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멋진 조각상 - the very best statue liverpool |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그녀의 작품은 매우 다양하다. 번역된 도자기, 미디어 아트, 조각, 경면주사 그림, 연필 드로잉 등 자신의 관심영역에 합당한 표현 방법을 찾는 데 그녀는 막힘이 없다. 이번에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젊은 가객 정마리의 노래였다. 정마리의 공연을 처음 보았을 때 그는 ‘가슴이 뛰는 것이 보일 정도로’ 감동을 받았다. 이수경은 정마리의 제자가 되길 청하고 2년 넘게 정가를 배웠다. 정가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에서 그가 살짝 노래를 부른다. 목소리가 청아하다. 서양음악의 공연에 맞게 설계된 공연장에서는 정가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녀는 스승을 위해서 정가에 딱 맞는 무대를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그 꿈이 아르코미술관의 이번 전시에서 실현되었다. “예술가 중에는 절대감각을 타고난 특별한 사람이 있다. 정마리는 바로 그런 사람이다”라고 이수경은 스승에게 아낌없는 존경의 염을 표한다. 한 예술가의 또 다른 예술가를 위한 헌신은 환상적인 결과를 나았다.
이동식 사원 portable temple-front, h 175cm, mineral pigment on silk, 2008 |
온통 흰색으로 마감된 무대에서 흰색 치마저고리를 입은 정마리는 미동도 하지 않고 단정히 앉아 정가를 부른다. 7m 깊이에 15도 각도로 경사가 진 깔때기 모양의 무대는 공연자가 공중부양을 하는 듯한 비현실적인 장면을 연출하게 된다. 이 무대에서 정마리는 전시 기간 중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에 한 시간씩 공연한다. 이수경의 미술 전시인 동시에 정마리의 장기 공연인 셈이다.
불꽃, 한지 위에 경면주사 flame, cinnabar on Korean paper, 100 x 100cm, 2006 |
1층이 땅의 노래라면 2층은 천상의 노래다. 성모의 고난을 의미하는 ‘스타바트 마테르(Stabat Mater)’라는 서양 종교음악을 가곡, 범패 창법 등 네 가지로 편곡하여 정마리가 부른 음악이 네 귀퉁이에서 흘러나온다. 타원형으로 만들어진 전시장에는 이수경이 그린 〈매일 드로잉(dairy drawing)〉180여 점이 전시된다. “사운드가 물리적으로 공간을 바꿀 수도 있고 영혼을 바꿀 수도 있다”라고 말할 정도로 이 그림은 그려질 때부터 음악과 관련이 있다. 작가는 촛불을 켜놓고 범패, 정가, 스타바트 마테르, 그레고리안 성가, 이슬람 경전 낭독 등을 들으면서 매일 일기를 쓰듯 그림을 그려갔다.
이 드로잉 중에는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것들이 있다. 신적인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완벽한 좌우대칭의 드로잉들은 작업방식도 완벽한 좌우대칭의 방식을 따른다. 오른쪽은 오른손으로, 왼쪽은 왼손으로 그린다. 이 과정은 정신적인 고통을 육체적인 고통으로 대리하는 종교적 수행 과정과 닮았다. 이수경 자신은 특정 종교를 가진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종교의 본질적 의미를 통찰하고 자신의 예술의 밑바탕으로 삼는다. “종교는 모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의 결정체다. 종교음악을 들으면서 작업하면, 순간이탈을 할 정도로 강렬한 체험을 하게 된다. 종교음악은 감정을 극대화된 경지로 올리기 위한 장치인 것 같다.” 이 드로잉들은 그러므로 음악의 파동에 몸이 반응하면서 나온 그림들이다. 그녀는 몸과 마음은 하나라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은 모양이다. 숭고한 종교음악을 들으며 그린 그림들에는 뜻밖에 만화 같은 장난스러움과 에로틱함의 요소도 함께 보인다.
