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혜은사 주지 덕산 스님
극도의 신장염 고통 속 3000일 용맹정진 ‘덕산 염불선’ 창출!
군 복무 때 당한 구타 어혈이 신장기능 망쳐
저염식 식단 절실해 수행터 찾아가며 정진
명호는 짧고 빠르게 해야 번뇌 들어갈 틈 주지 않아
견성이 곧 성불 아니다! ‘습’ 녹이는 보임 철저해야
‘기후위기·차별’ 극복할 원동력 ‘직지’에 오롯이
‘직지고인쇄博’ 명칭변경 박물관 위상제고 확실
용맹정진 수행자 지원 ‘12칸 무문관’ 불사 희망
어른 스님들이 덕산 스님을 처음 만나면 하는 말씀이 있었다고 한다.
“얼굴 인상 좀 펴게!” 신장염을 오랫동안 앓아 온 덕산 스님은
신도의 기증으로 신장이식 수술을 받았지만 후유증도 심하게 겪었다.
5월의 햇살이 유난히 따가웠던 날, 청주 혜은사 관세음보살 입상 점안식이 봉행됐다.(1992)
증명법사는 당대 선지식 청화(1924∼2003) 스님.
사자좌에 올라 법문 내리려는 순간 관세음보살상의 머리 위로
무지개처럼 영롱한 반원형의 띠가 나타났다.
야단법석에 운집한 300여명의 사부대중이 합장한 채 술렁였다.
‘저 반원형의 빛 또한 허상’임을 직시하고 있던 덕산(德山) 스님이었지만
차오르는 환희를 억누를 길은 없었다.
군 제대 직후 시골에서 농사일을 돕고 있을 때
극심한 오한을 동반한 부종이 생겨 진료를 받았다.
신증후군(Nephrotic Syndrome). 군 복무 때 선참에게 당한 구타로 생긴 어혈이
끝내 콩팥의 기능까지 망쳐놓은 것이다.
요양 차 들어간 절에서 49일 정진을 이어가던 중 48일 째 되는 날 꿈을 꾸었다.
미륵부처님이 염주를 주기에 받아 들고 뒤를 돌아보니
흰 옷 입은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절을 하고 있었다.
숙연에 이끌리듯 자연스레 산문을 열고 삭발염의 했다.(1982)
세속의 정은 끊고 출가했지만 신장염마저 끊을 수는 없었다.
사찰음식의 간보다 더 낮은 극도의 저염식을 해야만 했다.
생쌀 빻은 곡식과 소금 안 친 김 한 장이 찬의 전부였다.
강원을 졸업하지 못하고 속리산 법주사, 청주 용궁사 등으로 옮겨 다닌 것도
저염식 식단을 차릴 수 있는 수행 터를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선운사 참당암에서 염불정진을 하던 중 비어있던 혜은사와 인연이 닿았다.(1989)
임시 법당 하나 남아 있는 허름한 도량에
관세음보살님 한 분이라도 조성하고 싶다는 마음에 덜컥 사채를 끌어다 썼다.
결국 사달이 났다. 매월 돌아오는 이자를 갚아야 한다는 압박감은 상상을 초월했는데
구도심마저 흔들어 놓았다. 그때 부처님의 말씀이 귓전을 울렸다.
‘마군(魔軍)도 수행을 도와주는 벗으로 삼으라!’
덕산 스님은 관세음보살 입상을 조성하며 3000일 용맹정진에 돌입했다.
하루 2시간씩 세 차례 정진하는 삼분정근에 돌입했다.
일주일 정도 지날 무렵 관세음보살님을 중심으로 한 불보살님이 현전했다.
벅찬 환희에 용맹심이 솟았다.
그 무렵 곡성 성륜사 조실로 주석하고 있던 청화 스님을 찾아 가르침을 청한 결과
자신이 밀어붙이고 있던 염불선에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는 용맹정진에 돌입했다.
청화 스님이 법좌에서 내려올 때까지도 오색찬란한 반원형의 띠는 그대로 떠 있었다.
청화 스님은 혜은사를 떠나며 일렀다.
“이 도량에 큰 불사가 이뤄질 것이다!”
그날 이후 3000일 정진에 들어갔다. 신장염이 짓눌러 와 의식까지 잃는 고난도 겪었지만
그때 그때 슬기롭게 다스려가며 정진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회향 200여일을 앞둔 1999년 10월. 새벽 정진 중에 삼매 속에서 희유한 체험을 했다.
덕산 스님은 자신의 저서 ‘염불선’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갑자기 머리가 텅 비워지면서 우주가 훤히 밝아지고
말과 생각이 끊긴 자리를 또렷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의 환희는 세상에 나온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로부터 20여 일 간 나는 자유로운 경지를 느끼며 지냈습니다.’
