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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로 잘 알려진 허 준. 그가 많은 이들의 목숨을 지켜내고 꺼져가는 생명하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믿음과 환자로부터의 신뢰. 사실 이 믿음과 신뢰야말로 환자와 의료진 사이의 가장 중요한 처방이 아닌가 싶다. 40여년 동안 꾸준히 대웅제약을 이끌어 올 수 있었던 그 힘도 바로 정직함이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란 나는 유난히 병든 사람을 고치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막상 내가 이 길로 들어서기까지 약간의 우회로를 거쳐야 했다. 성균관대 약대를 졸업하고, 57년 부산 동아고등학교의 화학교사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교사로 재직하면서도 약학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는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길이 아니면 더 늦기 전에 다른 길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고, 결국 1년 남짓 내교사생활을 마감했다. |
그러나 잠시도 한가로이 지낼 순 없었다. 바로 내가 직감한 내가 가야할 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나는 곧바로 부산 수정동 경남여고 앞에 ‘선화약국’을 열었다. 어렵사리 문을 열긴 했지만, 기존 약국과의 경쟁은 만만치 않았다. 병든 사람들에게 건강을 찾아주고 믿음을 줄 수 있는 모범적인, 말 그대로 정성을 다하는 약국을 만들고 싶었다. 날 믿고 찾아오는 환자를 위해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대하는 것이야말로 다른 약국과 차별화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무엇보다 환자들에게 최상의 약을 선별해 줄 자신감도 있었다. 일단 선화약국 문을 열고 들어온 환자들에게 내가 아는 모든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진심으로 그들의 입장에서 약을 선택해 주었다. 여러가지 좋은 약들이 많이 있었지만, 환자에게 가장 적합한 약에 대해 설명했고, 내가 환자의 입장이라면 어떤 점이 가장 불안하고 궁금한지에 대해 더 연구했다. 그 당시 약국 옆에 작은 방에서 생활하던 내게 그 약국은 일터요 보금자리인 셈이었다. 새벽 6시에 문을 열어 밤 12시에 문을 닫았지만, 새벽 2~3시에 위급한 환자가 문을 두드릴 때도 많았다. 단순히 이윤을 남기기 보다는 우수한 약품을 우선 구입했고, 틈날 때마다 병원의 우수한 조제사례나 외국 처방전을 입수해 처방 조제 공부도 병행했다. 하루 2~3시간 밖에 못자는 날도 많았지만, 약을 조제하고 환자를 상담하는 그 모든 일이 내게는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고, 어떨 때는 잠자리에 누웠을 때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기도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서서히 환자들이 몰리기 시작한 것이다. 내 진심이 통했다는 점이 무엇보다 기뻤다. 약국앞은 환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하루 1천 여명의 환자를 받은 날도 있었다. 친절함과 진심으로 다가갔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이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곧바로 매출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다른 약국의 하루 매상이 몇 만원 정도 일 때, 선화약국은 50만원을 넘겼다.
돈이 모이기 시작했고, 나는 또 다른 도전을 준비했다. 기업에 대한 꿈이었다. 서두르거나 앞서 달리지 않고, 내 소신을 펴고 싶었다. 그리고 제2의 전성기를 향한 성공에 대한 확신도 예감할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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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약국의 성공은 내게 많은 것을 가져다 주었다. 사업에 대한 자신감은 물론이고 환자를 대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느끼게 해준 것이다. 사실 혈기왕성했던 20대 시절 그렇게 열정적으로 일할 수 있었던 건, 그만큼 나를 믿고 찾아와 주는 환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당시 나는 양복과 구두를 맞추지 않았다. 오히려 구두 뒷굽을 잘라 슬리퍼를 만들어 약국에서 신을 정도였다. 언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할지 모르는 환자들을 생각하면 잠시라도 자리를 비운다는 건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선화약국이 자리를 잡아갈 무렵 내게 또 한번의 기회가 왔다. 그 당시 좀 더 큰 기업의 꿈을 꾸고 있던 내게 제약회사 인수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66년 구정아침. 약국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평소 약품 관계로 알고 지내던 대한비타민사의 박문수 사장이 회사 인수를 제안했다. ‘좀 더 큰 일을 해보자’라는 생각과 맞물린 제의, 나는 주저 없이 인수를 결심했다. 