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는 어둠을 밀고 계속해서 북쪽으로 질주한다
새벽이 희붐하게 밝아온다
강제이주 시베리아횡단열차의 첫 밤,
북쪽으로 놓인 철길 위에서 밝아오는 것이다
예까쩨리나는 빅토르의 어깨에 기대 눈을 떴다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리라
그녀는 머리를 쓸어올리며 생각 한다
로자는 엄마 품에 잠들어 있다
엄마는 잠든 로자의 얼굴을 하염없이 보고 있다
이 어린 생명을 어찌 할 것인지요 천주님
주루룩 눈물이 흐른다
예까쩨리나는 엄마를 뒤에서 안는다
그녀의 어깨가 낮게 출렁인다
빅토르는 조용히 일어나 문 쪽으로 간다
문을 밀고 밖을 본다
지평선 위에 붉은 기운이 부채살처럼 퍼진다
가슴이 뛴다
그는 예까쩨리나를 눈으로 부른다
예까쩨리나가 그에게 다가온다
광휘로운 붉은 기운,
그녀 가슴이 뛴다
새로운 태양이,
오늘, 오늘의 태양이 솟아오르는 것이다
지평선 위로 붉은 태양이 불끈 솟아오른다
광활한 대지가 붉게 물든다
대지 위의 모든 것들이 경건해진다
바람도 조용히 대지에 엎드린다
자작나무숲도 정갈하게 대지에 엎드린다
늪지도 겸손하게 대지에 엎드린다
사람, 사람은 한 영혼을 위해 대지에 경배한다
그리고 가슴에 두 손을 모은다
지평선이 붉게 타오르고
자작나무숲이 붉게 타오르고
늪지가 붉게 타오르고
마침내, 사람의 가슴이 붉게 타오른다
빅토르와 예까제리나는 서로의 몸으로 건너가는
영혼을 보고 있다 서로에게 영혼을 보내며 몸을 떤다
몸이 황홀한 떨림 속에 서 있는 것이다
영혼은 누구에겐가 헌정되는 것이다
강제이주 시베리아횡단열차가 질주하는 철길 위에서
젊은 영혼은 서로에게 영혼을 헌정하며 떨고 있다
서로에게 헌정된 영혼을 지킬 수 있을지
두려운 젊은 연인들이다
영혼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역사가 있다는 걸
영혼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붉은 세상이 있다는 걸
짐작하지 못하는 젊은 영혼들이었다
실내가 환해지며
동승한 일행의 모습이 드러난다
하나같이 검은 얼굴이다 그러나
밤을 견디어냈다는 안도의 표정이다
첫 밤을 철길의 굉음과 불면으로 지세우고
맞은 시베리아횡단 철로 위에서의 첫 아침이다
아낙들은 보퉁이에서 먹거리를 찾는다
사내들은 무연히 밖을 내다본다
노인들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아침잠을 깬 아이들이 밥을 달라고 조르기 시작한다
아이들 밥 달라는 소리는 듣기 좋은 악장이었다
밥은 목숨이고
밥은 오늘이고
밥은 혈육이고
밥은 함박웃음이어서
살아 있음의 찬가이다
그 찬가로 아침이 시작되는 것이다
절망의 공간을 깨뜨리는 아이들, 목숨의 찬가는 사내들을 떨게 한다
아이들이 허기를 채우고 노인들이 깊은 눈길로 아이들을 보고 있다
해가 중천에 묶였다
자작나무숲이 때론 근경으로 때론 원경으로
다가오고 밀려갔다
숲은 푸르름을 버리기 시작했다
숲은 스스로 돌아갈 시간을 알아
몸을 가벼이 두는 것이다
몸이 가벼워지지 않으면 떠날 수 없는 것을
자작나무숲은 알고 있었다
노랗게 물들고 있는 자작나무숲이다
연두에서 연초록, 초록을 거쳐 진초록으로
무거워지던 숲, 그 무거움을 내려놓기 위해
뿌리를 재우고 햇빛을 멀리한 것이다
*
1937년 9월 3일,
러시아 교통인민위원부는 강제이주 수송열차 예정표*를 극비문서로 작성했다
9월 9일 출발 예정으로 되어 있던 갈렌기 역, 끄노링 역, 스비야기노 역의 열차는
예정대로 출발되지 않았다
9월 10일 출발 예정으로 있던 라즈돌리노예 역의 열차가
강제이주 1호 열차가 된 것이다
무엇이 예정된 길을 뒤집어 운명을 느닷없이 바꿔 놓는지 알 수 없다
연해주에서 6000킬로미터 떨어진 황무한 땅
꿈에라도 가보지 않은 두려운 땅
수많은 강을 건너, 수많은 산맥을 넘어 닿아야 하는 땅
한인들 지도에는 없는 불모의 땅
한인들 지도에는 없는 저주의 땅
그 땅을 행해 검은 얼굴들을 싣고 강제이주열차는 질주하는 것이다
1937년 9월 10일,
시베리아횡단 강제이주열차 1호는 라즈돌리노예 역을 출발하여
중앙아시아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
시베리아횡단 강제이주열차 2호와 3호는 갈렌끼 역에서 출발하여
중앙아시아를 향해 질주하고 있을 것이다
* 김명호 역, 앞의 책, 1944, pp128-129.
이 예정표에 의하면 1차 강제이주는 9월 9일부터 9월 23일 까지 모든 수송을 끝내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9월 10일에 시작되어 9월 21일에 모든 수송을 끝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2차 강제이주는 9월 24일부터 10월 25일 사이에 이루어졌다. 이는 연해주에서 강제이주 한인들을 실은 열차의 출발이 완료되었다는 의미이며 이주지역인 카자흐스탄과 우즈벡스탄에 도착되기 까지는 40여일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