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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충족이유율
박홍규, 형이상학 강의 2: 박홍규전집 3, 민음사, 2004, pp. 315-354. (P. 467)
- 박홍규(朴洪奎, 1919-1994), 1992년 6월 24일 강의,
* 나로서는, 제목에서 「존재의 충족 이유률」에서 존재는 존재(l’etre)가 아니라, 현존(l’existence)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중세 스콜라철학자들이 신의 존재 증명에서 존재 라고 할 때도 현존이다. 현존이 문제가 되는 것은 “존재와 무”라는 대립이라기보다, 현존하여 있기는 있는데 어떻게 있느냐는 것을 다루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존재의 본질(l’essence)라고 하는데 비해, 현존에서는 본징(l’entité)으로 쓰고자 한다. 다시 말하면 개체화 또는 개체들에 있어서 사물들은 현존하며, 그 현존의 본징이, 즉 현존의 고유한 성질들이나 본성들이 있다. 현존에 대한 주제는 이 현존의 본징과 연관들을 다룬다. 따라서 ‘존재와 무’의 주제가 논리적이고 순수 존재론에 속한다면, 현존의 개체들에 대한 주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개별물들과 연관해서 다루는 현존론에 속한다.
선생님은 사유의 근원에서 자연은 추상적인 것인가? 실재적인 것인가를 문제삼았던 것 같다. 실재적 자연이, 무에서 나온다는 종교적 관점과 추상에서 풀어진다고 하는 철학(존재론)의 관점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우주(자연)이 닫혀있고, 그 총체는 불변이며 내부적으로 변화가 있다고 하더라도 총체의 양(질)은 일정하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논의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자연(우주)는 스스로 생성하고 어떻게 또는 얼마나 변할지를 아무도 모른다는 입장에서, 실증철학은 생성하며 변하는 현존을 다루면서 현존의 단면들과 총체 즉 부분들과 전체라는 관점에서 구체적 내용들을 다룬다. 물론 전체를 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관점은 여전하다. 그러나 고대와 중세 철학에서 무와 존재 사이에 등급을 규정하는 것은 위계적이고 수학적일 수 있다. 수학적이라는 의미에서 존재론은 인간 사고의 추상화이며, 추상화가 왜 기원전 4-3세기에 거의 정립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아마도 이 시기에 일반인으로서 개인의 영혼이 관심거리일 것 같다.
영웅이나 이야기 속에 신격화의 문제에서 세상 저편 또는 엘리제 평원(서방 정토든, 옥황상제 곁이든 용궁이든)에서 산다고 할 경우에, 연속적 삶이 무엇인가에 철학적 사유는 깊이 생각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도 개인의 삶이 신체와 떨어져서 살 것으로 여긴 것이 파이돈편이 아니었던가 한다. 고다마 싯달다는 개인 영속적으로 산다고 하기보다, 여기서 소멸하고 열려진 세상으로 – 온 세상이 평화로운 세상으로 - 간다고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철학에서 개인의 영혼이 아니라, 먼저 ‘온영혼’이 문제로 제기되었을까? 전승의 이야기에서 신들은 어떤 상태 또는 지위에 있을까? 이야기는 이야기일까? 실재하는 것을 생각했을까?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Θεογονία)에서 제우스가 문제가 아니라 가이아를 왜 끌어냈을까? 사유의 시초는 산다는 것, 즉 생명의 연속성이었을 것이며, 이로부터 사물에 투사하는 방식에서 공간의 사고가 먼저 등장하고, 그리고 그 공간 사고가 모순 또는 파라독스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 사물의 투영에서 시간(영혼)의 자기운동으로 – 연속성을 운동에서 찾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천체의 운동의 연속성의 완벽함과 원운동의 아름다움에 도취된 그리스인들이 영원성에서 불멸성을 찾았을 것이다. 유대교도 불교에도 불멸성에 대해서 불가지적 입장인데, 바울이 불가지적 입장을 사고의 단절에 의해 죽음과 부활 용어를 끌어들이면서 자기기만(사기)과 오만에 빠졌다. 그런데 후세는 오만을 자긍심 정도로 또는 자아의 성립정도로 착각하는 경향으로, 원의 완벽함에 빠져서 나오지 못하였듯이, 오래 오래 빠져있었다. 원의 길이가 직선이 안 된다는 것을 알 때에 오만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2천년의 고질병(파라노이아)는 여전히 “자본(Das Kapital)”에 협력하고 있다. - 삶은 수학과 물리학이 아니라 생물학과 심리학이다.(53SMF)]
** 서양 철학의 근본적 두 주제는 자기 자체적인 것(자체성)<kath’hauto>과 자기 운동(자발성)<heauton kinoun>이다. 정지와 운동, 공간과 시간이라는 사유의 두 축은 여전히 문제거리이다. 자체성이 자기운동에서 나왔을 법한데, 자체성이 자기 운동보다 자기 부동성이 먼저 인 것으로 여기는 사고(추론)이성이 서양철학사를 지배해 왔다. 운동이 제대로 사유의 대상이 되기에는 우선 갈릴레이가 등장하여 운동의 상대성이 인정되어야 하고, 역엔트르피와 전자기운동에서 상대성의 운동이 심층에서도 일어나고 있으며, 우주에서 상대성의 운동은 광자의 이론으로 일반화되어 가고 있다. 그럼에도 정지에서 운동으로 사고하는 것은 오랜 사고의 인습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지에서 사고를 운동의 사유로 바꾸는 데는 여러 불합리(파라독스)를 거쳐 왔지만, 그래도 정지가 먼저이라 한다.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부친살해의 소크라테스의 사유도 시대에 단죄되었고, 갈릴레이가 종교재판을 받은 것도 마찬가지였다. 21세에도 십진법의 간편으로 이진법의 극대화로서 정보기술이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차이와 반복이라는 두 용어가 정지를 기준으로 하는 사고에서 운동을 포함하는 사유로 바뀌는 과정을 서술했다고 하더라도 정지가 먼저라는 일반인들의 사고는 여전하다. 존재론에서 형이상학으로 이동이든, 삶에서 기술로 이전이든, 그 이행에서 여러 과학들은 여전히 후자에 기반을 두고 있다. 선전제로서 원리와 말(오노마타)이 지배의 역할을 하는 것은 원리가 법칙을 지배하고 법칙이 사회적 규범의 거울처럼 여기는 것에서 온 것이다. 이 규범의 코드는 19세기를 거치면서 탈코드화의 과정을 겪는다고 하더라도 재코트화의 길 속에 포획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은 존재론과 삶에서 스스로 새로운 길을 찾기보다, 편안과 안존에 안주하고자 하는 심성을 어쩔 수 없다. 이 심성은 새로운 삶을 고행과 고난의 길처럼 여길 것이다.
