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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08, 22. 고창지역지역 답사(문화재 두레단)
1. 언 제 : 2013년 8월 22일(목요일) 06:30 - 23:00
2. 어디로 : 전라북도 고창군
(선운사-미당 시문학관-고인돌 박물관-판소리 박물관- 고창읍성 )
3. 누구와 : 포항시 문화재 두레단 회원
연일 계속되는 불 볕 더위는 바다와 강 그리고 대지를 불태우고, 가뭄도 함께하여, 사람과 대지가 함께 아우성인데, 8월 고창지역 정기 유적답사 43명이 참석하여 06:50분경에 문화원을 출발하고, 07:20분 영천 휴게소에서 아침 요기를 위한 간단한 휴식을 하고, 08;10 도동분기점을 통과하고, 새로오신 분들의 인사가 있고, 다음으로 박혜경 운영위원의 전봉준과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연구발표가 30여분에 걸쳐 세세하고 심도 깊은 강의가 있고 나서 , 09:00 거창 휴게소에 도착하니 하늘은 얕은 구름이 깔렸으나 더운 열기를 얼굴에 확 끼얹는다.
뒤이어 이 경우 고문의 미당 서정주 선생의 시에 대한 설명과 낭송을 듣고 특별 강의는 끝이 나고, 88고속도로는 중장비 소리와 함께 확장공사가 한창이고, 고산의 들녘에는 푸르름이 그 절정에 이르고 비닐하우스 주변에는 부지런히 움직이는 일손의 모습이 차창으로 스쳐 지난다.
이런 밖의 풍경과 함께 버스는 88고속도로에서 호남고속도로를 거쳐 담양- 고창간의 고속도로를 달리고, 이어서 서해안 고속도로로 옮겨져 고창 나들목(11:10)을 나와서 11;30에 선운사 주차장에 도착한다.
먼저 와 게신 고창군 문화유산 해설사 2분(남, 여 1명)이 우리를 반겨주고 인사를 나누고 서로의 소개를 마친 뒤 해박한 지식과 달변으로 고창군과 선운사에 대한 해설이 시작된다.
▶ 고창군
현재 고창군은 전라북도 6시 8군의하나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고창, 무장, 흥덕 세 고을이 병합되어 생긴 명칭이다.
병합되기 이전 고창은 본래 백제의 모량부리현인데 신라 삼국통일 이후 경덕왕 16년 고창현으로 고쳐 이웃 무령군(지금의 영광)의 영현이 되었고, 고려 때에는 고부군의 영현이 되었으며 이웃 상질감무가 겸임했다가 조선조에 들어와 태종원년 두 현에 각기 감무를 두었고, 그 뒤 현감을 두어 나주진관에 소속되었다가 고종 32년 군으로 고쳐졌으며 건양 원년 전라남도에 소속시켰고 융희 원년 전라북도로 소속되었으며, 1914년 흥덕 무장을 병합했다.
건양 원년 전라남도에 소속시켰다가 융희 원년 전라북도로 소속되었으며 1914년 고창에 병합되었다. 무장은 본래 무송과 장사 두 고을이 병합된 고을이다. 무송은 백제 때 송미지현인데 신라 경덕왕 16년 무송현으로 고쳐 이웃 무령군의 영현이 되었고, 고려에 들어서도 그대로 내려왔으며, 장사는 백제때 상로현인데 신라 경덕왕 16년 장사현이라 고쳐 이웃 무령군의 영현이 되었고, 고려에 들어서도 그대로 내려왔으며, 뒤에 감무를 두어 무송을 겸임시켰고 조선조에 들어와 태종 17년 이 두 고을을 병합하여 무장이라고 하고 진을 설치하여 병마사를 두어 현 행정까지 겸임시켰다.(나주진관) 세종 5년 병마사를 첨절제사로 고치고, 그 뒤 현감을 두었다. 고종 32년 군으로 되어 전주부에 속했다가 건양 원년 전라남도에 소속시켰고 융희 원년 전라북도로 소속시켰으며, 1914년 고창군에 병합되었다. 1914년 3군은 병합하여 17면으로 갈랐다가 1935년 오산, 벽사, 석곡 3면을 없애 그 이웃에 편입시켜 14면으로 되고, 1955년 고창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1읍 13면의 체제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 선운산( 도솔봉 : 336m)
소재지 :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 심원면
선운산은 대표적으로는 도솔산을 가리키지 만 선운산 도립공원안의 모든 봉우리와 능선을 지칭한다고 봐야 한다. 이 산은 고도에 관계없이 무척 굴곡이 심하고 군데군데 위험한 암릉도 적지 않고 길이도 긴데다가 산기슭에 우리의 정겨운 문화유산이 널려 있어서 산과 함께 문화적 향취에 흠뻑 빠져 들 수 있는 산이다. 선운산 산행은 능선을 따라 능선의 양편에 전개되는 다양한 조망을 즐길 수 있는 산행이다.
