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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강해(76)
눈은 몸의 등불
(2022.08.10 수)
본문 : 누가복음11:33-36
<요나의 표적 밖에는>
앞서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이
‘말 못 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낸 것을 두고,
칭송하기는커녕 ...
오히려 예수님의 사역을 폄하하였기 때문입니다.
- 그들 가운데 일부는 예수님의 행동을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냈다고 말하는가 하면,
- - 또 다른 부류는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차고 넘치는 표적을 두고도
마음이 완악하여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들을 향해
‘악한 세대’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30절)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죄악이 관영한 니느웨를
그냥 멸하시지 않고 요나를 보내셔서 회개를 선포하게
하신 것 자체가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팔레스타인에 나타나셨다는 것,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선포하셨다는 것 자체가
표적이라는 겁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를 ‘하나님 심판의 표적’으로
믿고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듯이....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도 예수님을 구원의 표적으로
믿고 순종하여 구원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솔로몬 시대의 남방여왕이,
그리고 요나 시대의 니느웨 사람들이 심판 날에
오히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등불은 등경 위에>....
문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긴 예수님은 한 가지 비유를 통해
다시 한번 사람들에게 교훈을 남기십니다.
33절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등불을 켜는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빛을 보고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둡니다.
‘움’은 땅을 파고 위를 거적 따위로
덮어 놓은 ‘움막’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말’은 ‘됫박’을 가리킵니다.
누가 등불을 켜서 그런 곳에 숨겨 두겠습니까?
등경 위에 두어야 방 구석구석을 비출 수 있고
사람들은 그 빛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당연한 이치입니다.
<네 몸의 등불은 눈>
그런데 우리 몸에도 ‘등불’의 역할을
하는 기관이 있습니다.
34절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예수님은 ‘몸의 등불은 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눈이 있어야 우리는 암흑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눈이 빛을 받아들이고, 그 받아들인 빛으로
모든 물체의 모양을 식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눈으로 식별한 그 모양을 따라 뇌가
명령을 내려 우리의 온 몸이 움직이고 제어됩니다.
그래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는 표현은
아주 재치있는 표현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옛말에도 ‘눈이 보배’라는
말로 눈의 소중함을 표현하였습니다.
모든 장애가 다 고통스럽지만, 저는 실명의
장애가 가장 고통스러운 장애로 느껴집니다.
제가 아는 파주지방의 한사랑교회 배성권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분이 녹내장이 생겨 시력이 점점
안 좋아지고 있습니다.
책 읽는 것도, 운전하는 것도 점점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 치유되기를 기도하면서도,
이런 시를 지어 카톡방에 올리셨습니다.
<눈에게>
얼마나 아프니 또 얼마나 힘드니/
난데없는 녹내장이 너에게 찾아왔으니 말이다
많이 놀라고 또 당황했겠다/ 너의 아픔과 괴로움은
뒤로하고 네가 느끼는 미안한 마음은 또 어떻니
너는 하나님에게서부터 나와서 나의 부모님을 통해서
이 땅에 왔지/ 그동안 많은 시간 일해 주어서 고맙다/
너 아니었으면 오늘의 내가 어찌 있을 수
있었겠니/ 다 네가 이것저것 보아준 덕분이다
하지만 여기서 너더러 그만 일하라고 말하지도
못하겠구나 좀 더 힘을 내주지 않겠니
그래야 우리 몸의 다른 지체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일할 수 있겠다
귀와 입 손과 발/ 나머지 몸의 많은 기관들도
그 힘이 다하기까지 일할 수 있겠다
눈아/ 점점 더 약해지고 아플 수도 있겠다/ 이전보다
너의 하는 일이 훨씬 적어질 수도 있겠다
그래도 걱정하지 말아라 미안해하지도 말아라/ 그저
힘닿는 데까지 일해 주렴 우리도 함께 힘을 내마
그간 네가 한 수고 결코 우리는 잊지 않는다/
네 덕분에 우리 모두가/ 지금껏 잘 살아왔단다
고맙다 애썼다 그리고 사랑한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눈이 성한 것을 감사하시고,
잘 보호해 주시기 바랍니다.
