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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계시록!(33) :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 본 문 : 요한계시록 22장 13절 - 21절 (신약성경 422쪽)
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15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18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마태복음 24장과 25장에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직전의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며칠 뒤면 십자가을 지셔야 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마지막 권면의 말씀으로,
주신 말씀이 마태복음 24장,25장의 내용입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메시지였습니다.
요한계시록 마지막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요한계시록은 당시 극심하게 핍박당하던,
초대교회 성도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소망을 주어 고난을 잘 견딜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주셨습니다.
사실 당시 로마제국에 의해 심한 핍박을 받고 있었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 극심한 고통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사는 것을 소망하였기 때문에,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보면, 그들이 갈망하고 소원하는 방식은 아니었습니다.
이 땅에서의 고난이 사라지고, 고난에 대한 보상을 받아 잘 먹고 잘 사는 쪽으로 주신 말씀이 아니라,
다시 오실 재림 예수님에 대한 선포였고, 그 선포를 들은 핍박 받고 있는 성도들이 두 팔을 벌리며,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마라나타!” 하고 큰소리로 외치기를 바라며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생활이란? 언제나 항상 다시 오실 예수님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신앙적인 삶과,
내 눈앞의 안락과 평안함을 추구하는 삶, 이 두 갈래 길에서 자신의 삶을 조절하고 점검하는 것입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 또한 주님이 오신 이후에 누리게 될 하나님나라는 멀어 보입니다.
우리에게는 세상을 더 사랑하는 죄성이 있어, 다시 오실 예수님! 또한 주님이 오신 이후에 누리게 될,
하나님 나라는 지금 우리에게는 선뜻 와 닿지 않고, 당장 오늘 이 세상에서의 떡을 하나 더 얻고,
지금 당장 겪고 있는 고난이 사라지기를 원하는,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말씀하십니다.
“근시안적이고 좁은 눈을 가지고, 이 땅만 들여다보고 살지 말고 눈을 넓혀라. 멀리 바라보아라!”
그래서 요한계시록이 제시하는 대안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가는,
관문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 사함 받고 구원 받은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 완성된,
새 하늘과 새 땅! 곧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음성입니다.
요한계시록, 특히 요한계시록 22장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는 설교자로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당장 현실적으로 눈에 보이는 성도들의 힘든 삶을 보면서, 위로와 축복의 말씀을 많이 선포하게 됩니다.
이 땅에서 어떻게 하면 회복되는가? 어떻게 하면 땅에서 위로를 받고 축복받을 것인가에 치우쳤습니다.
물론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존재들이기에, 어쩔 수 없이 이 땅에서의 아픔에서 회복되고자 하는,
땅의 위로와 축복이 필요하겠지만, 우린 거기에만 머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이걸 깨달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이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예언과 관련해서 주는 메시지는 딱 두 가지입니다.
“속히 오신다.” 는 것과 “도둑같이 오신다.” 는 것입니다. 속히 오시겠다는 것은 분명히 말씀하셨지만,
언제 오실지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아멘! (살전 5:1,2) - 왜 주님은 속히 오겠다는 것을 강조하셨을까요?
그리고 왜 예고하지 않고 도둑같이 오겠다고 하셨을까요? 한마디로 긴장감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황금만능주의 속에서 쾌락을 추구하며 사는 지금의 성도들에겐 이런 긴장감이 없습니다.
오실 주님에 대한 절박한 소망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영적인 변질이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마라나타! 주님 재림에 대한 영적인 긴박성, 긴장감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마라나타의 신앙인 영적인 긴박성과 긴장감을, 우리가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요?
먼저 깨어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깨어서 주님을 기다리는 삶입니다.
마태복음 24장 42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지금 우리가 집중해야 할 분은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 예수님에게 우리의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 전, 프랑스에서 열린 파리 올림픽에 열광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열린 장애인들의,
패럴림픽이 열렸습니다. 메달을 딴 선수들이나,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들이나 진짜 대단했습니다.
선수들의 메달을 향한 무서운 집중력은 대단한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신앙생활도,
바로 그 하나님 나라를 향한 집중력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성공도, 바로 이 집중력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도 바로 꿈을 향해 집중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다운 삶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시야를 좀 더 높은 곳에 두어라. 지금 당하는 고통을,
어떻게 하면 내게서 없어지게 할 수 있을 것인가에만 집중하지 말고, 꿈을 저 높은 곳에 두어라.”
우리의 영적 눈이 하나님 나라, 새 하늘과 새 땅에 있으면 좀 억울한 일을 당해도 참아낼 힘이 생깁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결론으로 “내가 다시 속히 오겠다.” 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우리의 화답은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라는 소망입니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아기 예수로 오시는 과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그 중요한 과정에, 뜬금없이 두 사람 시므온과 안나가 등장을 합니다.