선운산산행은 경수산만이 444m 일 뿐 도솔산(336m), 개이빨산(345m), 청룡산(314m), 비학산(307m)등 300m를 조금 넘는 산들이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면서 산군을 이루고 있다. 이름은 모두 산이며 봉우리라지만 각각의 산과 봉우리를 하나의 산으로 보기에는 규모가 작아 염주 꿰듯 한꺼번에 올라야 진정한 선운산 산행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도솔계곡의 산자락과 골짜기에는 유서 깊은 불교의 도량인 선운사, 참당암, 도솔암, 미륵장륙 마애불, 사자암, 동윤암이 골골마다 자리를 잡고 있어서 비유하여 말하자면 분향냄새가 산곡에 가득한 셈이 되어 있다.
▶선운사
소재지 : 전라북도 고창군 서운산로
선운사는 소백산줄기에서 뻗어 나온 노령산맥을 등지고 있는 도솔산에 자리잡고 있으며 도솔계곡을 흐르는 서출동류(西出東流)하는 맑은 물에서는 은어가 노닐고 삼천여수의 사시상청(四時常靑)의 동백숲이 둘려있고 천애적벽과 기암괴석과 많은 천연굴이 있으며 또 웅장한 계곡을 따라 낙조대에 오르면 서해의 칠산바다와 변산반도가 일목요연하게 보이니 호남의 내금강이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선운사는 조계종 24교구의 본사로 검단선사가 창건하고 대참사(참당사)는 진흥왕의 왕사인 의운국사가 창건했다고 하나 천오백년 전의 일이고 현재는 도솔암, 석상암, 동운암과 함께 참당암이 있지만 옛날에는 89암자가 골짜기마다 들어섰던 것으로 전한다.
선운산의 경치를 살펴보면 큰절에서 개울을 따라 올라가면 물줄기가 갈라진 곳에 자연의 집이 있고, 우측으로 더 올라가면 여덟 가지로 소담하게 벌어진 장사송과 진흥왕이 수도했다는 진흥굴이 있다.
개울 건너 산 중턱에 우뚝 선 바위가 이 산에 침입하는 마귀를 방어하는 신장역할을 하는 봉두암(일명 투구봉), 그 위 산등성이에 돌아앉은 바위가 역시 도솔천에 들어오는 마귀를 방어하는 사자암이고, 여기서 조금만 올라가면 도솔암, 우측으로 층층의 바위계단을 오르면 천길 절벽 위에 도솔천 내원궁 즉 상도솔이 있다. 이곳에서 우측 암벽을 오르면 말 발자국이 파여 있어 이를 진흥왕의 말 발자국으로 전하며 바위틈을 비집고 올라서면 이곳이 만월대이며 신선이 학을 타고 내려와 놀고 갔다는 선학암이다.
다시 내려와 나한전에서 좌측을 보면 깎아지른 듯 한 암벽에 불상이 조각되어 있는 도솔암 마애불이고 더 올라가면 용문굴, 좌측으로 돌아 오르면 낙조대가 있다. 바로 옆이 천마봉, 도솔천의 비경이 발아래 전개된다.
• 대웅보전(보물 제290호)
선운사의 본전(本殿)으로서 신라 진흥왕 때 세운 것으로 전하며, 지금 있는 건물은 조선 성종 3년(1472)에 중건하여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광해군 5년(1613)에 다시 지은 것이다. 건물의 평면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긴 장방형 평면을 이루고 있고, 전체적으로 기둥 옆면 사이의 간격이 넓고 건물의 앞뒤 너비는 좁아 옆으로 길면서도 안정된 외형을 지니고 있다.
다포계(多包系) 맞배지붕에, 벽의 양 측면에는 풍우를 막기 위해 널판으로 풍판(風板)을 대었다. 막돌로 허튼 쌓기를 한 얕은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약한 배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을 세웠다.
정면의 모든 칸에는 빗살 창호를 달았으나 후면에는 중앙 칸에만 창호를 달고 양 측면의 협칸에는 교창(交窓)을 달았다. 동쪽 면은 모두 벽체로 처리하고 서쪽 면에는 외짝 출입문을 달았다.
내부는 통칸으로서 불벽(佛壁)을 한 줄로 세워 그 앞에 불단을 만들었으며, 불단 위에는 흙으로 빚은 소조(塑造) 삼세불을 봉안하고 삼존 사이에는 근래에 조성된 보살입상을 협시로 세웠다.