어느 누구도 자기의 이익과 편안에서 벗어나 공동체나 인류의 삶을 진솔하게 대하지 못한다. 어찌 인간의 인습만을 탓할 수 있겠는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자기와 자기 이웃 그리고 토양과 함께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겠지만, 우선 자기 이익에 끌려들어가는 성향도 여전하다. 심성, 인습, 성향은 시대의 경향을 이루고 있다. 그럼에도 이런 개인적 경향으로부터 출발해서는 인간의 삶, 지구의 삶을 풀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도 인간이라는 점이다. 코로나가 종교도 정치도 아닌 기본 문제가 자연과 더불어 이웃과 함께라는 것을 자각하게 한다면 그나마 반성의 기회일 것이다. 생태계를 망친 것도 인간이고, 사회체제를 망조로 만들어 갔던 것도 인간이다. 그런데 그것을 고칠 자도 인간이라는 점이다. 그 인간이 정지의 사고에서 운동의 사유로 바뀌는 것은 쉽지 않다. 그 중에서도 두 가지: 유일신앙의 선전제로 신을 만든 사고들이고 다른 하나는 자본이라는 틀 속에 있는 국가가 인민의 삶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사고들이다. 이 둘이 파라노이아의 근원이며, 영웅이 오리라고 믿는 심성들에게 가득하다. 인민이 스스로 풀어가는 삶이 있다. 들뢰즈가 매끈하게 물결 파처럼 펼치는 노마드라고 한다. 사고에서 사유로 전환이 왔다. 그런데 지구라는 생태계가 그럴 시간을 주지 않고, 먼저 청소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지구 온난화, 유전자 식품, 팬더믹 질병 등도 이 지구를 청소할 것 같다. 하여튼 목적적이고 완성적인 예측은 사기와 기만이라 하는데, 지구에 대해 자신을 바꾸는 노력은 예측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삶의 진솔한 태도이다. 이런 글을 쓰면서 용어가 가지는 이중성은 참으로 다양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래도 인간 속에서 인간을 통해서 인간에 의해 이루어가야 할 뿐이다. 자연 속에서 자연 스스로 가는 길을 깨달을 수 있는 생명체는 인간만이 아니라고 가정하더라도, 인간은 흄이 생각했듯이 자신이 만들었던 과정을 다시 반추하고 시정하고 교정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자연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 토지(토양)와 더불어 삶의 얼굴을 만든다는 것, 즉 풍경이 얼굴이다. 산하가 우리의 몸이다. (53SM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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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의 충족이유률 (315-354)
[raison suffisante, principium rationis sufficientis] .
박홍규: 요전에는 희랍적 사고(greek thought)의 근본으로 들어가면 <physis(자연)>의 세계를 만난다는 얘기를 했어. 거기 선사 시대에는 지능, 특히 추상 능력이 발달하지 않았는데, 그때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모순개념이 없고, 구체적이라고 했지? .. 그런데 점점 추상화 하는 능력이 생기면, 나, 사람과 우주, 물질과 생명, 가족 이런 것들이 구분된다고 했지? 그래서 점점더 구별되면 그냥 사람에게 이 사람이라는 하나의 특수한 인격(person)이 떨어져서 구별된다고 했지? (315)
가령 <소크라테스의 본성(physistes Socrates)라는 말은 소크라테스의 총체적 인격(total personality)을 의미하고 그 총체적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 거기서 대화를 한다고 했지? .. 그 때 사람들이 사물을 보는 가장 추상적인 개념은 존재와 무라고 했지? 그래서 가장 원시적인 사고방식에서 사물을 보는 것을 알파라고 한다면, 이제 여기 존재와 무의 관계에서 사물을 보는 것은 오메가다. 그말이야. 그런데 이 존재와 무 관계에서 볼 때에 문제가 되는 것이 충족률이야. 충족률. (315-316)
가령 예를 들어서 대학에 들어가는 데, 100점 만점에 60에서 합격선을 그었다면, .. 한 점 모자라도, 59점짜리도 다 떨어져. .. 대학생이 될 수 있는 그 점수를 만족시켜야 돼. 그것이 바로 60점이야. ... 선과 악은 0점에서 10, 20, 30, 40, 50, 60, 70, 80점으로 나아가. 거기에는 59점짜리보다는 60점짜리가 더 좋고 60점 보다는 61점이 더 좋고 100점은 더 좋아아. 그러니까 거기에서는 정도의 문제지. 선은 정도가 문제야. 어떤 성격이 나타나는 정도가 얼마냐 하는 것이 문제지. 어디서 딱 끊어져서 양자택일(entweder-oder)로 이거냐 저거냐, 학생으로 존재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냐. 충족률은 달라. ... 충족률은 모순관계의 문제야. 선악은 모순이라고 하지 않고, 빔(vacuum)이라고 하지. 악은 선의 빔, 결여(privation)라고 해. 결여라고 하지 모순이라고 하지 않아. 이걸 딱 구별해야 돼. (316)
왜냐하면 존재와 무는 모든 것에 대해서 다 책임을 져야 돼. 모든 것에 대해서 충족률을 논의 할 수가 있어. 모든 것을 선악처럼 결여의 입장에서도 볼 수가 있지만, 결여의 반대인 충만(plenum), 즉 충족률의 입장에서 볼 수 있어. 왜 이것이 무가 아니고 존재냐, 왜 이것이 없지 않고 있느냐는 문제는 충족률의 문제야. (317)
그런데 추상화의 극치가 충족률이라 그랬어. 거기서 존재가 성립할 수 있는 근거를 우리가 충족률이라 그래. 그렇다면 추상화란 것이 무엇이냐? 서로 엉켜 있는 것을 따로 따로 떼어내어서 내용을 구별하고 그 각각의 자기 동일성(identity)이 성립할 수 있는 공간에다 집어넣어서 자기 동일성이 나와야, 그것을 우리가 추상화한다고 하고, 그 공간을 추상적 공간이라 그래. (317)
그러면 무엇이 엉키게 하느냐가 문제야. 엉킨 상태는 어떤 상태냐는 말이야. 사물이 엉키는 과정을 우리가 운동이라고 해. 운동에서는 A나B나, 이것이나 저것이나 서로 엉켜서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서 끝나는지를 몰라. 왜 어디서 시작하고 어디서 끝나는지를 모르냐? .. [그래서 엉킨 것을] 그것을 우리가 동시에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 그러니까 동시에 존재도 아니고 무도 아닌 것이라고 해. 왜냐? 존재와 무는 딱 끊어버려. (317) [아테네의 사고에서 존재와 무의 이분법이, 전제로서 생각되는 한, 철학에서 온갖 논의가 이어질 것이다. - 존재와 무 사이의 불연속성 또는 따로 떨어짐이라 할 때 그러면 그 사이는 무엇인가? 그러면 존재가 무로 변했다거나 무가 존재로 변했다는 가정이 있을 수 있는가? ]
A에서 B까지 연속해서 변화했다면 연결되어 있으니까 변하지 않는 측면이 있는 건 분명하지. 끊어지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연속성이라는 게 두 가지 측면이 있어. 요컨대 연속성은 모순을 넘어서는 제삼자야. 모순을 넘어서는 제삼자가 엉키게 해. 연속성 속에 들어가면 그 속에 있는 사물이 서로 연결이 돼. (318)
