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병(千祥炳1930.1.29∼1993.4.28)
시인. 경남 창원 출생. 1949년 마산중학 5학년 때, [죽순(竹筍)] 11집에 시 <공상(空想)> 외 1편을 추천받았고, 1952년 서울대 상과대학 재학 중 [문예(文藝)]에 <강물> <갈매기> 등을 추천받아 데뷔 후 여러 문예지에 시와 평론 등을 발표했다.
1967년 7월 동베를린 거점 문인간첩단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가난ㆍ무직ㆍ방탕ㆍ주벽 등으로 많은 일화를 남긴 그는 우주의 근원, 죽음과 피안, 인생의 비통한 현실 등을 간결하게 압축한 시를 썼다. 1971년 가을 문우들이 주선해서 내준 제1시집 <새>는 그가 소식도 없이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되었을 때, 그의 생사를 몰라 유고시집으로 발간되었다. ‘문단의 마지막 순수시인’ 또는 ‘문단의 마지막 기인(奇人)’으로 불리던 그는 지병인 간경변증으로 고생하다가 아침 식사 도중 갑작스럽게 변을 당해 세상을 떠났다.
장지 : 의정부 송산시립묘지
【작품세계】그는 어렵고 불행한 생활로 이어지는 생애를 보내면서 삶의 어두움, 외로움, 죽음 등의 문제를 다루는 시를 많이 지었다. 이러한 시를 쓰면서도 맑은 눈과 청순한 시정신을 구현하려고 애썼다.
그는 맑고 투명하게 사물을 인식하는 눈을 가지고 있다. 그의 시는 순진무구한 시정을 드러내고 있는데 현실 삶의 즐거움이나 괴로움을 말할 때에도 천진한 상상력을 잃지 않는다. 특히 세속 삶에 대한 거추장스러움을 벗어버리는 소박한 정서는 죽음과 가난함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허무주의와 구차함에 떨어지지 않는 자연스러움과 당당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연보】
▶1930년 1월 29일 경상남도 창원 출생
▶1945년 일본에서 귀국, 마산에 정착
▶1949년 마산 중학 5년 재학 중, 당시 담임(김춘수 시인)의 주선으로 <공상(空想)>이 [죽순]지에 첫 번째 추천됨
▶1950년 미국통역관으로 6개월간 근무
▶1951년 전시 중 부산에서 서울대 상과대 입학, 송영택, 김재섭 등과 함께 동인지 [처녀]지를 발간. [문예]지에 평론 <나는 거부하고 저항할 것이다>를 전재함으로써 시와 평론 활동을 함께 시작.
▶1952년 [문예]지 1월호에 시 <강물>이 유치환에 의해 추천, 5∼6월 합본호에 시 <갈매기>가 모윤숙에 의해 추천되어 추천 완료.
▶1953년 [문예]지 신춘호 ‘신세대 사유’란에 <나는 거부하고 저항할 것이다>와 11월호에 <사실(寫實)의 한계-허윤석론(論)>이 조연현에 의해 추천 완료되어 본격적으로 평론활동을 시작함.
▶1954년 서울대 상대 수료
▶1956년 [현대문학]지에 월평 집필, 이후 외국서적 다수 번역
▶1964년 김현옥 부산시장의 공보비서로 약 2년간 재직
▶1967년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체포, 약 6개월간 옥고를 치름
▶1971년 고문 후유증과 음주생활에서 오는 영양실조로 거리에서 쓰러짐. 행려병자로 서울 시립정신병원에 입원 생활. 유고시집 <새> 발간 (특이하게도 살아있는 시인의 시집이 '유고시집'으로 발간됨)
▶1972년 친구 목순복의 누이동생인 목순옥과 소설가 김동리 주례로 결혼
▶1979년 시집 <주막에서>(민음사) 간행.
▶1984년 시집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 간행
▶1985년 천상병 문학선집 <구름 손짓하면은>(문성당)을 간행.
▶1987년 시집 <저승 가는데도 여비가 든다면> 간행
▶1988년 간경화증으로 춘천의료원 입원. 기적적으로 회생함
▶1989년 3인 시집 <도적놈 셋이서>(인의) 간행. 시선집 <귀천>(살림) 간행.
▶1990년 시집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간행. 산문집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간행.
▶1991년 시집 <요놈! 요놈! 요 이쁜 놈!> 간행
▶1993년 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 간행. 4월 28일 오전 11시 20분 의정부 의료원에서 숙환으로 별세.
【문집】<구름 손짓하면은>(1985.문성당) <날개 없는 새 짝이 되어>(1993.부인 목순옥 편)
【유고시집】<나 하늘로 돌아가네>(1996)
-------------------------------------
<극빈의 생애, 순수의 노래 - 천상병의 시세계를 중심으로>
【서론】
하루치의 막걸리와 담배만 있으면 스스로 행복하다고 서슴없이 외쳤던 시인, 천상병(1930∼1993)은 생전에도 기이한 일화를 바탕으로 세인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의 시세계보다 그의 생애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그의 사후에도 각종 언론매체나 연극 등을 통해서 꾸준히 회자되어왔다.
그러한 생애에 가려 40년의 긴 시력에도 불구하고 시세계에 대한 연구업적이 그리 활발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작고한 93년 이후부터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고, 최근에는 그의 시세계를 보다 다양한 각도에서 연구한 업적을 볼 수 있었다.
이자영은 천상병의 시세계를 크게 공간지향성과 시간지향성으로 나누고, 공간지 향성에서는 ‘하늘’과 ‘새’를 시간지향성에서는 ‘과거 회상적 의지’, ‘현실 만족적 삶’, ‘미래 지향적 의지’로 세분하여 작품분석을 하고 있다.
