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조사가 창건한 <화엄전교 십찰>의 하나 |
의상조사(625-702)는 당나라 종남산 지엄국사로부터 화엄경을 배워 670년에 돌아온 후 우리 민족의 정신을 화엄사상으로 통일시키기 위하여 <화엄전교십찰:華嚴傳敎十刹>을 창건했다. 고운 최치원 선생이 찬한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부석사, 해인사. 화엄사, 갑사 등 <화엄전교십찰>이 열거 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비슬산(毘瑟山) 옥천사가 있다. 비슬산은 연화산의 옛 산명으로서 연화산 옥천사(蓮華山 玉泉寺)는 <화엄전교십찰> 중의 하나이다. |
(연화산 옥천사의 일주문) : 일주문을 지나 조금으르면 사천왕문이 있다.
(사천왕문) :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는 곳. 옥천사에 들어갈려면 이문을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교통의 발달과 발전으로 오른쪽으로 난 다리를 건너서 갈수도 있다.
그러나 멋스러움과 고즈녁함을 느끼면서 걸어보는 것 또한 좋을것 같아 사천왕문을 통과하였다.
(하마비) 사천왕문을 통과하면 바로 나타나는 작은 건물과 하마비라는 작은 돌비석을 만나게 된다.
하마비는 남녀노소,고관대작을 불문하고 누구나 여기서는 우마에서 내려서 걸어들어가야 한다는 표지석.
사찰입구에 이러한 하마비가 있는 곳은 전국을 다녀봐도 흔하지 않는 오래된 사찰이며 그 만큼 격식이 높았
던 절간이라고 할수도 있다.
(자방루) : 옥천사 마당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제일먼저 보이는 건물이며 옥천사의 현판을 달고 있다.
자방루(滋芳樓)는 조선후기의 대표적 건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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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산옥천사 의 주 출입문) - 이문을 통하여 대웅전으로 들어가도록 되있었다.
(대웅전)
반개연화 9봉(半開蓮華 九峰)이 감싸고 있는 도량 |
연화산(蓮華山: 526m)은 소백산계로 덕유산, 지리산을 지나 100여리를 더 내려간 남해안 고성군에 뻗쳐 있다. 9개 봉우리가 반만 핀 연꽃잎 같이 생겼다 하여 연화산이라 부른다. 연화산의 본래 산명은 비슬산(琵瑟山)이라 불렀는데 이는 인도의 범천신인 비슈뉴(Visn?)의 음가(音價)를 따온 것이라는 일부학자들의 주장이 있다. 그러나 고문헌에는 산의 동북쪽에 선유봉(仙遊峯), 옥녀봉(玉女峯), 탄금봉(彈琴峯;望仙峯)의 3봉이 늘어서 있어서 선인은 비파를 타고, 옥녀는 거문고를 타는 모습이라 비슬산(琵瑟山)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후 절을 중창한 학명(學明)대사가 산모양이 마치 연꽃잎이 반만 핀(半開蓮華) 것 같은 형상이라 하여 옛 비슬산(琵瑟山)을 “연화산(蓮華山)”으로 개명했다. 옥천사는 이 연화산의 꽃심에 자리 잡고 있는 명당 길지로서 항상 안온한 기운이 감돈다. |
(대웅전에 모셔진 불보살님 - 세분의 불보살님들의 수인이 모두 같은 것이 여타 사찰들과는 틀리는 모습이었다)
대웅전 외벽에 그려진 벽화들 퇴색된채로 방치된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떤 몰지각한 사람이 낙서를 하였는지는 알수 없으나 정말 이러한 일은 없어야 되는데 어딜 가나 무엇이 그렇게도
원하는게 많았을까?
이런것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과 화가나서 갑자기 가슴과 머리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 나한도량, 참선도량으로 유명한 사찰 |
옥천사는 예로부터 나한도량 및 참선도량으로 유명하다. 옥천사 나한전 상단불상의 좌우에는 각 여덟 분씩, 16분의 나한님이 모셔져 있는데 그 중 9분은 조선 전래의 목조 나한님들이다. 도량석이 늦어지면 목탁소리가 들리고 경을 읽다 잠이 들면 잡아끄는 수가 있으며, 밤중에 불을 켜놓고 깜박 잠이 들면 “누구 계십니까?” 하고 깨우기도 한다. 옥천사의 산내암자인 (200m 떨어진) 백련암(白蓮庵)은 선방으로 유명한 암자다. 조계종 종정을 지낸 설석우스님, 서옹스님, 월하스님, 혜암스님 같은 큰스님들이 6.25 전후 이 암자에서 참선 수행했던 유서 깊은 선방이다. |
(자방루 : 대웅전에서 바라본 자방루에 연화옥천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사찰의 누각은 대개 2층으로서 누각 밑을 통과하여 계단을 올라 마당에 이르도록 되어 있으나
옥천사의 경우, 많은 인원이 2층 누각에 오르면 도괴될 위험이 있으므로 자방루를 튼튼한 단층
건물로 건립했던 것이다. 오늘날 옥천사의 외부 모습은 흡사 성채를 방불케 하는데 이 또한
일단 유사시에 즉각 방어태세를 취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자방루 천정모습 _ 중보에 그려진 비천상과 꿈틀거리는 용의 모습이 생동감 있게 보였다.