가령 수를 갖고 얘기 하자면, .. 수학적 수에는 0이 들어가. 희랍에서는 0을 수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왜 0이 수학적 수냐 하면, 그것이 수학적 공간에 들어갔을 때 수학적 공간의 성격을 띠어서 다른 수와 연산(operation) 속에 들어가기 때문이야. (318)
우리는 자연적 세계에서만 직선이나 원을 그릴 수 가 있어. 왜냐하면 제2성질이 있어야 우리가 감각적으로 직선이라고 알 수 있으니까. 그러나 기하학적 공간에서는 감각적 요인은 다 빠져. 그러니까 그것은[기하적 직선은] 물리적 세계와 추상적 공간을 가르는 선의 한계에서, 그 선에 즉(卽)해서 성립해. 그렇지 않으면 연속이 되지 않아. 그러니까 추상적 공간, 수학적 공간과 물리적 공간의 연속을 가르는 공간의 저편에서는 정의(definition)가 이루어지는 기하학이 성립하고, 이편에서는 감각적인 물리적 삼각형이 성립해. (319)
그러면 추상한다는 것은 무엇이냐? 수학적 공간이나 기하학적 공간은 그 속에 들어있는 것을 수학적으로 또는 기하학적으로 다른 사물과 연결을 시키는 것 아냐? 그 연결도 끊어버리라는 말이야. 거기서도 추상화를 해야 돼. 자기 동일성(idntentity)이 성립하는 모든 사물을 전부 다 분류(classify)해서 있는 것, 없는 것으로 나누면, 여러 가지 공간이 나오겠지? .. 그때 무[(無)], 없다는 것은, 연속이 끊어져 있으니까 다른 타자와의 관계에서 어떻게 규정할 수가 없고 – 가령 수학에서는 다른 것과 관계에서 0을 규정할 수가 있지만, - 무 그 자체의 내포(intention)에 의해서, 그 자체의 정의의 내용에 의해서 규정해야 돼.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무는 그 자체 없는 것이니까 없어져 버려, 사라져버려. 그와 반대로 존재는 남아. 이 사상이 어디서 나와? 파르메니데스 단편 맨 처음에 나와. 존재는 있는 것‥…(파르메니데스 단편을 살피면서) .. 여기야. 이 말이 아주 번역하기 힘들어. 사람마다 번역이 모두 달라. 요는 <있다는 것, 그리고 있지 않음이 불가능하다는 것(exist, it is impossible, not to exist>하나 하고, <반면에 없다는 것, 그리고 없음이 필연적인 것(the ather case, exist not. ‘not exist’ is necessary>, 이 두 개로 나타나. 동일률의 입장에서 보면 이 명제는 옳아. (319-320)
제우스는 제우스요, 사람은 사람이요, 귀신은 귀신이요, 다 들어맞아. 그러나 이것을 더 추상화해서 넘어가면 없는 것은 다 사라져버려. 있는 것만 남아. 그런데 다음에 하는 말이 이 후자의 길[없다는 것]은 연구하지 말라는 거야. 왜냐하면 있는 것 바로 그것이 직관(noein)의 대상이니까. 그것은 무는 직관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야. 인식의 대상이 되지 않아. 그런데 이 <noein>이란 말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우리 사고 일반을 의미하지만 그것과 달리 여기서는 최고의 직관을 의미해. (320) [파르메니데스(전515경-전450경)의 <노에인>의 존재가 싯달다의 항하사 같은 용어만큼이나 있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동일률을 넘어서면 어디로 가느냐? 동일률의 세계에서는 여러 가지 조작(operation)이 성립하는데 이것은 조작이 성립하지 않아. 그래서 이런 존재자를 동일한 장소에서 자체적으로(kath’hauto) 서 있다고 해. 그리고 존재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느냐> 존재로서 가득 차 있다고 해. 왜냐? 존재 속에 다른 것이 들어 있으면 그것은 진정한 존재는 아냐. 파괴돼 버려. 그러니까 존재로 가득 차 있고 그 밖에는 아무 것도 없대. 없는 것은 대상으로 생각하지도 말라는 얘기야. (320) [이 존재자들로 가득 찬 세계가 화엄의 세계이지.]
이 사람[파르메니데스]의 이론에 의하면 없는 것은 전부 다 <noein(직관)>의 대상이 안 된다는 말이야. 제우스가 무슨 <noein>의 대상이 되냐? 신화에 나오는 허구적인 것이 무슨 대상이 되냐, 안 된다. 그 말이야. 내가 부연해서 이야기하자면, 동일률의 대상은 돼. 그러나 <noein>의 대상은 안 돼. 이것은 직관이야. (320-321) [여기서 동일률의 대상이라고 할 때 대상은 추론에서 현실과 마주하는 대상일 것이고, 그것을 이름으로 부르고 고유명사화할 수 있을 것이다. 제우스는 고유명사로 신은 존재로 성립할 것이다. - 그런데 그 신은 현실에서는 알 수 없는 대상, 지식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즉 삶의 실행과 무관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신은 ‘있다’ 이다. 이것은 “신 ‘이다’”가 아니다. 신 ‘이다’라고 할 때, 이다는 이름(onomata)에 대해 ‘이다’가 되면, 존재가 아니라 이름일 뿐이다.]
그러면 이것이 존재하는 근거를 논의해야 돼. 동일률의 세계, 조작이 가능한 세계에서는 사물이 왜 존재[현존]하느냐는 문제는 그것을 성립시키는 다른 전항(前項), 다른 전제조건으로 가야될 거 아냐? 다른 전제 조건은 또 다른 데 있어. 밖에 있어. 전제 조건이 있고, 그 후건으로서 성립해야 되고, 하는 식으로 무한히 나가. (321) [존재는 전건과 후건이 필요하지 않는 직관이라면, 현존은 전건과 후건의 연관 속에서 설명할 것이다. 그러면 전건이 무엇인가? 그 전건은 존재에서가 아니라 현존에서 관계 또는 연관을 찾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연관은 연산자(un opérateur)와 관계 속에 있다.]
그러니까 존재가 자신의 근거야. 홀로 서 있으니까 그것은 존재 이유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속에 있어. 그 자체가 자기 자신의 이유가 돼. 조작의 세계에서 충족률을 찾으면 무제한하게 가지만, 여기서는 딱 끊어져 나와. 그래서 이런 존재자를 <kath’hauto(자체적인 것)>, 라틴어로 <ens per se(자체 존재)>라고 해. 독립해서 있다는 거야. 거기다 근거를 집어 넣을 때는 스콜라철학자는 <ens a se><자기 자신으로부터 존재하는 것>이라고 해. 대단히 중요해. (321) - [ens(존재자)는 esse(존재)와 달리 본징들(des entité)을 지니고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존재 그 자체’(ipsum esse)는 존재의 현존의 한 본징(‘ens a se’)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이제 우리가 여기서 학문에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하나는] 물리 현상이든 생물학적 현상이든 모든 현상의 법칙을 추구하는 학문이 있고, 또 하나는 물리학적 현상이나 생물학적 현상이나 심리학적 현상과 같은 그런 현상들이 존재하는가, 그 충족률을 취급하는 학문이 있어. 둘 있어 (321) [수학적 순수 추론에서 원리를 추구, 물리학에서처럼 현상에서 법칙을 추구, 그리고 생물학과 심리학에서 현존의 특이성을 추구. 그리고 운동(지속, 기억)의 추구. - 넷째에서 역사와 고고학은 과정을 재구성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 산다는 것은 과정의 총체이니깐.]