더욱이 서로 상대방이 요구하는 인수가격도 일치했다.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식사 전 물이 나오기도 전인 단 5분만에 모든 인수 계약을 마무리지었다. 계약서 한 장 주고받지 않은 구두 계약으로 대한비타민이라는 회사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33살. 일에 대한 열정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막상 대한비타민이라는 회사를 인수하고 사장에 취임했지만, 처음부터 모든 것이 만만치 않았다. 고질적인 병폐와 부실 기업의 흔적이 여기저기서 눈에 띄었다. 가장 큰 문제는 자금 부족과 사원들의 무사안일주의. 병 뚜껑 하나에도 여러가지 문제점이 드러났다. 제품 병 뚜껑이 입고될 때 무게를 검수하면 개수가 적고, 개수로 검수하면 무게가 줄어드는 이상한 일이 생기기 일수였고, 원료가 입고되는 차량의 상당수가 빈 드럼통으로 들어왔다 나가는 등 헛점 투성이였다. 그러나, 이대로 두고 볼 순 없었다. 그토록 원했던 사업. 우선 경영 악화 상태에 있는 회사를 살리는 일이 급선무였다. 작은 부분부터 하나하나 고쳐가기 시작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편법 없이 정도를 걷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환자들에게 떳떳한 기업, 오래도록 기억되는 기업이 되기 위해선 일대 혁신이 필요했다. 사장실에 야전 침대를 갖다 놓고 회사에서 숙식을 해가며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들을 직접 하나하나 체크하기 시작했다. 원료 입고에서부터 생산과정, 영업사원들의 판매 장애요인 그리고 세일즈 테크닉 등 모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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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길도 물어가라 했던가. 대한비타민사를 살리기 위해 회사를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기본부터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나 혼자만의 열의와 노력으로 회사를 살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매일 간부와 사원들을 한 사람씩 사장실로 불러 내 의지와 신념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 한 가지만은 꼭 잊지 않았다. “만약 내가 탈세를 한다면, 여러분도 회사 돈을 써도 좋다.” 사실,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 내 자신이 실천에 옮길 자신이 있었고, 그런 나의 생각을 모든 직원들이 느끼기를 간절히 바랬다. 이런 진심이 통했는지, 서서히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66년 인수 당시 업계 34위이던 대한비타민사의 발돋움이 시작된 것이다. 67년 24위, 68년 19위, 69년 16위, 70년 상반기에는 12위까지, 말 그대로 매년 60%가 넘는 급성장을 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순 없었다. 말 그대로 새로운 개혁으로 회사의 일대 혁신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앞으로 더 뻗어 가느냐 아니면 이대로 머물러 있느냐를 결정지을 중요한 시기였다. 이후 회사의 혁신을 위해 나는 Zero-Defect(무결점)운동을 업계 최초로 도입했다. 당시 다른 기업들은 생산과 판매에 매달려 있던 상황. 그러나 나는 모든 결점만 해결되면 생산과 판매 모두 증가할 것이라 판단했다. 매일 이어지는 토론에 사원들을 직접 집으로 불러 숙식까지 함께 하며 회사 살리기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들은 회사의 매출에도 큰 성과를 가져왔다. 인수 당시 3백 5십만원에 불과했던 회사의 월 매출이 5년 후 월 4천만원으로 성장한 것이다. 다 쓰러져 가던 대한비타민사는 그렇게 살아나기 시작했고, 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대한비타민사의 위치를 더욱 확고히 하는 계기를 마련한 일이 생겼다. 다름아닌 싸이클라메이트 파동(1969)이 바로 그것. 드링크 류에 설탕 대신으로 들어가는 인공 감미료 싸이클라메이트가 발암물질로 판명되어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킨 것이다. 이 여파는 제약업계에 찬물을 끼얹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당시 여러 회사의 제품이 조사, 검수 되었고, 대한 비타민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조사 결과, 대한비타민의 ‘아스파라 S 드링크’만이 유일하게 인공 감미료 싸이클라메이트를 사용하지 않았음이 입증된 것이다. ‘아스파라긴산’을 주성분으로 하는 이 드링크는 자체 원료가 비싸 당시 1병에 1백원이나 하는 고가로 다른 저렴한 제품과 비교해 그 당시 크게 빛을 보진 못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소비자들에게 알려지면서 믿을 수 있는 제품이라는 인식의 확산으로 큰 호응을 얻어, 드링크 시장을 석권하는 개가를 올리게 되었다. ‘정직과 신의’로 좋은 약을 만들겠다는 나의 신념을 확인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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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계 순위 34위에서 12위로 성장.