시므온은 예루살렘 사람으로,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초림을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성령이 계신, 성령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셀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결혼하고 7년 만에 남편과 사별합니다.
그리고 과부로 84세가 되도록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겼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는 과정에서, 안나와 시므온과 예수님을 연결시킵니다.
그들이 그렇게 예수님과 연결 될 수 있었던 것은,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삶에 집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재림이 아닌 이 세상에 올인 하며 살지는 않습니까?
필립 얀시의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수도원에 여행객이 방문하여 수도승과 나눈 대화입니다.
수도원을 방문한 여행객에게 수도승이 말했습니다. “머무시는 동안에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십시오. 그것이 없이도 사는 법을 가르쳐드리겠습니다.” - 참 묘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꼭 필요한 것 없이도 사는 법을 가르쳐 드리겠다.” 는 이 엉뚱한 수도승의 말을 들으면서,
혹시 나는 영적인 것보다는 우리 성도들이 당장 필요한 불편만을 채워주는 목회는 아니었는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걸 불평하면 이것 채워주고, 저것 부족하면 그것 채워 주는 목회 말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당장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목회가 아니라, 하늘 소망을 채워주는 목회를 하라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당장 세상 것만을 채워주는 삶이 아니라, 하늘 소망을 채워주는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파악하고, 세상 것에만 집착하고, 더 가지려고 애쓰는 삶이 아니라,
좀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하늘을 바라보는 신앙생활을 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안나와 시므온처럼 세상에서는 초라한 삶이었을지라도, 주님을 만나는 소원을 이루었듯이,
저와 여러분도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이 끝났을 때,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해주실 주님을 소망하고,
아니면 살아서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만나는 영광에 대한 꿈과 소망을 이루며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이런 신앙과 삶이 우리 안에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초점이 있는 우리의 신앙과 삶입니다.
다음으로 마라나타 정신으로 사는 우리는, 사랑과 긍휼의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세에 나타날 현상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장 11절, 12절 말씀입니다.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 지금 이런 일들을 우리가 보고 있는 현실입니다.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이단인 신천지가 지난 18일 서울 송파구,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하늘문화세계평화광복 주최로 만국회의 2주년 기념 평화 축제를 개최했습니다.
참석인원은 언론보도에 따르면 적게는 수만 명에서 10만 여명에 이르는 대규모 행사였다고 합니다.
신천지는 행사장 입장 시 바코드를 동원한 신분확인, 그리고 전체 참석인원의 75%가 여성이었고,
여성 대부분이 20대 여성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지정좌석에서 이동금지를 시켰기에, 남녀를 불문하고,
화장실에 갈 수가 없어 아예 기저귀를 착용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행사가 끝난 뒤 기저귀가,
산더미처럼 쌓였다고 합니다. 마치 북한에서 하는 행사처럼 1만 5천 명의 열병과 카드색션을 하므로,
마치 기계처럼 움직였다고 합니다. 자칭 보혜사 성령으로 오신 재림 예수라고 하는 이만희를 향해,
우로 봐 경례를 하므로 신으로 추앙하는 예를 갖추었다고 합니다.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신천지의 이만희 교주 찬양이 그렇습니다.
그런가하면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 지금 우리 사회가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경제는 엄청나게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이에 비해 약자에 대한 배려, 외국인에 대한 배려,
장애인에 대한 배려 등, 배려심은 OECD 국가 중 꼴찌라고 합니다. 너무나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운전을 하다보면 “초보운전” 이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합니까?
대부분 전혀 배려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무시하고 달려갑니다. 그래서 초보자들이 깜짝깜짝 놀랍니다.
그러다보니 초보운자들의 문구도 살벌해지기 시작합니다. “왕초보” “받으면 너만 손해” “무시하니?”
“당황하면 확 후진한다.” “이틀째 직진 중” “욕하면 후진한다.” “내 창에 야구 방망이 있다.”
초보운전자들도, 그들을 대하는 운전자들도 피차에 막가파입니다. 배려나 양보심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랑이 식어지니, 우리 사람들의 입에는 탐욕의 언어만 난무하고 있습니다.
“저 사람 수입이 얼마야?” “얼마짜리 옷이야.” “얼마짜리 가방이야.” “집은 몇 평이야?” 등등,
심지어 이런 탐욕의 언어들이, 교회 안에서도 넘치고 있습니다. 제일 가슴 아픈 것은 통계입니다.
“몇 명 모여!” “예산이 얼마야?” “교회당은 몇 평이야?” - 그리고 그 숫자를 부풀립니다.
“우리 목사님 학벌은 일류요. 유학파요. 박사야.” “우리교회는 대단한 사람들이 다니는 교회야.”
이 모두가 다 탐욕의 언어들입니다. 이렇게 부풀리면서 교인 뺏기에 혈안입니다. 교인 도둑질입니다.
