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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청아카데미 167주(2013.2.20)
시간의 공간화, 공간의 시간화
- 영화에서 시간과 공간, 그 구체성과 그 현실성 -
이 강 화(영화칼럼리스트)
1. 추상적 형식으로서의 시간과 공간
시간과 공간은 가장 추상적인 형식으로 세계와 자연을 구획함과 동시에, 우리의 삶을 구체적으로 규정한다. 시. 공간에 대한 고찰이 모든 과학의 시원을 이루고 있는 것은 첫 번째 이유에서이고, 모든 철학적 문제의 첫 주제가 되는 이유는 두 번째 이유에서이다. 한편, 예술의 장르를 구분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전통적으로 시간과 공간이 이러한 구분을 위한 일반적인 기준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이리하여 근대에 이르러 세 개의 공간예술(회화, 건축, 무용)과 세 개의 시간예술(음악, 연극, 문학)이 구분되었고, 영화는 이 모든 영역을 종합하는 7번째의 장르로서 인정받았다.
여기에서 눈여겨볼 것은 영화에서 시간과 공간은 동등하게 취급된다는 것이다. 특히 시간은 공간과 더불어 영화분석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며, 영화가 예술로서 인정받게 된 동기도 이러한 독특한 시간성에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들은 영화라는 장르가 시간을 어떻게 독특한 방식으로 엮어나가며 어떻게 이를 공간 위에서 재현하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즉, 영화가 시간을 어떻게 공간을 통해서 가시화하면서 그 존재 양식을 어떻게 결정하는가를 분석하려는 것이다.
시. 공간은 측정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기에 고대로부터 수학적 계산의 대상이 되었다. 공간의 경우, 점(위치)의 연결에 의해서 선분이 구성되고, 선분은 길이에 의해서 정의되기 때문에 1차원적 존재이고, 평면은 길이와 넓이를 가지는 2차원적 존재이다. 높이와 깊이 그리고 넓이를 가진 공간은 3차원의 존재이다. 시간도 측정할 수 있는 기본 단위로서 예를 들면, 하루의 시간이나 1초의 지속을 출발점으로 하여 필요한 만큼 이 기본적인 단위로 셀 수 있게 한다. 시. 공간이 측정할 수 있는 크기인 한에서 이들은 양으로 정의할 수 있고, 이런 차원에서 수학(기하학과 대수학)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계산 가능한 양적 대상으로서의 추상적인 시. 공간을 현실에서는 구체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예를 들어서 사건들로 가득 찬 정신없이 바빴던 하루를 되돌아보는 경우, 그 지나간 시간은 결코 양적 대상으로만 인식되지 않는다. 물론 상상력을 통해서 기쁨과 근심과 노동으로 가득 차 있는 하루의 내용들을 지울 수 있다. 즉 그 모든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가정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상상력이 제거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으니 그것은 시간 그 자체, 즉 경과하는 모든 사건들의 바탕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속이라는 사건이 공허하면 할수록, 즉 시간 속의 내용이 빈약하면 할수록 그 시간은 더욱 지루하게 느껴지고, 반대로 그 지속이라는 사건이 충만하면 할수록, 시간 속의 내용이 풍부하면 할수록 더욱 즐겁게 느껴지는 것이다.
시간을 추상화할 수 없듯이 공간도 추상화할 수 없다. 거주하는 공간 상의 모든 대상들을 비워버려도 공간 그 자체를 제거할 수는 없다. 동시에 공간의 크기는 그 대상들이 공간을 점유하는 정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공간의 밀도성이 공간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처럼 시. 공간은 그것을 제거하려는 우리의 모든 노력에 저항한다. 시. 공간은 내가 결코 비워버릴 수 없는 나의 경험의 소여이며, 나의 경험의 세계에 필연적인 방식으로 연관되어있다.
그럼에도 시. 공간을 추상적 방식으로 이해하려는 태도는 과학적 사유가 요구하는 전통적 방식이었는데. 이러한 측정의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 시간을 공간으로, 공간을 시간으로 환산하는 것이다. 이때 시간의 측정이란 일정한 속도로 이동하는 운동체가 지나가는 공간, 예를 들어서 시계바늘이 문자판 위에서 편력하는 공간을 측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시간의 측정이 운동체가 지나간 공간의 위치들에 의해서는, 다시 말해서 운동을 통한 시간과 공간의 측정이 전혀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우리들은 보게 된다.
제논의 이론이 이러한 주장의 고전적인 예이다. 그의 여러 주장 중에서 다음 세 가지가 잘 알려져 있다. ‘二分의 역설’과 ‘경주의 역설’ 그리고 ‘나르는 화살의 역설’인데 이중에서 세 번째가 영화와 가장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날으는 화살의 역설’에 의하면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은 날아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로의 매순간 화살은 공간의 일정한 지점에 위치하게 되는데, 공간의 일정한 지점에 위치한다는 것은 화살이 자기 자신과 동일한 공간을 순간적으로 점유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이것은 화살이 그 순간 정지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화살은 날아가지 않고 영원히 정지해 있는 것이다.
제논은 왜 이러한 주장을 주장했을까? 그리고 그 오류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 베르그송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제논의 오류는 운동체가 지나간 궤적을 구체지속 속에서 체험된 운동자체와 혼동한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운동을 측정하는데 쓰이는 공간은 실상 무한히 분할될 수 있다. 그러나 운동 그 자체는 분할이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운동에는 서로 구별되어야 하는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운동체가 지나간 공간과 운동의 진행 자체, 다시 말해서 계기적인 위치들과 그 위치들의 종합인데 이 둘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베르그송이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시간에 대한 오성적 분석을 거부했던 이유도 운동이란 분할에 의해서는 파악될 수 없는 본성상 연속적이고 지속적이라는데 있었다.