그러나 이런 성장에도 한계가 나타났다. 회사의 성장이 어느 순간 주춤하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사원들의 노력을 헛되게 할 순 없었다. 얼마 후 ‘입지적 여건’이 한계라는 것을 깨달았다. 당시 부산은 서울에 비해 유능한 인재와, 양질의 원자재 확보에 어려움이 있었다. 게다가 경영정보나 의약기술정보도 2류의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실정. 나는 과감히 서울로의 진출을 감행했다. 회사의 질적, 양적 성장을 위해 더이상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먼저 경기도 성남시 상대원동에 4천 3백평의 대지를 마련하고 1천 4백평 규모의 공장건물 공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서울 진출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공사 자금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설 순 없었다. 대연동에 있던 집까지 팔아야할 형편이었다. 조심스레 아내에게 의논을 했고, 선뜻 그러자고 했다. 오히려 내 입장을 더 생각해 주었던 아내에게 고마웠다. 이렇게 해서 72년 9월 성남 공장이 세워진 것이다.
그토록 고대하던 서울입성이 자리를 잡아갈 무렵, 서울의 일류 제약업체들을 둘러봤다. 앞서 있으리라고 상상은 했지만, 실제 첨단 장비와 시설면에서 그 이상이었다. 대한비타민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우수했다. 또, 이 당시엔 외국 제약업체의 국내 진출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다. 뭔가 일대 혁신이 필요했다. 곧바로 공장시설의 현대화를 비롯해 신제품 개발과 원료합성, 제제기술 개발에 매달렸다. 처음 대한비타민을 인수하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갔다. 또 다른 도약을 위해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장비와 시스템을 현대화하는 것과 동시에 내부적으로도 정비가 필요했다.
73년 과감히 기업공개를 단행했고, 우리사주조합도 발족시켰다. 우리사주조합은 주식을 몇 사람의 대주주가 소유하기보다는 사원이 소유하는 것이 좋으리란 판단에서 단행한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직원이 찾아와 “주식대금을 봉급에서 떼는 것은 봉급을 인하하기 위한 것 아니냐”는 불만을 토로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주식의 3분의 1을 사원들에게 액면가로 팔고, 대금은 봉급에서 쪼개 1년 동안 상환하게 하자 당시 주식에 대한 인지도가 낮은 사원들의 불만을 산 것이다. 나는 주식을 사서 이익이 생기면 사원들이 갖고 손해를 보면 회사가 보상해주기로 하는 한편 30%의 현금 배당도 실시했다. 회사에 이익이 나면 곧 직원과 함께 나눈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건전하고 투명한 기업풍토를 조성하고, 회사의 실제 주인은 사원이며 회사의 이익도 이들과 함께 나눠야 한다는 내 생각엔 변함이 없다. 스스로 떳떳한 기업이 되는 길인 기업공개, 우리사주조합 등을 통해 대한비타민도 변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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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년 새로운 제품 개발과 기존 제품의 개선을 위해 부설 연구소를 설립했다.
사실 간장약은 이미 다른 업체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던 상황이었다. 뭔가 다른 차별화가 필요했다. 순간 내 머리에 스치는 게 바로 최고의 약효를 낸다는 웅담이었다. 여기에 예로부터 간장질환 치료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웅담을 어떻게 약효화 시킬 것인가를 고민하던 끝에 탄생한 약이 바로 우루사였다. 바로 이곳에서 대웅제약 기술로 웅담성분 간장약 우루사가 탄생한 것이다. 웅담의 약효 성분인 우루소데속시콜린산(UDCA)이 함유돼 간에 쌓이는 피로물질을 밖으로 내보내주는 역할을 해 말 그대로 피로를 가시게 하는 ‘웅담성분 간장약’ 이다. 61년 정제로 발매된 이후 74년 세계 최초로 연질 캅셀화, 77년 연질 캅셀 자동 생산화 등으로 품질과 효능이 향상됐다. 74년 1억원의 판매실적을 기록한 이 제품은 85년에는 무려 1백 27억의 매출을 올렸고, 90년에는 2백억원에 이르렀다. 또, 61년 처음 개발이후 지속적인 개선과정을 거쳐 86년 서울 아시안 게임, 88년 서울 올림픽 공식 간장약으로 선정되는 등 그 제품의 우수성을 인정받는 한편, 국내 캅셀제품 시장의 70%, 간장약 시장의 50%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10년간 100배 성장. 도저히 믿기지 않는 놀라운 기록을 세운 것이었다. 드디어 80년대 중반 우리는 제약업계 10위권 진입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또, 웅담 성분을 자체 합성에 성공한 공로로 철탑산업훈장까지 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뿌듯한 일은 지금까지도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는 우루사의 약효와 효능을 꾸준히 연구해 그 우수성을 입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날 부터인가 걸려오는 문의전화. “대한비타민에서 비타민만 만드나요? 비타민 외에 다른 약은 없나요?” 난감했다. 