삼존은 중앙의 비로자나불을 주존(主尊)으로 하여, 왼쪽에 아미타불과 오른쪽에 약사불을 모셨다. 삼존불상 뒤의 후불벽화는 1688년(숙종 14)에 조성한 것으로, 중앙의 비로자나불회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회상도·약사회상도가 각각 자리 잡고 있다. 천장에는 사실감이 돋보이는 커다란 운룡문(雲龍紋)이 그려져 있고, 안쪽 천장에는 우물 정(井)자 모양을 한 우물천장을 설치하여 구름ㆍ학ㆍ연꽃 등으로 장엄하였다. 내부 벽에는 산수ㆍ비천ㆍ나한 등을 벽화로 장식하였고, 닫집과 중앙의 불단 등은 비교적 간략하고 단순한 모습이다. 이 건물은 미술사적으로 조선 후기의 뛰어난 건축기술과 조형미를 지니고 있다.
• 고창 선운사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보물 제1752호)
고창 선운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高敞 禪雲寺 塑造毘盧遮那三佛坐像)의 형태는 넓고 당당한 어깨, 긴 허리, 넓고 낮은 무릎으로 인하여 장대하고 웅장한 형태미를 보여준다. 이러한 장대하고 웅장한 형태미를 갖춘 대형 소조상들은 법주사 소조비로자나삼불상, 귀신사 소조비로자나삼불상, 완주 송광사 소조석가여래삼불상 등 17세기 전반기 각지의 대표적인 사찰에서 조성된다. 대형의 소조불상의 조성 목적은 이전 시대와 달리 새로워진 불교계의 위상을 한껏 드러내고, 전란으로 소실된 불상을 빠른 시간 내에 재건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비로자나삼불상은 양대 전란 이후 재건불사 과정과 당시 달라진 시대적 분위기를 직·간접적으로 대변해 주는 매우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또한 대좌의 밑면에 기록한 묵서명에서 불상의 조성과정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로자나, 약사, 아미타라는 삼불상의 존명을 분명히 적시하고 있어 비로자나 삼불상의 도상연구에 기준이 된다. 그리고 1633년이라는 정확한 제작시기와 17세기 전반기의 대표적 조각승 무염과 그의 문하승(門下僧)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정확한 조성주체가 밝혀져 있고, 대형의 상임에도 불구하고 조각적·종교적 완성도가 높은 우수한 작품이다.
• 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 제279호)
선운사에 봉안되어 있는 조선 초기의 금동지장보살좌상으로 높이는 1m이다. 머리는 고려시대 지장보살상에서 폭넓게 나타나는 두건(頭巾)을 쓴 모습이며, 두건을 묶은 좁은 띠가 이마를 두른 후 귀를 덮고 양 가슴부분까지 내려와 있다.
풍만한 얼굴에 조그마한 아래턱 주위로 살집이 많은 이중 턱을 이루어 후덕한 인상을 주며, 목에는 굵게 주름진 삼도(三道)가 표현되어 있다. 하체는 무릎 높이가 낮아서 상체에 비해 빈약한 편이고, 결가부좌한 다리는 옷에 덮혀 있어 보이지 않는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까지 들어서 엄지와 넷째손가락을 맞댈 듯 굽혔고, 왼손은 아랫배에 붙여서 엄지와 중지를 약간 구부렸는데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어깨에서 끈으로 매듭지은 독특한 치레장식이 특징적인데, 이는 고승의 진영이나 불ㆍ보살상에서 보이는 형식이기도 하다. 겉옷 안에는 수평으로 가로질러 가슴까지 올라온 군의(裙衣)를 띠 매듭으로 단정하게 동여매었다. 이 보살상은 선운사 도솔암에 봉안되어 있는 고려 후기의 선운사지장보살좌상(禪雲寺地藏菩薩坐像, 보물 제280호)과 목걸이 장식이나 밋밋한 가슴표현 등이 유사하지만, 머리가 크고 하체가 빈약하여 신체비례가 부자연스러운 점, 목이 짧고 어깨가 올라가 움츠린 듯한 자세, 간략한 장식과 형식적인 옷주름 등은 고려 보살상의 양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조선 초기의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 지장보살좌상(보물 보물 제280호)
선운사 도솔암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봉안되어 있는 고려 후기의 금동지장보살좌상으로 높이는 96.9㎝이다. 대좌(臺座)와 광배(光背)가 모두 없어지고 불신(佛身)만 완전하게 남아 있는데, 상체가 늘씬하고 당당하여 고려 후기의 장곡사금동약사여래좌상(보물 제337호)이나 문수사금동불좌상과 흡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길상좌(吉祥坐)를 한 탄력적인 하체나 부드럽고 단아한 어깨선, 상ㆍ하체의 비례 등이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형태를 지니고 있다. 머리에는 두건을 썼는데, 이마를 감싼 후 귀 뒤로 넘겨서 어깨까지 천을 늘어뜨린 모습이다.