공간은 등질적인 양의 집합이지만 시간은 질의 차원이기 때문에 운동을 좌표화하면서, 즉 운동을 특정 공간속의 한 점으로 규정한 것이 제논의 오류인 것이다. 물론 좌표화하는 것이 운동을 수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 고찰하는데는 편리할지 모르나 운동의 본질적 의미는 그런 방식으로는 밝혀질 수 없다는 것이 베르그송의 주장이다. 왜냐하면 운동은 그 본성상 연속적이지 분할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베르그송에 의해서 운동이 함유하고 있는 질적이고 구체적 지속이 분석적이고 연역적인 오성의 지배를 벗어나게 된다.
동시에 연역논리가 시간의 부정이라는 것도 쉽게 증명되는데 그 이유는 한 명제로부터 다른 명제를 연역해 낸다는 것은 두 명제가 동일한 것임을 드러내는 것이며, 현재로부터 미래를 연역해낸다는 것은 미래와 현재를 동일시하는 것이다. 연역논증에서의 논리적 동일성은 시간적 계기를 사상시키는 것이고, 이것은 결과를 원인에 완전히 환원시켜 동일시함으로써 시간적 비가역성을 모면하는 것이다. 그러나 연역논리가 실패한 이 지점에서 변증법적 논리는 성공을 거둘 수 있다. 변증법은 동어반복이 아니라 모순극복의 방법에 의해 진행되기 때문이다.
사물과 개념들을 그 운동과 상호작용, 그 결과로 이루어지는 변화와 생성, 그들의 발전과 쇠퇴 속에서 고려하는 이 방법은 생성 그 자체의 법칙들을 파악하고자 노력한다. 상반되는 것들과의 대립 및 화해를 통해 이루어지는 변증법적 모순과 상호작용은 비약에 의한 진보를 가능하게 한다. 그런데 이러한 구체적이고도 본래적인 시간이해를 우리의 의식이 애초부터 가지고 있음을 다른 어떠한 양식보다도 영화가 잘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영화에서의 심리적 시간이란 이러한 양적 시간에 대한 거부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2. 영화에서의 시간과 공간
우리가 인식하듯이 현실에서의 모든 운동은 시. 공간의 차원을 가진다. 그러나 우리들은 일상생활에서 이 두 가지 차원 중 하나의 차원으로 운동이나 변화를 의식한다. 예를 들어서 식물이 자라는 것이 시. 공간적 차원 모두에서 일어나지만 그 움직임이 공간적 차원에서는 너무나 미미하기 때문에 시간의 문제로만 이해하게 된다. 반면에 총을 쏘는 것은 공간의 이동으로만 생각하려고 한다. 거기에 소요되는 시간은 거의 미분적 시간이기 때문에 그것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지하였듯이 이러한 시. 공간의 차원문제는 적어도 영화가 발명되기 이전까지는 과학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과학 내부에서 시. 공간에 대한 인식이 변화되었다. 고전 물리학적인 시. 공간이론 - 시간은 일직선으로 지속적으로 흐르며, 공간은 유클리드적인 구조로서 고정되어 있다 - 은 이른바 상대적 이론과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의해서 붕괴되었다. 현대과학에서 시. 공간은 함께 결합되어 하나의 틀을 형성하고 그 안에 우주가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공간에서와 마찬가지로 시간 안에서 움직이며 공간도 시간과 같이 흐르는 것이다. 더 이상 물리학의 단위는 시간과 공간의 단위가 아닌 시공단위(時空單位)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영화는 이러한 새로운 시. 공간 이해를 예술적 형식으로 재현하는 하는 것이다.
그러면 영화는 이러한 시. 공간을 어떠한 방식으로 표현하는가? 영화는 시간적으로 조직화된 공간이다. 우리가 물리적으로 인식하는 공간, 즉 스크린은 움직이지도 않고 변화하지 않는 정적세계이다. 그러나 영화에서의 공간은 정적인 성질은 잃게 되고 시간과 결합된 동적인 세계로 바뀌게 된다. 공간의 부분들은 시간적인 순서로 정리되며 시간적 리듬을 가진 시간적 구조의 일부가 된다. 어떠한 요소(인물, 집단, 풍경 등)로 구성되어있든, 서로 다른 공간은 시간적 순서로 배열되며, 특수한 경우 다른 결과를 얻기 위해서 다른 시간 배열을 선택하게 된다. 공간으로 구성된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의 하나는 시간차원이다.
영화에서 모든 장면은 현재라는 시제를 갖는다는 사실, 즉 “우리가 보는 화면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다”라는 사실과 관련해서 제기되는 또 다른 문제는 시간의식이다. 세계에 대한 대부분의 지식을 감각기관을 통해서 얻는 것과는 달리, 시간에 대한 우리의 감각은 내적이다. 시간을 객관화하려면 또는 그것을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하려면 우리는 시계, 태양, 별, 조류, 성장 등의 공간언어로 밖에 표현 할 수 밖에 없다. 영화도 이와 유사한 방식을 취하는바, 다른 공간을 보여 줌으로서 시간의 흐름을 표현하게 된다. 즉 영화는 시간의 경과라는 개념을 공간차원으로 만든다. 시간의 경과를 표현하기 위해서 같은 공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면 무언가 움직이고 달라져 있을 것이다. 즉 본질적으로 공간적인 언어가 달라질 것이다.
이와 같이 영화의 두 가지 기본요소인 시간과 공간은 서로 혼합되고 교환되고 서로 영향을 준다. 시간이 공간화되고 공간이 시간화된다. 따라서 절대적인 시간과 공간이란 영화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공간과 시간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흔히 영화를 ‘시. 공간 연속체’(space-time cautinnum)라고 부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영화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공간이며 그 밖에 것은 없다. 그래서 이 공간은 필연적으로 시간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이 공간은 시간적으로 배열될 수 밖에 없고 시간이라는 형식으로 맞추어져야 한다. 이것이 영화를 새로운 것으로 만들며 또 영화를 현실 또는 다른 예술과 구별시켜주는 것이다. 연극에서 연기력이, 문학에서 언어적 테크닉이, 그리고 영화에서 공간과 시간의 변화가 각각 예술양식의 본질적 근원이 되는 것이다.
