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의 (The Righteousness of Jesus Christ)
- 능동순종 주장에 대한 반론 -
이지끼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무엇인지 알려면 "의"가 무엇인지 부터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 에서, "의"는 도덕적 정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적인 개념입니다.
곧 "의" 라는 단어는 관계적인 용어입니다.
I am right with God 이라는 말을 생각해 보면
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바르다 는 말입니다.
이를 의롭다(rigtheous)라는 말로 바꾸면
I am righteous in the relationship with God 입니다.
나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의롭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의(righteousness) 또는 의롭다(righteous) 라는 말을 이해하려면
관계(relationship)라는 단어와 함께 이해해야 합니다.
곧, 의(righteousness) 또는 의롭다(righteous) 라는 말은 관계를 떠나 존재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만일 제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의롭다 라고 한다면
이 의는 저와 하나님의 관계 안에 있는 저의 의 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저의 의 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의(righteousness)는,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어떤 사람의 의(righteousness)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와 그 사람은 같은 사람이 아니므로
저와 하나님의 관계는, 그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의를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A, B, C는 한 가족입니다.
A와 B는 부부이고 이들의 자녀가 C 입니다.
가족이 세 사람이니 관계의 수는 셋입니다.
A와 B의 관계
A와 C의 관계
그리고 B와 C의 관계가 있는데 이 세 관계가 다 다릅니다.
모든 관계에는 관계적 의무가 발생하는데
이 관계적 의무를 다하는 것이 의로운(righteous)것 입니다.
그러므로 A가, 자신의 부인인 B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관계적 의무를 다하면
A는 이 관계에서 의롭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부인인 B도 A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관계적 의무를 다하면
B도 이 관계에서 의롭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A의 의, 곧 A와 B의 관계에 있는 A의 의는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없습니다.
곧 A와 B의 관계에 있는 A의 의를 C에게 주어
C와 B의 관계에서 C의 의가 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에스겔 14:14절
"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성경에서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는
하나님과 사람들의 관계에서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의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in the image of God) 지음을 받았습니다.
많은 피조물들 중에서 사람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 위해 지음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언약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이 언약관계 안에서 사람을 향하는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을 의미합니다. 곧 언약관계적 신실함입니다.
모세 언약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셨는데
사람과의 언약관계 안에서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곧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언약관계 상대방인 사람들에게 의로움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곧 율법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관계적의무를 규정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의 기준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이 율법을 신실히 수행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의롭다고 간주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율법을 지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곧 아무도 이 의의 기준을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계획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사람들을 의롭다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영원한 관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예수님의 영원한 의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아래 나시고 율법을 준수하셨는데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율법을 지키신 것입니다.
곧 인간에게 부여된 관계적 의무를 다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을 준수하셔서 의를 획득하신 것이 아닙니다.
말씀드린대로
예수님의 의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영원한 관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예수님의 영원한 의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시기 전에도, 이 땅에 계실 때에도, 그리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도
하나님과의 영원한 관계 안에서 변함없이 한결같은 의가 예수님의 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의로 의롭다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우리를 의롭다하시는 것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곧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의롭다함을 받으려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하는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게 되어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의롭다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의로 인해 하나님으로 부터 의롭다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율법준수를 통해 획득하신 의로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주장이
능동순종 주장입니다.
이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관련하여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전에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할 수도 있고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1) 예수님께서 율법준수로 획득하신 의로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아서 예수님과 연합한다는 주장과
(2)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하여, 예수님께서 율법준수로 획득하신 의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주장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의 경우는, 위에서 말씀드린대로 불가능합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 안에 있는 예수님의 의는,
예수님과 연합하기 전에는 우리에게 전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의 경우, 예수님과의 연합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의가 아니라
이 땅에 계셨던 기간인 33년간의 의 만으로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글의 서두에 말씀드린대로, 의 라는 말은 관계라는 말과 함께 이해해야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하면,
하나님과 예수님의 영원한 관계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예수님의 영원한 의로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관계 안으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7:21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그런데, 이땅에 계셨던 기간인 33년간의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우리를 의롭다 하신다면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의 영원한 관계 안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 33년간만의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 안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이 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는 영원한 관계입니다.
