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25:1-6
찬송가 310장 ‘아 하나님의 은혜로’
말씀을 읽을 때 우리 모두가 흔히 하는 실수가 있습니다. 바로 말씀을 내 주장을 위한 근거로 사용하는 실수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켜야 하는데, 우리가 말씀을 취사선택하거나 왜곡해서 사용한다면, 변화는커녕 도리어 우리는 완고해져갈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진리에서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하나님만을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더욱 만날 수 없게 만들고 알 수 없게 만듭니다.
욥기 25장은 23-24장에 걸친 욥의 말에 대한 빌닷의 대답입니다. 빌닷은 25장에서 이번이 세 번째 발언인데, 이후에는 다시 등장하지 않을 것입니다. 25장은 여섯 절이라는 욥기에서 가장 적은 분량을 차지합니다. 누군가는 빌닷이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 그랬다거나, 욥의 변하지 않는 자세로 인해 지쳐서 적게 말했다고 하지만, 사실 그는 여섯 절의 내용만으로도 알뜰하게 욥의 주장을 반박하고 나섭니다. 그렇기에 둘의 싸움은 오히려 절정으로 치닫고, 둘의 차이는 더욱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사실 욥을 반박하기 위한 용도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빌닷은 이미 실수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과정이나 내용이 올바르다 해도 잘못된 목적이 모든 것을 망칠 수 있습니다. 특히나 하나님을 대하는 자세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25장의 빌닷처럼 말입니다. 빌닷의 모든 발언은 그 말만 보았을 때는 옳아 보입니다. 하지만 무리하게 하나님의 일면을 가지고 욥을 비난하려다가, 하나님을 왜곡하며, 스스로는 더욱 완고해졌으며, 진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먼저 1-3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권능(1-3)
(1-3)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은 주권과 위엄을 가지셨고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느니라 그의 군대를 어찌 계수할 수 있으랴 그가 비추는 광명을 받지 않은 자가 누구냐
1-3절은 욥이 24장에서 말했던 내용들에 대한 빌닷의 반박입니다. 욥은 24장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부재를 언급합니다. 고아의 나귀를 몰아가며 과부의 소를 볼모 잡는 등 악한 일이 판을 치는데 하나님이 일하지 않으며, 성중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신음하는데 하나님이 그들을 보지 않는다고 욥은 항변합니다. 비록 24장의 마지막에서 하나님이 악인을 반드시 심판하리라는 기대를 드러내긴 했지만, 욥의 전체적인 어조에서는 기대와는 달리 현실에서는 공의로운 심판이 임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불평이 읽힙니다.
욥은 고난을 겪으면서 그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된 것 같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강대한 주권에도, 여전히 유지되는 현실의 어려움들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선을 전혀 끌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비참한 인류의 운명을 그는 보았습니다. 사실 이것은 지금도 인류가 처한 현실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지만 여전히 세상에는 고통이 넘쳐나고, 아픔이 흔합니다. 인간이 악해서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인간을 그러한 비참에 두고, 전혀 일하지 않는 신이 있다면, 그것은 직무유기일 것입니다.
이에 대한 빌닷은 3절에 말하는 것처럼 세상에 빛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듯,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심판은 임한다고 합니다. 그는 뜬금없이 하나님의 군대가 많고 강하시며, 놀라운 주권과 위엄을 가지고 계시다고 말합니다. 천천히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강하시니까 불평하지 말고 조용히 있으라는 말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욥은 현실을 보며 고뇌하지만, 빌닷은 이론을 가지고 그 고민을 덮어버리려 합니다. ‘하나님이 전능하다’라는 사실을 통해 폭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빌닷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가치 없기에 어떤 대우를 당하더라도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더불어 하나님은 권능 있는 분이기에,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서 우리가 할 말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는다면, 그건 다 이유가 있고, 그의 권능이 올바르게 사용되는 것이기에 찍소리 하지 않고 인간은 지켜보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실제 하나님의 본질에 ‘권능’만이 있고, 하나님이 그 권능만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면, 그 세상은 매우 딱하고 가련할 것입니다. 그 세상에는 따뜻함이라고는 전혀 없으며, 구원의 가능성도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온 땅을 신의 권능으로만 가득 채운다면, 참으로 서글픈 곳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실제로 그런 분인 것은 아닙니다. 빌닷은 하나님의 어떠함의 일부만을 인용했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하기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실상 자비로운 분이며 노하기를 더디하며 인자가 많으신 분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은 유지되고, 선인을 찾아보기 힘든 역사 속에도 인류는 유지 되는 중입니다.
모세오경에 그렇게 계시된 하나님은 계시록까지도 동일하게 소개됩니다. 복음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보며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23장 37절입니다.
(마 23: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자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탄식입니다. 하나님은 강한 군대로 묘사되기도 하고, 권능 있는 분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때론 암탉처럼, 자기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기 위해 애쓰며, 자기 백성을 위해 탄식하며 고통 받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하나님이 권능이 아닌, 약함으로 표현되는 이미지의 절정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구속사의 절정에서 힘으로 일하신 것이 아니라, 힘의 없으심으로 일하셨습니다. 순수한 권능만이 신의 본질이라면, 인류의 구원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한 신은 욥에게만 절망이 아니라 빌닷에게도 절망일 뿐입니다.