김희정은 그의 전기시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를 한 바 있다. 김희정은 그 동안의 연구 업적에서는 처음으로 발견할 수 있는 시의 구체적인 형식과 구조미를 연구했다. 전기시에서 단순서술형어미를 비롯하여 ‘의문형어미’들이 주가 되고 있는 반면에, 후기시들은 ‘감탄형 어미’와 기도문적인 어미들이 빈번하게 출현하고 있음 을 지적했다. 또한 한 행이 4음보를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최소한의 문장으로 화자의 ‘근원적 슬픔’과 ‘존재론적 고독’을 서정적인 명징함과 슬픈 투명성으로 그려내고 있다고 보고 있다.
천상병은 세속적 명리를 떨쳐버리고 순수한 시를 쓴 시인이다. 이 땅에는 가난한 시인도 많고 가난한 일반인도 많지만 천상병처럼 그 가난을 직업처럼 생각하며 순 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이는 천상병 특유의 아이처럼 순수한 기질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천상병의 전반적인 시세계의 특성을 살펴보고, 천상병 시에서 가장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새’의 상징성에 대해서 논의해보고자 한다.
【시세계의 특성】
▶가난과 초월의식
천상병의 시는 처음부터 줄곧 가난의 정조가 깊게 베여있다. 그 스스로가 돈에 대한 관념이 없는 사람이라고 지칭하듯 그는 가난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생활하고 있다. 그가 단지 가난한 일상만을 문제삼았다면 그건 개인의 진부한 넋두리나 한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가난을 담담하게 바라보고 초월하려는 의지로 반전시키고 있어 시를 읽는 사람들을 자못 엄숙하게 만들곤 한다. 즉 가난으로 얼룩진 슬픔과 절망을 넘어 관조해버리는 성숙한 내면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는
고향산소에 있고
외톨박이 나는
서울에 있고
형과 누이들은
부산에 있는데,
여비가 없으니
가지 못한다.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
생각노니, 아,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 <소릉조> -
‘여비가 없으니’ 고향에도 못 가는 가난의 쓸쓸함과 절망감이 애통하게 묻어난 다. 그러나 이 시에서 그의 가난은 그저 넋두리에 그치는 것이 아닌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없다면 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라고 독자를 반문하는 해학과 여유를 보여준다. 가난하기 때문에 어쩌면 저승에도 못 갈 수 있다는 가난한 자의 행복 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눈물겹도록 따뜻하고 비장한 그의 초월의식을 느끼게 한다.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
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는 것은
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이 없어도
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
이 햇빛에도 예금통장은 없을 테니까...
나의 과거와 미래
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
내 무덤가 무성한 풀섶으로 때론 와선
괴로웠음 그런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
씽씽 바람 불어라........
- <나의 가난은> 전문 -
그는 진정 가난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자이다. 하루하루 한 잔의 커피와 담배와 버스 값만 해결되면 행복해하는 초연한 모습으로 살아간다. 가난은 내일 일을 걱정해 야 하는 불편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 햇빛에도 예금통장은 없을 테니까’라고 말하며, 무한한 자연과 햇빛 앞에서는 부자도 가난한 자도 평등한 것이어서 그의 가난은 떳떳한 것이라고 자위한다. 이는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부의 축적에 애쓰는 사람들의 가슴을 뜨끔하게 해줄 풍자적인 의미가 아닐 수 없다. 또한 마지막 연 ‘내 무덤가 무성한 풀섶으로 때론 와선/괴로웠음 그런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 씽씽 바람 불어라.......’라는 표현에서는 삶의 비장함과 엄숙함을 느낄 수 있고, 이 는 가난으로부터 진정 해방된 그의 초월의식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점심을 얻어먹고 배부른 내가
배고팠던 나에게 편지를 쓴다.
옛날에도 더러 있었던 일,
그다지 섭섭하진 않겠지?
때론 호사로운 적도 없지 않았다.
그걸 잊지 말아주기 바란다.
내일을 믿다가
이십년!
배부른 내가
그걸 잊을까 걱정이 되어서
나는
자네한테 편지를 쓴다네
-<편지> 전문 -
점심을 얻어먹고 배부른 내가 배고팠던 지난날의 내게 쓴 편지형식의 시다. 여기서 '배부른'의 상황은 분명 예전보다 나아진 상황일 테고, 화자는 혹시나 배고팠던 기억을 잊을까봐 스스로에게 걱정이 된다고 한다. 한 그릇 점심을 배불리 먹 은 것에서도 지난날의 배고팠던 자신을 반추해보고 미안해하기까지 하는 그의 겸허한 자세가 코끝을 찡하게 만든다.
이렇듯 그는 자신의 삶을 아주 솔직하게 그려내고 있다. 거기엔 뿌리 깊은 가난으로부터 그가 겪어야 하는 생생한 일상의 모습이 있고, 인생과 삶을 바라보는 깊은 성찰을 보여준다. 이는 곧 그의 빈곤에 대한 관조적인 자세와 초월의지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이러한 무욕의 삶은 후기시인 1980년대 초의 <나의 가난함>으로도 일관되고 있다.
나는 볼품없이 가난하지만
인간의 삶에는 부족하지 않다.
내 형제들 셋은 부산에서 잘 살지만
형제들 신세는 딱 질색이다.
(중략)
이렇게 가난해도
나는 가장 행복을 맛본다.
돈과 행복은 상관없다.
부자는 바늘귀를 통과해야 한다.