그런데 서양 사람의 지능 발달은 추상화의 극한치로 가는데 있어. 추상화의 극한치로 가기 때문에 존재와 무가 나타나. 모순 개념이 생기고, 그리고 거기서 왜 무가 아니고 존재냐 하는 것을 물어. (322)
그런데 지금 내가 말한 것 같은 철학이 정상적인 과정(course)을 밟아서 나오려면, 물리적 세계(physical world)가 있고, 물리적 세계를 정리, 분류(classify)하는 이론적인 실증과학이 나오고, 그리고 그 뒤에 비로소 충족률이 나와야 돼. 그런데 희랍철학은 반대야. 충족률이 먼저 나왔어. 파르메니데스에 보면, 사물에 대한 분류가 없어. 이러한 사태가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 하면, 우선 분류를 해서 학문 체계를 다 갖추어 놓고 그것을 넘어 설 때에는 충족률이 나오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말하자면 초월자야. .. 그러니까 동일성이 성립해서 동일성을 넘어서는 그 한계에 즉해서 저쪽은 파르메니데스가 말하는 존재이고 이쪽은 분류가 있는 존재[존재자]야. (322) [존재의 단일성과 완전성을 선가정해야 존재에 대해 사고 할 수 있는 지성이 있는데, 이 지성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는 정의 이다. (53SMG)]
요컨대 존재와 무를 구별해 주는 것이 뭐야? 무엇인 존재와 무를 구별해줘? 존재가 구별해 주는가, 무가 구별해주는가? 존재도 아니고 무도 아닌 것이 구별해 주지. 그것은 아까도 말한 바와 같이 무한정적(indefinte)이야. 거기서 우연과 가능성이 성립해. 그런데 그것이 영점(Zero Punkt)에 도달했다는 얘기야. 지금, 그것은 무제한하게 커질 수도 있고 무제한하게 영점에 가까이 갈 수도 있어. 그러니까 넘어선다는 것은 영점에 가까이 간다고 가정했을 때 얘기야. 그러면 우연이니 가능이니 하는 것이 다 빠져버려. 그리고 존재는 단적으로 존재해. 알아들었지? 단적으로 존재해. 그 연속성을 희랍어로는 <synechôn>이라고 하고 라틴어로는 <continuum>, <서로 엉켜있다>는 거야. 그것이 다 빠져야 돼. 단적으로 존재하니까 <kath’hauto>, <스스로에 의해서>만 존재해. 혼자 존재해. 다른 것과 관계해서가 아니라. 관계를 맺으려면 존재도 아니고 무도 아닌 것이 나와야 될 것 아냐? 존재도 아니고 무도 아닌 것이 영점에 도달했을 때만, 존재는 다른 것들과의 관계를 다 끊어져 버렸기 때문에 <kath’hauto>, <자기 자신에 따라서>만 성립해. 그리고 파르메니데스가 말하기를 그런 존재자[존재]는 운동도 않고, 변화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고, 미래, 과거 다 없어. 요컨대 무한정자(apeiron), 연속성이 몰고 오는 모든 것이 다 빠져버려. (322-323, 한 문단 전문이다.) - [왜 주를 길게 달았느냐 하면, 정지 또는 존재에는 충족률이 없다. 아페이론을 정도의 차로 놓았을 때, 각 부분(단면)의 정도들이 성립하는데서 충족률이 있으며, 정도의 차이가 영원히는 아닐지라도 일정하게 동일성을 유지해야 프라그마타가 있을 수 있고 그리고 오노마타로서 개념으로 성립할 것이다.]
이 세상을 파르메니데스의 일자와 같은 논리, 존재니 무니 하는 것만을 가지고 설명하려고 한단 말이야. 논리적 세계나 물리적 세계를. 파르메니데스에서는 말을 해, 신이 하는 말이야, 말. 모든 것을 말로 해. 그러니까 거기서 궤변이 나와. 그러니까 궤변이 나오는 대부분의 이유는 이 파르메니데스로 돌아가. (323)
그래서 그 후에 사물을 분류하려고 하는 [플라톤의] 노력이 소피스트편에 나와. 거기서 비로소 소피스트의 정의가 학문으로 이루어져. .. 그런데 파르메니데스의 일자 개념[용어 말]은 그 광간을 넘어서. 공간을 통해서 넘었지만, 그 자체는 <kath’hauto>니까, 모든 관계가 다 떨어져 나가. 시간, 공간도 다 떨어져 나가. 그런데 초기 자연철학자들처럼 이것을 가지고 자연 철학으로 간 사람들 있어. 그 사람들의 특징은 뭐냐 하면 요는 분류를 하지 않는데 있어. (323-324)
[* <kath’hauto>에서 <heauton kinoun>으로: 파르메니데스편을 넘어서 >
그런데 플라톤도 분류를 하지 않고서 이 공식을, 충족률을 집어넣어. 어디다 집어 넣으냐 하면 – 여기가 가장 중요한 대목이야 – 운동에다 집어넣어. 운동이 없어지지 않고 그 자체로서 존재하려면 그것의 충족률을 찾아라. 그 말이야. 어디서 찾아야 될 것이냐? 운동이 없어지지 않고 끊임없이 존재한다고 해보자. 그 충족률이 어서 나와? 어떻게 규정해야 할 것이냐는 말이야. 가장 중요한 대목이지. 플라톤이 파르메니데스 편에서 말하기를, 운동이 그 전제 조건으로 다른 운동이 있어서 거기서 받아서 운동을 한다면, 그 운동은 또 다른 운동이 있어야 하고, 그런 식으로 무제한하게 갈 거라는 거야. .. 그러니까 충족률은 운동 자신의 내부에서 취해야 돼. 그걸 자기 운동이라고 해, <heauton kinoun(스스로 움직이는 것)>. 아까 <kath’hauto on(존재 자체)>하고 <heauton kinoun>은 맞먹어 들어가. 이것이 획기적인 것이지. 플라톤에서 아주 어려운 대목이지. 이런 것을 우리는 나전어로 <sponte sua(스스로 움직여서>, <spontanéité><자발성>이라고 그래. 운동의 충족률. 이런 충족률이라는 것은 아주 어려운 대목이야. 나중에 뒤로 가서 아리스토텔레서에서도 그렇고. 어째든 플라톤은 영혼은 불멸하다고 해. 그런 자기 운동을 영혼이 가지고 있다고해. 이 <heauton kinoun>, 자기 자신을 움직이는 능력이 생물의 생명이야. 그래서 영혼은 불멸해. 알아들었지? (324) .
[* <heauton kinoun>의 기능(연관)의 분화, 그리고 인식 ]
그 다음에, 이제 아주 중요한 데야. <heauton kinoun>의 기능은 무엇이냐? 능동적(active)인 운동이 주는 것이야. 아까 맨 처음에 말한 것처럼 연속은 연결시키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시간이 나와. 다시 말하면 흐리멍덩하게 이것도 아니고 저적도 아닌 것으로서 연결해 주는 무한정자(apeiron)의 운동하고 달라. 능동성(activity)이니까. 영혼이 가지고 있는 능력은 인식능력의 하나이고 또 하나는 인식능력에 의해서 사물을 움직이게 하는 능력이야. 갈라놓으면 움직이는 능력하고 인식 능력하고 두 개가 있어. 그 둘이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야. (324-325)
그러면 이제 인식론의 문제가 나와. .. 아ㅡ 그 전에,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의 이 존재의 충족률이 다른 수나, 다른 색깔로 나온다고 했지? 그러면 그것은 형상(idée)이 돼. 그래서 형상(eidos)하고 물리적 세계의 관례를 참여(metechein)또는 분유(parousia)로 설명해. 형상 그 자체는 변하지 않아. .. 그러면 수니 사람이니 공간으로서 나타난 것에 대해서는 형상이라고 하고 – 그래서 형상이론(idea theory)이 나오고 -, 운동에 대해서는 자기 운동 이론이 나와. (325) [우리는 주에서 이데아이론은 플라톤에, 에이도스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에 귀속시켜 설명할 것이다.]
그런데 [운동 이론에서] 이런 인식 능력이 어떤 능력이냐 하는 어려운 문제가 나와. 플라톤도 설명이 없어. 그러나 테아이테토스편에서 인식능력은 영혼의 기능(psychic function)이다. 영혼이 하는 거라는 얘기야. 그러니까 살아있는 생물, 영혼(pshchê), 산다(zên)는 것, 그것은 불사적(athanaton)인 자기 운동, 자발성(la spontanéit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거야. (325) - [삶은 행(行)이다. 각자이행(覺者移行) - 숫타니파타(Sutta Nipāta), 37장: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같이(Pas plus surpris qu'un lion par un bruit).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Pas plus piégé que le vent dans un filet.) 물에 때 묻지 않는 연꽃같이(Pas plus souillé qu'un lotus dans la mare): 외뿔 무소처럼 혼자서 가라(Va t'en tout seul, comme une corne de rhinocéros.)]
