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상당한 다리는 마비되어 가고
증언자 : 이상조(남)
생년월일 : 1933.(당시 나이 47세)
직 업 : 교사 (현재 교사)
조사일시 : 1989. 1
개 요
5월 19일 학생들의 귀가지도를 하고 동료교사인 박재호 씨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고를 당했다. 중흥동 청과물시장 앞에서 트럭이 불에 타고 있어 구경을 하다가 갑자기 나타난 10여 명의 공수들에게 허리, 다리 등을 구타당했다.
다친 이후 집에서 치료를 했는데 4년(1984년) 전부터는 발바닥이 마비되더니 2년 전부터는 무릎까지 마비가 와 감각이 없고 걷기가 불편할 정도이다.
학생들을 귀가조치시키고
나는 1933년에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원래 부모님의 고향은 담양군 봉산면이었으나 내가 태어나기 전에 전가족이 광주로 이사를 왔다. 아버님이 사업을 하셔서 집안 형편은 부유한 편이었다. 그 덕택에 나는 대학교육까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전남대 농대를 졸업하고 결혼한 뒤 처음에는 세무서에서 근무하다가 공립학교 시험을 거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교편생활을 했다. 광주, 순천 등 도시 학교에서 농업과목 대신 기술과목이 생겨 다시 기술교사 자격증을 취득, 현 재 용봉중학교에 근무하고 있다.
부상을 당한 1980년 5월에는 충장중학교에 근무하고 있었다. 5월 중순에 접어 들어 시국이 심상치 않고 고교생들까지 합세할 분위기가 일자 전남도교육위는 19일 오전수업을 마치고 학생들을 귀가시켰다. 퇴근 후 동료교사들과 소주 한잔을 마시고 신안동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경상도 트럭이 불타는 것을 구경
오후 7시쯤 동료교사인 박재호 선생(현재 전남여고 근무)과 함께 시청을 지나 광주역 부근에 이르렀을 대 중흥청과물시장 쪽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박재호 선생과 나는 호기심에 그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불에 타고 있는 트럭을 30-40명의 시민이 구경하고 있었다. 사람들 말이 경상도 트럭이라고 했다. 아무 생각 없이 구경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쪽에서 공수부대 30-40명이 쫓아왔다. 공수부대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후려쳤다. 갑자기 당한 일이라 놀라 순간적으로 도로변에 있는 2층 집으로 올라갔다. 2층에는 마침 몸을 숨길 만한 베니어판이 있었다. 다급한 나머지 베니어판을 덮고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심장이 콩당콩당 뛰는 소리를 들으면서 제발 무사하기만 빌었다. 그 집이 도로가에 있어서 공수부대는 나를 곧바로 뒤쫓아왔다. 2층으로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음과 동시에 나는 놈들에게 노출되어 무자비한 구타를 당했다. 10여 명이나 되는 공수부대에게 군화발과 진압봉으로 팔, 다리, 허리 할 것 없이 온몸을 만신창이가 되도록 맞았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더군다나 지은 죄도 없이 갑자기 당한 봉면에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쉰 살 먹은 학교선생이오."
"이 새끼야, 나이 50이 뭐냐? 전남 폭도들은 전부 때려죽어야 돼."
그들은 욕지거리를 퍼부으면서 막무가내로 두들겨팼다. 잠시 후 어느 정도 의식을 찾은 나를 계엄군 두 명이 양쪽 어깨를 잡고 질질 끌고 갔다. 도로에는 이미 20여 명의 시민들이 먼저 잡혀와 무릎을 꿇고 손을 뒤로 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도 그들처럼 고개를 처박고 꿇어앉아 있는데 박재호 선생도 끌려나와 내 뒤로 앉았다. 뒤에 있던 박재호 선생은 소령으로 보이는 공수부대원에게 사정을 했다.
"우리는 학교선생으로 시위에 가담한 사실도 전혀 없고 학생들을 귀가시키고 집으로 가는 길이오."
그러자 그 소령은 박재호 선생과 나만 가라고 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곳을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다른 사람들을 걱정해줄 여유가 없었다. 박재호 선생은 덜 맞았는지 나를 부축해서 택시를 태워줬다. 집에 와서 보니 호주머니에 넣어둔 돈 오만 원이 없었다. 아마 맞으면서 몸부림치는 통에 빠져버린 것 같다.
온몸이 쑤시고 아파 걸을 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3, 4일간 집에서 치료하다가 노준채외과에 입원했다. 원장이 시국이 시끄러우니 집에서 치료를 하라고 하여 이틀 후 퇴원했다. 그때는 차가 없어 짐받이 자전거를 타고 집에 왔다. 며칠간 집에서 치료를 하다가 몸이 아파 도저히 견딜 수 없어 기독병원에 갔다. 기독병원 원장이 충장중학교 육성회장이라 잘 아는 사이였다. 그가 요즘 날마다 정보기관, 경찰서 등에서 나와 입원환자를 조사하는데 혹 뒤탈이 있으면 어떡하느냐고 했다.
그도 그럴 것 같아 곧장 집으로 왔다. 45일 간을 꼬박 집에 누워 몸에 좋다는 것은 뭐든지 먹었고 똥물도 닷 되씩이나 먹었다.
나이를 먹으니 후유증이 점점 심해진다. 공수부대원들이 "우리에게 맞으면 죽진 않으나 골병이 든다"고 말한 것이 맞는 것 같다. 4년 전부터는 발바닥이 마비되었다. 마치 철판을 깔아놓은 것처럼 아무 감각도 없다. 침을 맞아도 감각이 없을 정도다. 그러다가 2년 전부터는 무릎까지 마비되어 점점 위로 올라오고 있다. 다리에 힘이 없어 걸을 때는 중심을 못 잡고 술취한 사람처럼 휘청거린다.
이렇게 몸이 불편하여 학교생활에 많은 불편을 느끼고 있다. 작년에 용봉중학교로 전근을 왔는데, 1, 2학년 교실이 4층에 있어 하루에 세 번씩 계단을 오르내려야 한다. 그때마다 다리가 휘청거려 계속 서 있기가 불편해 아이들한테 양해를 구하고 판서를 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계단을 많이 오르내리지 않아도 되는 다른 학교로 옮겨가고 싶다.
이러다가는 교직생활도 오래 못 할 것 같다. 몸이 계속 악화되기 때문에 앞으로 2, 3년밖에 못 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을 하면 세상만사가 귀찮아지고 기력도 없으며 매사에 의욕이 없다.
나는 아침 조회시간에 전두환 사진을 보면 경례도 하지 않는다. 5공화국 놈들에게 정말 이가 갈린다. 데모를 한번이라도 했다가 그 변을 당했다면 덜 원통하겠다. 선량한 시민을 닥치는 대로 폭도로 몰고 병신이 되도록 두들겼으니 어찌 분하지 않겠는가!
전두환은 국민에게 백배사죄하고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광주문제가 원만히 해결되리라 본다. 그리고 부상자와 사망자의 가족에게 응분의 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확실한 직장이라도 있으니 그나마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지만 다른 부상자들은 고통에 허덕이며 어렵게 생활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본주의 사회는 돈 없으면 꼼짝 못 하는데 다른 부상자들이 어렵게 생활하는 것을 보면 정말 가슴이 아프다. (조사.정리 신봉화)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