“크게 보면 내 작업은 생명에 관한 것이다. 생명체의 파동, 운동이다. 바위에도 과일에도 살았음의 생명의 요구가 담겨 있다. 그러다 보니 에로틱해 보일 수도 있다. 가장 성스러운 것과 가장 세속적인 것이 함께 하는 것이다.”
dairy drawing |
궁극적인 관심사는 ‘생명’
이수경의 궁극적인 관심사는 ‘생명’이다. 생명에 대한 희구는 그를 전통에 근접시켰다. 부적을 그릴 때 쓰는 붉은색 경면주사를 사용한 〈불꽃 그림〉은 치유의 그림이다. 커다란 종이 위에 쭈그리고 앉아 가는 붓으로 밑그림도 없이 장시간 그려낸 작품들이다. 우주의 삼라만상이 생명의 불꽃 속에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다. 살고자 하고, 더 생생하게 살고자 하는 것들의 아우성이다. 이런 생명의 종교가 늘 함께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만들어진 작품이 바로 〈움직이는 성전〉이다. 언제든지 휴대하고 다닐 수 있는 병풍 형식 성전에는 등을 돌린 보살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마치 ‘나도 내 해탈로 바쁘니, 네 해탈은 네가 알아서 해라’라고 말하는 듯하다.
“나는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한 사람이다. 생명 있음은 응집과 뭉쳐 있는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생생한 것이다. 예술가 중에는 허무, 쓸쓸함을 갈구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다산성, 생명들이 넘쳐나서 새끼들이 바글바글한 것이 좋다.”
번역된 도자기 translated vase, ceramic trash, epoxy, 24K gold leaf, Courtesy of the artist |
그러고 보니 그녀의 저 유명한 〈번역된 도자기〉 시리즈도 깨진 도자기 파편들이 다글다글 붙어 있는 형태다. 한국 전통의 도자기를 재현하는 도자 장인들의 작업실에는 까다로운 합격 기준을 통과하지 못하고 파기된 도자기 파편이 즐비하다. 깨어진 도자기 파편을 이어 붙이고 연결 부위에 생긴 금을 ‘금(金)’으로 채색하고 여러 번 코팅하여 완결하는 작업이다. 원래의 파편에 있는 상처와 흠집도 금색 장식선으로 재치 있게 살려냈다. 이 작업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한번 깨어진 조각을 다시 깨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생명과 살아 있음에 대한 이수경의 원숙한 태도를 보여준다. 깨어진 도자기 파편은 깨어짐으로써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한번 상처받은 것들에 다시 한 번 상처를 주는 일을 작가는 하지 않는다. 도자기 파편이 서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마치 자연처럼 자라나 예측하지 못했던 하나의 형태가 된다. 작품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면 파격과 완만한 흐름이 반복됨을 알 수 있다. “맺혔다 풀어지는 생명의 흐름들”을 여기서도 볼 수 있다. 생명의 파동에는 웃음이 담겨 있다. 진지한 가운데서도 엉뚱하고 기발하다. 살아 있는 것들의 특징이다.
이 작업은 다양한 코드로 읽힌다. 버려지고 상처받은 것들을 모아 하나의 새로운 존재로 되살아나게 하니 상처와 치유라는 삶의 단면을 보여주기도 하고, 전통적인 도자기의 형태가 해체되고 현대적인 감각의 조형의 언어로 다시 태어나니 전통과 현대라는 중요한 미술적 담론에 대한 실천적 답이 되기도 한다. 이수경의 말처럼 “빈 캔버스처럼 여러 가지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작업이다. 이 작업에 대한 외국인들의 반응은 열광적이다. 2008년 파리 루이비통미술관, 2009년 일본 마루가메현대미술관, 2010년 독일 베타니엔미술관의 그룹전 등에 초빙되었다. 또 지난해에는 브라질 상파울루, 일본 도쿄(東京)와 독일 데사우의 고성 오라니엔바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수년째 복원 중인 고성 오라니엔바움 성(城)에 설치된 도자기 작업은 치유와 부활이라는 맥락에서 훌륭한 조화를 이루었다. 2011년 피카소 손자의 부인이 운영하는 알민 레쉬 갤러리 전시로 이수경의 작품은 다시 한 번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다.
사진 : 신생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