이러한 형태의 두건을 쓴 지장보살〔被巾地藏〕의 모습은 고려시대에 널리 유행하였던 도상적 특징으로, 현존하는 많은 고려불화에서 그 예를 살펴볼 수 있다. 얼굴은 둥글고 단아한 인상을 주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이목구비 등을 세부적으로 꼼꼼하게 표현하였다. 양 귀에는 만개한 화문(花紋)을 띠로 연결하여 귓불에 묶은 이식(耳飾)을 착용하고 있어,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보살상이 원형 고리를 길게 늘어뜨려 매달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특이한 형태라 하겠다.
오른손은 가슴 부분에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댄 중품인(中品印)을 취하고 왼손은 가슴과 배 중간쯤에 들어 법륜(法輪)을 잡고 있는데, 이는 육도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로서 보주(寶珠)ㆍ석장(錫杖)ㆍ법륜 등의 지물을 들고 있는 지장보살의 일반적인 특성을 표현한 것이다. 앉은 자세는 오른발을 왼 무릎에 올린 모양으로 발을 실감나게 표현하였다. 어깨나 소매ㆍ무릎 등에 몇 가닥의 간단한 주름만을 표현하여, 상에 나타난 선묘는 유려하게 휘어지는 맛과 함께 단순ㆍ명쾌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보살상은 고려 후기의 불상양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우아하고 세련된 당대 최고의 걸작이라 할 수 있다.
• 도솔암 마애불(보물 제1200호)
도솔암의 서편 암벽 칠송대(七松臺)에 새겨진 높이 13m, 너비 3m에 이르는 거대한 마애불상이다. 전설에 의하면 백제 위덕왕(재위 554∼597년)이 검단선사(黔丹禪師)에게 부탁하여 암벽에 불상(마애불)을 조각하고 동불암이라는 공중누각을 짓게 하였는데, 조선 영조 때 무너졌다고 한다. 불상은 낮은 부조로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이며, 머리에는 뾰족한 육계가 있다.
방형(方形)에 가까운 평면적인 얼굴에 눈은 가늘고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으며, 우뚝 솟은 코에 앞으로 내민 일자형의 두툼한 입술이 소박하고 익살스러운 미소를 띤 것처럼 보인다. 귀는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게 늘어져 있고, 목은 표현하지 않아서 상체 위에 머리를 올려놓은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상체는 방형에 가슴이 넓고 평면적이며, 결가부좌한 넓은 하체에 손과 발 역시 체구에 비해 큼직큼직하다. 투박한 두 손은 활짝 편 채 아랫배에 가지런히 붙여져 있다.
불의(佛衣)는 통견(通肩)으로 두꺼운 편은 아니나 옷 주름선이 선각으로 형식화되어 있고, 평평한 가슴 아래로 선명하고 단정한 군의(裙衣)의 띠 매듭이 가로질러 새겨져 있다.
대좌는 비교적 높은 2단으로 되어 있는데, 상대(上臺)에는 옷자락이 늘어져 덮여 있고 하대(下臺)는 간략한 연꽃무늬의 연화좌로서 전반적으로 마멸이 심한 편이다.
광배는 표현되지 않았고, 가슴에는 사각형으로 큼직하게 복장(腹藏)구멍을 나타내었다. 머리 위에는 사각형의 구멍이 여러 개 뚫려 있고 부러진 서까래가 꽂혀 있는 것도 있는데, 이는 불상을 보호하기 위해 지붕만 있는 누각 형태의 목조 전실(前室)을 마련하였던 흔적으로 보인다.
• 청당암 대웅전(보물 제803호)
선운사 산내암자 참당암의 중심건물로서 신라시대 의운화상(義雲和尙)이 창건하였다는 기록이 전하며, 그 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현존하는 건물은 조선시대의 것이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매 칸마다 4분합문을 달았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고, 지붕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다포양식의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다.
앞면에 짜인 공포는 전형적인 18세기 다포양식인 반면 뒷면 공포는 굽면이 곡선이다. 석가여래를 본존으로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이 협시한 삼존불을 봉안하고 있으며, 1900년에 후불탱화로서 영산회상도를 조성하였다. 이 건물은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음에도 여전히 고려시대 건축 부재(部材)의 양식을 지니고 있어 이채로우며, 조선 후기의 빼어난 건축미를 지니고 있다.
선운사 대웅보전 뒤의 유명한 동백숲(천연기념물)과 대웅보전 앞의 백일홍에 대하여 보고 도솔산의 진달래꽃 선운사 관음전 앞뜰에 피는 산수유의 노랑꽃에 대해서는 설명만 듣고, 시간 때문에 대웅보전 주변만을 둘러보고 다음 유적지로 발길을 돌려야 하는 아쉬움을 남기고...
▶ 고창 고인돌박물관
소재지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도산리 676
고창 고인돌박물관은 청동기 시대의 각종 유물과 생활상, 세계의 고인돌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만든 곳으로 선사시대의 생활상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곳이다.
