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27.
쪽파
차창으로 녹차향이 밀려온다. 나에게서 보성이라는 땅은 녹차만 떠오른다. 보성제다 녹차가 뇌리에 뿌리 깊게 박힌 탓이리라. 젊은 날 ‘선비 다도’로 짧은 시절을 보낸 적도 있었지만, 각종 다기 세트만 값비싼 유물로 남기고 말았다. 메뚜기도 한철이라더니만 그땐 그랬었다.
시월 말, 천고마비의 가을이다. 추수가 끝난 논에는 공룡알처럼 하얀 덩어리의 볏집 원형 곤포 사일리지가 지천이다. 국도변에서 흔하게 만나는 풍경이다. 드문드문 흰색 비닐로 멀칭된 밭들이 보인다. 검은색이 아닌 흰 비닐이라서 쪽파밭이겠거니 한다. 따뜻한 남쪽이라서 파종 시기가 좀 늦은 듯하지만, 10월 초중순에 파종했을 것 같다. 보성이 쪽파를 많이 한다는 소문이 정말인가 보다.
쪽파를 생각하면 즐겁다. 9월 초에 뜻하지 않게 쪽파 씨앗을 얻었다. 텃밭에 심고 남았다며 서른 알쯤 건네주길래 비닐하우스 안에 심었으나 4주가 지나도 깜깜무소식이었다. 포기랄 것도 없이 하루 이틀 지나다 보니 자존심이 꿈틀거렸다. 자꾸만 보채는 아내 때문의 오일장터에서 부실한 쪽파 종자 한 소쿠리를 구매했다. 9월 말이었다. 남들보다 늦은 파종이라 긴가민가하며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에 한 뼘이나 자랐다. 보성 쪽파보다 모양새가 좋은 내 쪽파를 생각하니 가을이 더 풍성해진다.
기발한 가게명을 가진 전집이 있다. 가게 이름만 들어도 전집이란걸 금방 알 수 있을 듯한 홍길동전, 흥부전 놀부전, 전쟁이들, 패자부활전, 삼파전 등이다. 파전을 비롯해 부추전, 고구마전, 감자전, 동태전 등과 막걸리를 파는 전문점이다. 고소한 기름 향이 솔솔 풍기는 전집에 들어서면 모든 종류의 전을 다 맛봐야 한다. 많이 먹는 것보다 ‘모두 맛본다.’로 목표를 정한다. 대개가 그렇다.
파전을 먹고 싶다. 프라이팬에 나란하게 누운 쪽파 위로 밀가루 반죽을 두르고 앞뒤를 노릇하게 구우면 별미다. 오징어나 새우, 굴, 홍합 같은 해산물과 빨간 고추를 엇썰어 몇 개 올리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남들은 막걸리 한 사발을 겸하겠지만 알코올 없이도 잘 구워진 쪽파 하얀 뿌리 씹는 맛으로도 나는 충분하다.
파김치도 좋아한다. 간이 잘 밴 파김치 한 접시면 쌀밥 한 그릇도 뚝딱인 사랑스러운 딸을 생각하면 쪽파 농사가 성공해야 한다. 텃밭에 6행 40열로 심은 쪽파는 씨앗만 240개 정도 심었고 한 씨앗이 평균 다섯 포기로 분화했다면 대충 계산해도 쪽파 1,200포기는 수확할 수 있을 것 같다. 파전은 몇 장이나 구울 수 있고, 파김치는 몇 통을 담을 수 있을까? 생각만으로도 행복하다.
운전 잘하는 아내 덕분에 가을이 더 풍요롭다. 조수석에 앉아야 더 많이 보이고 더 잘 보인다.
첫댓글 쪽파가 마지막 작물인겨?
아마... 쪽파와, 배추와, 무가 마지막일꺼야... 현실을 부정하는 뜻에서 당근을 심었으나 수확은 어려울 듯...
1월말이나 2월에 캐라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