- <나의 가난함> 중에서 -
위의 시는 성경에서 인용한 시구인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는 더 어려운 일’이라는 그의 산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가난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그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즉 물질적인 가난함이 오히려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안겨주어 행복하다고 말한다. 이는 철저히 무욕의 삶을 실천했던 그의 가난에 대한 초월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외로움과 소외감의 정서
천상병 시에서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정서는 외로움과 소외감이다. 김재홍은 천상병의 시가 소외의식을 기저로 하면서 외로움과 슬픔의 정서를 드러내고 나아가 수직 상상력의 방향성을 지니는 주요한 특성을 지닌다고 한다.
그러면 시인의 이러한 외로움이나 소외의식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50년대 이 후 이 땅에 태풍처럼 밀어닥친 외국 문학 사조의 영향으로(중략) 순정한 서정시들은 맹물같이 무미하대서 무시당하기 일쑤였던 것이다. 그리고 천상병은 그의 산문집을 통해 유년시절은 비교적 부유하고 평탄하게 보냈다고 회고했다. 이렇게 볼 때 천상병 시에서의 외로움과 소외의식은 그의 문학에 대한 갈증과 행복했던 유년의 회상에서 파생된 현실과의 괴리감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한다.
산등성 외따론 데,
애기 들국화.
바람도 없는데
괜히 몸을 뒤누인다.
가을은
다시 올테지.
다시 올까?
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지금처럼
순하게 겹친 이 순간이-
- <들국화> -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나란히 소리 없이 서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안타까움을 달래며
서로 애터지게 바라보았다.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 <갈대> -
들국화나 갈대는 다같이 외로움 또는 슬픔의 객관적 상관물에 해당된다. <들국화>에서 화자가 지칭한 ‘외따론’곳은 그야말로 소외의 공간이다. 바람도 불지 않는 아주 적막한 곳이어서 괜히 몸을 뒤척여보는 얘기 들국화, 이는 곧 외로움의 정 조이기도 하다. 각각 외로운 처지인 들국화와 화자의 마음이 하나일 수 있는 가을 이 다시 올까? 반문함으로써 더 비극적인 정조를 자아낸다.
<갈대>의 공간 또한 달빛만 환하게 비치는 외로운 밤이다. 갈대와 화자는 서로의 그 외로움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타인의 눈 속에서 자신의 외로움을 들여다보는 한층 더 깊어진 외로움의 정조가 베여있다.
지금은 다 뭣들을 하고 있을까?
지금은 얼마나 출세를 했을까?
지금은 어디를 걷고 있을까?
점심을 먹고 있을까?
지금은 이사관이 됐을까?
지금은 가로수 밑을 걷고 있을까?
나는 지금 걷고 있지만,
굶주려서 배에서 무슨 소리가 나지마는
그들은 다 무엇들을 하고 있을까?
- <동창> -
사실, 이 시대에 직업이 시인인 시인은 거의 없다. 그것은 이상인(理想人)으로서 의 시인은 존재할 수 있지만 생활인으로서의 시인은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다. 문단의 많은 문우들이 그를 천재시인으로 회자했듯 누구보다도 명석한 두뇌와 이지 적이었던 그가 별다른 직업도 없이 하루를 연명해나가는 걱정을 해야 하는 처지에 서 떠올려보는 '동창생각' 은 그 무엇보다도 깊은 소외감이었을 것이다. '굶주려서 배에서 무슨 소리'가 날 지경인 그의 소외된 현실을 볼 수 있다.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린다
우수를 씹고 있는 나는
돌아가신 분들을 생각한다
비는 슬픔의 강물이다
내 젊은 날의 뉘우침이며
하느님의 보살피심을
친구들의 슬픈 이야기가
새삼스레 생각나누나
교회에 혼가 가서 기도할까나
- <비> -
위의 시가 1975년에 발표된 것으로 보아 시인이 말하는 ‘친구들의 슬픈 이야기’ 는 이전에 타계한 신동엽과 김관식을 지칭하는 듯하다. 비를 바라보며 시인은 먼저 작고한 친구들을 떠올린다. 친구들이 떠난 ‘슬픔의 강물’ 같은 빗속에 혼자 남은 시인의 그 공간 또한 소외된 외로운 공간이다.
이처럼 그의 시세계의 또 다른 특징으로 볼 수 있는 외로움과 소외의식은 <들국화>, <갈대>, <비>와 같은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토로하기도 하고, <동창>에서와 같이 가난으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일상적 현실인식에의 후기시
천상병 후기시의 특징이라면 시적 변용을 전혀 거치지 않은 일상적인 현실을 그대로 담은 것과 순수한 동심을 노래한 것이다. 이러한 후기시를 읽으며 필자는 문득 시인이 시적 퇴행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에 잠깐 빠지기도 했다. 이남호는 이러한 천상병의 후기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천상병의 후기시들을 읽을 때 보통 때와는 다른 독법을 지녀야 한다. 다시 한번 말하여, 천상병은 시인 이전의 시인이고 그의 시들은 시 이전의 <시의 원료> 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과도한 단순성과 심한 어눌함을 보여준다. 그렇지 만 그것들은 순수한 원료이기 때문에 강한 에너지를 지니고 있으며, 또한 뮤즈의 노래이기 때문에 삶에 대한 단도직입적 통찰을 내포하고 있다.
① 누가 나에게 집을 사주지 않겠는가? 하늘을 우러러 목터지게 외친다. 들려다 오 세계가 끝날 때까지(중략) 나는 결혼식을 몇 주 전에 마쳤으니 어찌 이렇게 부르짖지 못하겠는가? - <내집> 가운데서 -
② 우리 집도 초가요 옆집도 초가야.
우리 집 주인은 서울 백성.
옆집 사람과는 인사한 적이 없다.