(팔상전) - 대웅전 동쪽에 위치한 팔상전, 부처님 일대기를 화폭에 담아놓은 전각이다.
범종각 _ 옥천사 마당 한켠에 설치된 범종각 여기에는 법고사물이 걸려있다 (법고인 북, 종, 운판, 목어)
(옥천각)
옥천(玉泉)으로 유명한 천년고찰. |
신라 문무왕 16년(676), 옥천사가 창건되기 전부터 맑은 옥천이 샘솟고 있어 옥천사(玉泉寺)라는 절 이름을 얻게 되었다. 옥천은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고 하며 예부터 각종 병을 고치는 감로수(甘露水)로 유명하다. 물은 수평일 때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지만 이 옥천은 서출동류(西出東流)하는 특징이 있다. 한국 100대 명수(名水) 중의 하나. 많은 사람들이 옥천 샘물을 마시기 위하여 옥천사를 찾고 있다. 옥천은 암수 2개의 샘이 있는데 연화산 산속 물무듬이에 수샘이 있고 옥천사의 옥샘은 암샘이라 한다. 대웅전 향 우측 팔상전 옆에 옥천수각(玉泉水閣)이 위치하고 있다. |
(청담대종사 사리탑과 비) - 불교정화운동의 선구자 청담대종사가 출가한 사찰 |
옥천사는 근래의 고승인 청담(靑潭1902-1971)대종사께서 입산한 출가본사로 유명하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 일본 총독부가 민족불교를 말살하기 위한 정책으로 1911년 <寺刹令>을 제정하여 전국 사찰을 통할하였고 “사찰의 승려는 독신자로 한다.”는 조선 전래의 계율을 무너뜨리고 취처(娶妻)를 허용하는 규정으로 바꾸는 등 왜색불교를 조장함에 따라 승려들은 모두 총독부의 눈치를 보아가며 하나 둘 취처를 하게 되었다. 이들 대처승들은 처자식 먹여 살리기에만 골몰할 뿐, 불교 수행은 뒷전이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계율을 엄정히 지키는 일부 비구승들이 독신승으로 살며 부처님 정법을 수호하였다. 광복이 되자 청담스님은 부패한 불교를 정화하여 민족불교를 회복하기로 결심하고 “불법에 대처 없다! 대처승은 물러가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불교정화운동을 주도, 마침내 비구승들이 전국의 주요사찰을 관장하게 되었다. 정화운동의 기수 청담스님은 진주농업학교(晋州農業學校)를 졸업하고 26세시인 1926년 박한영(朴漢永, 映湖鼎鎬)스님을 은사로 옥천사에서 출가한 후 서울 개운사에서 박한영 스님이 강원을 열자 이 곳에서 대교과를 이수하였다. 이후 20년 동안 운수납자로 전국 방방곡곡의 선방을 참방하며 참선 정진에 매진하였다. 만주의 수월(水月)스님을 찾아 도를 묻고, 덕숭산 수덕사의 만공(滿空月面)스님으로부터 전법게를 받았다. 광복 후에는 총무원장과 종정 등을 역임하며 한국불교를 이끌어 나가시다가 1971년 세수 70세, 법랍 48하(夏)를 일기로 입적하셨다. 다비하자 15과의 오색찬란한 사리가 출현하여 인연 있는 몇 개 사찰에 사리탑을 세웠는데 출가 본사인 옥천사에는 청담스님의 사리탑과 탄허스님이 찬하고 직접 글씨를 쓴 탑비가 있다. |
옥천사 보장각 : 옥천사의 유물을 보관 관리하는 박물관
옥천사 앞을 흐르는 계곡을 예쁘게 정비하여 물의 흐름이 더욱 보기에도 좋았다.
넉넉하지 못한 시간으로 그저 둘러볼 뿐이다.(참고 : 옥천사 홈페이지)
090722 한낮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