3. 선형적 시간의 거부로서의 영화적 시간
그러면 현실세계의 객관적 시간을 영화는 어떻게 변형시키는가? 다시 말해서 영화 특유의 극적이고 율동적인 지속 속에서 시간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영화에서 시간은 보통 세 가지 측면에서 고려된다. 물리적 시간, 심리적 시간, 그리고 극적 시간이다. 물리적 시간이란 움직임이 촬영되는 시간, 즉 스크린에 영사되는 시간을 가리킨다. 보통 런닝 타임이라고 말한다. 심리적 시간이란 관객이 영화를 볼 때 경험하는 시간에 대한 주관적 정서적 시간을 의미한다. 극적 시간이란 영화 속에서의 어떤 사건이 전개되는 시간을 말한다. 한 편의 영화는 하룻동안의 사건을 그려낼 수 도 있고 수십 년 동안의 사건을 그려낼 수 있다. 물론 이 세 가지 시간이 한 영화 속에서 동시에 나타나며 서로 작용한다는 것을 관객들은 잘 알고 있다.
1) 물리적 시간
영화는 물리적인 세계의 움직임을 시간을 통해서 스크린 위에 그려낸다. 이때 현실 세계에서의 움직임은 정확하게 동일한 시간으로 스크린에 전개된다. 그러나 두 현상의 전개과정은 다르다. 스크린에서의 전개는 하나의 정사진(靜寫眞 still)이 48분의 1의 속도로 영사됨으로써 진행된다. 정상적인 속도는 1초에 24프레임이지만 하나의 정사진에서 다른 정사진로 옮겨가는 동안에 잠시 어두워지므로 48분의 1초로 정사진이 바뀌는 셈이 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정사진 한 장 한 장은 고정된 형태에 불과하지만 이것이 연속적으로 움직일 때 운동력을 가지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우리의 시각은 잔상이라는 불완전성 때문에 이렇게 미세하게 분화된 장면들을 의식하지 못한 채 먼저 본 그림의 인상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다음 그림을 겹쳐서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우리의 청각이 미세한 소리를 의식하지 못하듯이 시각도 미세한 움직임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연속된 그림들에 의해서 움직임이 시간적으로 재현된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필름이라는 재료와 촬영기로서 이러한 움직임을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있다는데 있다. 이러한 조작된 그림에 의한 인위적인 시간을 의해서 영화는 재현적 움직임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 조작의 대표적인 기법으로 패스트 모션, 슬로우 모션, 스탑 모션, 플래쉬 백, 프래쉬 프론트(포워드) 등이 있다.
(1) 패스트 모션(Accelerated motion) : 패스트 모션은 초기영화에서부터 해학적 효과를 얻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특히 버스터 키튼이나 찰리 차플린의 영화에서 이러한 기법은 많은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배우는 정상적으로 움직이지만 촬영을 정상보다 느리게 함으로써 얻어지는 효과로서 그 결과 어떤 사물의 움직임을 정상속도보다 빠르게 함으로서 그 행동을 재미있게 할 뿐만 아니라, 관객들에게 심리적으로 긴장감을 부여할 수 있다.
(2) 슬로우 모션(Slow motion) : 슬로우 모션은 꿈이나 환상 혹은 비극적이거나 장엄한 장면에서 사용된다. 심리적으로 설명하자면 패스트 모션은 속도가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에 희극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단지 웃을 뿐이다. 그러나 슬로우 모션은 시간을 늦춤으로써 한 사건을 오래 목격하게 만들기에 지루하고 견딜수 없으므로 비극적이면서도 장엄하다. 또한 슬로우 모션은 꿈 장면이나 비현실적인 상황을 묘사할 때도 자주 사용된다.
(3) 스탑 모션(Stopped motion) : 스탑 모션은 기술적인 기교로서 예술적인 차원에서 사용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실제적인 이유로 정사진은 자주 사용된다. 정확성이 중요시 되지만 연속되는 장면으로 꾸미기는 불가능할 때 이러한 기법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건에 연류된 사람들을 하나씩 나열할 때 짧은 시간 안의 정사진의 나열은 효과적이다. 그러나 정사진을 잠시 보여주는 것과 같은 프레임을 계속 보여주는 것은 서로 구별된다. 예를 들어서 영화 중간에 사건과 관련된 신문기사가 잠시 삽입되는 것과 영화 마지막에 계속되는 주인공의 고정된 모습은 시간이라는 차원에서 전혀 다른 효과를 주기 때문이다,
(4) 역모션(Reserve motion) : 역모션은 비교적 드물고 자주 사용하기에는 다소 기괴한 느낌이 있다. 초기에는 마술이나 코믹 효과를 내기 위해 아무 설명없이 평범하게 쓰였다. 예를 들어 깨진 자기그릇이 다시 붙는다든가, 먼지가 일어나서 벽이 된다든가, 다이버가 물 속에서 튀어 나오는 것 등이다. 요즘에는 CF에서 이 기술은 자주 쓰여진다.
(5) 플래쉬 백(Flash back), 프래쉬 프론트(Flash Front) 혹은 프래쉬 포워드(Flash Forward) : 영화에서 시간 이동의 가장 커다란 특징은 별다른 장애없이 시간을 이동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한 프레임 안에서 두 가지 시간이 나올 수도 있다. 쉽게 말해서 영화는 이 기법을 이용하여 다른 장르에 비해서 과거, 현재, 미래로의 시간이동을 용이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법은 신중하게 사용해야 하면 그렇지 않으면 관객은 시간 상의 혼란에 빠질 수 있다. 한편 플래쉬 백에 반대되는 프래쉬 프론트 혹은 프래쉬 포워드는 등장인물들은 미리 알 수 없는 미래의 사건들을 관객에게 예시함으로써 극적 긴장을 고조시킨다.