-<수락산하변 5> 가운데서 -
③ KBS 라디오의 희망음악은,
아침 9시 5분에서 10시까지인데
나는 매일같이 기어코 듣는다.
고전 음악의 올림픽이요 대제인
고전 음악 시간을 내가 듣는 것은,
진짜로 희망이 우러나는 까닭이다.
- <희망음악>가운데서 -
①에서는 아무런 시적인 변용도 없이 집에 대한 갈망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②는 시인의 거주지를 대상으로 쓴 시로 이는 ‘수락산변’의 연작시로 이어지게 된다. ③은 라디오의 고전 음악 프로에 대한 간단한 감상을 적고 있는 작품이다. 위의 작품들에서 특별한 시적 변용이나 상징성을 찾아 볼 수는 없다. 과연 시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시적 장치를 배제한 시가 독자에게 파고드는 힘이 더 크게 다가온다. 이러한 그의 후기시는 ‘가장 사실적인 사물들과 언어로써 정치와 자연의 의미를 전달하는 놀라운 솜씨를 보여준다’.
집을 나서니
여섯 살짜리 꼬마가 놀고 있다.
‘요놈 요놈 요놈아’라고 했더니
대답이
‘아무 것도 안 사주면서 뭘’ 한다.
그래서 내가
‘자 가자
사탕 사줄께‘라고 해서
가게로 가서
사탕을 한 봉지
사줬더니 좋아한다.
내 미래의 주인을
나는 이렇게 좋아한다.
- <요놈 요놈 요놈아> -
우리 부부에게는 어린이가 없다.
그렇게도 소중한
어린이가 하나도 없다.
그래서 난
동네 어린이들을 좋아하고
사랑한다.
요놈! 요놈하면서
내가 부르면
어린이들은
환갑 나이의 날 보고
요놈! 요놈한다.
어린이들은
보면 볼수록 좋다.
잘 커서 큰일 해다오!
- <난 어린애가 좋다> -
천상병 후기 시에 드러나는 특징 중의 하나인 동심 지향성을 엿볼 수 있는 시편이 다. 환갑의 나이에도 어린이와 사탕 한 봉지로 친구가 되어 서슴없이 요놈이라 불러대며 함께 어울릴 수 있다는 건, 그건 그만큼 시인이 맑고 천진하다는 것이다. 천상병 시에서 동심 지향성은 그대로 선 지향성의 표상이자 천진성의 시학에 원천 이 되며, 휴머니즘 정신의 실질적 기반이 된다. 이것은 현실도피나 패배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천상병 특유의 생래적 선 지향성과 휴머니즘의 자연스런 유도라고 볼 수 있겠다. 이 외에도 그는 일상적인 소재들을 시에 많이 담았다. 아내, 장모님, 조카 영진, 아이들을 비롯한 주변인물과 똘똘이, 복실이 등의 강아지들이다.
이처럼 천상병의 후기시는 전기시 와는 사뭇 다르게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친근한 일상의 소재들을 바탕으로 시적 변용이나, 수사 또는 상징적 의미를 배제한 채 일상적인 관찰을 투명하게 표현해낸다.
▶시적 상징
(1) ‘새’의 상징성
한 작가의 작품세계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상징은 그 작가의 전 작품 내지는 작가 의 전 생애와의 연관성을 떠나서는 이해되기 힘들다. 천상병의 시세계에 대한 선 자들의 업적을 살펴보니 가장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부분이 ‘새’와 ‘하늘’에 대한 상징이었다. 이는 새와 하늘이 그의 전기시부터 후기시까지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중심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한 시인의 작품 속에 자주 나타나는 어떤 특정한 사물이나 대상을 논의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여기서는 '새'의 상징이 가지는 의미를 알아보고, 후기시에는 어떠한 변모 양상을 띠게 되는지 살펴보도록 한다.
자연물 중에서도 ‘새’는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자연물 중 가장 활동적이란 점, 그 비상으로 인해 이상지향적 존재로 생각되기 쉬운 점, 인간과 가장 가까이 있다는 점 등에 착안하여 ‘새’에 대한 인간인식의 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
① ............ 맑은 날이나 궂은 날이나
대자대비처럼
가지 끝에서
하늘 끝에서.....
저것 보아라,
오늘 따라
이승에서 저승으로
한 마리 새가 날아간다
-<새>(1966) 가운데서 -
② 어느 날 병사는 그의 머리 위에 날아온 한 마리 새를 다정하게 쳐다보았다. 산골 출신인 그는 새에게 온갖 아름다운 관심을 쏟았다. 그 관심은 그의 눈을 충혈케 했다. 그의 손은 서서히 움직여 최신 형 기관총구를 새에게 겨냥하고 있었다. 피를 흘리며 새는 하늘에 서 떨어졌다. 수풀 속에 떨어진 새의 시체는 그냥 싸늘하게 굳어 졌을까.
- <새>(1966) 가운데서 -
같은 해에 나온 두 편의 시에서 각각 다른 새의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다. ①에서 의 새는 일기의 변화, 즉 삶의 고난 속에서도 대자대비처럼 넉넉한 마음으로 ‘이승에서 저승으로 한 마리 새가 날아간다’고 하듯, 초월의 의지마저 볼 수 있는 자유로운 비상이다. 하지만, ②에서는 총에 맞아 날 수 없는 새이다. 총에 맞아 떨어졌다는 것은 곧, 자유의 단절, 지상에서의 삶의 황폐, 나아가서는 인간적 삶의 고뇌를 말해준다. 위 두 편에서 말하는 새의 상징은 ‘비상’과 ‘삶의 고난’을 보여주고 있다.