<영안을 열라>
그런데 눈은 육체적인 눈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영안’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영적인 것을 분별하는 눈입니다.
<35-36절>
35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36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빛’ 되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는 영안이
열려있는지 확인하라는 말씀입니다.
사탄이 인간을 타락시키는 수단이 있습니다.
첫째는 ‘안목의 정욕’을 자극하여
탐욕의 눈으로 보게 하는 것입니다.
창 3장에 뱀(사탄)이 하와를 유혹할 때를 보십시오.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고 믿고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귀에 의심의 말을 집어넣었습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4-5).
뱀의 말을 듣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보니
전에 보던 것과는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6).
사탄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안목의 정욕’을
자극하여 ‘탐욕의 눈’으로 사물을 보게 합니다.
아브람과 롯의 차이(창 13장) -
아브람(아브라함)과 롯은 둘 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신앙을 같이 시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둘이 맺은 삶의 열매는 어떠했습니까?
아브람(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고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이 창대하게 되며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롯은 소돔의 심판을 겨우 피하였을 뿐
아내와 사위들은 모두 잃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두 딸과 근친상간하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삶이 이렇게 극명하게 갈리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둘 다 번성하여 목자들을 두고 가축을 쳤는데,
우물을 두고 다툼이 생기자 아브라함이 롯에 제안을 합니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9절).
그러자 롯이 눈을 들어 주변을 살펴봅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13:10).
그가 바라본 것은 무엇입니까? ‘안목의 정욕’으로
보았습니다. ‘탐욕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육신의 눈으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타락의 성읍(소돔과 고모라)이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롯의 자신이 선택한 땅으로 갔습니다.
남겨진 아브람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요?
(성경에 없는 내용이지만) 섭섭한 마음....
서운하고 괘씸한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요?
롯이 자신에게 먼저 선택권을 행사하도록
양보하는 것이 예의에 맞는 행동인데...
자신의 이익을 챙겨 떠나는 모습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그에게 남은 땅은
황량하기 그지없는 광야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임재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4-17).
14절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15저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16절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17절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육신의 눈으로 볼 때는 형편없는 땅이었지만,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비전’을 주셨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볼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지금 당장 아브람의 소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소망의 눈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땅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의지하며
살도록 역사하신 것입니다.
이후 두 사람의 차이는 극명해졌습니다.
- 롯은 현실의 풍요를 바라보고 살았고,...
-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보고
살았습니다.
이 차이가 2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을 때에
두 사람의 인생을 정반대로 갈라놓았습니다.
롯을 자신의 풍요와 안일을 위해 한걸음씩
거처를 옮기다 죄악을 도성으로 들어갔고....
아브람은 끝까지 믿음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리고 그 결말은 앞서 말씀 드린대로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예수님은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고
경고하십니다. 사탄의 유혹에 우리의 영안에
어두워지지는 않았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라기는 사탄의 시험에 속아 흐려지지 말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눈’을 잘 지켜내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는 대신
다른 곳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에 먼저 가서 기다리라고 명하시고,
홀로 산에 기도하러 오르셨습니다(마14:22-33,
막6:45-52, 요6:15-21).
날이 저물어 제자들이 배를 타고 반대편으로 가는데
풍랑이 일어 큰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는 것을 제자들이 보고는 놀라
“유령이라”고 하며 무서워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며 그들을 안심시켰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놀라운 제안을 합니다.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예수님께서 허락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예수님을 보고 물 위를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세게 불어 풍랑이 일자
그것을 보고 두려운 마음이 생기자 그만...