그러면 인식 능력이 완전한(parfait) 것으로서 존재하지 않느냐, 이것을 인식이라고 하느냐 아니냐는 충족률은 어디서 나오느냐, 그것을 생각해야 돼. 아까 파르메니데스가 말한 것처럼, 일자는 <noein(직관)>의 대상이라고 해. 플라톤도 그 <noein(직관)>을 끌어들였고. 그러면 옛날의 <nous(직관력)>가 들어와. 요는 그 <noein>의 기능의 분화야. 그것이 바로 직관이야. .. (326)
직관이 아닌 것은 그 대상과 나 사이에 제삼자가 개입해. 그러니까 그런 것은 직관했다고, 인식했다고 말할 수 없어. 직관만이 인식이야. . .. 직관은 증명이 없어. 그러니까 그것은 재인을 해야 된다는 거야. 직관은 반드시 결과로 기억[추억]상이 나오고, 기억상은 반드시 재인으로 가야 돼. 내가 인식했느냐 아니냐는 재인해 물어보면 알아. 그런데 형상은 항상 재인이돼. 그러나 감성적 사물은 그렇지 않아. 이게 중요해. 감성적 사물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이 우의 신체적 기능을 완전히 지해해서 <noein>이 가지는 하나의 성격, 통일된 성격이 우리의 감각 기능을 통제할 때만 성립해. 거기서만 직관이 성립해. 직관의 주체자는 나 하나야. 하나. 갈라지면 직관이 안 돼. 외부에도 그것에 해당하는 것이 있어. 그것을 플라톤은 <ôn(ὤν 존재)>이라고 해. 존재에 대한 직관만 있어. 아무리 이론적으로 따져봤댔자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은 실제로 그 결과를 내가 데이터에 대해서 직관을 해야 돼. 그래야 옳은 것이 나와. .. 인식은 이론적 공간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ontisch)하는 실제 사물에 대해서 성립해. (326)
아까도 말한 바와 같이 여러 가지 궤변이 있어. 에우클레이데스((Euclide, Ευκλείδης, 435경-365)이니 제논(Zenon, 전490경-430경)이니 하는 것들이 전부 파르메니데스에서 출발한 궤변이야. 왜? 파르메니데스의 일자는 초월자인데, 그것을 바로 현실 세계에다 집어넣어서 운동[계속의 길이(연장)]이나 양적 정도(degree)가 있는 것으로 설명하니까 잘못이야. (326-327)
에우클레이데스는 곡식 한말 던지면 소리가 나야 안 나야 하고 물어 그러면 난다고 대답하지. 그러나 한알을 던졌는데 소리가 안 나지. 두 알 던졌는데도 소리가 안 나지. (327) [제논식의 분할의 불합리를 지적한 것이다. - 들뢰즈의 플라톤주의 전복도 이러하다.]
에피메니데스(Épiménide, Ἐπιμενίδης, 556년 활동)의 크레타 사람도 그래. 크레타 사람은 모두 거짓말을 한다고 크레타 사람이 말해. 그 사람의 말은 거짓말이야 참말이냐? 그러나 동일률에서 분류하면 아무 문제가 없어. 왜냐하면 동일률이라는 것은 소피스트편에서 말하기를 동일한 사물에 대해서 동일한 각도에서 동일한 시점에 동일한 것을 말해야지 다른 것을 말하면 안된다는 거야. 말하는 사람이 여러 가지 측면이 있어. 그 측면을 혼동하니까 궤변이 성립해. 그러니까 그런 궤변을 물리치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임무 중 하나야. (327) 그래서 소피스트 편에서 분류를 해. 고대의 궤변이 나오는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요컨대 분류를 제대로 하지 않는 데에 있다는 거야. [플라톤도] 소피스트를 여러 관점에서 출발해서 분리(diairesis)하고 종합(synagogê)해서 분류해 가지고 소피스트는 이렇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정의를 해. 지금과 같으면 그렇게 각각 떨어지지가 않지. 지금은 실증철학이 발달해서 말이야, .. 그러나 그때는 분류가 잘 안되던 시대니까. (327)
플라톤은 없는 것은 인식이 안되다고 해. 파르메니데스하고 똑 같아. 아마 이것이 서양철학의 학문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일 거야. ...그런데 말은 모든 것을 대상으로 하거든. 말도 존재자의 하나야. 그러니까 모든 것에 대해 어떻게 하면 가장 기본적인 분류를 얻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나와. 그래서 초기 자연 철학자로부터 분류를 죽 검토해. (328)
그러니까 이제 문제가 하나 성립해. 파르메니데스는 초월자에 대해서 충족률을 취급했는데, 플라톤은 그렇게 생각하면 허위가 성립하지 않으니까 다와 운동이 있는 이 세상에서 총족률을 찾아. 알아들었지 이 세계의 충족률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이 다 의미가 없어. 알아들었나? (328)
박홍규: 소피스트편에서 <pantelôs ôn(perfect being)>이라는 말이 나와. 충족률이라 말은 근세에서 나온 것이지. <hikanos legetai(충분히 이야기했다)>, <충분히>라는 형용사만 있어, 아직 율[principe] 법칙으로서는 없어. (328-329)
그런데 충족률에 의해서 성립하는 것이 <pantelôs ôn(perfect being)>이것든. 그러면 거기서 기본적인 분류를 해보자는 거야. ... 허무는 없으니까, 실제 있는 것과 다르게 말하는 것이 허위라는 말이야. 달리 말하면 허상이야. 허상은 말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든지 다 있다는 거야. (329) [허상(fiction): 착각(l’illusion)일까?]
그러면 이제 이 최고의 분륜가 어떤 문제로 돌아게 되느냐? 우리가 살고 잇는 이 세상의 기본적인 원인(aitia)으로, 원인론으로 넘어가. 그래서 필레보스편에서는 <peras(한정자)>, <apeiron(무한정자)>, <poiun(능동자)> 또는 <nous(이성), 그 세 가지가 나와. (329) [이렇게 3가지로 구별하는 것이 나오면, 필레보스편이 티마이오스편 다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능동자를 누스로 규정했으니까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기계적으로 본것과 다르니까.]
원인론에 입각해서 전체 우주의 충족률이 어떻게 성립하는가? 그 문제는 티마이오스편으로 넘어가. 거기서 우주는 동그랗고 모든 형태를 받아들일 수 있는 구와 같대. (330) [이 설명을 보면 필레보스편이 티마이오스편보다 먼저 같다.]