이와 같이 영화는 실제세계의 시간적 연속성을 무시할 수 있으며, 현실의 물리적 시간을 초월하여 영화적 시간을 만들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시간을 변화시킴으로써 과거, 현재, 미래는 혼합되고 서로 복잡한 인과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2) 심리적 시간
심리적 시간이란 하나의 정신적 현상으로서, 시간의 경과에 대한 우리들의 주관적 혹은 감각이라 할 수 있다. 시간경과에 대한 우리의 의식이 일차적으로는 외적인 감각에서 비롯된다. 시계바늘, 시계소리, 심장의 고동, 맥박 등을 통해서 객관적이고도 규칙적인 시간을 의식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의식은 주관적이며 시계가 가리키는 객관적 시계에 비해서 다양하다. 어떤 일에 몰두할 때 그 일이 즐겁거나 행복하면 시간은 빨리 간다. 그러나 지루하거나 불행하면 시간은 느리게 간다. 만약 우리가 미래에 어떤 일을 염려나 조바심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다면 시간은 느리게 갈 것이다. 영화 속의 사건이 극적으로 전개됨으로써 이 사건이 관객의 정서에 영향을 주게 되고 이것은 다시 관객의 주관적인 시간의식을 형성한다. 이러한 시간의식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로는 서스펜스와 리듬과 템포 등이 있다.
(1) 서스펜스 : 서스펜스는 상황의 해결을 지연시킴으로써 관객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그 상태를 유지시키는 것으로 모든 설화적 예술에 공용된 기법이기도 하다. 시간 경과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인 감각은 부분적으로는 상대적인 것이다. 느리고 조용한 시퀀스 다음에 빠른 편집, 난폭한 행동, 소리 높은 음악, 또는 소음이 오면 보다 효과적이며 갑작스러운 충격을 줄 수 있다. 느린 편집은 그것을 중화시키기 위해 적절한 변화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우리의 시간 감각은 이러한 움직임에 의해서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원리가 편집에서도 적용되는데, 앞의 시퀀스보다 짧은 장면으로 구성된 시퀀스는(점점 빠르게), 전체가 모두 짧은 장면으로 이어진 시퀀스보다 박진감을 더 주게 된다. 한 장면에서의 시간 경과에 대한 우리의 감각은, 그 장면의 드라마적인 내용, 스케일, 정서적 의미,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복합된 구성에도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절대적인 가치뿐만 아니라 상대적인 가치도 갖는 것이다.
(2) 리듬과 템포 : 시간이 지배적인 요소가 되는 예술 즉 음악, 무용, 시, 연극, 영화 중 어느 예술작품이든, 시간의 경과에 대한 우리의 정신적인 감각은 리듬에 영향을 받게 된다. 물론 정적(靜的)인 예술 즉 회화, 조각, 건축에도 리듬은 존재한다. 다른 종류의 리듬이지만 이 둘 사이에 유사성은 있다. 왜냐하면 조각과 그림은 움직이지는 않지만, 우리가 그것을 불 때 하나의 모멘트로 모두를 파악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것을 탐구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빙 돌아가면서 보기도 하고 그 속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이 움직임은 단순히 무의식이나 상상력일 수도 있지만 눈이 실제로 움직이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건축물 역시 움직이지는 않지만 그것을 쳐다볼 때 우리는 물리적이 아니면 정신적으로도 움직이는 것이다. 이처럼 움직임과 시간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영화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것은 모든 움직임이 공간과 시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정적인 리듬과 동적인 리듬이 결합되어 잇다는 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연관성이라는 측면이다. 각 장면은 바로 앞의 장면을 계승하고 완성시켜야 하며, 또한 전체의 효과에 기여했을 때만이 가치가 있는 것이다. 영화가 필연적으로 동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형태나 움직임에 계속 되어가고 있는 상태(미완의 상태)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감독은 장면을 형식적이거나 극적인 내용과는 상관없이 정적으로만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장면은 영상, 감각, 감정, 리듬이 계속적으로 변화 발전해 간다는 전제 아래 보여져야 하는 것이다.
다른 예술에서처럼 영화에서의 리듬도 비율과 균형의 문제이다. 리듬은 아주 평범한 방법으로, 영화의 내용으로부터 생겨난다. 다시 말해서 장면의 시각적, 극적인 내용에 따라 결정된다. 간단한 영상은 복잡한 것보다 파악하는 데 드는 시간이 짧다. 클로즈업은 롱숏보다 시간이 적게 든다. 고정된 화면은 움직이는 화면보다, 극적으로 강한 이미지는 평범한 것보다 시간이 적게 든다. 또 바로 전에 나온 장면과 대조되는 장면은 앞 장면과 유사한 것보다 시간이 적게 든다. 영화에 있어서 리듬이 되는 요소는 이외에도 다양하다. 음악, 대사, 자연음, 색채는 물론이고 선, 입체, 빛과 그림자의 구성, 사람, 물체, 빛의 움직임, 장면의 길이와 연관성, 장면 변화와 카메라 움직임 때문에 생기는 형식의 변화, 대사의 리듬, 극적 강도의 변화 등이 모두 그것이다.
에이젠슈타인이 지적했듯이, 이 모든 요소들은 자체로서 ‘선율적 (族律的)인 선(melodic line)’을 형성하며, 다른 요소들과 동시에 결합하여 화음(和音)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불협화음(不協和音)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런 차원에서 영화를 열 몇 개의 다른 ‘소리’를 가진 악기들로 구성된 대위법적인 악곡과 비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 이러한 여러 가지 요소가 복잡하게 내재되어 있다는 것은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하다.