야외에 마련된 청동기시대 움집 마을과 생활상을 재현해 놓은 여러가지 모형들은 특히 아이들에게 많은 공부와 현장 학습이 되엇다.
국내 고인돌의 40% 이상이 이곳 고창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며, 특히 남방식과 북방식 고인돌의 중간형태인 지상 석곽식 고인돌의 분포가 많은 곳으로 유명하다.
• 고창 고인돌(2000. 12. 세계문화유산 등록)
소재지 : 전북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일대
고인돌이란?
일반적으로 판석이나 지석을 이용해 상석을 받치고 있는 거석문화의 일종이다.
고인돌은 대부분 무덤으로 쓰이지만 공동무덤을 상징하는 묘표석 혹은 종족이나 집단의 모임장소나 의식을 행하는 제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지석묘로 불리고 중국에서는 석붕 또는 대석개묘라 하며, 유럽 등지에서는 Dolmen이라 불리고 있다.
고창 고인돌은 주로 북부와 동부의 산악 지대 산자락 아래에 집중 분포되어 있다. 모두 8개 권역으로 나눠지는데 권역 간의 직선거리가 약 6㎞ 정도여서 당시 청동기인의 생활 영역이 반경 3㎞ 정도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죽림리 일대의 고인돌은 약 2km 구간 내에 500여 기의 고인돌이 위치하고 있음이 밝혀져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많이 밀집 분포되어 있는 지역이다. 상금리 고인돌은 마을 입구에서부터 전라남도로 넘어가는 표고 225m의 가리재까지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주요 교통로를 따라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 고인돌의 분류
1. 북방식 고인돌
일반적으로 '고인돌'의 모습으로 정형화 되어 버린 '탁자 모양'의 고인돌이 바로 '북방식' 고인돌입니다.
'시신이 매장된 무덤방' 이 지상에 노출된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2. 남방식 고인돌
흔히 '바둑판식'이라고 불리는 남방식 고인돌은 매장시설이 대부분 지하에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매장시설이 '지상'에 있는 북방식 고인돌과 형태상으로 구분이 됩니다.
3. 개석식 고인돌
개석식 고인돌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고인돌의 형태입니다.
지하에 매장시설을 만들고 그 위에 뚜껑형태로 '커다란 돌'을 그저 올려만 놓은 형태가 개석식인데요, 얼핏 봐서는 땅 위에 놓인 '커다란 돌 하나'의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덮개돌의 가공 상태, 입지조건, 그리고 주변상황 등과 비교하여 '자연적인 돌' 과 구분을 합니다.
4. 위석식 고인돌
위석식 고인돌은 무덤을 덮는 덮개돌을 지지하는 굄돌을 대개 6~8개 가지고 있는 형태로 '변형 남방식'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 미당 서정주 [未堂 徐廷柱 : 1915 - 2000]
호는 미당(未堂)·궁발(窮髮). 시세계의 폭넓음과 깊이로 해서 한국 현대시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로 손꼽힌다.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공부하다가 부안 줄포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29년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30년 광주학생운동과 관련하여 구속되었다가 기소유예로 석방, 이로 인해 퇴학당했다. 1931년 고창고등보통학교에 편입했으나 곧 자퇴하고 박한영의 도움을 받아 대한불교전문 강원에 입학하여 불교와 관련을 맺게 되었다. 1941년 동대문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후 동아대학교·조선대학교 등에서 강의했으며, 1960년 이후 동국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해방 후에는 좌익 측의 조선 문학가 동맹에 대응하여 우익 측이 결성한 조선청년문학가협회의 시분과 위원장으로 활동했으며, 동아일보사 문화부장, 문교부 초대 예술과장을 역임했다. 1949년 한국문학가협회 창립과 함께 시분과 위원장을 지냈고, 1950년 6·25전쟁 때는 종군 문인단을 결성했다. 1954년 예술원 종신회원에 추천되었고, 1977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내 그대를 사랑하는 마음은/ 서정주
내 그대를 사랑하는 마음은
이것은 차마 벌써 말씀도 아닌,
말씀이 아닐 것도 인제는 없는
구름 없는 하늘에 가 살고 있어요.
햇빛의 일곱 빛깔 타고 내려와
구름 속에 묻히어 앉아 쉬다가
빗방울에 싸여서 산수유山茱萸에 내리면
산수유꽃 피여서 사운거리고
산수유꽃 떨어져 시드시어서
구름으로 날아가 또 앉아 쉬다
프리즘의 무지개를 타고 오르면
구름 없는 하늘에서 다시 살아요. - 서정주 『선운사 동백꽃 보러갔더니 』-
• 미당 서정주 시문학관
소재지 :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진마(선운분교 폐교부지, 생가 일원)
미당시문학관은 미당 서정주 시인의 고향이자 영면지인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읍 선운리 마을에 세워진 기념관이다. 그의 사후 다음 해인 2001년 가을, 이호종 전 고창군수의 적극적인 도움에 힘입어 개관하였 다. 개관일은 11월 3일인데 이는 미당의 중앙고보 재학시절 광주학생의거 지원 시위 사건(1929년, 1930 년 2회)을 기념하기 위해서 정해졌다. 이 기념관은 고향의 생가와 묘역 근처에 있어서 더욱 뜻 깊은 공 간이며, 폐교된 선운초등학교 봉암분교를 새롭게 단장하여 지었으므로 <친환경>과 <배움>의 건축미학을 지향하고 있다.