그런데 신체는 영혼이 있어야 횔 것 아냐? <nous(이성)>, 영혼은 소피스트편에서 말하는 존재, 동일자, 타자를 가지고서 법칙에 다라서 구성돼. 플라톤은 그렇게 합해 갖고 이 우주를 돌려. 바깥에 항성이 있고, 동일한 궤도를 돌아가. 속에는 유성[행성]이 있어. 유성이라는 것도 궤도를 달리하는 것이야. 그런데 그 속에 있는 별들이 하나도 충돌하지 않아. 문제는 거기에 있어. 그걸 끄집어내려고 한 거야. 충돌하면 우주는 망할 것 아냐? 자기 자신 내부로부터, 응? 다와 운동으로 되어 있으니까 자기 자신 내에서 파괴될 것 아냐? 이게 전부 조화(harmony)설이지. 그래 갖고 일정한 기간이 되면 우주가 또 다시 원위치로 돌아와 그 도정(course)를 자꾸 되풀이 해. 그걸 대우주년이라 해. 무슨 애기냐 하면, 조화는 전체에 대해 일자가 나와야 돼. 그걸 조화라고 해. 정적인(static)인 공간 개념이야. (330)
우주는 시간적으로, 그 지속이 영원해. 그런데 소피스트편에서 말한 것처럼, 아까 일자를 분열시키는 타자성의 입장에서 보면 질서가 없거든? 그러니까 질서가 없는 측면도 있어. 그래서 질서가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물질적인 측면을 <synaitia>, 보조원인이라고 해. (311)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의 아들이야. 소피스트편에 나온 것처럼, 파르메니데스를 아버지라고 그랬고, 그 아버지를 죽여야 되겠다. 그 말이야. 파르메니데스의 일자가 가지고 있는 성격, 그 충족률을 이 다(多)와 운동(運動)의 세계 속에서 찾아야 되겠다. 그런데 자기는 그게 <eikos logos>(그럴듯한 이야기)래. 왜? 자신이 없으니까, 뒷받침해줄 만한 실증과학적인 검증이 안되거든. (331). - [티마이오스편에서 ‘그럼직한 설명’(eikos logos) 또는 ‘그럼직한 이야기’(eikos mythos)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이 연역적으로 출발하는 데에 문제가 하나 있어. 연역적으로 출발하면 처음부터 한 발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어. (331)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에게 가까운 것으로부터 출발해서 점점 먼 데로, 본성적인 것으로 가자고 해. 현재 우리 실증과학하고 비슷해. (331)
아리스토텔레스도 파르메니데스나 플라톤과 똑 같지. 어디서 닮았느냐면 공간적이야. 플라톤도 폐쇄된 우주를 생각해. (332) [정태적 공간의 사유는 전체가 통일된 하나라는 전제가 들어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첫째 이 운동을 억제해야 돼. .. 저 위에 이 우주를 지배하는 일자가 있어. 그래 갖고 모든 사물이 운동하되 그 일자로만 운동하도록 되어 있어라는 말이야. 그게 목적론이야. .. 그런데 그 목적론이 밑에서는 처음에 실체(substance)[substratum]가 있고, 그 다음에 식물이 있고, 동물이 있고, 사람이 있고, 일자로, 이렇게 딱딱 위계질서로 해서 마치 군대조직처럼 정해 놨어.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는 하나도 깨지지 않지, 내부에서. 그리고 저 바깥에는 항성이 있고 가장 속에는 위성이 있어. 그리고 인간 세계는 가장 불규칙하대. (332)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그 우주관이 깨졌어. 누구한테 깨졌냐 하면, 르네상스의 갈릴레이에서 깨져버렸어. .. 갈릴레이가 실험을 해봤어. 자연학은 요컨대 운동론이니까. ..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나 운동은 형상(eidos)에 따라가야 된다는 겁니다. 플라톤은 제작자(dêmiourgos)를 따라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을 따라가거든. ... [갈릴레이의 낙하 실험에서] 형상 이론이 다 틀렸다는 말이야. 그래서 형상은 다 없어지고, 지수화풍도 다 무너져. 그 다음은 순전히 운동만 가지고 논의해 (332-333)
이건[운동만] 우리의 지능 발달사에서도 굉장한 지능 발달이야. .. 순수 운동을 추상해 놨다는 것이 특징이야. 굉장한 지능 발달이야. .. 여기서 하나의 물리학만 성립해. 베르그송은 근대 물리학이니 현대물리학의 특징이 뭐냐 하면, 시간이 독립변수고, 나머지는 종속변수라는 거야.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형상이 독립변수고 운동은 종속변수야. (333)
[개체(개별물)에 대하여]
자 그러면 이제 문제가 생겨. 사물들이 모조리 운동 속에서 있다면, 운동 속에 있는 사물들의 충족률은 어떻게[어디서?] 찾아야 될 것이냐 하는 문제야. 또는 운동 자체의 충족률은? 아까도 말한 바와 같이 플라톤에도 파이드로스편으로 넘어간다고 했지? 그런데 플라톤의 후기를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로 넘어오면 형상 하나만 갖고는 안 된다고 했지? 이 세상이거든. 그러니까 플라톤에서 보조인[<synaitia>]이 물질(matter)가 돼. 형상 하나는 그 자체로서는 가능적으로만 존재하고, 플라톤의 형상처럼 독자적으로 성립하지 않다. 무슨 얘기냐 하면, 소피스트편에서 존재[현존, 존재자]가 여러 가지로 나눠졌는데, 그 분산된 존재를 모조리 다시 합해 놔야만 존재가 나오더라, 충족률이 성립하더라는 얘기야. (333)
플라톤에서 <synaitia>를 왜 보조인이라고 하냐? 옆에 같이 더불어 있는 원이라면 주원인이 아니고 보조원이지만, 그것이 원인이라는 것은 존재하도록 하는 요인이 그 안에도 있더라는 말이야. <planōmenē aitia(방황하는 원인)>에도 있더라. 왜냐? 무가 아닌 한은 존재이까. 그런데 무는 없거든? 그러니까 존재로 갈 것 아니냐는 거야. 그러니까 그런 것을 모조리 다 합해 놔야겠구나 하는 말이야. 그것이[전부] 보조해야(supporting)만 비로소 이 다와 운동이 있는 세계에서 존재 자체가 드러나더라. 플라톤 후기 철학에서 나오는 사고야. 아리스토텔레스에서도 나와. (334)
아리스토텔레스처럼 형상이나 질료는 그 자체로서는 가능적이야. 형상이 한정적(definite)[peras]인 것이고, 그것이 존재에 가장 가까운 것이거든? 그러니까 그것을 중심으로 해서 그것이 존재하는 데 부족한 측면을 질료가 메워줘야만 되겠더라는 말이야. 메워주는 한에서 질료라 그래. 메워주지 않으면 질료라 하지 않아. 질료가 메워줘서 실재로 존재할 때, 그냥 <있다>라고도 하고, 또 아리스토텔레스는 <energeia(현실성)>란 말을 써. 그리고 스콜라 철학에서는 그럴 때 <existentia(실재)>[현존]란 말을 써. (334)
내가 <<existentia>란 말의 정확한 의미를 가르쳐 줄게. <ex->라는 라틴어의 <ex>, <밖에>이고 희랍어의 <apo(밖으로)>에 해당해. <ex>의 본래 의미는 <exeinai>, <밖에 있다>는 말이야. 그 말이 무슨 얘기냐?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나와. 우리 마음속에만 단순히 있는 것과 반대야. 제우스는 내 맘 속에만 있어. 실재는[현존은] 없어. 실재 바깥에 있는 것을 <existere(실재하다)>[현존하다]라고 해. (334)
스콜라철학에서 <existentia>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비슷해. 가능성 밖으로 나가면 어디로 나가? 현실화된다는 얘기야. 스콜라철학에서는 그래. 희랍어에서는 <existere>란 말은 없어. .. 그러니까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나 플라톤의 형상에는 <existere>[현존하다]를 안 써. 의미가 없어. 여러 가지의 것으로 구성되어 있는 사물에 대해서만 <existere>란 말을 써. 현실화될 때에만. (335)
그리고 파이드로스편에서 플라톤은 우리 영혼이 불사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서 스스로 자기 자신을 움직이는 존재자의 운동을 애기 했지만, 그것만이 홀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야. 알아들었지? 우리 신체가 영혼을 도와주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잖아.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존재가 자연적으로 위의 존재로 향하도록 돼 있어. .. 베르그송은 뭐라호 말하느냐 하면, 생물은, 인간은 자기 자신의 <existencee(생존)>을 <se créer>, <스스로 만들어낸다>고 해. .. 그러니까 베르그송에서 신체는 도구야. 이걸 도구로 삼아엇 우리 생명 현상은 <heauton kinoun>, <자기 자신을 움직이는 존재자>를 있게 하는 능력을 지닌 존재자만이 살아. 그러니까 운동 속에서 존재하는 사물이 어떻게 하면 자기 존재의 충족률을 성립시킬 수 있느냐는 문제는 물질에는 없다는 결론이 나와. 물질은 흐름(flux)이니까 엔트로피를 따라간다고 해. 반(反)엔트로피 능력을 갖고 있는 생물만이 존재한다는 말을 쓸 수 있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energeia>란 말을 쓸 수가 있어. 물질은 흐름이야 존재하지 않아. (335-336) [여기에서 벩송은 두 질서라고 했고 둘 질서가 모두 존재적 의미를 갖는다. 현존은 사물에서 이다. 그런데 이 존재적 의미를 존재처럼 사유해야 한다고 하면서 상향도 관념(l’idée)이고 하향도 관념이라 한다. 즉 하나는 플라톤식으로 지도(인도, 지향)하는 이데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하적으로 체계를 다룰 수 있는 이데라는 것이다. 다. 즉 두 종류의 이데(deux idées)를 인정한다(PM).] (336)
베르그송은 달라. .. 그리고 근세 실증과학 위에 서 있는 학문이니까, 물질의 엔트로피에 반대하는 반엔트로피의 존재자만이 항상 자기 자신이 존재[현존]하도록 반엔트로피 작용을 하고, 그런 한에 있어서만 산다는 말이야. (337) [사키야 무니도 이렇게 생각한 것 같다.]