①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 터에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에 그득 찬 계절
슬픔과 기쁨의 주일,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 <새>(1959) 전문 -
② 저 새는 날지 않고 울지 않고
내내 움직일 줄 모른다.
상처가 매우 깊은 모양이다.
아시지의 성(聖)프란시스코는
새들에게
은총설교를 했다지만
저 새는 그저 아프기만 한 모양이다.
수백년 전 그날 그 벌판의 일몰(日沒)과 백야(白夜)는
오늘 이 땅 위에
눈을 내리게 하는데
눈이 내리는데..........
- <새>(1965) 전문 -
①에서 시인은 그의 삶처럼 쓸쓸한 영혼의 빈터엔 그가 죽고 나서야 새가 울고 꽃 이 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죽음만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산다는 것, 아름다운 것, 사랑한다는 것'에의 노래로 한창일 때 그는 '슬픔과 기쁨, 좋은 일 과 나쁜 일'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정감에 가득 찬 계절이라고 노래한 다. 그의 삶이 외롭고 가난했기에 행복할 것이라는 희망이 상징화된 것이다. 여기서 새는 시적 화자의 대리자아로서 시인의 내면풍경을 대변한다. 새는 외로움과 아름다움 및 사랑의 표상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부활의 새, 영혼의 새로서 나타난다.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와 같이 새는 시인 자신의 객관적 상관물로서 포괄적인 상징성을 지니는 것이다.
②에서, 이 시의 새는 깊은 상처에 의해 비상의 의지가 꺾인 새로 상징된다, 즉 날 고 싶지만 날지 못하는 새라기보다는, ‘날기’를 거부하고 ‘나는’ 새의 고유한 속성마저 망각할 정도로 퇴화해 버린 엄청난 상처의 새로 제시된다. 슬픔이 너무 깊으면 차라리 침묵하는 것처럼 ②에서의 새는 비상도 울지도 못한다. 하늘의 은총 설교로도 달래지지 않는 새의 아픔과 상처가 짙게 자아나고 있다. 따라서 이 시에 서 시적 화자는 자신의 삶의 고난을 반영하여 삶의 비극성을 '새'라는 상징을 통 하여 응시하고 있다.
이제 몇 년이었는가
아이롱 밑 와이샤쓰 같이
당한 그날은........
이제 몇 년이었는가
무서운 집 뒷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
땀 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날은...........
내 살과 뼈는 알고 있다.
진실과 고통
그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내 마음 하늘
한편 가에서
새는 소스라치게 날개 편다.
- <그날은-새> -
시인의 그 유명한 동백림 사건 속에서 태어난 시가 바로 위의 시다. ‘아이롱 밑 와이샤쓰 같이 / 당한 그날’이란 표현에서 시인이 겪었을 그날의 처참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가늠해본다. 여기서 '새'의 상징은 자유에 대한 갈망이다. 그날의 고통스러웠을 전기고문을 회상하면서 시인은 새를 통해 시대의 구속과 억압을 고발하고 진실이 더 강하기에 '소스라치게 날개 펴는' 모습을 보여준다. 조금 비장하고 저항적인 새이기도 하다.
이렇듯 천상병 시에서의 새는 다양한 이미지로 형상화되고 상징되기도 하는데, 후기시로 가면 극히 사소하고 구체적인 새의 이미지로 변화하는 양상을 띠게 된다.
어느 날 일요일이었는데
창에서 참새 한 마리
날아 들어왔다.
이런 부질없는 새가 어디 있을까?
세상을 살다보면 별일도 많다는데
참으로 희귀한 일이다.
한참 천장을 날다가 달아났는데
꼭 나와 같은 어리석은 새다.
사람이 사는 좁은 공간을 날다니.
- <창에서 새> -
나는 새 세 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텔레비 옆에 있는 세 마리의 새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짜 새가 아니라
모조품이기 때문이다.
- <새 세 마리> 가운데서 -
참새 두 마리가
사이좋게 날아와서
내 방문 앞에서 뜰에서
기분좋게 쫑쫑거리며 놀고 있다.
- <참새> 가운데서 -
위의 시편들은 그의 후기시의 변모된 새의 이미지를 대변해주는 작품이다. 전기 시에서의 내면의 깊은 성찰과 울림을 토로하던 이미지는 찾을 수 없고, 모조품이나 참새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이고 평범한 새의 모습을 보여준다. 시적인 변용도 절제되고 등장하는 새의 이미지가 너무 평화롭고 자유로와 전기시에서 느끼지 못했던 시인의 편안한 일상을 보는 듯 하기도 하다.
이상으로 천상병 시에서 중요한 시적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새’의 상징성에 대해 알아보았다. 전기시에서의 새의 상징성은 현실의 고난과 비극을 토로하고 때론 그걸 극복해내려는 자유로운 비상과 초월의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그러나 후기 시에서는 시적 긴장감이 다소 떨어지는 가운데 전기시에서 끊임없는 비상을 꿈꾸던 새가 자유롭고 평화로운 일상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결론】
천상병은 평생을 가난하게 살며 순수한 시를 노래하다 간 시인이다. 사실 삶과 문학이 천상병 시인만큼 일치하는 시인도 드물 것이다. 고도의 물질만능주의 시대 에 그의 순수한 삶과 문학이 전해주는 의미가 커 그의 발자국을 되짚어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 글에서는 그의 시세계의 특징으로 첫째, 가난과 초월의식이 나타나고 있음을 보았다. 가난의 문제는 그의 시 전반에 걸쳐 스며있는 소재다. 그의 삶은 ‘여비가 없어 고향에도 못 가는’ 질곡의 삶이었지만 가난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은 겸허한 울림으로 퍼져 나온다. 거기엔 삶의 깊은 성찰에서 비롯된 그의 초월의식이 베어있기 때문이다.