“빠져” 버렸습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하고
소리를 지르니 예수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갈 때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얼마든지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에게서 시선을 떼는 순간 베드로에게
두려움이 엄습해왔고, 결국 물속으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주님을 바라볼 때에 풍랑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때에도 바다에는 거친 파도가 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데
전혀 방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눈이 주님을 향한다면
환경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1)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바라볼 때 사탄의 유혹에서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극복해야 할 장애물>
우리의 눈이 예수님을 ‘생명의 빛’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고백 속에서 그 요소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을 환상 중에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빛을 보자 눈이 그만 멀었습니다.
사흘 뒤 아나니아가 그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할 때,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자
그제야 눈이 열렸습니다. 영안이 열린 것입니다.
그는 훗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빌3:4-9>
4절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절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절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절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절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지금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바울로 변화되기 전의
사울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눈에 ‘비늘 같은 것’이 씌여져 있는 것입니다.
영안이 가려져 있는 것입니다.
그 ‘비늘 같은 것’이 무엇일까요?
첫째, 신분적 자랑입니다.
정통 유대인에다가 특별히 바리새인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예수님은 저 시골 근본 없는 지역 출신입니다(나사렛).
여기서 잠깐 바리새파에 대해 알아보면..
주전 2세기, 당시 팔레스타인의 주변 세계는 헬레니즘,
곧 그리스-로마 문화가 지배하던 시대였습니다.
문화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자연스럽게 그들의 문화에 젖어 들었습니다.
그런데 문화의 핵심은 종교인데, 그들의 문화는
우상 숭배의 문화입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유대인 중에는 모세 율법과
조상들의 전통을 철저히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들이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그 뜻은 ‘분리된(구별된) 자들’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율법뿐만 아니라 구전으로 내려오는
전통의 지극히 작은 항목까지 모두 지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바리새인들은 모든 유대인에게 존경을 받게 되었고,
유대교의 전통을 잘 수호해 내는 선한 영향력도 끼쳤습니다.
바울은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5)라고 말하면서
자긍심이 대단했음을 내비쳤습니다.
그런 육체적, 신분적 자긍심이 눈의 비늘이 되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둘째, 교만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특히 지적 교만이 대단했습니다. 자신들만큼
율법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없다고 자부하였습니다.
사울(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당시 최고의 랍비였던
가말리엘의 제자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6절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율법 수호의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율법에 관해 가장 잘 안다고
자부했고,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고 자부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만한 마음으로 자신들과
같지 않은 자들을 멸시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웃을 멸시하는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행위가 위선적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이러한 교만함이 ‘눈의 비늘’이 되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셋째, 기득권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자신의 기득권(이익)을
해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이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의
가르침보다 더 권위가 있다고 평가하였습니다.
미국의 노예제도를 지지한 남부지역의 교회들...
교회의 가르침이라고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 가르침의 동기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이익의 비늘’이 눈을 가려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성도님들의 눈을 가리고 있는 ‘비늘’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비늘’은 무엇입니까?
성도님들의 자랑거리, 교만함, 기득권을 내려놓지 못하면,
‘비늘’이 눈을 가려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지 못하게 됩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님들 ! 저와 성도님들의 눈을 가리고 있는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기를 바랍니다.
‘영안’이 열리기를 축복합니다.
시편 기자는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119:18)하고
노래하였습니다.
엘리사와 사환(왕하 6:14-20) -
엘리사를 잡으려 온 아람 왕의 군대가 엘리사가 살고 있는
성읍인 도단을 에워쌌습니다.
이것을 본 사환이 두려움에 떨며
엘리사에게 보고를 합니다. 이 때 엘리사는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고 하며,....
사환의 눈이 열려 그것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결국 엘리사의 기도대로 사환의 눈이
열렸을 때,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게
엘리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환경에 지배받기 쉬운 우리의 눈과 마음입니다.
그러나 엘리사의 기도처럼 환경만 보는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열리길 소망합니다.
암울한 현실이 아니라 천군천사를 동행하고 우리를
엄호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는
‘영안’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와 성도님들 눈이 복을 받아,
예수님을 ‘생명의 빛’으로 받아들여...
온 몸이 밝아지고 구원에 이르는 은혜를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