‘금강경’의 사구게 중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가 다 허망하다.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이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를 단박에 간파했다.
서산 스님의 오도송 ‘닭 우는 소리를 듣는 순간, 장부의 할 일을 다 마쳤네’라는 말도 떠올랐다.
그 직후 덕산 스님은 한 마디를 토해냈다.
“다시는 천하의 노스님 혀끝에 속지 않으리라.”
자성미타(自性彌陀)를 확인했음이다. 충만한 법열 속에 한없는 눈물을 흘렸다.
그 이후 경전과 선어록 어디를 펼쳐도 막힘이 없었다.
혜은사는 한국불교 대표 염불선 도량으로 우뚝 섰다.
청화 스님의 예견대로 대작불사가 일어났다.
4300여 제곱미터(1300평)의 대지 위에 대웅전과 약사전, 금용선원, 자은원 등이 연이어 들어섰다.
혜은사는 청주의 대표 염불선 도량으로 우뚝 섰다.
덕산 스님의 저서들을 살펴보면 자성을 깨닫도록 하는 실상염불과
염불을 화두 삼아 참구하는 공안염불의 정수를 회통한 덕산 스님 특유의 염불선을 전하고 있다.
“염불(念佛)은 ‘부처님을 생각한다’는 뜻이지만
만약 그 부처님이 어디에 따로 계신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나의 ‘생각 이전의 자리’가 ‘부처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문자, 언어, 시공, 분별, 유무가 떠난 자리이기에 실상의 자리, 본래의 자리라고도 합니다.
이것이 진여당체이자 본래면목입니다.
따라서 터럭만큼의 의심도 하지 말고 ‘내가 부처’임을 태산보다 강건히 믿고 정진해야 합니다.”
석가모니·아미타·관세음 등의 불보살 명호를 염하면서도
‘염불하는 이것은 무엇?’이 아닌 ‘실상의 자리’를 관하며 정진하라는 얘기다.
진여당체가 드러나면 어떤 변화가 있는 것일까?
“실상을 바로 볼 수 있는 반야가 열립니다. 경전과 선어록을 보면 바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나의 참모습을 보았다(견성)고 해도
곧바로 당체와 하나가 되어 생활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 본래자리를 확인한 뒤에는
지난 세월 동안 익혀 온 습을 녹이는 보임(保任) 공부를 철저히 해야 합니다.”
견성이 곧 성불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실상의 자리에 이르려면 삼매를 거쳐야 한다.
그러려면 ‘집중’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방편은 무엇일까?
“저는 염불을 짧고 최대한 빠르게 하라 권합니다.
‘관세음보살·지장보살’보다는 ‘관음·지장’으로 염하라 합니다.
명호를 길게 외다 보면 찰나의 틈 사이로 번뇌가 끼어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소리를 내야만 하는 건 아닙니다. 편안한 자세로 염하는 것도 적극 추천합니다.
누워서 눈을 지그시 감고 10분만이라도 집중해서 해 보세요.”
덕산 스님은 연기법과 삼법인에 대한 이해는 필수라고 했다.
“우리가 어디를 향해 걸어야 할지를 명확히 인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제법무아(諸法無我)의 도리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내가 없다’는 게 아니라 ‘나’라고 지칭할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무아의 가르침이 공(空), 불성(佛性), 진여(眞如), 법성(法性)입니다.
무아는 진여당체와 직결됩니다. 이러한 것을 한 마디로 ‘마음’이라고 합니다.”
공, 연기, 불성, 자성, 마음을 드러낸 명저를 청주는 품고 있다. ‘직지(直指)’다.
이미 ‘임제록’과 ‘금강경’ 강의로 청주 시민들의 큰 호응을 얻은 덕산 스님은
직지 강의를 2011년부터 10년 가까이 진행하고 있다.
‘직지’를 역해한 ‘직지심경’ 세 권도 선보였다.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의 진수가 농축된 ‘직지’입니다.
알음알이로라도 직지가 함축하고 있는 핵심들을 이해하면 염불선은 물론이고
그 어떤 수행의 증득에도 큰 힘을 불어 넣을 것입니다.”
덕산 스님의 선지가 저서들에 잘 배여있다.
청주 시내에 ‘직지불교대학’을 세운 연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대학은 불자들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일반 시민들에게도 문이 열려있다.
“‘직지’를 간행한 흥덕사 복원과 함께 고인쇄박물관이 들어섰습니다.