그 당시 회사가 성장하면서 대한비타민이라는 회사이름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우루사를 비롯해 다른 약을 생산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타민만 생산하는 비타민 전문회사로 먼저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우루사나 지미신 등의 유명한 제품도 우리회사의 제품인 것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사람의 이름이 중요하듯 회사의 이름도 신중히 검토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대한비타민은 창립 33주년을 맞게 된 78년 2월 대웅제약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건강의 이미지와 부합하는 큰 곰으로 새롭게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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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년 약의 상, 82년 의약계 최초 금탑산업훈장, 82년 한국능률협회(KMA) 경영실적 분석 업계 1위, 87년 철탑산업훈장 노사부문 수상. 이 모든 것들이 대웅제약이 일궈낸 땀과 노력의 열매들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 뛰어난 효능의 소화제의 개발에 몰두하고 있던 대웅에게 또 한번의 기회가 찾아왔다. 우루사의 성공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면서, 새로운 신약에 대한 기술 개발 역시 게을리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소화제 성분 중에는 일본의 야쿠르트에서 합성되는 효소제가 필요했고 일본 야쿠르트에서는 두 군데의 제약업체에 그 기회를 주려했다. 순수기술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국내 업체끼리의 경쟁은 그만큼 출혈이 클 수 밖에 없었다. 그 경쟁은 무의미 했다. 나는 과감히 그 기회를 양보했다. 이 길이 아니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처방의 웅담성분이 가미된 신약 개발에 더욱 매달렸다. 10년에 걸친 연구결과, 88년 2월 국내 최초로 국산 배합신약 종합 소화제 베아제정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베아제는 국내 여러 종합병원에서 임상시험을 하여 약효의 우수성을 입증받은 유일한 소화제였고, 그런 약효가 인정되어 특허도 획득했다. 그 당시 한국내에서 국산 의약품이 단 한 품목도 개발되지 않아 외국에서 발매된 약에 한해 허가되었던 현실을 감안할 때, 베아제의 성과는 가히 놀랄만한 일이었다. 그때 그 기회를 양보한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셈이었다. 베아제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대부분의 소화제가 복용 후 2~3시간 후에 장에서 작용하는 데 반해 베아제는 복용즉시 위에서부터 신속하게 소화작용을 발휘하는 제품이었다. 특히 복합소화효소 성분과 웅담 성분(UDCA)이 함유돼 그 효능이 뛰어나 제품 발매 몇 해 만에 200억이 넘는 매출을 올렸다. 우리 기술로 탄생한 특허받은 소화제 베아제의 탄생은 그렇게 빛을 보기 시작했다.
또한 83년에는 세계제일의 연질 캅셀 회사인 미국 알피쉐러社 와 50대 50합작비율로 한국 알피쉐러를 설립하였고, 이를 통해 선진 기술을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전세계에 100%자회사만을 통해 연질캅셀을 생산하고 제조기술과 합작을 하지 않던 기업이 대웅제약의 경영 및 영업 주도로 합작 회사를 설립한 것은 당시만 해도 놀라운 일이었다. 여기서 한발 나아가 85년 5월에는 세계 최대의 종합 화학 메이커인 미국의 듀폰社를 파트너로 삼아 의료기기사업에 진출하게 되었다. 종합제약기업으로 발돋움하는 초석을 세우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도 더 큰 기회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자세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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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제약업계. 어쩌면 제약기업의 세계화는 당연한 과정일 것이다. 지금도 한달에 한번씩 열리는 직원조회시간. 일방적인 회사 지침 전달이 아닌 직원들 간 서로의 경험담을 공유하는 시간이다. 아무리 말단 직원이라 해도 이 시간만큼 자신의 방법과 경험을 자신있게 이야기 할 수 있고, 나 또한 그들로부터 많은 점들을 새롭게 배우고 있다. 각자의 성공 사례를 통해 새로운 자신감을 얻을 수 있고, 이 과정을 통해 직원들 스스로 각자의 능력 개발에 대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도 나는 이 시간이 기다려지고 그들의 열정에 열광하게 된다. 90년 이후 꾸준히 세계화를 위해 노력해왔고, 나는 제약기업의 세계화는 선진국에서 통용될 수 있는 신물질 신약을 만드는 것과 기업운영의 정보화를 이룰 때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가장 먼저 신약연구 개발에 몰두했다. 지난해에는 용인에 최첨단시설을 갖춘 생명과학연구소를 설립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물 중 하나가 바로 국내 바이오 신약 1호인 이지에프(easyef)였다. 