둘째, 외로움과 소외감의 정서가 나타나고 있다. 그가 가난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길 바란다고 해도 근원적인 외로움과 가난에서 비롯된 소외의식을 배제하지는 못 했을 것이다. 이러한 정조는 <갈대>나 <들국화>, <비> 와 같은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서나, <동창>이나 자신의 거주지<수락산하변 연작시>에서 인식할 수밖에 없는 가난을 통해 드러난다.
셋째, 일상적 현실에의 후기시이다. 천상병의 후기시는 극히 일상적인 현실에 머물며 천진한 동심을 노래하는 독특한 특징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시적 변용이나 상징성들을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오히려 기교 없는 기교가 보여주는 시의 강한 힘을 볼 수 있었다.
다음으로 천상병 시에 나타나는 시적 상징을 알아보았는데 여기서는 ‘새’의 상징성에 대해 논의해보았다. 전기시에서의 새가 삶의 역경 앞에서 상처받고 그 속에서 초월하려는 비상의 의지를 상징했다면, 후기시에서는 아주 구체적이고 즉물적인 새를 통하여 자유와 평화로움을 상징하고 있다.
이상으로 천상병 시세계의 개략적인 흐름과 ‘새’의 상징성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의 시가 너무 개인적인 일상에 머물어 보다 넓은 세계를 수용하지 못하고 후기시로 갈수록 시적 긴장감이 떨어지는 아쉬움도 있지만, 그가 보여준 극빈의 생애와 순수의 노래는 치열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메마른 가슴을 따뜻하게 적셔줄 것이다.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일간스포츠](1993. 4. 29)
천 시인은 시에 미친 천상(天上)의 삶을 살았다. 학교 자퇴는 물론 전도유망한 한국은행 취직자리를 마다하고 방랑과 폭음, 구걸 등 일상에 도저히 편입될 수 없는 기행(奇行)의 삶을 ‘오직 시를 위해’ 살았다.
하지만 시를 위해 하늘 높이 날개짓하던 총명한 젊은 시인은 1967년 어처구니없게도 '동백림사건'에 연루돼 간첩혐의로 6개월의 수인 생활을 겪으며 이때 받은 모진 고문으로 평생을 정신황폐증에 시달렸다. 심신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시인은 이후 자포자기 상태서 문단 친구들을 찾아 전국을 떠돌아다녔으며 이 와중에서 그 유명한 <유고시집(遺稿詩集)> 출간이라는 웃지 못할 일화를 남겼다. 1971년 폭음에 지친 그의 육신이 길거리에 쓰러지자 경찰은 행려병자로 취급해 그를 시립정신병원에 옮겼다. 친구들은 돌연한 그의 행방불명이 계속되자 객사라고 판단, 각자의 주머니를 추렴해 유고시집 <새>를 묶어낸 것.
말년의 그는 1972년 만나 결혼한 부인 목순옥씨의 헌신적인 보살핌 속에 정신적인 안정을 많이 되찾은 것으로 알려졌었다. 하루 맥주 2병, 담배 1갑을 애지중지 맛있게 들이키면서 시도 계속 쓰고 지난 해 유고시집의 재출간 때는 “최소한 미수(米壽.88세)까지는 살 수 있다”며 건강을 자신하는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지난 세월의 굴곡이 너무 깊었음일까. 그는 그가 가장 아끼던 시 <귀천>처럼 하늘로 돌아갔다.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작품 ‘귀천’에서) -
<자신의 시처럼 하늘로 돌아간 천상병> - [중앙일보](1993. 4. 29)
1952년 문단에 나와 40여년간 구걸한 막걸리 두 사발 혹은 맥주 두 병으로 끼니를 이으며 시만 써오던 천상병이 밥을 먹다 타계했다.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쓰러져 가는 오두막에서 함께 늙어가던 장모와 뒤늦은 아침식사를 하다 두어 술 뜨던 수저를 놓고 쓰러졌다.
"인세를 모아 장모님 장례비까지 마련해 놓았으니 더할 나위없이 좋다"던 천생의 시인이 장모의 부축으로 병원으로 옮기던 중 숨마저 놓아버렸다. 그가 하늘로 돌아가던 날은 찬비가 뿌렸다. 문단에 채 연락이 안 되고 교통편도 멀고 외져 영안실 첫 밤은 노동자시인 김신용 등 몇 명만이 찬 술을 부으며 그의 기구한 삶, 그리고 정반대의 티없던 시세계를 쓸쓸히 되새겼다.
서울대 상대를 중퇴한 그는 그만한 학력으로 보장될 수 있었던 일체의 직장을 뿌리치고 시작에만 몰두했다. 현실세계에 편입돼서는 도저히 시의 순수성을 지켜낼 수 없다는 남다른 생각으로 무직ㆍ방랑ㆍ주벽ㆍ구걸 등으로 숱한 화제를 뿌리며 비단결 같은 인생의 깊이를 노래해 왔다.
시를 지키기 위해 현실을 내던졌던 그를 1967년 공안당국은 간첩혐의로 잡아 모진 고문을 가했다. '동베를린사건'의 작곡가 윤이상씨와 단지 고향이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아버지 어머니는 / 고향 산소에 있고 / 외톨박이 나는 / 서울에 있고 //
형과 누이들은 / 부산에 있는데, / 여비가 없으니 / 가지 못한다. //
저승 가는데도 / 여비가 든다면 / 나는 영영 / 가지도 못하나? //
생각느니 아, /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 <소능조(小陵調)> 전문 -
전기고문의 후유증과 걸식으로 지칠 대로 지친 그를 요양시키기 위해 문단 동료들이 여비를 마련, 1970년 겨울 형과 누이가 있는 부산으로 내려보냈다. 그러나 친구들이 못내 그리워 서울로 다시 돌아온 그는 경찰에 행려병자로 오인돼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을 얻어먹고 나서는 아무도 모르게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감’돼 버렸다.
