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로마 역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 라면 제정 초기 세 명의 황제 이름을 나열했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 나 필자가 작은 따옴표로 묶은 이유는 이 이름이 아우구스투스 황제 의 뒤를 이은 티베리우스 황제의 본명이기 때문이다.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율리우스 가문과 무관한 클라우디우스 가문 출신으로 아우구스투스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인물이다. 그렇다면 어떻 게 해서 티베리우스가 대제국의 주인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의붓자식이자 양자에 사위였다. 삼두정 치가 중 서방 로마의 실질적 지배자가 된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본명)는 기원전 38년 티베리우스의 어머니 리비아 드루실라와 재혼했다. 당시 리비아는 둘째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는데, 남편을 버리 고 최고 실력자의 품을 택했다. 부부가 다 공화정기 로마사에서 주도 적인 역할을 한 클라우디우스 가문 출신이었지만 가문의 명성도 권력 앞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 리비아의 본 남편이자 훗날 황제자리 에 오르는 티베리우스의 생부이기도 한 그는 이혼절차를 밟아 아내를 옥타비아누스에게 넘겨줬다.
뱃속의 아이가 옥타비아누스의 씨라는 내연관계설이나 리비아가 의도 적으로 옥타비아누스를 유혹했다는 설, 옥타비아누스가 권력을 강화 하기 위해 클라우디우스 가문을 동반세력으로 택했다는 설 등 다양한 주장들이 제기되지만, 확인할 증거는 없다. 다만 후속 상황들로 보아 이 충격적인 사건이 아우구스투스의 후계 구도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던 것 같다. 외동딸 율리아 외에 친자식이 없었던 아우구스투스 가 후계자 문제를 풀기 위해 취한 행동은 한마디로 혈연에 대한 집착 이었다.
중병에 걸렸다가 기사회생한 아우구스투스는 조카 마르켈루스를 외동 딸과 결혼시켜 후계자로 삼았으나 마르켈루스가 갑자기 사망하는 바 람에 무위로 돌아갔다. 캄피돌리오 언덕 맞은편에 남아 있는 마르첼 로 극장이 아우구스투스가 애도의 표시로 조카에게 바친 건물이다.
아우구스투스가 두번째로 선택한 후계자는 정계에 입문한 이래 운명 을 같이해온 친구 아그리파였다. 황제의 요구에 따라 아그리파는 부 인과 이혼하고 율리아와 재혼해 후계자 반열에 올라섰고, 두 사람 사 이에서 아들 둘이 태어나 후계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듯했다. 하지 만 기원전 12년 아그리파가 병사하고 아그리파의 두 아들은 후계자가 되기에 너무 어렸다. 이제 남은 건 리비아가 데려온 두 의붓자식 티 베리우스와 드루수스뿐이었다.
아그리파의 큰 딸 빕사니아와 결혼한 티베리우스는 부여받은 군사적 임무들을 제대로 처리하고 콘술 경력도 밟아 겉으로는 후계자가 되는 데 결격 사유가 없었지만 원만한 성격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그래도 적임자가 없었기 때문에 계승 후보로 지목되었고 그 절차는 본인에게 가혹한 시련이었다. 아우구스투스의 강요로 임신 중인 아내 빕사니아 와 갈라서야 했다. 게다가 방탕한 행실로 자주 물의를 빚었고 자기를 멸시했던 율리아와 어쩔 수 없이 재혼해야 했다. 티베리우스는 불행 한 결혼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자청해 로도스 섬에 은둔해버렸다.
동생 드루수스가 전선에서 사고로 횡사한 데다 아우구스투스의 두 외 손자도 사망함으로써 9년간의 은둔생활을 마친 티베리우스는 기원후 4년 공식적인 후계자 자리에 올랐다. 혈통을 고집한 권력자의 온갖 수단과 방법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주인자리는 예상치 못한 의붓아들 에게 넘어가고 말았으니 권력이란 게 잡기보다 지키기가 더 어렵다는 말이 맞긴 맞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