이 영원한 관계에서 33년간 만의 관계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2)의 경우도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후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후사가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3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 His Son whom He has apointed heir of all things, through whom also He made the worlds"
로마서 8:17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and if children, then heirs-heirs of God and joint heirs with Christ,
if indeed we suffer with Him, that we may also be glorified together.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예수님을 통해 모든 세계를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후사 (joint heirs with Christ)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게 하시고, 곧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케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33년간 만의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의로 의롭다하셔서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하는 후사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리의 능력으로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관계 안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의로 우리를 의롭다 하시어
예수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하는 만유의 후사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7:24절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8)
그런데 님은 “세례 중생론을 단죄하신 칼빈 선생님처럼” 이라고 하였습니다.
칼빈이 자신의 “세례중생론”을 단죄했다는 말인가요?
칼빈이 세례중생론을 단죄했다는 말은 어디서 들었습니까?
아니면 님이 만든 말입니까?
칼빈이 세례중생론을 단죄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제가 위에서 설명한 것 처럼 중세카톨릭의 “세례중생론”을 단죄했을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렸듯이 초대 교부들의 세례중생론과 카톨릭의 세례중생론은 다릅니다.
칼빈은 초대교부들의 세례중생론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세례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추가했고
우리가 따르는 것이 바로 칼빈이 추가한 이해입니다.
그래서 현재 세례에 관한 우리의 신학이 초대 교부들의 신학과 달라진 것입니다.
게다가 조나단 에드워드는 이에서 더욱 벗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학을 님이 따르는 것입니다.
@이지끼을 또또또 강조합니다.
원인과 결과를 모르는 유치원생에게나 해야 할 설명을 계속했던 저는 앵무새와 같은 도돌이표 토론에 지쳤습니다. 그러므로
저 그만 스토킹하고, 믿고 싶은 대로 믿으세요. 예? 부탁드립니다.
저 그만 스토킹하고, 믿고 싶은 대로 믿으세요. 예? 부탁드립니다.
저 그만 스토킹하고, 믿고 싶은 대로 믿으세요. 예? 부탁드립니다.
@이지끼을 또 도돌이표 토론을 하고 싶으십니까? 계속 저를 스토킹하고 싶으시면 “믿고”의 정체를 말씀해 보십시오.
“믿고”는 어떤 믿음입니까? 그리스도를 저주하는 믿음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를 “내 주님”으로, 성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믿음입니까?
@이지끼을 칼빈 선생님 세례론이 적힌 <마가복음 16장 16절 주석>은 TR-RE 님이 {개혁신앙 푸르내}에서 언급하신 것 같은데, 찾아 보십시오.
“같은데,” 라는 말은 이도 저도 아니니, {개혁신앙 푸르내}에서 찾아보려면, 찾아보시고, 말려면, 마십시오. 제발 이지끼을 님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저 그만 스토킹하십시오.
@四季 朴埰同
1)
제 형편상 여기 시간으로 금, 토, 주일은 답변을 드리기 곤란합니다.
거기 시간으로는 토, 주일, 월 이 되겠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한 점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님은 여러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William Hendriksen 이 자신의 신학을 지지하는 분인 줄 착각하고 있고
Calvin 이 “세례중생론”을 단죄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님은 칼빈이 한 가지 만을 말했다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칼빈의 기독교강요 글을 제시하고 설명까지 해 드렸는데도 억지를 부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님의 착각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요일 5:1절에 대해서도 착각하고 있습니다.
요일 5:1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낳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된다고 말씀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님은 그렇게 착각하고, 이런 님의 착각을 근거로 인신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님은 참으로 어이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四季 朴埰同
2)
가끔씩 님은 상대에게
“성경전체를 보지않고 일부만 보고 이해한다” 고 비판합니다.
이 말은 자신은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일 5:1절에 대한 님의 해석을 보면
님이 요한일서 전체를 읽지 않고 해석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 다음 절인 요일 5:2절도 안 읽고 해석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님과 같이 성경전체를 보지도 않고 해석하면서
말은 성경전체를 보는 것 처럼 말씀하시는 분들에게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고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이는 또한 님의 글을 읽는 사람들을 속이는 것입니다.
@四季 朴埰同
3)
왜 이렇게 착각하게 되는 지 아십니까?
각 신학은 성경을 보는 렌즈를 제공하는데
잘못된 신학이 제공하는 렌즈로 성경을 보면
그 잘못된 성경을 더 강화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신학으로 성경을 보면 성경이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못된 신학을 배웠는데도
그 잘못된 신학이, 잘못된 신학임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성경을 다르게 이해하는 것인데
자신은 맞다고 생각하고 이를 근거로 남을 조롱하고 인신공격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런 착각을 거짓모함까지도 하는 명분으로 삼아
거짓모함도 서슴지 않고 하는 것입니다.