문단에서는 부산에 연락해 보아도 소식이 없고 또 ‘저승 여비’ 운운하는 시까지 발표했던 터여서 그가 틀림없이 죽을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1971년 유고시집으로 <새>를 출간, 그의 혼을 달랬다.
그런 그가 이제 정말로 숨을 거둬 고향에도 못가고 의정부 송산시립묘지에 묻히게 됐다.
<기행시인(奇行詩人) 천상병> - [중앙일보](1992. 10. 16)
『나는 지금 육십세 살이다. / 그런데 나는 팔십팔세까지 살려고 한다. //
그렇게 되려면 / 건강이 좋아야 하고 / 신수가 그렇게 되어야 한다. //
나는 되도록 / 담배를 덜 피우려 하고 / 술도 적게 마신다.』
가난하면 몸이라도 건강해야 한다. 그래야 천수를 누릴 수 있다. 방랑ㆍ음주ㆍ구걸 등 일상에 도저히 편입될 수 없는 기행으로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갔던 시인 천상병은 올해 63세에 접어들며 위의 시 <건강을 위하여>와 같이 오래오래 살고자 한다. 88세까지 살라는 하느님 계시 같은 목소리를 올해초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의정부 자택을 찾았을 때 세상에 가장 때묻지 않은 ‘천상(天上)의 시인’ 천씨는 육신은 물론 마음까지도 거덜날 때로 거덜나 있는 듯했다. 상계동 아파트 단지에 밀려난 원주민 마을 옆 비닐하우스 사이의 농막같은 집 -
두 평도 채 못 되는 방에 그는 누워 있었다. 죄 없는 가을 햇살만 고층 아파트군을 지척에 둔 농막에 좋아라 누워 있었다.
“오래오래 살아야겠다고 하셨는데 건강이 무척 안 좋아 보입니다.”
“올들어 계속 누워있습니다. 관절이 쑤셔 제대로 걸을 수가 없어요. 혼자 가만히 드러누워 있으니 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렇게 편안하고 좋은 세상 살다, 구경하다 그냥 하늘나라에 가면 돼요. 오래 살고 싶다는 것, 그것은 내 시일뿐이에요.”
“시는 계속 쓰십니까. 약주도 드시고요.”
“원고 청탁이 오면 당장 써 주지요. 한 달에 2편 꼴로 쓰고 있어요. 누워만 있다 보니 책을 많이 못 읽는 것이 제일 섭섭해요. 술을 마시지 말아야 하는데. 하루 딱 2병씩만 마셔요. 맥주로요. 마셔야만 잠이 잘 오거든요. 잠 잘자기 위해 술을 마시는 것이지요.”
“좋은 학교, 직장 다 집어치우고 왜 그렇게 떠돌이 기행(奇行)으로만 삶을 흘렸습니까.”
“시가 그렇게 좋았어요. 오로지 시를 위해서였지요. 시인이면 다 되는 것 아니예요.”
1952년 시인으로 등단하자 그는 다니던 서울대 상대를 4학년 때 집어치워 버렸다. 당시 최고의 직장 한국은행에 들어가는 것도 포기해 버렸다.
『그대로의 그리움이 / 갈매기로 하여금 / 구름이 되게 하였다. //
기꺼운 듯 / 푸른 바다의 이름으로 / 흰 날개를 하늘에 묻어 보내어 //
이제 波濤도 / 빛나는 가슴도 / 구름을 따라 먼 나라로 흘렀다. //
그리하여 몊번이고 / 몇번이고 / 날아 오르는 자랑이었다. //
아름다운 마음이었다.』 - 데뷰작 <갈매기> 전문 -
그는 시에 대한, 순수에 대한 그리움만 갖고 세상을 구름처럼 떠돌았다. 그것을 자랑으로, 아름다운 마음으로 생각했고 피난시절이나 전후 곤궁한 시절에도 세상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동료문인들에게 끊임없이 내미는 막걸리 구걸 손, 주위를 성가실 정도로 괴롭히는 주벽 등도 다즐 잘 감싸주었다. 그렇게 세상을 뜬구름처럼 산 구걸시인에게 1967년 분단된 우리의 현실은 어처구니없는 폭력을 가한다.
동백림사건에 연루, 간첩혐의로 체포돼 6개월간 고초를 겪은 것이다. 베를린에 유학 중인 고향 친구와의 관계를 불라며 모진 전기고문을 당해 몸은 그때 망가져 버렸다.
『이젠 몇 년이었는가. / 아이론 밑 와이샤쓰 같이 당한 그날은 //
……… //
내 살과 뼈는 알고 있다. / 진실과 고통 / 그 어느쪽이 강자인지를… /
내 마음 하늘 / 한편가에서 / 새는 소스라치게 날개 편다.』
그 일을 당한 뒤 쓴 시 <그날은>의 일부다. 세상의 그리움을 향해 날아오르던 ‘갈매기’의 깃이 꺾인 것이다. ‘그때 내 인생은 사실상 끝났다’고 스스로 밝히듯 그 일로 인해 그의 떠돌이 삶마저도 자포자기에 빠진다. 세상에 대한 독한 배신감과 고문으로 상한 다리를 이끌고 문단 친구들을 찾아다니던 그는 1971년 정신 황폐증에다 영양 실조로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된다. 몸이 극도로 쇠약, 고향에서 좀 쉬고 올라오라며 동료 문인들이 부산으로 차를 태워보냈으나 친구들과 술이 그리워 다시 서울로 올라와 헤매던 그를 행려병자로 경찰에서 수용시킨 것이다.