청주시 주최로 직지 축제도 열립니다. 그러나 ‘직지’를 누가 편저했는지,
그 책에 담긴 내용의 핵심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드물었습니다.”
청주 교동의 어린이교육관, 복대동의 충청대학교평생직업교육관,
수동의 과학관 등을 전전하며 강의실 하나 어렵사리 얻어 ‘직지’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렇게 3년을 보내던 차에 한 신도의 시주로 직지불교대학을 열수 있었다.
코로나19 때문에 잠시 멈췄지만 2020년 1월까지 7기 졸업생을 배출했다.
최근 ‘고인쇄박물관’을 ‘직지박물관’으로 고쳐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청주시는 박물관명칭선정위원회 토론을 거쳐 12월23일 최종 명칭을 선정할 예정이다.
“고인쇄박물관이라는 명칭만으로는 ‘직지’를 연상할 수 없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두 이름을 절충 한 ‘직지고인쇄박물관’으로 확정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박물관의 위상이 훨씬 더 높아질 것이라 확신합니다.
청주 시민은 물론 국민적 관심도 지대해지리라 보는데 이 점이 참 중요합니다.
‘직지’는 선지만 담고 있는 게 아닙니다.
‘자연과 내가 하나’이고 ‘차별 없는 세상’의 메시지도 전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가 절실히 요구하는 시대적 사명이 직지에 새겨져 있는 겁니다.”
이미 수년 전부터 ‘직지’를 강의하며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역설해 온 덕산 스님이다.
“하늘과 땅은 한 뿌리이고(天地與我同根) 만물은 나와 한 몸(萬物與我同體)이라고 했습니다.
인류는 이것을 간과했습니다. 기후위기 대재앙은 이미 시작됐다고 합니다.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동식물의 8분의1에 해당하는 100만 종이 멸종 위기에 처했습니다.
해양 지역 66%가 치명적 상태에 놓여있고, 85% 이상의 습지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동식물이 죽어가는 지구에서 인간인들 생존할 수 있겠습니까?
폭염, 한파, 태풍, 홍수, 산불 등의 이상 기후현상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해마다 발생하는 기후 난민만도 2500만 명입니다.
식량·식수난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아이들의 눈을 어찌 본단 말입니까?
그러나 ‘인류문명 붕괴를 향해 돌아가는 시침을 되돌릴 수 없다’는
섣부른 절망이나, ‘누군가에 의해 어떻게든 호전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희망 등의
양 극단에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중도 관점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내야 합니다.”
“차세대 바이오 연료, 냉매 없는 냉각수, 가뭄과 홍수에 강한 식용작물도 나오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것은 과학계에서 할 일입니다.
요즘 잔소리처럼 말하곤 합니다. ‘휴지 하나라도 아껴 쓰시라!’
‘손에 쥔 텀블러 가능한 오래 쓰시라!’
지금 이 자리서 할 수 있는 소소한 일부터 실천하자는 겁니다.”
덕산 스님은 기후위기 대재앙의 심각성과
우리의 실천 과제 등을 담은 ‘환경 영상’을 준비하고 있다.
전 세계인이 주목할 수 있도록 영어자막도 넣을 것이라 한다.
덕산 스님이 희망하는 불사 하나가 있다. 무문관이다.
“구화산을 순례했을 때 불현듯 인 생각입니다.
신라의 왕자 한 명이 깨달아 지장보살의 화신(金喬覺)으로 1000년을 넘게 추앙받고 있습니다.
구화산의 법등은 지금도 켜져 있습니다.
포교 지평을 넓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깨달음에 이르겠다는
당찬 원력을 세운 염불선 수행자가 찾아온다면
용맹정진 할 수 있는 작은 공간 하나라도 내어주고 싶습니다.
현재 구상하고 있는 건 12칸의 무문관입니다.”
단 한 명이라도 더 궁극의 자리, 실상의 자리에 올려놓고 싶은 것이다.
그 공간 어서 조성되기를 기대한다.
청주를 넘어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명실상부한 염불선 도량으로 또 다시 거듭날 것이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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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스님은
1982년 출가. 염불선을 주창한 청화 스님을 친견하며 가르침을 받은 후
본격적인 염불선 정진에 들어갔다. 1992년 8월 3000일 용맹정진에 들어가
1999년 10월 자성미타를 확인했다. 현재 충북 청주시 청원의 혜은사에서
출·재가 수행자들에게 염불과 참선의 장점을 결합한 염불선을 지도하고 있다.
저서로는 ‘염불선’, ‘달마는 서쪽에서 오지 않았다’ 등과
직지와 임제의 어록을 강설한 ‘직지심경’(전 3권)과 ‘임제록’을 선보였다.
2021년 12월 1일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