@四季 朴埰同
4)
사계님
요일 5:1절에 대한 님의 해석을 보면
님은 요일 5:1절에서 성경이 말씀하지 않는 것을 이해합니다.
이런 해석을 뭐라고 해야될까요?
저는 사오정 식 해석이라고 부릅니다.
님은 님이 배운 신학으로 사오정 식 성경해석을 하고
이런 해석을 근거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꾸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四季 朴埰同
5)
그리고 제가 님을 스토킹한다고 계속 불평하시는데
스토킹은 님의 전문이지 저의 전문이 아닙니다.
저는 저의 의견을 말씀드리는 것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스토킹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님은 정이철 목사 등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않습니까?
(저도 정이철 목사등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님은 해도 되는데 저는 안된다는 것입니까?
전형적인 “내로남불”입니다 그렇지요?
@四季 朴埰同
6)
그리고 이 위의 게시글은 저의 글입니다.
님은 이견이 있으니 제가 올린 글에 님의 의견을 적은 것이고
저는 그에 대해 답을 드린 것입니다.
다르게 말해서
제가 님의 멱살을 잡아 끌어 제 글에 댓글달게 하고
그리고 님의 댓글에 제가 답을 드린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신이 누구의 글에 댓글을 달고 있는지 모르십니까?
제가 님의 글에 댓글을 달아도 스토킹이 아니고
이 게시글 밑에서는 더 더구나 아닙니다.
사계님은 이렇게 사리분별이 없는 사람입니까?
@四季 朴埰同
7)
그리고 님은 조나단 에드워드의 신학이 개혁주의 신학인 것 처럼 말씀하는데
에드워드의 신학은 개혁주의 신학이 아닙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중생론 -칼빈, 웨슬리의 신학 사상과 관련하여-』 노병기 박사학위 논문 요약
http://egau.co.kr/bbs/view.php?id=e03_07_02&no=58
[[ Ⅴ. 결 론
에드워즈는 청교도주의의 영향을 받아 칼빈주의의 특질을 강하게 물려받았으나 그의 신학의 핵심이 되는 중생의 개념에서는 칼빈을 닮았다기보다는 독일 경건주의, 혹은 영국 웨슬리와 윗필드의 복음주의 운동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에드워즈의 중생의 정의는 칼빈과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특히 중생 체험의 즉각성과 전체성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중생의 내용적 깊이에서 칼빈과는 뚜렷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四季 朴埰同
8)
그렇기 때문에 중생의 개념에서 에드워즈의 견해와 칼빈의 견해를 동일하다고 보는 것은 정확한 해석이 아니다. 에드워즈는 중생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데서는 칼빈과 같고, 신비적 체험과 표현에서는 어거스틴과 비슷하고, 중생 체험의 깊이에 대한 강조는 웨슬리와 같다. 이 연구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에드워즈의 중생론은 크게 보면 칼빈의 개혁주의 신학의 전통 위에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중생 체험의 성질 면에 있어서는 칼빈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오히려 웨슬리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
@四季 朴埰同
9)
노병기 목사님은 에드워드의 중생의 정의가, 칼빈의 중생의 정의와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고 말씀하면서도
에드워드가 개혁주의 신학의 전통 위에 있다고 말씀하는데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중생이 다르다는 것은 구원론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성령의 내주하심(중생)으로 믿음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곧 성령의 내주하심(중생)이 믿음 앞에 위치하는 것입니다.
개혁주의는 믿음 다음에 중생이 있다는 신학입니다.
믿음으로 중생한다고 이해하는 분들도 있지만,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중생한다고 이해하는 분도 많은 신학입니다.
그러므로 개혁신학은 믿음 다음에 중생(성령의 내주하심)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四季 朴埰同
10)
그리고 님이 제가 말씀드리는 막 16:16절만 있는 것이 아니라며 요일 5:1절을 말했는데
제가 막 16:16절만 말씀드렸습니까?
베드로는 행 2:38절에서 막 16:16절 예수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얻으리니
이 말씀에서 “성령의 선물”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성령의 내주하심”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믿음으로)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죄사함과 성령의 내주하심(중생)을 얻으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중생(성령의 내주하심)이 어디 위치하는지 보십시요.
@四季 朴埰同
11)
그리고 갈 2:26-27절도 있습니다.