미당 서정주 시문학관 전시실에서 설명을 듣고 유품을 구경하는 동안 소나기가 한차례 시원하게 내리는 시간에 애타하는 바람에 갈 길 먼 나그네들의 발길을 붙잡아 두려 하지만 내리는 빗속을 뚫고서 버스는 다음 답사장소로 이동한다.
▶ 고창 판소리 박물관
소재지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241-1
판소리를 중흥시킨 신재효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98년 개관하였고, 건물 2층 규모로 신재효의 유품과 고창지역의 명창 판소리 자료 등 총 1,000점을 전시하고 있는데, 전시실은 소리마당과 아니리마당 등 5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소리마당에는 판소리의 기원과 판소리 시연 모형, 판소리 계보 등이 전시되어 있고, 고창군 소개와 신재효. 진채선. 김소희 등 이 지역 출신 명창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가사집을 비롯한 국악관련의 음반. 서적 등 희귀한 전시물도 많다.
입구에는 소리하는 광대와 고수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고, 안으로 들어가면 판소리에 대한 설명과 자료들이 전시하고 있으며, 판소리는 설화, 무가, 광대놀음, 판놀음, 시나위, 민요, 정악 등 다양한 장르의 문화예술이 녹아들어가 있으며 이들이 성악의 극학적인 추구를 중심으로 통합되어온, 우리 정통 무형 문화유산의 집합체이다.
정정렬(丁貞烈, 1876~1938) : 판소리 현대화와 창극의 전형 일궈낸 계면조의 대가 이다.
박록주(朴錄珠, 1906~1979) : 남성 명창 못지 않은 성량과 독특한 수리성음으로 일세를 풍미했다.
김소희(金素姬, 1917~1995) : 해방 이후 최고의 성음과 예술로, 국창의 반열에 오른다.
박초월(朴初月, 1916~1983) : 청미하고 풍부한 성음으로 일찌기 명창의 반열에 오른 천재소녀였다.
김연수(金演洙, 1907~1974) : 후학을 길러낸 위대한 판소리 교육자이다.
정응민(鄭應珉1896~1964) : 오늘의 보성소리를 있게 한 판소리의 위대한 교육자이다.
임방울(林芳蔚, 1904~1961) : 타고난 성음으로 최고봉을 이룬 천하명창이다.
이동백(李東伯, 1867~1950) : 명창 중 최고 벼슬에 오른 독창성과 즉흥성의 소리의 소유자이다.
송만갑(宋萬甲, 1865~1939) : 가문의 동편소리에 서편소리를 가미하여 판소리의 천재 명창.
• 동편제 : 동편(東便)은 우조(羽調)를 주장하여 웅건청담(雄建淸淡)하게 하는데, 호령조가 많고 발성초(發 聲初)가 썩 진중하고 구절 끝마침을 꼭 되게 하여 쇠망치로나 내려치는 듯이하고......담담연(淡淡然)하 고 채소적(菜蔬的)이며.....천봉월출(千峰月出)격이라.....
• 서편제 : 서편(西便)은 계면(界面)을 주장하여 연미부화(軟美浮華)하게 하고, 구절 끝마침을 끌어서 꽁지 가 붙어다닌다.
• 판소리 형성기 명창들 : 우춘대(禹春大), 하은담(河殷譚), 최선달(崔先達),
• 전기8명창시대의 명창들
시대개관 : 19C 전기 순조(1801~1834) 무렵은 판소리의 기틀이 확립되고 동편제. 서편재. 중고제 등
다양한 유파로 발전되었으며, 서울과 경기의 양반들과 궁중에서도 판소리가 불려진 판소리 의 전성기로서 8명(권삼득, 송홍록, 모홍갑, 염계달, 고수관, 신만엽 김제철, 박유전, 주덕 기, 황해천) 정도의 명창이 뛰어난 활동을 벌였다고 하여 흔히 '전기8명창시대'로 일컬음.
• 전기8명창시대의 명창들
시대개관 : 19세기 후반 현종-철종-고종으로 이어지는 시대(1835~1863)에 뛰어난 활동을 보였던 8명
(이날치, 송우룡, 김세종, 장자백, 정창업, 정춘풍, 김찬업, 김정근, 한송학) 정도의 명창이 활약하던 시기를 흔히 '후기8명창시대'로 부른다.