간염 바이러스가 나를 먹고 살아. 그럼 나는 지금 간염 바이러스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돼. 그게 성립해? ..그러니까 먼저 분류를 제대로 해야만 올바른 형이상학이 나와. 분류를 제대로 해보면 대개 기본적인 충족률이 어디서 구해야 할 것인가는 알 수가 있어. 그리고 이것은 학문의 세계야. 아까도 말한 바와 같이 그 초기 자연철학이나 스토아학파는 다 분류가 제대로 돼 있지 않아. (338)
베르그송이 말한 것처럼 우리 의식에 직접적으로 주어진 한에 있어서 사물을 취급해야 돼. 알아들었나? 그래 가지고 분류를 해야돼. 원자론이니 그런 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이 다 빠졌어. 어디서 구해. 그 사람들은 이 우주의 충족률을 그것을 구성하는 원자에서 구해. [그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나 밖에 없다고 해. 문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분류라는 거야. (338)
김인곤: 그러한 분류란 것은 항상 유동적으로 별할 수 있지 않겠어요? 과학이 학문이 어떻게 발전하느냐에 따라서‥…
박: 변할 수 있지 그러니까 변하지 않는 한에 있어서, 그 정도의 형이상학이 성립해. 처음부터 다 있는 것은 아냐. 분류가 제대로 안된 것은 학문으로서 절름발이야. 모든 학문은 분류를 우선 제대로 해야 돼. 분류하지 않는 학문, 철학은 넌센스야. .. 모든 학문은 우리가 뭘 말하든 간에 모순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해 놓고 나가는 것 아냐? (338)
그런데 그것과[모순회피와] 반대 사상이 있어. 아까 인격(person) 얘기 했지? 희랍에서 총체적 인격(total person)이란 것은 추상의 극한치에서 성립하거든. 그런데 사람은 죽거든? 개인이 죽어. 그 때 개인이 추상호되기 이전의 충족률을 물을 수 있어. 가령 <physis tês Sokratês, 소크라테스의 본성, 자연), 소크라테스의 전체 인격성은 죽거든, 없어지거든,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이 생기거든. (339) [다음 사람으로 인격으로서 연결될 수 있다.]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 같은 것은 <역사적 사실로서 누구 누가 있는데, 그는 사람인 동시에 역사적 사실로서의 사람 아닌 어떤 것이어서, 자신을 죽음으로부터 구원시키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하고 우리 학문에서는 얘기하지 않는 것을 신앙으로 믿어. 그러니까 신앙이자. 순수한 신앙은 학문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거야. 학문은 또 가급적이면 신앙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 것이고. 그래서 순수한 신앙이 성립해. 그러니까 그리스도라는 그 역사적 사건을 빼놓고는 기독교가 성립하지 않아. 기독교가 어떻게 성립했어? 그리스도 제자하고 다른 제자하고 인격적으로 접촉하고, 그리고 인격적으로 접촉하고, 또 인격적으로 접촉하고, 해서 지금 세계에 퍼진 것 아냐? 그 집합을 교회라고 그러잖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그러잖아, 응? 우리 학문의 세계하고는 달라. 그것은 절대로 보편화가 되지 않아. 항상 고유명사니까. 학문은 추상적이니까 보편화(일반화)가 될 수가 있어. 우리는 인격적인 관계와는 상관없어. (339)
가령 아도니스라든지 이집트에서는 모두 다 부활한다고 생각했어. 미이라 같은 것을 만든 것은 부활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야. 주문하면 미이라가 살아난대.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신화가 있어. 그런데 그런 창조니 부활이니 하는 문제는 분류가 이루어지기 이전에 나타나. 그건 것이 나타나는 이유는 죽어도 다시 산다는 그 시대 사람들의 강박관념 때문이야. 플라톤은 아카데미아에서 한가하니 애들에게 공부를 가르친단 말이야. 틈[여가(餘暇)]이 생기거든. 강박관념이 없잖아? .. 틈이 있어야 돼. 자유가 있고 틈이 있어야 학문이 성립해(340) - [철학이 여가가 있어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도 사실상 파라노이아 이다. 여가문제가 아니라, 폐쇄된 우주냐 개방된 우주냐 에서 분류해야 할 것 같다.]