갈 3:26- 27절
26여러분은 모두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현재시제)
27여러분은 모두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되었고], (과거시제)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현재완료시제) [새번역]
갈 3:26-27절은 진리를 말씀한 것 뿐만이 아니라
그 진리 그대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루어진 사실을 바울이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26절은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씀이고
27절은 26절의 중간 과정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四季 朴埰同
12)
그래서 26-27절을 다시 쓰면
26a: 믿음으로
27 :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께 속하게 되어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26b: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가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맞지만
그 사이 중간 과정이 있다는 말입니다.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믿음을 갖게 된다고요?
사오정 식 성경해석입니다.
요한일서 5장에 1, 2절만 있고 4절은 없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믿음을 갖게 된다고요?”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믿음의 씨를 주셔서 중생케 하셔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그래서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사는데, 제가 언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믿음을 갖게 된다.”고 한 적 있습니까? ‘하나님을 저주하는 믿음으로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나님 자녀가 되는 중생을 하고 세례중생을 해야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믿음을 갖게 된다.’는 게 이지끼을 님 세례중생론 아닙니까?
위로부터 태어남인 중생 시 성령께서 믿음의 씨.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순종으로 획득하신 의義의 씨(부활의 생명)를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죄인에게 심으시면(주입하시면), 죽은 죄인은 즉시 살아나, 살아나자마자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며 하나님께 돌이킨다. 믿음의 씨가 새로운 힘으로 터져 나오는 열매를 맺는 이것은 중생 시 주신 믿음의 발현으로서 회심(믿음+회개)이자 중생 시 그리스도와 실제 연합을 했음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그리고 중생자는 이 ‘내적 실제 연합’을 인치는 외적 표징으로서 세례를 받음으로써, 중생 시에 주신 믿음으로 사탄을 저주하며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불러 이 세상과 교회 앞에서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더욱더 풍성한 그리스도와 연합을 누린다. 바로 이것이 여태껏 제가 말해 왔던 것입니다.
이른바 “속도위반”이라는 것도 있어서 비유로 진리의 모든 면을 설명할 수 없지만, 제가 님의 세례 중생론을 두고 결혼 비유를 한 적 있습니다. 결혼식을 세례식으로 보면, 결혼식 전 사랑이 전혀 없어서 서로 저주했던 남녀가 강제로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불타는 사랑이 생겨 첫날밤을 치르면서 한 몸을 이루지요? 아니면, 결혼식을 올렸음에도 강제 결혼식이라서 불타는 사랑은 일어나지 않았는데 후손을 낳으려고 어쩔 수 없이 갖게 된 밤, 첫날밤에 한 몸으로 이루는 연합으로 불타는 사랑이 생기지요?
“스토킹”이란 말이 왜 나왔습니까?
까마귀 고기가 주식인 정이철 목사처럼 잊으셨으니, 적어 드리지요.
여전히 제 질문에는 답변이 없는 채 장황한 글을 올리셨군요. 제 질문에는 2 년 넘게 답변 없이 이지끼을 님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하시는 이 정도면, 토론이 아닌 스토킹이지요. 스토킹 그만두시기를 바랍니다.
또또또 적습니다.
저와 ‘도돌이표 토론’을 또 하고 싶으시면, 세례 앞에 있는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를 답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회개의) 세례를 받아 구원을 얻는다(죄사함을 얻고 중생한다)고 생각합니다.”??? 도돌이표 토론을 하고 싶으시면, 세례 앞에 있는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를 답하시기를 바랍니다.
양자의 영으로서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성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게 하시는 ‘믿음’(롬 8:15. 갈 4:6)입니까? 아니면, 연중론에서 말하는 이른바 “일반 믿음”, ‘거짓(거진) 믿음’입니까?
또 도돌이표 토론을 하고 싶으십니까? 하고 싶으시면 “믿고”의 정체를 말씀해 보십시오. “믿고”는 어떤 믿음입니까? 그리스도를 저주하는 믿음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를 “내 주님”으로, 성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믿음입니까?
덧말: {기독교 강요}에 다음과 구절이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의 중생’을 서술한 구절입니다. 찾아보세요. 그리고 이 구절의 빛 아래 {기독교 강요}에 적힌 성례론을 읽어보세요.
《아무리 작은 믿음(믿음의 씨)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 마음속에 떨어지면, 우리는 그 즉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평화롭고 고요하며 은혜로우신 얼굴을 바라보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