이 같은 수용 사실을 모르고 5~6개월 동안 그의 행방이 묘연하자 문단에서는 객사한 줄 알고 각자의 호주머니를 추렴, 시집 <새>를 펴내 초유의 산 사람 유고시집으로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지난 10일 서울 인사동의 한 주점에서 색다른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당시 1천부 한정판으로 출간했던 <새>를 20여년만에 그대로 다시 출간, 그를 축하해 주는 모임이었다. 지루한 간호로 그를 살려내 1972년 결혼한 목순옥씨에게 이끌려온 그는 그의 대표시라며 <귀천>을 낭송했다. 초등학생 같이 또박또박 시를 읽고 그는 ‘이상입니다’고 진지한 자세로 끝을 맺었다. 그러나 20여년 전 그의 이 시집을 앞장서 만들어 주었던 문인들, 지금은 문화계의 중진들로서 활동하고 있는 그 얼굴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흥을 돋우지 못한 술자리도 두어시간만에 파하고 말았다.
“이 세상 소풍 나오셨습니까. 귀천하시면 아름다웠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그렇지요. 모든 것이 다 좋아요. 나쁜 사람들은 다 TV 속에 들어있고 내가 만난 사람들은 모두 다 좋아요.”
그는 질문에 거의 ‘좋지요’ ‘그래요’ ‘괜찮아요’ 등 짧은 대답으로 응답한다. 조서를 읽어내려가는 수사관 앞에서 선택의 여지를 앗긴 피의자가 대답하듯 짧게짧게 긍정으로만 나간다. 세상에 도통한 자의 대긍정정신도 그것을 가로막는 우리와 그의 현실이 아프다.
<천상병 시인 기념관 `귀천` 개관> - [한국일보](1994. 12. 12)
지난 93년 타계한 천상병 시인의 기념관 [귀천]이 12일 오후 6시 개관됐다.
천씨의 기념관은 서울 인사동 옛 민정당사 맞은편에 있는 13평의 민가를 미망인 목순옥씨가 사들여 꾸민 것. 이 민가는 원래 ‘서태지와 아이들’ 중 한 사람인 양현석씨의 일가가 살던 집으로 양씨가 살던 작은 방이 천씨가 누워 시를 쓰던 골방과 비슷해 이 방을 시인의 방과 똑같이 꾸몄다.
나머지 두개의 방은 하나로 터 천씨의 유품 전시장 및 다실로 꾸몄는데 유품들로는 천 시인이 생전에 브람스의 교향곡 4번을 즐겨 듣던 5만원짜리 골동품 라디오와 <새 삶>, <맥주>, <아내> 등의 유고시가 담긴 육필 원고들이 전시됐다.
천시인의 시를 영어로 번역하고 있는 서강대 영문과 앤터니 티그 교수와 송곡국교 국어교사인 홍경희씨는 전축을 사주었다. 하루치 술값을 제외하곤 돈에는 아무런 욕심이 없어 "나는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라고 즐겨 이야기하곤 했던 천시인.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 터에
새 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때는
내가 죽는 날
......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이 세상에서의 소풍을 끝내고 이제는 하늘나라에서 자신이 남긴 <새>를 노래하고 있을 천시인은 이 기념관의 건립으로 인해 이제 지상에 자신의 체온을 오롯이 보존할 수 있게 됐다.
미망인 목씨는 "운영해 오던 카페 ‘귀천’과 함께 이 기념관에 남편과 친했던 화가들의 작품을 걸어놓고 한 달에 한번씩 시낭송회를 갖겠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개관식에는 중광 스님, 시인 신경림, 민영, 박재삼, 강민, 황명걸 ,평론가 구중서, 소설가 배평모, 민속학자 심우성, 방송작가 신봉승, 가수 이남이씨 등이 참석했다.
<괴짜 시인 천상병>
천상병 시인은 대책 없는 순수로 이 세상을 가난하게만 살다간 천상의 시인이다.
서울대 상대를 나와 보장된 그 좋은 직장도 다 마다하고 천상병은 술로써만 시를 지키다 갔다. 그는 무직ㆍ방랑ㆍ구걸ㆍ주벽으로 우리시대 마지막으로 숱한 화제를 뿌리다 쓰러져가는 철거민촌 오두막에서 외로이 숨져갔다. 그러한 삶도 좋았노라고, 마치 소풍놀이 같았다며 하늘로 돌아갔다. 그가 죽자 문학평론가 김재홍(金載弘)씨는 다음과 같이 추모했다.
“곤궁한 삶의 극한 속에서도 세속으로부터 자신을 해방하여 인생의 의미를 깊이있게 일깨워준 참자유인, 진짜 시인의 타계로 이제 이 땅에서 시인의 신화시대는 막을 내렸다.”
‘참자유인’은 천상병만이 아니라 ‘진짜 괴짜문인’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다. 세속으로부터 자신을 해방한 아웃사이더 문인들을 우리가 기리는 것은 시공을 초월한 인생의 깊은 의미를 일깨우기 때문이다. 또 바로 이것이 문학의 핵심 아닌가.
시절이 수상해지면 방외자로서 숨어 있는 문인들이 우리의 시야에 다시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참자유가 무엇인가를 깨우칠 것이다
첫댓글 너무 좋은 시 잘보고 느끼고 가요^^
네에 보배님 읽으셨다면 저랑 같은 마음입니다,,