영화가 형식의 다양성, 양식의 범위, 주제의 복합성 등의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반 관객이 이러한 요소들을 잘 이해할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럴 수 없는 경우에는 이러한 요소들은 영화를 이해하려는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즉 영화의 이런 복합성은 - 그 기원과 성장이 대중예술에 있었다는 관점에서 보면 - 만드는 사람이나 감상하는 사람 모두에게 영화를 가장 어려운 예술형식으로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의 음악은 심포니처럼 거창해서도 안 되며, 대사가 연극처럼 많아서도 안 되고, 영상구도가 회화에서처럼 교묘해서도 안 되며, 플룻이 소설처럼 북잡해서도 안 되고, 연기가 연극에서보다 평범해야 되는 것이다. 즉 다수가 즐기는 대중매체로서의 영화에서는 단순함, 여유, 간소함이 가장 중요한 미덕이 되는 것이다.
3) 극적 시간
전통적으로 모든 예술장르에서의 시간은 실제 시간보다 어느 정도 압축되어 표현되었다. 예를 들면 고대에 설정되었고 17, 18세기 고전극작가들에게까지 존중하였던 연극의 3요소에 의하면 3시간 내지 4시간으로 압축될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24시간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2, 3시간의 한 연극작품에서 한 사람의 긴 생애나 여러 세대의 삶이 묘사될 수도 있고, 동시에 현실적 시간과 동일한 시간이 극 안에서 진행될 수 도 있다. 극적 시간 역시 심리적 시간과 동일하게 패스트 모션, 슬로우 모션, 스탑 모션, 그리고 프래쉬 백 등을 이용해서 시간을 처리함으로서 효과를 볼 수 있다.
4. 다차원적 형성으로서의 영화적 공간
영화의 공간은 한마디로 스크린이다. 비록 우리가 TV로, 비디오로 영화를 보는 것이 관습화 되어있지만 영화는 처음부터 스크린에 투사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비디오로 영화를 보면서 간혹 우리가 느끼는 부자연스러움 - 화면의 양 옆이 단절된 느낌을 받는 - 은 화면의 비례가 틀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화 스크린을 염두에 두면서 감독들은 필름의 폭과 카메라 렌즈를 조절한다. 이 필름의 폭과 카메라 렌즈에 따라 스크린에 투사되는 화면의 형태가 틀려지기 때문이다.
이 화면의 형태를 일반적으로 프레임(Frame)이라고 한다 영화가 발명된 이래로 많은 형태의 화면이 존재해 왔다. 그중 표준 화면은 가로 세로의 비가 4 대3 (1.33)인 35mm필름을 사용하는 것으로 50년대까지 상영된 거의 모든 영화와 오늘날 16mm나 수퍼 8mm 등과 같은 서브 스탠다드로 불리는 포맷을 가진 영화의 촬영에 쓰이고 있다. 그러나 표준 포뱃은 60년대 이후 가로 세로의 비율이 약 5대 3인 와이드 스크린에 밀려 그 효용성이 점점 감소되고 있는 추세이다.
1) 프레임의 의미
각 영화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4각의 틀은 영상 구성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단순한 2차원적 평면이 심리적 3차원 혹은 4차원으로 변형되는 이 마술적 공간의 존재에 영화 작가들은 대단한 매력을 느꼈다. 이것은 마치 화가에게 있어서 캔버스와 같이 많은 감독들이 화면 구성의 균형과 표현성에 역점을 두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따라서 감정이 뛰어난 감독은 프레임 안에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프레임에 들어가지 않는 대상물에도 관심을 표했다. 그리고 아무리 짧은 시간 동안 영상을 본다 할지라도 스크린에 비치는 평면의 영상을 관객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실제공간과 유사한 3차원적 공간으로 오해하고 반응한다.
이처럼 여러 가지 한계들, 즉 프레임의 존재, 3차원적 공간의 부재, 색채의 부재나 인공적인 성격 등에도 불구하고 영상의 현실과의 유사성은 아주 강렬하게 인식되어 특히 움직임의 환영이나 심도의 환영에서 보여지는 영화 특유의 현실감을 발생시킨다. 이외에도 미학적 장치로서 프레임은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하나의 쇼트 내에 담긴 사물들을 통일하는 기능을 보여준다. 예술은 여기서 혼동상태의 현실세계로부터 질서를 만들어 낸다. 또한 프레임은 강조의 기교로도 쓰이는데, 감독은 프레임으로 광범위한 맥락에서는 간과되어 버릴지도 모르는 사물에 특별한 주의를 집중시킬 수 있게 된다. 특히 클로즈업의 프레임은 가장 미세한 디테일을 정확히 잡아 낼 수가 있다.
영화에서 대부분의 은유와 상징은 영화 매체 자체의 물리적인 특성에서 비롯된다. 프레임 안의 어떤 부분은 상징적인 의미를 나타낼 수 있다. 프레임 안에서의 배치는 형식이 어떻게 실질적으로 내용이 되는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예다. 화면의 중앙부분은 일반적으로 가장 중요한 시각적 요소가 차지하게 되어 있다. 이 부분은 원래부터 관심의 본질적인 중심이라고 간주된다. 그렇다면 중앙이라는 것은 일종의 규범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습관화된 기대 때문에 중앙에 놓인 대상물은 시각적으로 극적이지 못한 경향이 있다. 이제 프레임 구성에 따른 의미를 알아보자.
(1) 프레임의 윗 부분에 맞출 때 : 프레임의 윗부분은 힘과 열망에 관련된 관념을 나타낼 수 있다. 여기에 배치된 인물들은 화면의 아래에 있는 시각적 요소들을 통제하는 것처럼 보이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권위적인 인물들은 종종 프레임 위쪽에 배치되어 촬영된다. 그러나 프레임의 윗부분이 언제나 이런 상징적인 방법으로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겨우, 한 대상물이 배치되는 가장 정상적인 장소일 수도 있다. 가령 인물의 미디엄 쇼트에서 머리가 스크린의 윗부분으로 가겠지만 분명히 이런 종류의 프레임은 상징적 의도를 갖고 있지는 않다.
