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폴론신전과 소크라테스
ㅡ너, 자신을 알라.
1.
최근 나훈아가 테스형이라는 신곡을 내놓으면서 한 때,
골목마다 집집마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명제가 회자된 적이 있다. 또 그것이 정치에 이용되면서 희화화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 격언은 이미 소크라테스 이전 고대 그리스인들의 전통적인 지혜였다. 그것은 그리스 델포이에 있는 태양과 예언의 신인 아폴론 신전에 새겨져 있던 말이었다. 자신의 미래를 알기위해 신탁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내리는 첫 번째 신성한 명령인 셈이다
그럼 소크라테스에의해 인식된 그것은
즉 보잘것 없는 우리 인간의 한계와 불안전함을 인식하고 자신의 성찰을 통해 낮은 곳에서 겸손하게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자기 발전을 도모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예외없이 본인이 잘 알고있다는 착각에 빠져있습니다.자신이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이러한 세태에 독침을 가한 것입니다. 그래서 테스형은 내가 아는 것은 내 자신이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럼 고대 그리스인의 지혜로써 너 자신의 알라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스 신화에 모이라 라는 여신이 있다. 모이라 여신은 제우스의 딸로 인간에게 운명을 부여하고 집행하는 세 명의 여신을 말한다. 클로토는 운명의 실을 잣고, 라케시스는 운명의 실을 감고, 아트로포스는 정해진 운명의 시간에 실을 잘라버리는 역활을 담당한다. 누가 언제 어떻게 죽던 그것은 이 여신들의 예정에 따른 것이며 인간들은 제멋대로 바꿀 수가 없다. 그리스인들은 그렇게 믿었다
여기 모이라 여신의 모이라는 원래 각자의 몫이라는 뜻이다. 사람들 각각의 몫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신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의 정의는 각자에게 합당한 몫을 주는 것이었고, 주어진 몫을 충실하게 행하여 뛰어나게 나타냄이 덕행이었으며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했다. 요약하면 신이 준 운명을 잘 실천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요 행복으로 인식한 것이다. 말하자면 "너 자신을 알라" 는 말의 초의는 모이라 여신이 부여한 너의 운명을 잘 알라 라는 뜻입니다
그럼 인간의 이성을 억제하고 맹 목적으로 신탁에 의지하는 삶이 고대 그리스인의 지혜였단 말인가, 그것이 민주정의 산실, 그리스인의 화려한 고전 문명의 원천이었단 말인가?
2
그리스인의 신은 우리가 생각하는 신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동양 문화권에서 신은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두려움의 대상이고 경원의 대상이다. 그래서 공자도 제자들이 신에 대해 물었을 때도 '경의 원지'라고 답했다.
그러나 그리스인에게 신은 인간과 생김새도 똑 같고 사고하고 생각하는 것도 똑 같다. 사랑하고 시기하고 배신하고 권모술수를 부리고 사기치고 다 한다. 차이점은 신은 죽지 않고 영생하는 것이고 사람은 죽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은 잘 생기고 미인이다. 그래서 인간은 신과 더불어 함께 살며 예뿐 신상을 조각해 놓고 신을 닮고자 노력했다.
인간은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와 똑같은데 왜 우리는 영생할 수 없을까 우리는 왜 아름다울 수 없을까 ? 이런 근본적인 의문이 그리스인의 이중적 양면적 성격을 잉태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그리스 역사는 신을 숭배하면서도 끊임없이 신에 도전하는 이성과 자각의 역사였다. 시시포스의 신화를 보자.
시시포스는 코린토스 왕국의 창시자이다. 포악한 군주로 많은 동생들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 그리고 신탁이 조카딸이 낳은 자식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예언이 나오자, 생질과 결혼하고 아이를 낳자 왕비로 하여금 자식을 모두 죽이게 했다.
이 간악한 왕이 어느 날 성채에서 해안가를 바라보고 있는데, 우연이 제우스 신의 비행을 목격하게 된다. 바람둥이 제우스신이 강의 신, 아소포스의 딸 아이기나를 납치해가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후 강의 신이 딸을 찾아 헤매는 것을 보고 하나의 제안을 한다. 아크로 코린토스 성채는 물이 귀하다 그래서 성채에 물이 나오는 샘을 파주면 딸의 행방을 알려준다고 이야기 한다. 강의 여신은 딸을 찾기위해 샘을 파준다. 그래서 성채에는 사철 물이 철철 넘치는 페이레네샘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리고 비밀을 발설한 시시포스왕은 제우스의 징벌을 받아 인근의 가파르고 험한 산인 타르타로스 산에서 바위를 밀어 올리는 끝없는 노역형을 아직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전설의 이면을 벗기면 이 포악한 왕의 행위는 새로운 반전이 생겨난다. 물이 귀한 코린토스 백성들에게 대대 손손 생명수를 주고 자신의 생명과 노역을 맞바꾼 것이다.