당뇨병성 족부궤양 치료제인 이지에프는 1988년부터 약 13년간의 연구, 개발, 임상실험 결과 끝에 순수 국내 생명공학 기술로 얻어낸 값진 결과였다. 이지에프는 당뇨병성 족부궤양 치료에 72.5%의 높은 완치율을 보이고 있으며 이외에도 만성적인 피부상처, 각막의 궤양과 수술후 손상된 치료, 대수술 후의 흉터 최소화에 효과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 그 다음 단계로 나는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시스템을 도입했다. 97년 제약업계에서 최초로 도입한 전사적 자원관리시스템(ERP)이 바로 그 증 하나다. 외부에서 납품 입찰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고, 신제품 개발이 어떤 단계에 진입했는지 한눈에 알 수 있게 하는, 말 그대로 경영의 효율성을 높이는 효과적인 인프라 시스템이었다. ERP 시스템의 도입은 성공적이었다. 그 결과, 아시아 지역에서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꼽힐 만큼 그 효과는 만점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우수한 연구인력, 앞서가는 개발 능력과 창의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내뿐 아니라 세계 시장과 견주어도 손색없는 앞서가는 마케팅 능력의 개발을 위해 전 영업사원에게 노트북과 PDA지급을 통해 모바일 오피스(Mobile Office)를 구현해 외국계 제약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입사 1년 차의 한 영업부 직원은 일주일에 이틀만 회사에 출근한다. 진정한 의미의 효율적인 재택근무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효율적인 시스템, 우수한 인력 개발, 신약개발을 위한 과감한 연구개발 투자, 이 세가지 삼박자가 조화를 이루어가는 동안, 대웅도 한걸음씩 앞으로 전진해 갈 것이고, 그와 함께 국민의 건강과 삶의 질도 높아질 수 있다는 진리를 확신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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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에프 개발 후, 핵심 과학자였던 박승국 박사가 “연구한 결과가 상품화되어 환자를 치료하게 되고, 그 환자로부터 감사의 전화를 받을 때 더욱 큰 사명감을 느끼게 된다.”며 기뻐하던 모습을 보며 나는 대웅제약의 또 다른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 7월 24일 대웅제약은 기업분할을 단행했다. 의약분업, 다국적 제약회사의 성장, 경영 환경변화 등 급변하는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세계최초, 국내 최초로 당뇨병성 족부궤양 치료제 EGF를 개발한 R&D 인프라를 바탕으로 제 2의 신약개발 추진 및 바이오 벤처기업과 전략적 제휴를 통해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Global HealthCare Group' 으로 다시한번 새롭게 거듭나기 위해서다.
환자와 그 가족들의 고통을 덜기 위해 편리하고 경제적인 통합된 건강,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미래의 꿈을 만들어 가기 위해 안주할 수가 없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원하는 길, 가고자 하는 길이 있을 것이다. 그 길에 도달하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는 이가 있는가 하면 조금 돌아가더라도 차근차근 한계단씩 그 길에 오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조금 빨리 도착했다고 해서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순리대로 정도를 가는 것이 어쩌면 완전히 그 길을 가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요즘 나는 주위사람들에게 자주 이런 질문을 던진다. ‘사는 목적이 뭔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사실, 가장 좋은 약으로 환자를 빨리 나을 수 있게 하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요 행복으로 알고 일평생을 살아온 나지만, 막상 나조차도 이런 질문 앞에서 그 답을말하는 것이 쉽진 않다. 그러나 40년전 처음 선화약국의 문을 열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대웅의 전 가족들이 이 일을 통해 행복을 느끼고 모든 직원이 연봉을 5천만원 이상 받는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 모든 이들이 최고의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는 그날까지 나는 다시 한번 일어설 것이다.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 그 영광의 자리는 돌아오지 않는다.
투명하고 열린 경영의 실천, 신약 개발을 위한 과감한 연구개발 투자, 체계적이고 전략적인 경영시스템, 직원들의 경쟁력 강화 프로그램의 지속 개발을 통한 ‘삶의 질 향상을 선도하는 글로발 헬스케어 그룹’. 21세기 대웅제약이 나가야 할 방향이며, 그 목표를 향해 나는 또다시 새로운 길 앞에 서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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