(2) 프레임의 아랫부분에 맞출 때 : 프레임의 아랫부분은 반대의미 즉, 굴종, 취약성, 무력함등을 나타낸다. 이 위치에 놓인 사물과 인물은 프레임 밖으로 완전히 흘러 나가 버릴 위험에 처한 것처럼 보인다. 이런 이유에서 이 부분은 종종 위험을 상징적으로 암시하기 위해 쓰여진다. 프레임 안에 두 사람 이상이 있고, 비슷한 크기일 때, 화면 아래에 있는 사람은 위에 있는 사람에 의해 지배를 받는 경향이 있다.
(3) 프레임의 좌우에 맞출 때 : 프레임의 좌우부분은 화면의 중앙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까닭에 가장 중요하지 않은 것을 암시하는 경향이 있다. 화면의 가장자리에 놓여진 대상물과 사람들은 실제로 프레임을 벗어나려는 듯이 어둠과 가까이 있다. 어떤 경우에는 프레임을 벗어나려는 암흑은 망각이나 죽음까지 상징할 수 있다. 세인들로부터 주목받지 않고 이름 없이 살기 원하는 사람을 주제로 한 영화에서, 감독은 가끔 그를 일부러 프레임 중앙부분에서 비껴 나가게끔 화면의 대수롭지 않은 가장자리에 배치한다.
(4) 화면의 중앙에 잡을 때 : 가장 중요한 시각적 요소들을 완전히 프레임의 바깥에 위치시키는 기교가 있다. 시대나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배치된다. 특히 한 인물이 어둠, 신비 혹은 죽음과 관련되어 있을 때, 이런 기교는 대단히 효과적일 수 있다. 관객은 볼 수 없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사실주의 감독이 이 양식을 가장 선호한다. 그 이유는 현실적인 구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화적 공간은 단순한 2차원적 표현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한한 상상력이 적용되는 살아있는 공간이다. 그리고 영화에서의 공간 즉 프레임은 가장 최초의 단위인 쇼트로부터 시작된다.
2) 트(Shot)
쇼트는 영화를 구성하는 최소의 단위이며, 감독이 레디 액션해서 컷 사인이 날 때까지, 즉 한 번의 지속적인 카메라 작동으로 촬영된 필름 단편이 쇼트이다. 동시에 쇼트는 사물과 피사체의 거리 혹은 하나의 네모난 구도 안에 잡는 움직임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쇼트는 카메라와 피사체 사이의 거리에 의해 꼭 정의되지는 않는다. 경우에 따라 렌즈에 의해 거리가 왜곡되기 때문이다. 어떤 감독에게 미디엄 쇼트는 다른 감독에게는 클로즈 업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화의 다양한 쇼트는 화면의 틀 안에 담긴 선택된 소재의 양에 따라 결정된다. 따라서 쇼트에 대한 정의는 매우 가변적이기 때문에 영화에는 다양한 종류의 쇼트가 있다. 그럼에도 일반적으로 다음의 7가지 쇼트가 기본 범주에 포함된다. 여기에다 크레인 쇼트가 보통 부가된다.
(1) 익스트림 롱 쇼트(extreme long shot) : 이 쇼트는 상당히 먼 거리에서 찍혀진다. 거의 언제나 야외촬영의 경우 촬영배경의 많은 부분을 보여주게 된다. 또한 근접 쇼트가 어떤 맥락에서 찍혔나를 밝혀 주는 공간적인 준거 틀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공간적인 준거의 틀을 통해서 치열한 삶, 다양한 인간상을 보여준다. 이러한 쇼트를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한 영화는 서부영화를 들 수 있다. 또는 전쟁영화, 사극에서 많이 사용된다. 이러한 영화에서는 촬영장소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2) 롱 쇼트(long shot) : 인물과 배경을 함께 드러낼 때 많이 사용하는데, 통일된 공간 안에서 대상과 배경을 비추어 의미를 전달하는데 용이하다. 롱 쇼트는 대사를 통하지 않고도 의미전달이 가능하다. 이 쇼트는 주로 사실주의 영화감독들이 많이 사용하는데 그것은 사람의 몸 전체뿐만이 아니라 촬영현자의 상당한 부분까지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주로 화면구성을 통해 의미를 전달하려는 감독들에게 이상적인 방법이다.
(3) 풀 쇼트(full shot) : 롱 쇼트의 범주 내에서 피사체에 가장 근접한 것으로서, 이는 몸 전체를 간신히 담아내는 것이다. 찰리 채플린은 이러한 풀 쇼트를 선호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무언극이라는 예술에 가장 적합할 뿐 아니라 적어도 다양한 얼굴 표정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피사체에 근접하기 때문이다.
(4) 미디엄 쇼트(medium shot) : 이 쇼트는 피사체의 무릎이나 허리를 촬영하는데, 일종의 기능적 쇼트로서 움직이는 장면 그리고 대화장면을 포착하는 데 사용한다. 또한 클로즈업과 그보다 먼 거리의 원경 쇼트 사이를 이어주는 데도 쓰이며 클로즈 업 쇼트나 롱 쇼트 이후에 그 배경을 재확인하는 데도 쓰인다.
(5) 클로즈 업(close-up) : 이 쇼트는 감독의 명확한 의지를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되는데, 찍히는 대상의 내면의 세계를 나타내고자 할 때 사용한다. 클로즈 업은 피사체의 크기를 확대하므로 사물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종종 상징적인 의미 작용을 한다.
(6) 익스트림 클로즈 업(extreme close-up) : 이것은 클로즈 업 쇼트의 변형이다. 예를 들면 눈물을 흘리는 주인공의 한쪽 눈만을 찍거나 입술만을 찍을 때 사용된다. 보다 더 깊은 내면을 찍어내야 할 때 사용되는데, 주로 표현주의 영화에서 사용된다. 혹은 컬트영화, 엽기적인 영화에서 사용되는데, 표현의 극한성을 나타낸다.