결론적으로 욥은 자신의 고난을 통해 인류의 고통을 보게 되었고 그 문제를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나갑니다. 하지만 빌닷은 욥을 비난하고 반박하기 위해 논리 안의 하나님의 일부를 들이밀고 있습니다. 결국 욥은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빌닷은 하나님을 더욱 알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어지는 4-6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
(4-6)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보라 그의 눈에는 달이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하거든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
4-6절은 23장의 욥의 발언들에 대한 반발입니다. 욥은 23장에서 자신의 정직을 앞세워 하나님께 변론하려고 시도하며, 자신의 무죄에 대해서 주장합니다. 이러한 주장이 틀렸음을 말하기 위해 그는 모든 인간은 깨끗하지 못하여,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어떤 사람도 빛을 발할 수 없고, 결국 인간은 구더기와 벌레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맞는 말 같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보다 높으신 분이 맞으며, 모든 인간은 죄악된 존재가 맞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빌닷의 논리는 몇 가지 점에서 맹점을 지닙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어떤 사람도 빛을 발할 수 없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벌레와 구더기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위대하시다고 해서, 인간이 뛰어난 존재여서는 안 될 이유가 없습니다. 반대로 인간이 구더기가 아니라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훼손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영광스럽고 또한 인간도 그 영광을 닮을 수 있습니다.
빌닷은 하나님을 보호하려고 하나님을 벌레들의 하나님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하지만 실상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보다 조금 못한 존재, 자기와 닮은 사랑의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타락한 이후에도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잃지는 않은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예수님의 사역 안에서도 인간은 벌레에 머물지 않고 나아갑니다. 의롭지 못한 우리를 의롭다 하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의롭다 함을 입은 존재들입니다. 스스로 벌레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 하나님 사랑의 높으심을 찬양하기 위해서이지, 우리를 비하하고, 누군가가 하나님을 아예 찾지 못하도록 하는 근거로 사용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가 벌레 같은 존재라 하더라도, 그렇기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러한 우리도 자비롭게 대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저렇게 말하는 빌닷 조차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 발언이니 빌닷이 이렇게까지 열을 내는 이유를 생각해봅시다. 처음부터 그가 욥을 비난하러 찾아온 것은 아닙니다. 시간을 내어 먼 거리를 위로해주러 온 참 친구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욥의 발언들이 하나님의 위엄을 훼손한다고 생각했고, 하나님을 변호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결과가 잘못되었을 지라도 그는 스스로 하나님의 변호자가 되길 원한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또한 구더기인 것만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을 지키기 위해 온 인류를 저주할 만큼 진심을 가진 존재입니다.
우리 안에 이러한 양심을 두시고, 그 형상을 남겨두신 것조차 은혜입니다. 우리는 은혜 안에 사는 자들입니다. 빌닷 또한 사람을 구더기로 그대로 두시는 하나님께는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그 구더기를 위해 모든 것을 무릅쓰는 하나님께 구원 얻을 수 있습니다. 결국 빌닷 또한 자신의 인지를 뛰어 넘는 하나님에게서만 구원을 얻을 따름입니다.
이제 결론을 향해 갑니다. 빌닷은 욥의 말을 반박하려다가 하나님의 다양한 면을 제한했고, 하나님을 벌레와 구더기의 하나님으로 격하시켜 버리고 맙니다. 그 의도가 하나님을 변호하기 위함이었다 하더라도, 결국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의 선한 뜻 안에서 구원해 가시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훼손해버리고 맙니다.
자신이 아는 몇 가지 확신을 지키고, 그것을 논지의 근거로 사용하느라, 더 큰 하나님 만나는 것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해석해야 합니다. 내가 말씀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신앙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저는 연애를 권장하는 편입니다. 제가 경험했던 연애의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나 자신이 무너지는 유익입니다. 누군가를 만나고 그와 함께 살아가다 보면 내가 확신했던 것들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완고했던 내가 깨어지고 상대방을 받아들여 더욱 넓고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래 연애를 하지 않으면 몇 가지 부작용이 있습니다. 이성에 대한 내 안에 이상향이 너무 뚜렷해서, 그에 부합하지 않은 모습을 현실에서 발견하면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내가 가진 왜곡된 이상이나 생각이 깨어져야,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진실 되게 만날 수 있는 법입니다.
우리는 결국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지만 그전에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우리의 생각이 깨어져야 합니다. 만남은 깨어짐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말씀을 읽어도 점점 완고해질 뿐이며, 진리에 다가갈 수 없습니다. 결국 빌닷도 자신이 확신했던 하나님에게는 구원 받지 못합니다. 빌닷의 논리를 넘어선 하나님이 빌닷 또한 구원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넘어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를 위해 사용하는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나의 욕망을 위해 일면만 받아들이는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진실 되게 창문을 열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감을 통해, 완고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만나 깨어지는 저와 교우님들 되길 주님 안에서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여전히 세속적 가치관의 지방질이 우리 안에 너무 많습니다.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쫓기보다, 다른 풍요를 따라 살 때가 많습니다. 그 모든 비성경적인 죄에서 멈추고, 말씀 앞에 진실 되게 서게 하옵소서. 욕망이 눈을 가리지 않게 하시고, 욕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말씀을 왜곡하지 않게 하옵소서. 완고했던 내가 무너지고, 말씀이 나를 형성해 가는 복된 경험을 하게 하옵소서. 내가 말씀을 이용해 먹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변화시키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날이 갈수록 주님의 통로로 사용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나의 주장을 강화시키기 위해 혹은 다른 사람과의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말씀을 사용한 적은 없는지 묵상해 봅시다.
2. 시간이 지나거나 나이가 들면서 이전에 알던 하나님과 다르게 알게 된 하나님이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3. 말씀이 일순간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느껴지고, 그것이 내 삶을 변화시켰던 경험이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4.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막는 내 안의 문제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작성: 송지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