• 근대5명창시대의 명창들
시대개관 : 고종 후기에서부터 일제 치하였던 1930년대까지의 시기를 흔히 '근대5명창시대'라고 말한 다. 1910년 이후로는 사회적 변동으로 판소리가 쇠퇴하면서 판소리는 창극으로 분화되고 산조 등으로 기악화 되었으며, 축음기의 등장으로 유성기음반 취입이 성행하면서 판소리는 더욱 대중의 취향에 의존하게 된다.
• 해방이후의 판소리 명창 1.
시대개관 : 해방이 되자 4일 후인 8월 19일 국악 건설 본부가 발족 되었으며, 이는 후에 '국악원'의 설 립으로 이어졌다. 창극 운동도 다시 활발해져 다시 여러 단체가 생기는 가운데, 레퍼토리도
전통 판소리를 벗어나 설화나 야사.야화 등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 해방이후의 판소리 명창 2.
시대개관 : 판소리가 재생의 계기를 맞게 된 것은 정부의 무형문화재 지정에 뒤이은 판소리 창자들의 완창 발표회, 그리고 일부 뜻있는 지식인들에 의해 주도된 판소리 감상회였다.
• 동초계 판소리 다섯마당
동초 김연수(東超 金演洙, 1907~1974)는 현대판소리사에서 가장 주목받는 명장 중의 한명이다.
일제시대 말부터 1970년대에 걸쳐 창극발전에 큰 기여를 했으며, 판소리 다섯 바탕을 새로 짜고 소위 (동초계) 판소리를 완성하는 등 뚜렷한 행적으로 남겼다.
김연수 명창은 전남 고흥군 금산 출신으로 29세 되는 1935년 순천에 머물던 유성준 명창에게서 수궁가 전편을 수업하고 같은 해 상경하여 조선성악연구회에 들어가 송만갑에게 흥보가와 심청가를, 이듬해 정 정렬 문하에서 적벽가와 춘향가를 사사하였다고 한다.
• 신재효본 판소리 여섯마당
고창에서 출생하여 판소리사에 큰 족적을 남긴 동리 신재효 선생(洞里 申在孝, 1812~1884)은 판소리를 지극히 사랑했던 평범한 아전 출신 지식인이었고, 판소리 애호가였으며, 이론가였고, 판소리 창자들을 후원하면서 가단(歌團)을 이끌었던 판소리 지도자였다.
신재효 문하의 명창으로는 당대의 8명창으로 꼽히는 박만순, 이날치, 김세종, 정창업, 등의 명창들이 많 았는데, 이들 명창들은 하나같이 판소리 이론에 밝고 소리광대로서 법통을 알고 지켜나가는 소리꾼이라 는 평가를 받았다.
• 광대가(廣大歌)
이 광대가에서 동리 신재효는 광대를 중심으로 판소리에 대한 이론을 펼치고 있으며, 이 때 광대가 갖추어야 할 네가지 조건 인물, 사설, 득음, 너름새 등을 제시하고 있다.
후반부에서는 역대 판소리 명장과 중국의 최고의 문장가를 비유함으로서 판소리 광대의 예술적 역활과 위상을 격상시켰다.
• 김소희
국악계의 사표(師表)이며 국창(國唱)으로 불리운 만정 김소희(晩汀 金素姬, 본명:김순옥)는 1917년 12월 1일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사포리 345번지에서 태어났다.
8세까지는 꽤나 풍족하고 화목했다고 하지만 점차 살림이 어려워지면서 아버지가 자주 집을 비웠다고 한다. 김소희는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거문고로 유명한 시대의 율객 박석기를 만나 이들 사이에 박 윤초를 낳았다. 그러나 그는 일찍 세상을 뜨고 말았다.
김소희 소리의 계보
춘향가 : 송만갑/정정렬/ 정웅민 - 만정판 춘향가(김소희제)
심청가 : 전반부-박유전-이날치-김채만-박동실-김소희
후반부-박유전-전재근-정웅민-김소희
흥보가 : 송만갑-김정문-강도근-김소희
수궁가 : 박유전(1834~) 이날치- 공창식-박동실-김소희
• 신재효고택(申在孝古宅)
소재지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453
이 건물은 동리 신재효선생(1812 - 1884)의 고택으로 고창읍성 입구에 자리하고 있다. 동리 선생은 종래 계통 없이 불려 오던 광대소리를 통일하여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가루치기 타령, 토끼타령, 적벽가 등 여섯 마당으로 체계를 세우고 독특한 창으로 판소리 사설문학을 집대성하였으며 특히 춘향가, 박타령, 토끼타령, 심청전 등을 창극화한 판소리 사상 뛰어난 공적을 이룩한 분이다.