(7) 딥 포커스 쇼트(deep focus shot) : 이 쇼트는 롱 쇼트의 변형인데, 복수의 초점거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피사체 심도가 깊다. 이 기교는 피사체를 가까운 거리, 중간 거리, 그리고 먼 거리에서 동시에 포착한다. 이는 공간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데 유용하다. 이 쇼트로 포착된 피사체들은 평면공간의 연속선상에서 주의 깊게 배열된다. 이러한 기교를 사용함으로써 감독은 관객의 눈을 하나의 거리에서 다른 거리로, 거기서 또 다른 거리로 안내할 수 있다. 미디엄 쇼트나 클로즈 업에서는 나타날 수 없는 기법이다.
(8) 크레인 쇼트(crane shots) : 크레인 쇼트는 궁극적으로 공중에서의 달리 쇼트다. 크레인은 일종의 기계 팔과 같은 것으로서 길이는 6미터를 넘는다. 여러 면에서, 이 크레인은 전화 회사에서 전선을 수리할 때 사용하는 크레인과 비슷하다. 크레인은 촬영 기사와 카메라를 씬 안으로 혹은 밖으로 들어서 이동시킬 수 있다. 그것은 실제로 어떤 방향으로도 - 위로, 아래로, 비스듬하게, 안으로, 밖으로, 혹은 이 몇 가지를 합친 방향으로 - 움직일 수 있다. 이러한 유연성 때문에 크레인 쇼트는 복합적인 많은 의미를 암시할 수 있다.
3)쇼트와 앵글(Shot, Angle) : 쇼트와 앵글은 영화만의 독특한 영상언어가 문자언어와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표현양식이다. 따라서 감독은 카메라의 움직임을 통해 자신의 스타일을 드러내려고 한다. 가능한 한 카메라를 고정시킨 정적화면을 일관되게 주장할 수도 있고, 팬이나 틸트처럼 삼각대는 고정시키되 화면은 움직이게 하는 이동화면에서부터 달리나 크레인처럼 카메라 자체가 이동하는 유동촬영에 이르기까지 움직임의 영역은 다양하다.
사실주의 감독들은 극단적인 앵글을 피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대부분 장면들을 눈높이에서 촬영한다. 이것은 실제로 관찰자가 어떤 장면을 볼 때와 거의 같은 높이다. 그들은 대상물에 대한 가장 명확한 시야를 확보하려고 한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극적이지는 못하다. 반면에 표현주의 감독들은 대상물의 본질을 가장 잘 포착하는 영상에 관심이 있다. 그러므로 극단적인 각도에서 촬영된 사물들은 왜곡되어 보인다. 사실주의 감독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카메라의 존재를 잊게 만들려고 하는 반면에 표현주의 감독들은 카메라의 존재를 관객들에게 의도적으로 환기시키려고 한다.
어떤 감독은 카메라가 천천히 물 흐르듯 부유케 함으로써, 소위 '시적 카메라'를 즐기는가 하면 심하게 흔들리는 들고 찍기를 통해 사실주의적인 자연스러움을 강조하기도 한다. 또는 프레임 공간을 안팎으로 빠르게 변화시킴으로써 자극적인 움직임과 반응을 강조하곤 하는 감독도 있다. 또 어떤 감독들은 삼차원적인 공간이 두드러져 보이도록 하기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는데, 이같은 효과를 성취하기 위한 여러 가지 기법들도 역시 영상 스타일의 필수요소가 된다.
(1) 버즈 아이 뷰(bird's-eye view) : '새의 눈으로 본다'는 의미이다. 카메라의 위치가 위에서 아래로 향해 있는데, 이것은 모든 앵글 중에서 가장 낯설어 보인다. 그 이유는 한 장면을 바로 머리 위해서 촬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쇼트의 피사체는 처음에는 알기 힘들고 추상적으로 보일 수 있다. 때문에 감독들은 이런 방식을 피하지만 어떠한 상황에서는 이 앵글이야말로 대단한 표현력을 지닐 수 있다. 이 앵글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치 전능한 산과 같이 장면 위를 날며 돌아다니게끔 해준다. 운명이라는 주제를 취급하는 감독들은 이 앵글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2) 하이 앵글 쇼트(high angle shot) : 카메라는 크래인에 설치되거나 혹은 천연적으로 높게 튀어 나온 곳에 설치된다. 보통 대상을 위에서 아래로 찍는데, 사물의 높이를 감소시킨다. 동작의 움직임이 감소하여 지루한 느낌이 있다. 주로 대상물의 가치를 축소시키려 할 때 사용한다. 예를 들면 주인공의 시각에서 악당을 보려 할 때 사용된다. 또는 자기비하를 나타낼 때 효과적이다.
(3) 로우 앵글(low angle) : 대상물의 높이는 증가되고 따라서 수직성을 나타내는 데 유용하다. 실제적으로는 키가 작은 배우를 크게 보이게도 한다. 동작은 속도가 붙으며, 특히 폭력장면에서 로우 앵글은 그 혼란감을 잘 포착할 수 있다. 로우 앵글에서 주위 환경은 보통 왜소화되고 종종 하늘이나 천정이 단지 배경에 불과하게 된다. 밑에서부터 촬영되는 인물에게 공포감, 경외심, 존경심, 그리고 권위를 부여한다. 이런 연유에서 선전영화나 영웅주의를 묘사하는 장면에 자주 쓰인다.
(4) 아이 레벨(eye level) : 사실주의 감독들이 많이 사용하는 기법으로 눈높이에서 찍어낸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반영하기 위해 사물을 왜곡시키지 않고 그대로 촬영한다. 현실감을 주고 일상생활을 표현하는데 사용된다.
(5) 사각 앵글(oblique angle) : 이것은 카메라를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이는 것이다. 이 앵글로 찍힌 인물은 한쪽으로 넘어갈 듯이 보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 앵글은 때때로 술 취한 사람의 불균형 따위를암시하기 위한 시점 쇼트로 쓰인다. 심리적으로 사각 앵글은 긴장, 변이 그리고 임박한 변동을 암시한다. 관객은 이러한 앵글을 보면 어리둥절해지기 마련이어서 자주 사용되지는 않지만 폭력장면에서는 이러한 시각적 불안감을 포착하는 데 효과적일 수 있다.