박: <sôma>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어. 신체도 되고 입체도 되고. (340) - [소마(sôma)는 스토아를 거쳐서 중세에 코르푸스(corpus)에서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물체, 신체, 영혼, 국가기구도 코르푸스이다. 라이프니츠에게 모나드가 유사한 방식으로 미세한 먼지에서 물체 생명체, 의식을 넘어서 우주에 까지 모나드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이 모두 닫혀있다. 역(逆)엔트로피와 자기장의 실상이 등장해야 열릴 것이다. 인류는 이렇게 느리게 느리게 진행한다. 코로나19에 대한 생태계의 사유도 느리고 우여곡절을 거쳐서 코드화 할 것이다. 지구의 반격을 받고서야. ]
<sôma>하고 <asôma(비입체)>를 구별해서, <sôma>라는 것을 입체를 의미하고 <asôma>라는 것은 선이니 평면, 점을 의미해. .. 아리스토텔레스의 개체를 얘기하려면 우선 딱 이렇게 무한정자를 끊어야 돼. 끊어버리면 폐쇄적인 공간이 나오잖아. .. 플라톤도 끊었어,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렇고. 그래서 우주 전체는 하나 밖에 없대. 공간적으로 한정돼 있고, 시간적으로는 영원해.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sôma>가 있어야만 질이 있지, 질 만 똑 떨어져서 있질 않아. (341)
질만 가지고 입체가 안된다는 거야. .. 자연학을 보면 <sôma>가 나오는 것을 온냉건습만 가지고 이야기 하거든? 그런데 그것은 질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내말을 <sôma>하고 질은 다르다는 얘기야. (341-342)
[세상에는] 실제로는 질을 가지고 잇는 하나하나의 개체만 있어. ../..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서 보면 여기 <sôma>에 뭣이 들어가느냐에 따라서 물질이냐생명체냐, 식물이먀 동물이냐 그렇게 갈라져. (342) [형태에 성질의 부여이다. / 성질자체의 분류(4상 의학)]
형이상학 Z편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기를 개체와 개체는 떨어져(chôris) 있다고 해. (343)
시간은 자꾸 밖으로 나가서 무한하대. 물질은 속으로 들어가야 무한하대. 무제한히 쪼개면 무한이 나온다는 거야. (344) - [일반적으로 밖으로 무한은 무한하게 안으로 무한히 쪼개기는 무한정이라고 한다. / 헤겔은 무한 전진을 '악무한'이라하고, '진무한'은 유한할 뿐만 아니라 자기 완결적이고 구체적이다. 진무한은 닫혀 있다. ]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체를 <chôris>나 <tode ti>라고 할 적에 단지 모래를 갈라놓고 그런 말을 쓰지 않았을 거산 말이야. (345)
덩어리는 자기 존재의 충족률이 없어. (346) [다양체는 충족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확장의 내용(강도, 방향, 경향)이 무엇인지 어떻게 전개되는지 어디서 무엇과 등의 드라마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철학의 다른 방식이 있을 수 있다.]
박: 내가 설명한다면, 보조인(synaitia)이 어떻게 되느냐? 이제 잘 들어봐. 방황하는 원인(planōmenē aitia), 타자성, 연속성은 존재도 아니고 무도 아니니까. 존재로 갈 수도 있고 무로 갈 수도 있는 두 가지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 존재로 갔을 때 우리는 그것을 가능성이라고 해 무로 갈 때는 우연성[par accidnet, 우발성]이라고 해.
박홍규: 아리스토텔레스 말에 의하면, 플라톤도 그렇고 스토아 학파도 그렇지만, 형상은 남자한데서 오고 여자는 질료래. 허허허. (349) - [이것은 가부장에 덧씌워져 설명된 것같다. 라이프니츠도 호문쿨루스가 정자에 들어 있다는 전성설에 치우쳤다. / 중세 많은 삽화에서 여성이 발가벗고 기어가는 노인에게 채찍질 하는 그림이 있는데, 이는 여성이 아리스토텔레스를 비판하는 책의 속표지로 썼다고 한다. 그 이유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윤리학에서 가정을 다스리는데, 중요한 세 가지에 재산, 노예, 여성이라고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왜 그런 소리를 하냐 하면, 플라톤처럼 인식능력이 고차원이냐 저차원이냐를 갖고 고하(高下)를 논하기 때문이야[위계질서], 식물은 영양만 섭취하고, 동물은 감각만 갖고 있고, 인간은 감가보다 더 높은 이성을 갖고 있다고 해.. 오각형 속에 사각형이 있고 사각형 속에 삼각형이 있듯이, 식물 속에 동물이 있고, 동물 속에 인간이 있고, 그런 식으로 나가. 영혼론(페리 프쉬케, De Anima)에서 그런 말을 해. (350-351)
그런데 실증과학에 기초를 두지 않는 학문은 칸트나 데카르트나, 영국 경험론자는 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우려먹기야. 그 사람들은 어디서부터 시작하느냐 하면 감각에서 출발해. 지금 인식론은 감각에서 출발하지 않아. 그건 옛날 얘기야. 지금은 생물학이 발달했어. (351) - [미생물의 인식 5관이 없을때는 무엇으로 인식하지, 온몸으로, 즉<sôma>로, 덩어리로.... ]
박홍규: 하하하. 우주 전체에다가 목적론을 놓는다. 글쎄? 베르그송 같은 데서는 목적론이 성립하지 않는데‥…. 목적론이란 것은 형상 이론 때문에 나와. 목적은 딱 끊어져야만 나와. 이것이 목적이다. (352)
끊어서 생각하니까 목적론을 얘기해. 그러나 우리의 생명 본체[자연] 속에 들어 있는 본능은 목적을 배제해. 무제한하게, 미래의 어떤 경우든 살려고 하는데, 그것이 미지수야. 양문흠: 목적론이 발달했던 시대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전부 그 본성(physis)을 알 수 있다는 전제가 있었죠. / 박: 그렇지. 그러나 시간의 세계에서는 미래의 세계가 열려 있어. 열려 있으니까 목적론을 얘기할 수 없어. (353)
박: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기하학적 공간도 객관적으로 성립하지 않아. 개체로서만 성립해. (353) -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개체의 충족이유를 설명해야 할 이유가 있다. 개체니까, 그리고 개체니까 관념이 아니라 개념으로 다루어야 할 것이다. 용어로 다루는 시기는 정보화 시대에 내포에 따라 용어들을 만들고 선정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용어가 한정된(peras) 범위의 개념으로 자리잡는 것은 분류와 분할이 정리되어야 한다는 것도 당연하다. - 분류법이 다양한 만큼 체계도 다양할 것이다. 범주론은 언어(논리)의 분류체계인데, 18세기 계몽주의(뷔퐁, 린네)에 생물 분류에는 다른 방식이 등장해야 생물학과 진화론이 나올 것이다.] - (1992, 5. 24) ,
(21:27, 53S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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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는 파이드로스편에서 불가능 한 것이 가능하게 될 때, 언제 그렇게 되느냐 하는 문제야. 불가능한 것, 모순된 것이 현실화된다고 할 때, 언제 가능화되느냔 말이야.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이란 모순이 아니라 모순을 넘어선 것이야. 그러니까 거기에는 정도 차가 있어. ... 파이드로스편을 읽어보면 생명[영혼] 현상 같은 것이 그런 것으로 나와.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모순됨에도 불구하고 실제 존재하는 것, 그런 것은 정도 차가 있을까, 없을까? [답 없다] (361-362) .... 박: [없는 이유] 왜냐하면 존재와 무의 관계이니까. 비약뿐이니까. 모순된 것에서 가능한 것은 무엇이냐? 바로 현실화된 것이 가능한 것이야. 그런 것을 하르트만은 자꾸 충족률로 가지고가. 거기 충족률이 나오잖아? 그리고 존재를 원자적(atomic)으로 쪼개서 봐. 그러니까 충족률이 나오게 되고, 가능성을 거기다 붙여 놓았어. 베르그송은 그렇게 하지 말라, 그런 존재론(Ontologie)은 소용없다는 거야. (362) ... 베르그송을 통하려면, 파이드로스편의 영혼(psyche) 분석으로 가야하지. 그걸 분석하면 다 나와. 그때 영혼은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가능적으로 성립해. 그러니까 가능성은 두 개 있어. 불가능한 것, 모순된 것이 현실화된 것과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모순을 넘어섰기 때문에 가능한 것, 그것 [둘]이야. 후자는 정도의 차가 성립하는 것이야. 어떤 조건만 주어지면 가능에서 현실태로 연속적인 과정을 밟아서 가지. 전자는 안 돼. 비약을 통해서 가니까. 하르트만은 그 전자에다가 정도차를 붙이고 충족률을 붙였어. (362) 박홍규, '고별강연(1984)' 검토 1, 1988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