솔직히 목사와 성도들의 영성이 어떠한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신실한 교회인가? 이게 중요하잖아요?
탐욕의 언어도 문제지만, 비난의 언어도 문제입니다. 이 모두가 사랑이 식어 불법이 성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걸 아십시오. 거듭 강조하지만 우리 주님의 마지막 요청은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 35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일리라.”아멘!
데살로니가교회는 바울이 개척한 교회 중 하나로, 전도를 받아 회심한 이방인들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직 믿음이 깊게 뿌리내리지 못한 상태였는데, 바울이 다른 지역으로 떠나야 했습니다.
그렇게 부득불 바울이 떠난 후에, 로마와 유대인의 박해가 데살로니가교회에 극심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성도를 사이에 동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잘못된 신학을 퍼뜨리는 사람들도 나타나고,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다며 잘못된 종말 신앙을 가르치는 이단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났습니다.
심지어는 믿음의 변절자까지 나타나, 교회 안의 크리스천을 박해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혼란한 데살로니가교회에 바울이 편지를 보내 교훈하기를 “...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악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아멘!
그리고 교회를 혼란하게 하는 사람과 가까이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형제같이 권면하라고 말씀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4, 15 / 데살로니가후서 3:14, 15)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서 성도들 간의 관계가 깨어져 서로 미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서로를 원수같이 여기며 얼굴도 대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로인해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예배도 드리고, 기도도 하고, 사역도 합니다. 그걸 보면 참 신기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사랑으로 신앙생활 하지 않으면, 다 허무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6)
유명한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라는 분에 대한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프란체스코가 제자들과 더불어 3주 간 금식을 하기로 했습니다. 3주 금식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래서 그중 금식에 아주 약한 한 제자가 안 그래도 배가 고파 죽겠는데, 제자들이 가는 길 건너에,
죽 파는 데가 있어, 그 제자가 견디질 못하고 죽 파는 곳으로 가서는 게걸스럽게 죽을 먹어버렸습니다.
그 제자를 향해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그때 갑자기 스승인 프란체스코가 죽 파눈 곳으로,
달려가서는 죽 한 그릇을 시켜 게걸스럽게 먹어버렸습니다. 그러고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실은 나도 배가 너무 고팠어. 오늘로 금식 끝이야. 너희들도 어서 와서 이 죽을 먹어라.”
프란체스코가 정말로 주기 원했던 교훈은, 금식보다 중요한 것은 관용하는 마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남을 비난하지 않는 선한 태도가 금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들의 마음 안에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나이 드신 분이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 분이 당시 뇌경색이 두 번이나 와서 약간의 치매 증세가 있었다고 합니다. 교회가 작은 교회라서,
가족 같은 분위기였는데, 목사님이 수요예배를 인도하다가 갑자기 순서에도 없는 특송을 요청합니다.
“누구 특송 하실 분 있습니까? 누구라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자유롭게 나와서 특송 해주세요.”
그랬더니 약간의 치매가 있으신 그 어른이 나오셨습니다. 그러고는 정말 난감한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일송정 푸른 송은 늙어 늙어 갔어도...” 예배 중에 찬양이 아닌 가곡을 부르자 사람들이 당황합니다.
그런데 노래가 끝나자 예상과 달리 목사님이 은혜를 많이 받았다면서 그분을 막 칭찬을 하십니다.
교인들의 반응이 목사님 왜 저래? 하는 반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목사님의 관용에 감동을 받은,
그 어른의 두 아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나중에 목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관용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너무 쉽게 원칙이라는 잣대를 들이밀지 맙시다. 관용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우리 모두는 반드시 죽음의 길을 통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지금 은행에서 번호표 뽑아놓고 기다리듯이, 언제든지 부르면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죽을 것인가? 또 살아 있는 동안,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기다려야 할까요?
끊임없이 원망하며, 비난의 목소리를 키우고, 불평하며 살아가는 그런 허접한 삶을 살지 맙시다.
탐욕스럽게 살다가 주님 앞에 가는 인생이 되지 말고, 멀리 내다보며 관용하고 용납하고 용서하며,
사랑하며, 감사하며, 우리의 삶의 지경이 넓어지도록 넓은 포용력으로 서로를 품어주며 살아갑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눈을 멀리 들어 이 땅의 문제만 보며 안달복달하며 살지 말고,
오신 예수님을 잘 믿으며,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소망의 사람으로 정말로 잘 살아가는,
인생이 됩시다. 그리고 우리 모두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오늘의 삶을 잘 견디어 냅시다.
그 동안 예배시간을 통해서 오늘까지 33번째 요한계시록을 설교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행복한 마음으로 저를 따라서 큰 소리로, 우리의 소망을 담아 두 번 외쳐 보겠습니다.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아멘!
♥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