시시포스는 제우스 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백성을 위해 신에 도전한 것이다
그리스신화에는 이런 신에 대한 인간 도전의 사례는 허다하다. 페가수스를 타고 올림포스 신궁을 탐한 벨레로폰이 그러하고, 크레타 미노스왕의 미궁을 탈출한 이카로스가 밀납으로 봍인 날개를 달고 천상에 오르다가 태양에 날개가 녹아 떨어져 죽는다. 이것은 실폐가 아니라 신에 대한 비이성적인 도전이다. 신을 숭배하면서 한편으로는 신을 닮기위해 행한 신에 대한 끊임없는 비이성적 도전이야말로 그리스 고전문명의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3.
너, 자신을 알라는 고전적 의미는 너 자신의 운명을 알라는 것이고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함의와는 다른 것이었다. 진리와 정의에 절대적인 것이 어디 있는가? 소크라테스는 민주정을 꽃피운 아티카 사람이고, 그리스 고전적 신관의 발아는 그 남쪽, 스파르타와 코린토스, 올림피아가 있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잉태한 것이니 시간이나 공간적으로 차이가 있으니 각기 다른 의미를 가졌음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다름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다. 다르면서도 하나로 관통되고 있는 생각은 운명에 대한 저항이요 진취적인 진리에 대한 갈망이다.
물같이 푸른 조석이
밀려가고 밀려오는 거리에서
너는 좋은 이웃과
푸른 하늘과 꽃을 더불어 살라
그 거리를 지키는 고독한 산정을
나는 밤마다 호올로 걷고 있노니
운명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피할 수 있는 것을 피하지 않음이 운명이니라.
유치환의 "너에게" 라는 시이다.
이 시는 사랑에 대한 원망과 한이 깊이 베어있다. 그래서 운명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있는 것을 안피하고 받아 드리는 것이 운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허기야 자신이 사랑을 위해 운명을 개척할 수도 있지만 상대가 움직이지 않으니 내가 바람둥이 제우스처럼 너를 납치할 수 없지 않느냐?
그러니 너는 꽃과 하늘과 이웃과 더불어 오손 도손 잘 살거라. 나는 밤마다 고독한 산정을 배회하리라
얼마나 지고 지순한 사랑인가?
중국 전국시대 제나라 왕이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노쇠하여 죽게 되었다. 그래서 주변에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주변의 간신들은 울며 불며 왕에 동정했으나, 제상 안영은 싱긋이 웃었다. 왕이 화가 나서 그대는 왜 웃는가? 라고 물었다. 안영이 답하길, 제나라를 세운 강태공이나, 천하를 호령했던 환공이 아직 살아 있었다면 왕께서는 지금 밭에서 도롱이를 입고 일만 하고 있을 것인 즉, 죽음의 운명을 애석하게 여길 것이 아니며, 그분들이 죽지 않았으면 지금의 왕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라고 반문했다.
이 글은 고전, 열자에 나온 말이지만 운명론을 비판하고, 신분이나 남여를 불문하고 노동과 학습을 통해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묵가의 글에 실린 글이다. 묵자의 통찰은 죽고 사는 일이 하늘의 섭리, 진리에 있는 것이지 운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명은 평생에 딱 한번 태어날 때 정해지는 것이 아니고 섭리와 진리가 매일같이 새롭게 인간에게 운명을 부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제 일구어낸 운명이, 변이되는 오늘의 운명에 씨앗이 되고 매일 매일 갱신되는 명을 받아 인간은 삶의 임무를 완성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운명을 거부하는 인간의 진취적 사고와 노력이 오늘 날의 역사와 문명, 문화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래 , 이 복잡한 세상 허허벌판에서 우리 인간이 무엇을 얼마나 알 것인가? 안다 한들 당신은 내일의 운명을 알것인가?
낮은 곳에서 겸손하게 대화하며 가족을 이웃을 사랑하며
지금 나와 함께하고 있는 사람을 존중하며 즐겁게 열심히
오늘을 살자.. 시유심 최재용 배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