3) 씬(Scene) : 무대라는 말의 어원인 그리스 고대극의 의상실(衣裳室:skne)에서 온 말이다. 희곡에서는 막중(幕中) 드라마 진행의 최소 단위로 장(場) 또는 경(景)이라는 역어에 해당한다. 영화․ 텔레비전에서는 삽화(揷話)로 어느 정도 정립된 부분이다. sequence 중 한 장면으로 일반적으로 시간․ 장소가 변할 때마다 scene이 변한다. 쇼트(커트)로 분할되는 경우가 많으나 1 shot가 1 scene이 되는 경우도 있다. 일련의 Shot 들을 결합하면 한 번에 한 장소에서 발생하는 통일된 행위인 scene이 된다. 따라서 씬은 한 sequence 안에 있는 여러 개의 장면을 의미한다.
4) 시퀀스(Sequence) : 영화의 단락이며 영화의 가장 큰 기본단위이다. 영화의 연속된 화면을 의미한다. 또한 Scene이 여러 개가 모여 Sequence가 된다. 시퀀스는 영화가 진행됨에 있어 하나의 문단을 뜻한다. 연극의 막에 해당하는 극적 국면으로 기능한다. "여러 개의 Sequence가 모여 영화가 완성된다."
4) 부동과 영화
이처럼 영화에서 모든 움직임은 공간과 시간의 차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만약 움직임이 없다면 어찌 되겠는가? 이것은 극단적인 이론이며, 그러한 경우 시간차원은 영원으로 공간차원은 무(無)로 되며,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 정적 예술을 보는 또 하나의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적 예술은 결국 영원한 부동성을 추구하는 것이며, 어느 정도 그러한 본질 때문에 인간의 눈에 가치 있게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죽지 않는 것이며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이다. 움직임과의 날카로운 콘트라스트 때문에 영화의 중간에 움직이지 않는 영상이 갑자기 나오면, 이러한 ‘얼어붙은 조화(frozen harmony)’로서 훌륭하게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이다.
조각과 회화는 그 내구생(耐久性)으로 일찌기 무엇인가를 기념하고 신의 영원성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집트의 화가는 그것을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의 책형상(傑形像)을 그릴 것을 의뢰받은 중세의 화가는 그 영원성을 고정된 조각이나 회화로 재현하였다. 한편, 19세기말 사진이 발명된 이후, 사진은 그림을 대신하여 ‘과거의 추억을 기념하는 데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왔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사진은 그림보다 비용이 적게 들며 비슷하게 만드는 데도 그렇게 기술을 요하지 않으며, 보다 신빙성이 있기 때문이다. 현실과 정확하게 같아야 한다는 짐을 덜게 된 그림은 완전히 자유로와져서 지난 70년 동안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입체파 등 ’추상과 실험‘에 몰두해 왔다.
영화가 과거를 보존하는 데 사진보다 앞서 있다는 것은 주묵할 만한 것이다. 영화는 움직임을 보여주면서도 영원히 보존할 수 있고 새롭게 재생할 수 있다. 또한 영화는 순간뿐 아니라 어느 기간을 영원히 보존할 수 있다. 그래서 8mm 가정 영화(home movie)가 휴일의 스냅사진에 대체되고 있는 것이다. 중요 인물과 사건의 필름도 역사적인 기록-으로 보존된다. 한 순간보다는 어느 정도의 기간에 맞출 수 있다는 이점 또는 움직임의 경과를 기록할 수 있다는 이점은 수백만 년 전부터 갈구되어 오던 것이며, 오랜 역사를 통해 정적 예술은 움직임을 모방하려고 노력해 왔다.
최근 들소의 동굴벽화를 영화와 애니메이션으로 기록해 나가면서 연구가 진행된 적이 있는데 그 연구에 따르면 그 동굴벽화를 겹쳐서 보면 그것이 계속적인 움직임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그리이스의 항아리를 보면 재주넘기를 하는 광대가 그려져 있는데 이 또한 같은 기법을 보이고 있다. 이미 2천년 전에 움직이는 그림이 창출되었던 것이다. 그 다음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에서도 이런 양식은 나타나는데 한 캔버스 위에 성자(聖者)의 일생에 관한 일련의 사건을 연대기적으로 그려내기도 하고, 한낮의 사냥장면과 일련의 풍자화를 그리기도 했다.
현대회화에서도 영화의 영향력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정적 예술이 이렇게 움직임을 표현하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상 성공할 수 없었고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시도는 중단되었다. 그리고 한가할 때 조용히 관조할 수 있다는 이점과 함께, 정적인 이미지는 그 나름대로 독특한 맛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화에서도 이미 말한 바와 갑이 스탑 모션 등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움직이는 영상에 대한 인류의 오래된 염원은 영화가 발명되면서야 이루어졌다.
이제 결론을 내려보자. 영화의 시공(時空)은 현실과 다르다. 영화는 정적인 이미지로부터 가속화되어 눈으로 따라갈 수 없는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실제와는 다른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또 어떤 목적에 의해서 실제 세계의 시공차원을 변화시킨 예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영화가 이룩해 놓은 가장 위대한 업적은 시간과 공간에서 일상적이고 상징적인 특성을 제거한 후 그 세계에 사상과 관념이라는 비물질적인 질료를 부여하여 그들을 새로운 통일체, 즉 영화적인 시. 공간을 새롭게 결합하는 것이었다. 스크린이라는 공간을 차지하는 외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단순히 물리적 존재가 아니라 정신적 존재이며, 따라서 영화가 진실로 하나의 예술이며 나아가서 예술 가운데 가장 풍요로운 양식이 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시, 공간적 변환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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