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역사의 빈 들에서·지은이 정중규
빈 들. 내 삶은 빈 들, 언제나 빈 들이었다. '58 개띠'로 태어나 첫돌을 앞두고 덮친 아픔의 굴레 소아마비로 평생을 장애라는 짐을 지고 휠체어에 의지해 살게 된 그 때부터 내 삶은 빈 들이었다. 언제나 나의 세상 공부는 혼자였고, 하느님에서부터 세상 모든 것과의 만남도 오직 홀로였다. 그 빈 들에서 내 삶의 불꽃을 오롯이 태우며, 지난 사십년을 에트랑제(etranger)처럼 살았었다. 그런까닭에 오히려 이른바 제도권 교육에서 자유로왔고, 제3자적 입장에서 세상을 보다 객관적이고 정직하게 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쓰레기 더미에서도 활자가 박힌 종이조각만 보이면 꺼집어내 탐독했다는 '동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의 그 심정으로 나는 책을 벗삼았고 내 나름 인생과 세상에 대해 사색했고 숱하게 글을 적었다.
마침 올해가 내가 일기장에다 글을 쓴지 25년이 되는 해이기에 지나간 4반세기의 내 삶을 정리도 할 겸해서 새로운 세상을 향한 나의 노래들을 모아 얇게나마 한 묶음으로 만들었다. 신영복 선생께서 글모음집 [나무야 나무야]에서 "수(秀)와 장(莊)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속성인지도 모릅니다. 이 둘 가운데 하나만을 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단연 수(秀)보다 장(莊)을 택하고 싶습니다. 장중함은 얼른 눈에 띄지도 않고 그것에서 오는 감동도 매우 더딘 것이긴 하지만 그것의 '있음'이 크고 그 감동이 구원(久遠)하여 가히 '근본'을 경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주장했던가. 내 나름 그런 책을 만들고 싶었다. 그런 메시지를 이 책에다 담고 싶었다. 여섯 마당의 이야기인 이 책의 메시지는 오직 '이 사회의 인간환경의 인간화를 위하여'로 모아질 수 있다. 바로 내가 꿈꾸고 바라는 좋은 세상이다
우리 부모님이야 말할 나위도 없고 가족들, 어릴 때 재활원 시절의 물리치료사 염 선생과 서정희 누님, 동촌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 중앙중학교 하마(河馬) 친구, 유이(有二)한 벗들 임희진과 성승학, 무척 나를 사랑해주셨고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신 외할머님과 외삼촌 신상조 신부님, 내 영적 지도자이신 정행만 삼촌신부님과 오수영·하 안토니오 신부님, 효숙 안나·마르타·노엘·마리로사·아도라타 수녀님, 이현주 목사님, 포럼신사고의 김정주 선생님, 배다지 선생님과 박재율씨, 무엇보다 내 가슴을 한아름 사랑으로 발갛게 물들여주었던 소녀들 특히 JHK, OMA. 인간다운 너무나 인간다운 좋은 느낌으로 나를 키워주었던 그들 모두는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내 삶에 언제까지나 소중히 살아 있다. 어쩌면 우리의 새천년도 이러한 인간의 얼굴에서 희망을 찾아야 할 것이리라.
부끄러운 작품에다 넓으신 마음으로 기꺼히 추천사를 써주신 부산일보 김상훈 사장님과 부산대 김성국 교수님, 귀한 사진작품들을 선물해주신 사진작가 최민식 선생님, 표지화를 꾸며준 동양화가 하삼두씨와 금오기획, 제자(題字)를 영역(英譯)해주신 시인 김철 선생님, 초벌원고를 살펴주신 반여본당의 양요섭 신부님, 가톨릭신문 차영도 선생님, 국제신문 강동수 기자님, 평화신문 김원철 기자님, 유상훈 형과 복사나라, 그리고 함께 산고를 겪으며 이토록 아름다운 책을 꾸며주신 '도서출판 푸른별'의 류명선 사장과 이선경씨, 무엇보다 언제나 내 글의 원천이 되는 이 땅의 수많은 장애인들을 비롯한 소외된 우리 민중들의 아픈 가슴에다 깊은 감사와 사랑을 드린다.
새천년추진위원회 이어령 위원장께선 '뉴 밀레니엄'을 순수 우리말 '새 즈믄해'로 바꿔부르자고 한다. 과연 옛 즈믄해는 저물고 새 즈믄해가 솟아오는 즈믄과 즈믄 사이에서 더 넓게 펼쳐진 빈들에다 나무 한 그루를 심는 심정으로 이 책 한 권을 다가올 새 즈믄해에 바치고 싶다. 아니 지나간 즈믄해의 마지막 빈칸을 채우는 심정으로 이 노래를 마저 부른다.
새 즈믄해를 앞두고 광안리 바닷가에서
터질듯한 빛으로 움트는 새 천년의 새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