이 건물은 1850년에 건립된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로 물을 멀리서 끌어들여 마루 밑을 통해서 서재 밖 연못으로 흘러가도록 꾸몄었으나 모두 매몰되고 연못은 복원하였다.
또 한 차례 소나기가 다시 우리의 바쁜 시간을 멈추게 하였고. 먹구름이 지나고 햇살이 비취는 고창읍성의 안내판 앞에서 해설사와 인사를 나눈다.
▶ 고창읍성 [高敞邑城]
소재지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사적 제145호. 둘레 1,684m, 높이 3.6m.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한다. 축조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며, 숙종 때 이항(李恒)이 주민의 힘을 빌려 8년 만에 완성시켰다는 설과, 1453년(단종 1)에 축조되었다는 설이 있다. 성벽에 "濟州始", "和順始", "羅州始", "癸酉所築宋芝政"이라고 새겨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계유년에 전라도의 여러 마을 사람들이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계유년이 어느 해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성벽축성법으로 보아 1573년으로 짐작된다. 동쪽으로 반등산(半登山)을 둘러싸고 있으며 동·서·북의 3문(門)과 6치(雉), 2군데의 수구문(水口門)과 옹성(甕城) 등이 있다. 1976년 발굴에서 서문터의 기둥 주춧돌과 문짝 달던 위치, 동문터의 기둥 주춧돌을 확인했다. 성벽은 제법 잘 남아 있는데, 거칠게 다듬은 자연석을 쓰거나 초석·당간지주를 깨어서 쓴 것도 있다. 이와 같은 읍성은 우리나라의 독특한 형태로서 행정·군사 시설로 이용되었다. 고창에서는 여자들의 성벽 밟기 풍습이 전해내려 오는데, 이는 한 해의 재앙·질병을 막는 의식으로 여겨진다.
▶ 전봉준 [全琫準 : 1855 - 1895]
전봉준은 농민대중의 밑으로부터의 힘을 결집하여 봉건제도를 타파하고, 동시에 한국에 침투해 들어오는 일본의 자본주의적 진출을 저지함으로써, 국가의 근대화를 이룩하려 했다. 비록 그의 변혁 의지는 일본의 군사력 앞에서 좌절당하고 말았지만 그가 영도한 갑오농민전쟁은 조선의 봉건제도가 종말에 이르렀음을 실증했고, 민중을 반침략·반봉건의 방향으로 각성시킴으로써, 이후의 사회변혁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진전에 원동력이 되었다. 본관은 천안(天安). 자는 명숙(明叔), 호는 해몽(海夢). 왜소한 체구 때문에 녹두(綠豆)라 불렸고, 훗날 녹두장군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 정읍 전봉준 유적(井邑 全琫準 遺蹟, 사적 제293호)
소재지; 전북 정읍시 이평면 조소1길(장내리)
옛집은 조선 고종 15년(1878)에 세워졌다. 앞면 4칸·옆면 1칸의 초가집으로 안채가 구성된 남향집이다.
동쪽부터 부엌·큰방·웃방·끝방 순서의 일(一)자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남부지역 민가 구조와는 다른 방향으로 되어 있는 특징을 보여준다."
▷ 전봉준선생 생가, 전라북도기념물 제19호(1974. 08. 27. 지정)
▷ 전봉준선생 고택지, 사적 제293호(1981. 11. 28. 지정)
▷ 정읍 전봉준 유적, 사적 제293호(2011. 07. 28. 고시)
• 동학농민군대장 전봉준壇所
소재지 : 전북 정읍시 이평면 창동리 산 10-3
비석에는 ‘갑오 민주 창의 통수 천안 전공 봉준 지단(甲午民主倡義統首天安全公琫準之壇)’이라고 새김.
단비의 이름은 사학자 김상시(金庠基, 1913~1993) 박사가 지었다.
• 전봉준장군 운명시(殞命詩)
時來天地皆同力(시래천지개동력) 때를 만나니 하늘과 땅이 힘을 모아주고
運去英雄不自謀(운거영웅불자모) 운이 다하니 영웅도 할 바가 없구나.
愛民正義我無失(애민정의아무실)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따랐나니 내 부끄러운 것이 없는데
委國丹心誰有知(위국단심수유지) 나라 사랑하는 마음 그 누가 알아주리.
동학 유적지는 포항으로 돌아와야 할 시간 때문에 아침에 버스 안의 강의로 대체하고 다음에 찾아 올 기회를 만들기로 하고 오늘의 답사 일정을 마무리 하고(18:00), 간단한 뒤풀이를 하고서 버스는 포항 방향으로 차머리를 돌린다.(19;00)
장거리 긴 시간의 여행과 답사에 모두들 수고 하셨고 9월의 구리지역 답사에 또 만납시다.
2013. 8. 23. 산나그네 박춘덕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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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좋은자료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