌리 깊은 습기(習氣)가 남아있다.
이 습기를 제거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그것이 제거된 만큼 부처의 경지로 다가가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가장 궁극적인 단계까지
이 습기를 제거하신 분이다.
불교에서 가장 큰 혼동이 열반과 해탈을 같은 것으로 보는 시각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제자들이 가르침을 받아
열반에 이르렀다고 하기도 하고 해탈에 이르렀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확히 표현하자면, 열반과 해탈은 다른 것으로
먼저 열반에 이른 후에 해탈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과거 부처님의 육친 제자들 중에
열반에 이른 사람에 대한 기록이 있었으나,
해탈을 얻어 부처님과 같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음 생에 해탈을 얻어
부처가 될 것이라고 수기를 주신 것만이 남아있다.
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이 이룬 경지와
부처님이 이룬 경지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바로 그 차이가 열반과 해탈의 차이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오는 동안 깨달음의 실상에 대해 정확히 아는 사람이 드물어서
열반과 해탈이 혼동돼 그 실체가 모호해진 것이다.
그렇다면 열반과 해탈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해탈은 불교에서 삶과 수행의 궁극적인 지향점으로서 인간완성의 경지이며,
모든 속박과 한계로부터의 해방돼 대자유를 이룬 경지를 의미한다.
즉, 범부는 탐ㆍ진ㆍ치 등의 번뇌와 과거의 업(業)에 속박돼
생ㆍ노ㆍ병ㆍ사의 윤회의 굴레 속에 빠져 있으므로
여기서 벗어나 걸리지 않는 대자유를 얻는 것을 말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인간이 자신이 타고난 의식을 완전히 정화해
우주에서 가장 완성된 열매를 이룬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의식은 업과 욕망과 집착에 의해
얼룩져 있는 탁한 상태이다.
이것이 진리에 대한 밝은 마음과 세상에 대한 뜨거운 사랑,
그리고 수행정진을 통해 순수하게 정화하게 된다.
그래서 업의 작용이 정지되면 먼저 열반에 이르게 되고,
진리와 사랑의 불로써 지고 온 모든 업과 갈애와 사사로움을
완전히 불살라버리면 완전히 맑고 순수해져서 해탈이 온다.
즉, 열반은 업이 정지된 경지이며 해탈은 업이 사라진 경지이다.
그런데 열반의 경우 업이 활동하지 않고 정지해 있을 뿐
사라지지 않았기에 마음이 완전히 개이지 않아
세상을 있는 그대로 비치지 못한다.
비록 업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서
있는 일을 있는 그대로 알아보고 판단할 수 있지만,
업이 아직 남아 있기에 미완성의 경지이다.
즉, 열반은 업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평안을 얻은 것이기에
매우 조심스러운 평화이다.
따라서 크게 잘못된 인연을 만나면 자신을 다시 퇴보시킬 수 있다.
열반은 자기의 노력에 의해 평안을 얻는 경지이기 때문에
해탈과 달리 행동이 부자연스럽다.
그러나 해탈하면 모든 것을 졸업했기 때문에 조심할 필요도 없이
영원히 평안하고 자유자재하다.
모든 것이 맑게 개어 비치는 대로 행동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고
영원히 자유로우며 업 속에 들어가도 업에 물들지 않고,
빠져 나오면 다시 깨끗해진다.
의식이 티끌 한 점 없이 맑게 개어 아무 것도 속박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아무 것도 의식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생각하지 않으며
오직 비치는 대로 이것은 이렇다, 저것은 저렇다고 할 뿐이다.
실상(實相)을 볼 수 있는 경지이다.
모든 것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기 때문에
이 우주에서 아무 것도 간섭하거나 얽매는 것이 없다.
따라서 자기 스스로 자기를 결정하게 된다.
즉, 자기가 우주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업과 걸림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자기의 의지대로 한다.
윤회로부터 벗어난다고 하는 말의 진정한 의미이다. 이것이 해탈이다.
하지만 범부로서는 열반과 해탈의 차이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열반의 근처에도 못가는 처지에
열반이 뭐고, 해탈이 뭐라도 따질 필요가 없다.
해탈한 이는 진실함과 세상에 대한 사랑에
모든 거짓과 욕망과 삿됨과 집착을 불사르고
자신마저 세상에 바쳐 오직 깨어있는 맑은 의식만이 남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까지도 잊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무(無)가 아니라 완전히 정화된 깨어있는 맑음이다.
그래서 어떤 환경에 부딪히면 지혜가 생겨나고 원력이 생겨난다.
고요히 혼자 있으면 아무 것도 없지만
바깥에 나가 인연을 만나면 실상과 이치가 모두 비치고
우주의 주체가 돼 조화를 부리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해탈을 했다고 해도
육체를 가지고 있는 한 현실의 영향을 받는다.
영하의 날씨에 가면 춥고, 남이 때리면 아프고,
때가 되면 배가 고파 먹어야 한다.
몸을 가진 자는 아무리 깨달아도 몸이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어야 한다.
안 그러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에서 벗어나면 업이 없기 때문에
아무 것도 남지 않고 다시 맑아진다.
그래서 해탈한 자는 더 이상 업에 얼룩지지 않는다.
우주의 열매인 해탈은 이 우주에서 가장 큰 공덕을 지은 자만이 가능하다.
진리의 인연을 만나 끝없는 깨우침과 공덕으로
우주에서 최고 선근을 얻어야 한다.
그리하여 세상이 움직일 수 없는 양심과 하늘도 꺾을 수 없는 용기가 있어
어두운 세상에 지지 않아야 오탁악세(五濁惡世)의 어둠을 뚫고
해탈의 열매를 맺게 된다.
어둡고 거친 세상과 겨루어 결코 지지 않는 의지와 용기가 있어
세상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모두 불사를 수 있을 때
비로소 해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해탈이란,
좋은 마음과 선근을 얻는 길이요,
좋은 마음과 선근을 지키는 길이요,
좋은 마음과 선근을 이루는 길이요,
좋은 마음과 선근을 남에게 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세상에 다 바칠 때 비로소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래가 되는 것은
백년이나 이백년이나 서너 생으로는 어렵고, 수 천 수 만 년이 돼야 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여래는 수천 년에 한번 씩 난다고 하기도 하고,
한 인류사회에 한번 씩 난다는 말도 전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부처란
사람 속에서 난, 가장 훌륭한 여래, 완전한 해탈을 이룬 자를 말한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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